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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2-05 23:34
[기타] 송시열과 윤휴는 왜 적이 되었나?
 글쓴이 : 으라랏차
조회 : 3,382  

이건 뭐 그냥 생각난김에 대충 끄적이는거임.



오늘 졸라 할일없어서 그러는건 아니고 그냥 끄적이는거임.


송시열과 윤휴 시대의 붕당정치에 대해 설명하려면 일단 붕당정치에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것이 필요하고 


 붕당정치를 얘기하기전에 또  우선 몇가지 기존에 막연하게 퍼져있던 잘못된 편견부터 없애야됨.



뭐 이젠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조선이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


이런 말은 구라임.  전에도 한번 얘기했지만 "당쟁"이란 용어 자체도 우리에겐 없었음.

"당쟁"이란 명칭을 사용한건 일제 시대 일인학자들이었고 후에 이병도 신석도 이기백 등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교과서에 조차 당쟁이란 프레임이 씌어지며 조선사=당쟁으로 맨날 싸우기만 한 무능력한 시대란

편견이 생기게 된거임.



그럼 실상은 어땠나?  


처음으로 사림이 중앙정계를 장악한건 조선 선조때임.


기본적으로 향촌 출신이 많았지만 중앙 귀족이나 외척등 훈구세력 가운데서도 사림이 나왔음.

학연,지연등으로 얽혀 명확하게 훈구냐 사림이냐 나뉠수 없는 부분도 있음.


심의겸 같은 인물도 외척으로써 그 집안 청송심씨에 훈구가 많음.  


그러나 어찌되었든 기본은 재야 유생으로 기존에 사장이 아닌 경학을 중시하고 도학정치를 꿈꾸며

세조의 찬탈을 불의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의 분모가 있었음.


아무튼 선조때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은 곧이어 동서로 분당되었음.


흔히 이황은 동인, 이이는 서인이라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음.


동.서 분당 초창기에 이황은 어느쪽에서건 반박할수 없는 넘사벽이었고 양쪽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았음.


율곡 이이 역시 동서 어느쪽에 속하지 않았음. 단 이황을 극단적으로 존경하는 젊은 학자들로부터 공격받기는

했음.  그 젊은 학자들은 대게 동인이었음.


우리 선생님(이황)과 감히 논쟁을 했다거나, 불교에 귀의해 승려생활을 했다든가 하는게 주 공격대상이었으나

그게 상대방을 끝장내겠다는식에 공격은 아니고 그저 약간의 트집 정도였던 거고 격렬한 싸움은 아니었음.


즉 당파싸움이라 할것도 없음.


나중에 북인 이산해가 남인 류성룡을 이용해 서인 정철을 쫒아낸 일이 있으나 이것 역시 북인과 서인에 싸움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이산해와 정철의 개인적 싸움이었음.


광해군 때로 넘어가면 북인이 정권을 잡게됨.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진게 아니라 원래 다른 이황의 제자들과 조식의 

제자들이 동인으로 합쳤다가 다시 원래대로 갈라진거이기 때문에 북인과 남인은 원래부터 달랐음. 


암튼 북인은 남명 조식에 제자들이 주류로써 학문적인 수양 못지않게 육체적인 수양도 중시했고

모든것을 단순명료하게 실천하는 실천주의 였음. 


남명 조식이 칼을 차고 다녔다는데서 알수 있듯이 그는 문무 양쪽 치우침 없이 익히라고 했음.


임란이 터지자 당연 무예를 익힌 조식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의병으로 들고 일어났고 

전후 정권에 중용된건 너무나 당연한 일임,


정권을 장악한 북인에 수장은 정인홍.

임란때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운 선비로

이 양반 매우 강직한 양반이었지만 너무 외골수였음.  


자신에 스승 조식을 존경한건 좋은데 그게 지나쳐 이황과 이언적을 폄하해 문묘종사를 막았다가

역풍을 맞음. 쉽게 말해 붕당을 초월해 나름 존경 받는 부분이 많았던 정인홍이 괜히 죽은 이황의 문묘종사

를 막았다가 역풍 맞아 멘붕되어 버려 북인을 벗어나 다른 붕당에겐 멘붕이 되어버린거임.


거기에 더해 이이첨 같은 간적(이런 류는 어느 붕당에서도 나타나는 쓰레기임)을 신뢰해 이이첨이 뒤에서

온갖 음흉한 모략을 써도 감쪽같이 속아서는 그를 두둔함. 


그래도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정인홍과 이이첨은 광해군과 폐모살제를 저지름


뭐 동생을 죽일수도, 마누라를 죽이거나 쫒아낼수도 있지만 자식이 부모를 쫒아낸다는건 그 어떤 명분으로도

말이 안되는 시대에 이건 매우 큰 실수였음.


사실 광해군의 정책 가운대 중립외교 같은건 반정의 직접적인 이유가 안됨.

북인 역시 서인이나, 남인과 마친가지로 숭명배금 이었기 때문에 광해군을 떠받치고 있던 북인 정권의 몰락과

중립외교 정책은 별 연관이 없음.


친모가 아니더래도 어찌됐든 법적인 어머니고 공식적인 나라의 대왕대비인 인수대비를 아들이 폐서인 한다?

결국 광해군과 이이첨의 자충수로 북인 정권은 몰락하게됨.


북인은 사실 정권의 몰락이 아니었더래도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이 있었는데 그건 학문적으로

취약했고 ( 이황이나 이이 이언적, 성흔 등의 학문에 비해  다른 지향점이 있는데다가 객관적으로 보면

좀 허접해 보이는  부분이 있음) 해서 그 학문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음.


남인이나 서인이 정권을 잃고도 유지되는건 그 학통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데 

북인은 그런 면에서 많이 취약했음. 


아무튼 인조반정으로 정권은 서인 +남인 (남인+소북) 에 연합정부가 되고 


기본적으로 이 구도는 숙종 년간까지 유지됨.


즉 인조-효종-현종-숙종 초까지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부는 계속 유지됨.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서인이지만 남인 스승 밑에서 수학한다던가 반대로 남인 출신이지만

서인 스승에게 배워 서인들 논리에 찬성한다던가 하는게 큰 문제도 아니고 애깃거리도 아니었음.


당파를 초월해 산림이란 엄청나게 많은 공부를 한 재야의 학자들이 존경받았고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붕당의 당수나 권력자들 보다도 더 영향력이 있던 때임.


대부분의 사안은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만이 아닌 향촌의 선비들까지 참여한 공론의 장에서 논의를 거쳤고

어느 당파의 이익에도 따르지 않는 그냥 말 그대로 수준 높은 토론이 난무하던 시절임. 


송준길이나 윤휴 송시열등 당대 저명한 산림 석학들이 서로 논쟁한걸 보믄 

비록 이견이 있더래도 매우 품위있고 논리적이며 심지어 그 문장이 아름답기까지 함. 


아무튼 그런 사림들의 정치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함. 

 

바로 효종 사후 예송 논쟁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예송논쟁은 처음에 왕권파냐 신권파냐 하는 거창한 싸움이 아니었음.

예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더더욱 아니었음.


즉 예초부터 별다른 논쟁이나 거창한 명분 싸움 같은것도 아니었는데 권력을 장악하려는

자들이 이를 확대해서 싸움거리로 만든거임.


알다시피 효종조에 출사한 송시열과 송준길은 서인이고

효종이 죽고 현종조에 산림에서 중앙정계로 나선 윤휴는 남인임. 


효종이 죽자 그 모후인 자의대비 복상문제가 생김.


사실 이건 좀 에매하고 명확한 규정이 없어 1년복을 입든 3년복을 입든 큰 문제 될게 없었음.

당시 출사했던 양송은 논의 끝에 1년복을 하기로 하고 혹시라도 예에 어긋남이 없나 싶어

윤휴에게 편지로 물어봄. 윤휴 답장, 송시열 다시 문의, 그러던 와중에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싶어

송준길과 대신들 그냥 1년복 하기로 함.   


그런데 허목이 여기서 문제점을 제기. 


윤휴 역시 틀렸다고 물고 늘어짐/ 


왕이 어째서 사대부의 예법을 따라야 하느냐 하는거임.


뭐 자세한 얘기는 다 아는 얘기니깐 넘어가고 문제는 이미 기년설로 정해졌는데 이걸 뒤업으면

상당수 대신과 사림이 화를 입을수도 있는 상황이 된거임.



그러니 같은 남인 윤선거 조차 기왕 이리 된거 공연히 화를 만들지 말자고 함.


그러다 효종의 비가 죽고 다시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2차 예송이 발생함.

자의대비가 좀 일찍 죽었으면 공연한 논란이 안생겼겠지만 어쨌튼 이 상황에서 송시열의 논리가 흔들리고

사림 내부의 예송에 대한 논쟁은 남인 허적과 서인 김석주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지. 

이 둘은 광해군 때의 이이첨과 마찬가지로 어떤 철학적 이상과 학문을 쫒는 선비가 아냐.

그냥 사익과 파벌의 이익을 쫒는 출세지향의 인물이지. 


이 둘이 주축이 되서 결국 산림의 송시열,송준길,김수항등이 대거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고 이름만 남인, 서인인 권세가들이 판치게돼.


이때부터 허적과 김석주의 개판 싸움이 시작됨.


이때의 싸움 절정이 바로 장희빈을 둘러싼 궁중 암투로까지 이어져. 


엄밀히 말해 숙종 연간 몇차례의 환국은 정통 서인이나 정통 남인의 붕당정치와 큰 연관이 없어.

허목은 나름대로 좋은 정치를 하려 했지만 허적은 왕가의 물건도 자기 생일 잔치에 무단으로 사용하는등

안하무인이었고 김석주 역시 그랬어.



근데 허적이 자기보다 잘나가자 김석주는 송시열을 다시 정계로 복귀시키지. 


송시열이 김석주의 꿍꿍이를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평생 학문하며 정치적 술수와 거리를 두고 산

송시열이라 그런 구질구질한 사람들의 심성을 잘 이해 못했을수도 있어.


암튼 송시열이 다시 복귀하지만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아.


왜냐하면 예송논쟁때 서인가운데 상당수 젊은 선비들 역시 송시열의 논리에 수긍하지 못하고

윤휴와 허목의 주장에 동조했거든.


결국 이 시점에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게 되지. 


이때까지야 좋아.


그런데 권력을 휘두르던 허적이 결국 김석주등 일당에 의해 역모죄로 걸려 죽게되네.

이때 윤휴까지 걸려들어 죽게됨.


남인들 입장에선 송시열이 복귀하고 서인정권하에서 윤휴가 죽었으니 송시열이 철천지 원수가 된거야.


근데 송시열 입장에선 이게 억울한데 에초부터 송시열과 윤휴는 서로 존경하는 사이였고 크게 다툰 사이가

아닌데다가 윤휴가 죽는데 있어 송시열이 간여하거나 계획한거는 전혀 없다는 거거든. 


물론 송시열이 윤휴의 주자에 반한 사서해석에 대해 사문난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이게 쳐죽일 일이라고

한것도 아니고 그냥 학문적인 싸움이지 어떤 권력투쟁은 아니었음. 


결국 남인이 정권을 잡게되자 송시열도 끝내 사약을 받아 죽게돼. 


이때 부터 노론과 남인은 서로를 배척하게되고 상대적으로 송시열에 반발한 윤증으로부터 시작된

소론은 남인과 가깝게되지.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거고 아무튼 이때부터 즉 송시열의 죽음으로부터

붕당 정치는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서서히 왜곡되기 시작하지. 


서로 다른 붕당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던가 다른 붕당 스승에게 사사하지 않는다던가

하게된거거든. 물론 그게 아주 엄격하게 지켜진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를 꺼리게 됐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비극에 시작이지. 


그러나 좀 더 시간이 지나면서 죽은 송시열 복권되고 송자라고 불리며 조선 18현으로 문묘종사까지 하게돼.


어떤 사람들은 노론이 정권을 잡았으니 그리 된거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아.


만약 노론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송시열의 문묘종사가 가능했다면 율곡 이이는 진작에 문묘종사되어야 했어. 잠깐이지만 승려를 했다는 치부 때문에 이이조차도 공자묘에 배향되지 못했단 말야.


남인이건 노론이건 소론이건 학문적으로 그 누구도 이의제기 할수 없을 만치 아주 아주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절대 문묘종사될수 없는 일이거든.


물론 남인 윤휴의 학문적 수준도 매우 높아. 근데 윤휴는 역적으로 몰려 죽었어.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건 아주 애매한 죄목으로 죽은거라 복권이 쉬웠던가랑 다르지.


결론


송시열과 윤휴는 학문적으로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는 사이였고 후에 주자의 해석에 대한

이견으로 비난 하는 사이가 됐지만 절때 서로 죽여야할 원수까지는 아니었음. 

김석주와 허적의 싸움 속에 김석주가 남인들을 싸그리 죽이려고 했고 그 김석주 밑에 김익훈이라는 

김장생의 손자가 있었는데 송시열이 김익훈을 감쌈. 당시 정상적인 즉 상식을 가진 선비라면 

서인이든 남인이든 훈척 김석주와 허적의 싸움을 비난하고 그들 때문에 벌어지는 붕당 간 싸움을

바라지 않았거든. 그러니 김석주나 허적은 당파를 떠나 사림 전체에 공적이란 말야

.

근데 김익훈이 때문에 송시열이 마치 남인들을 학살한 주범인양 몰리게 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과 김수항 등 당파를 초월한 대가들 죽게된거고 그때부터 붕당이 서서히 변질되게 되는거지. 


또한 학문적으로 조선시대 통틀어 子란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람일 만큼 그 깊이가 깊고 고려와 조선을

통틀은 18현 중 한명으로 문묘종사까지 된 사람인데 오늘날 이덕일 같은 일부 역사학자를 사칭한 소설가들이

수구세력의 원흉, 악의 세력, 권력욕의 화신 등으로 모는건 매우 부당한 일이야.


마지막으로 송시열 이 양반, 평생 자기 부인한테 존칭을 썼다고 함.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보지 않고

서로 존경하는 인격으로 대했고, 청렴했으며 맹자를 천번 읽었다고 하듯이 죽을때까지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학자였다는거.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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