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주막 어쩌고만 많이 봐서리 고려, 조선의 숙박시설에 대해 선입견
들이 있더군요.
중세 고려는 유럽의 최대도시라는 로마보다 큰 수도인 개경(개성)을 중심으
로 북진정책을 중시여겨 이에 버금가는 서경(평양) 그리고 남북국시대 과장
없는 100만에 육박하던 세계 4대 국제적 대도시인 동경(경주 서라벌)을 전
쟁없이 흡수하면서 오늘날 서울인 남경 즉 4경 체재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중소도시를 거느린 도시문명체재의 위용을 보입니다.
혜음원지는 고려 예종 16년(1122년)에 착공을 하는 데 수도인 개경과 남경
(서울) 사이에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시
설로 만들었음. 그외 고려황제가 쉴 수 있는 행궁 건물도 존재합니다.
파주시 일대에서 2001년부터 발굴되었는데 혜음사, 행궁지, 혜음원 등 3곳
을 축으로 24동의 건물터와 더불어 각종 청자류 및 불구(佛具), 기와
조각등이 출토되었는데 면적이 오늘날
축구장크기를 상회하여 당시의 웅장한 규모를 알 수 있음.
그기에 조선의 본격적 수도인 한양이라는 도시가 이미 고려시대 남경으로
중요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대목입니다.
그외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미 숙박시설인 역을 만들고 이후 이런 고려 조
선시대에 중앙집권화체재가 가속화되면서 지방에 대한 정치적 통합과 관리
를 위해 역원의 중요성이 일찍히 대두되어 빠르게 인프라를 구축하게
됩니다.
역(驛)은 말을 키우고 사람도 숙박하던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총 545개소가
원(院)은 1,310개소가 있었다고 함.(원은 역사이에 존재하며 역은 관의
공공적 성격이 강하고 원은 반관반민으로 일반인도 사용가능했음)
(미륵원지 같은 경우는 이미 고려시대 사설 숙박시설 중 확인되는 걸로는 가
장 오래되며 17세기 대동법의 시행으로 조선의 상공업이 활발해지면서 근대
적 기틀의 양상이 사회전반으로 싹트기 시작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전국을 돌아단니는 보부상등 상인이 주로 머무는 객주(客主)와 여
각(旅閣) 같은 시설과 일반 서민숙박시설인 주막(酒幕)등으로
나뉜 사설 숙박시설들도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