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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2-15 08:30
[기타] 연개소문관련
 글쓴이 : 센스
조회 : 3,642  

 
오래전에 역사스페셜에서 본 몽룡탑이야기도나오고 자세히설명해준글인듯
 
영웅이라하면서  왜 저런것은  가르칠맘이없어보이는거죠  이나라는?
 
 
 
 
 
 
 
줄행랑치는 당태종과 중원의 패자 연개소문
산동성과 특히 강소성 등지에 산재한 연개소문에 대한 전설과 유적
신완순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4/02/05 [16:09]
인기리에 방영된 SBS 대하드라마 ‘연개소문’에서의 장면 중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 이세민이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고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장면이 방송이 되었다. 비록 드라마라 할지라도 이 장면을 본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은 정말이지 통쾌하였을 것이며 중국의 역사찬탈음모(동북공정)로 쌓였던 울분을 다소나마 삭였으리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를 본 중국 사람들은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과 더불어 최고의 군주로 인식하는 당태종이 애꾸눈이 되어 비참하게 도망가는 모습은 또 다른 한국의 역사왜곡이라고 핏대를 세웠다고 하는데
입장에 따른 역사에 대한 애증의 교차가 이런 것인가?

사실 우리 역사에서 연개소문만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많지 않을 것이다.
조선 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평가한 신채호 선생의 평이 있는가 하면, 임금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아 잔악무도하게 학정을 일삼아서 당의 침략을 자초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고구려가 망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평가를 하던 간에 2005년 10월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중국 강소성 염성에 있는 ‘몽롱탑(朦朧塔)’에 대하여 현지 주민의 인터뷰 기사와 함께 방송을 보았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높이가 16.7m이고 팔각형 누각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탑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과 당태종과의 전투에서 유래하여 생긴 탑으로서 몽롱탑의 ‘천스안’이라는 관리인이 KBS와 인터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중원 동쪽에 연개소문이 있었는데 전쟁을 일으켜 중원을 공격했다. 그가 중원을 공격할 때 당왕(唐王) 이세민이 연개소문을 추격하여 이곳까지 왔다가 도리어 연개소문에게 쫓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 지하에 숨었는데 우물위에 거미가 줄을 쳐서 이세민을 가려주었다. 연개소문이 와서 보니 거미줄만 있어서 그냥 가버렸다. 그래서 당왕 이세민은 살게 되었고 그 자리에 이 보탑을 세웠는데 바로 몽롱탑이다. 여기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안다.”

▲ <몽롱탑의 모습과 강소성 염성의 위치 - KBS 역사스페셜 방송 중에서> ©


위 관리인의 말은 우리나라 일반 기존의 역사인식 즉 요하(遼河) 동쪽과 만주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연개소문과 당태종에 관한 전설과 격전지 그리고 유물이 현 중국의 산동성과 강소성에 널려 있다고 한다면 더더욱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산동성의 즉묵시(即墨市)와 봉래시(蓬萊市) 그리고 강소성의 숙천시(宿遷市)와 연운항시(連雲港市)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혹자들은 산동성과 강소성은 혹시 고조선의 역사라고 한다면 몰라도 삼국시대의 역사인식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상상이 잘 안가겠지만 연개소문에 관한 아래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산동성 즉묵시 마산(馬山)에서는 정관17년(643년)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마산대전(馬山大戰)이 있었던 사실이 청(淸)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即墨鄕土志)'에 실려 있으며, 이 전투에서 당나라 장수 김걸(金杰)이 사망하고 당태종이 패하여 도망갔다고 되어 있으며 마산에는 지금도 연개소문이 주둔하던 대왕구라는 골짜기와 김걸 장군의 사당인 대왕묘(大王廟)가 남아 있다.

산동성 봉래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유래된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는데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했던 고성과 당태종 형의 사당인 대왕묘, 식수가 모자라 판 우물인 일검천, 당태종이 패하고 숨은 왕구촌, 당태종의 가마가 빠진 락가하, 투구와 갑옷을 말린 쇄갑하 등이 남아 있으며 이 전투에서 당태종의 형이 전사하였다고 한다.

강소성 숙천시(宿遷市)에서는 연개소문과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의 유적지가 있는데 설인귀가 숨어 있었다는 장군동, 망을 보던 장대와 찬밥을 먹던 냉반대, 과광산, 오자산 등의 유적이 있으며, 고구려 군사가 청량원에 주둔하였는데 인근의 묘에서는 1996년에 고구려 양식의 투구와 철검 등이 출토되었다 한다.

강소성 연운항시(連雲港市)에는
연개소문과 당태종과 관련된 숙성(宿城)이 있다. 원래 이곳은 성(城)이 아니었는데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연운항 지역에서 전투를 하던 중 숙성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숙성이라 불리운다. 성안에 있는 보가산(保駕山)은 당태종이 전투에 패하여 숨은 곳이라 하며 당왕동(唐王洞), 장인석(藏印石) 등도 이때에 생긴 이름의 지명이며 소문정(蘇文頂)은 연개소문의 군사가 주둔하던 곳이라 한다. 운대산지(雲臺山志)에는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한다.

▲ 연개소문에게 쫓겨 당태종이 숨었다는 연운항의 보가산(保駕山) © 편집부


이밖에도 강소성 태주의 호국사염성정혜사 그리고 비주의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유적지와
북경 유역과 다른 지역에도 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위의 기록들은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 낸
연개소문의 대륙에서의 활약을 발췌해서 요약한 것들이다.

이는 연개소문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중국의 역사에서 당태종이 ‘정관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위업을 달성하고 당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를 하고 있지만 중국 현지 밑바닥에서 나타나는 기록과 유물들은 당태종이 그렇게 영명하고 위대한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 도망 다니는 초라한 몰골의 당태종의 모습은 기존 사서의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며 SBS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보이는 영락없는 그 모습이다. 군기가 빠진 오합지졸을 왜 ‘당나라 군대’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중국 현지의 지방지와 전설 그리고 유적지와 유물이 존재하고 있다면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서술한 기록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그리고 고구려와 당나라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백만의 군대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을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장성(長城, 우리는 친절하게도 만리장성이라 한다)을 넘었다는 기록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으며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수나라나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할 당시 장성(長城)을 넘지 않았다면 두 가지의 가설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첫 번째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지역과 당나라와의 전쟁 지역이 현재의 장성 이남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 하나는 당시에 고구려와 수.당 사이에는 장성이 없었으며 고구려가 쌓았던 천리장성이 현재 중국 장성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안시성 전투에서 패하여 도주하는 당태종을 연개소문이 추격을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실질적인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는 것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당태종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경극의 내용이나 조선시대 이맥이 썼다는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막리지(연개소문)가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고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선도하게 하여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 양자강 유역) 모두 고구려에 속한다고 약속하였다”고 기록된 것들이 결코 과장이나 허위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태종이 도망을 가다 맞닥뜨린 요택(遼澤)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遼)라는 글자 때문에 지금의 요동만 부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지만, 다음의 지도 그림을 보면 고구려와 당나라가 싸운 7세기 중엽의 요동만 유역은 대부분 바다였음을 알 수 있다.

당태종이 빠진 것은 중국의 경극에서나 지방현지에서 모두 진흙 밭인 요택(遼澤) 어니하(淤泥河)라고 되어 있지 바다 속이라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요택도 지금의 요동만이 아닌 황하와 가까운 뻘밭에서 찾아야 하고 안시성도 지금의 하북성의 장성(長城) 근처로 보아야 하며 이곳에서부터 연개소문의 추격이 된 것으로 보아야 모든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 류제헌이 쓴 <중국역사지리, (문학과 지성사 출판)>의 요동만 해안의 변천 © 편집부


연개소문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대륙의 곳곳에서 보이며 심지어 대륙의 남단 광동성에서도 나타나며 일본의 천황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의 경극 <어니하(淤泥河)>에서는 청룡장군 연개소문이 당태종에게 항복을 종용하다 설인귀가 이를 구해주는 것으로 각색이 되어 있지만 고구려가 망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연개소문이 얼마나 두렵고 대단했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개소문은 국난에서 나라를 구하고 고구려의 위상을 중원대륙에 각인을 한 진정한 우리의 영웅이며
연개소문 사후에 내분으로 고구려가 패망했다고 해서 그를 폄하할 수 없는 것이며 제대로 그를 평가하고 조명을 하는 것도 중국의 역사찬탈음모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길의 하나로 보여진다.


 
 
출처-http://www.koguryeo.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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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4조 14-02-16 04:51
   
중국애들이 연개소문에 대해서 트라우마가 있죠. ㅋㅋㅋ

그러나 연개소문에 대한 관심은 남북통일 후에도 늦지 않아요.

현재로서는 북쪽에 자유와 인권을 확립시키는것이 급선무입니다. 이것이 더 중요하지요.

연개소문 대단한 분이란거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나 지금 보세요. 민족의 아름다운 대표곡인 "아리랑"조차도 군대에서 불온곡으로 지정했잖아요. ㅋㅋㅋ

이렇게 개판인데. 하물며 북방역사의 한 축이었던 민족영웅 연개소문은 오죽하겠나요.^^

아리랑을 불온곡으로 지정한다고 해서 아리랑의 가치가 어디 가는거 아니지요.

연개소문의 가치는 어디 안 갑니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반대로 김춘추 같은 녀석을 kbs에서 빨아대는 무개념 드라마도 나왔잖아요. ㅋㅋㅋ

그렇다고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는것 아니지요.

어쨌든 도망가는 당나라 군대 쫒아가서 궁뎅이 걷어찬 연개소문의 기개를 보며

흐뭇해 하는 한국인들 많으니 걱정 안해도 됩니다. 통일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재로서는 연개소문 보다도 북쪽에 민주주의를 확립하는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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