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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2-13 08:17
[기타] [KBS]금나라, 신라의 후예였다! 방송내용 2
 글쓴이 : gagengi
조회 : 3,550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선조는 고려초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 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 금사, 흠정만류원류고 뿐만 아니라 금지, 선화유사, 삼조북맹회록 등에도 줄줄이 기록되어 있다.
이민족으론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떠한가?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의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김부 金傅)의 무덤만이 경기도 연천에 있다.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는 천 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년 -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라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신라 천 년 사직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에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일까?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마의태자유적지비.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에 있을까?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는 수백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에 남아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인터뷰: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천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 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고려사》예종 10년,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극수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我平州僧今俊....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조선 유학자 김세렴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라는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신라 고도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해사록》

 ' ....(경순왕) 김부가 려왕(고려왕)에 항복한 후

그 외손 완안 아골타 즉, 권행의 후손....' 라는 기록이 있다.

 

즉,완안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며 안동 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金幸)인데 왜 권행(權幸)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김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사람이 왕건을 도움으로써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수 있었다. 경북 안동시 북문동에는 삼태사의 묘가 있다. 왕건은 위 세사람에게 태사(太師)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金幸)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權幸)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태사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100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인터뷰: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신라에 충성했던 김행이 후백제의 공격을 막은 것은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김함보가 누구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김함보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 여진지역에 옮겨간 것으로 추론이 됩니다.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에겐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북방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이다. 우리역사에서 여진족은 읍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직,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한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리 역사의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이다. 
금사에 따르면 김함보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 사이에선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마변상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 뿐만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의 7세손에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 된다. 그리고 1102년에 고려로 사신을 보낸다.

 

그런데 아골타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난다. 
 

1107년(고려 예종 2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의 17만명은 여진을 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후 150여 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북관유적도(北關遺蹟圖)에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비석을 세우는 그림이 보인다. 이 그림은 윤관이 북관지역의 여진을 정벌하고 국경비를 세우는 장면(拓境立碑圖 척경입비도)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公嶮鎭)에 국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었을까? 일제 강점기때부터 공험진의 함경남도 일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윤관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00리 지점이라고 되어 있다. 조선국회도. 세종때 실측한 이 지도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던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비는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연길시(延吉市 옌지시)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져 올 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험진은 연길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의 하나였던 간도지방을 고려에 뺏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에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당시 여진 추장은 아골타(阿骨打)의 형 오아속(烏雅束)이었다.


《고려사》예종 4년, 
'일찍이 저희 여진의 선조가 대방(고려)로부터 나왔으니...

이 오아속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我祖宗出自大邦至…雅束亦以大邦爲父母之國)...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여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15년 금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다. 
《고려사》예종 12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겨 조심스럽게 섬겨왔고…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라는 서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인터뷰: 중국 요녕성 대연(다렌) 대학 왕우량 교수]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가 있습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을 겁니다. 물론 전쟁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만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 공동체입니다. 그들에게는 혈연상, 역사상의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진인과 조선반도의 신라인 나중의 고려인은 민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금나라 5경중 하나인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 이곳에서 1985년 우연히 한 점의 비가 발견되었다. 동경 승엄사 선사 탑명(塔銘). 비명은 덕망 높은 한 스님의 일대기였다. 비가 제작된 것은 1190년(명창원년), 스님의 성은 고(高)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동경 요양현 발해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190년이면  발해가 망한지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데 아직도 발해인이다. 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00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거란의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발해인의 반란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엔 반거란이란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금사》 
여진발해동본일가(女眞渤海同本一家).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같은 뿌리 한 집안이다).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인과 발해인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 집안임을 주장해 발해 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발해 여진 동일가라는 그런 말이 먹혀들어갔다는 것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민족적으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쉽게 먹어들어갔다 이런 얘기인 것입니다.

 


중국의 수도 북경(베이징), 북경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겐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북경은 이후 중국의 중심지가 됐다. 
요금 성곽 박물관. 이 박물관의 지하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 시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나무로 수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북경의 명소인 북해공원도 이때 완성된 인공 정원이다. 당시 북경 건설의 총책임자는 장호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4대에 걸쳐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요양 출신 발해 유민이었다.

 

《금사》 
장호는 요양의 발해인이다.
본래 성은 고씨로 동명왕의 후손이다. 
(張浩遼陽渤海人本性高氏東明王之後)

 

장호 뿐 아니라 수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대제국을 운영했던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히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터뷰: 이성호, 동양사학회/금사 연구]
발해는 대제국을 건설 운영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금이 건국을 하고 국가체제를 확장, 반석 위에 올려 놓는데 그들의 경험이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은 이러한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건설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요양을 금나라 5대 도시였기 때문에 수 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여진족과 발해인의 친연관계 뿐 아니라 대제국을 경영하였던 발해사람들의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요양 박물관 별관에 늘어선 금대의 비들 속엔 특별한 비가 한 점 있다. 통혜원명대사 탑명으로 불리우는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로 역시 발해인이었다.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다.

 

《통혜원명대사 탑명》
관찰사 이후의 따님이시며 
태조황제 셋째 아들 허왕의 아내이고 
동경유수 정국공의 어머니다.

 

그녀의 아들 정국공은 나중에 금황제가 되는데 이가 바로 금의 성군이라 불리우는 세종황제였다.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의 여인들은 금황실로 시집을 갔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의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인터뷰: 한국 명지대 사학과 김위현 교수]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의 후손의 왕비족과 신라의 후예인 왕족 이들이 합해져 금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낳았다. 따라는 금나라는 우리 역사의 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다. 
 
금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의 지배층은 발해유민,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 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의 역사와는 그 맥락이 이어진다.  
이렇게 만주와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다른 북방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후퇴한다. 북방민족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300년 지배를 받았던 중국 한족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해서 중국대륙을 지배함으로써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는듯 하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진족이 1616년 만주에 후금을 세우고 중국을 공략해 명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다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을 마지막으로 지배한 청나라이다.



http://cafe.naver.com/corean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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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금 남북조시대 지도:

Map_Jin_Goryeo.jpg

금나라 청나라는 한국사입니다.  김구임시정부때 금청사를 한국사로  가르쳤습니다. 원래 한국사였던 금청사를  원래대로 한국사로 복원해야합니다. 

김구임시정부 발간 한국최초 국사교과서 목차(http://www.yes24.com/24/goods/1978304):
제1장 려요시대 
제2장 고려와 금나라 때 
제3장 고려시대 
...
제4편 근세(近世) 
제1장 조선시대 
제2장 조선과 청나라 시대 

"신라 김함보후손이 중국을 정복해":
여진-고려는 공통의 언어/문화를 가진 민족공동체:
조선-청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한민족의 남북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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