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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1-20 22:23
[기타] 역사를 잘 아시는분과 관심있는 분만 이글을 봐주세요 .
 글쓴이 : 지금정치는
조회 : 2,371  

제가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1급을 합격했는데, 1급을 공부하면서 정당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훈구파 사림파 에서 시작해서 노론 소론으로 갈리는데, 훈구파는 성종 이후부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훈구파는 정체성을 중시하는 반면 사림은 소중화를 강조하고 중국에 사대를 중시합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것이 없지만 만약 성종때 사림을 등용 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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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틩 13-11-20 22:57
   
ㅎㅎ..
성종 대즘에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한 이유는 훈구파의 독점 때문입니다.
훈구파가 대농장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경제력도 독점하고 권력도 독점하다시피 해서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한거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자주사상이나 과학기술 쪽으로는 좀 더 발전을 하거나 (적어도 그런 쪽을 우대하는 풍토는 지속됐겠죠) 했겠지만
고인물은 썩듯이 훈구파들이 계속 경제력이나 권력을 독점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합니다.
왕이 훈구세력들 눈치를 볼 정도였으니까요.

그랬으면 훈구세력 내에서 분당식으로 갈라져서 정치를 했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모르겠죠 ㅎㅎ...
지금정치는 13-11-20 23:12
   
문제는 사림을등용해서 사림의시대로갔다는점입니다  그것또한 독재죠. 아무리파가갈라져도 기본이념은 같고,나라에 도움이안되는정치를 자주펼첫다는게문제죠
     
mymiky 13-11-21 00:20
   
?
저기요-.-;; 사림이 등용하던 때의 사림파들은 엄연히 파릇파릇한 신진세력이였습니다.
물론, 고인물도 섞는다고 조선후기 사림이  까인다지만
왜 사림을 등용했느냐? 따지면 안되죠.
인재를 등용하는건 정치의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언제나 훈구파들만 등용하는 것 또한 독재란 생각은 안 하시나요?
훈구파들은 뭐, 천년만년 살겁니까?

아니,, 봉건왕조 시대에 독재운운은 뭔 코메디같은 소리인지?
전, 님이 한국사 1등급 맞았다는 것도 참 우습네요..

님은, 그냥 역사공부보단, 시험 유형만 달달 외운 사람 같아 보이네요..
mymiky 13-11-21 00:15
   
훈구파들이야 조선초기 사람들이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워지진 얼마 안된 사람들이고
사림파들이야 태어날때부터 조선이였던 사람이니 배경이 다르죠.

그리고, 님이 하고픈 말씀은 사림파가 없었어야 소중화와 중국에 사대가 없어졌을텐데,, 아쉽다?
뭐 그런 논조인듯 하지만..
그런데 회의적입니다. 소중화는 조선이 중국만큼 문명국이란 자부심이 없으면 나오기 힘든 말이죠.
중국에 사대도 마찬가집니다. 중국같이 거대한 제국과 접해있는한 사대주의 노선이 크게 바뀔 일은 없었습니다. 19세기 이전, 중국이 동아시아에 가지는 영향력은 매우 큰건 사실이니까요.

성종때 사림을 등용하지 않았다? 그럼 훈구파들 중에서 파벌이 나뉘어졌겠죠.
뻥치지마라 13-11-21 00:26
   
훈구파든 사림파든 성종이 권력 재분배를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해 밥그릇 싸움을 붙인 것이고

그러한 당쟁을 통해 이조 500년이 유지된 것인 바.

만일 밥그릇 싸움인 당쟁이 없었다면, 조선은 진작에 망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mymiky 13-11-21 00:48
   
조선은 정쟁으로 망한게 아니라, 엄연히 외척인 세도정치로 망했죠.
더이상, 서로 견제가 되지 않고, 사사로히 어느 한가문의 영달을 위한 정치를 할때 조선은 아작났습니다. 더불어, 이 같은 경우가 현재도 있지요. [북조선의 김씨왕조]라고;;;
지금정치는 13-11-21 00:51
   
mymiky 님 죄송한데 역사를 좀 잘 모르시는것 같네요... 일단 한국사 1등급이아니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1급입니다.  그리고 훈구파들이야 조선초기 사람들이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워지진 얼마 안된 사람들이고
사림파들이야 태어날때부터 조선이였던 사람이니 배경이 다르죠. 라고 하셧는데 ,.......... 고려 말 온건개혁파 (정몽주 길재 이색) 등 이사람들이 사학파 이며 후세 조선시대에 사림이 된것이고  급진개혁파(정도전 조준 권근)등이 관학파에서 이후 훈구로 바뀐것입니다.  파릇파릇한 신진세력이라뇨? 온건개혁파가 파릇파릇한 신진새력?그냥 웃고갑니다. 잘 아신다음 태클걸어주세요.
     
mymiky 13-11-21 01:34
   
님은,, 역사를 너무 암기식으로 외우신듯 하네요.
한국사 1등급이란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1급이라고 제가 다 치기 귀찮아서 줄여서 말한거구요..

고려말 온건 개혁파가 조선창업 이후 정계에 투신하기 보단, 각 향촌사회로 내려가
사림 사학파 계열로 가는건 흐름까진 맞는데요
성종대 궁으로 들어온 님이 말씀하시는 사림파들은 엄밀히 말해 이들의 제자계열이죠.
젊은 유생들 말입니다.
지금정치는 13-11-21 00:58
   
당쟁이없엇다면 500년이 유지 되지 않다뇨? 천만의 말씀 만약 일당 체제로 갔었더라면 처음에는 독재가 위험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훈구에서도 의견이 갈리여 나뉘어 졌을겁니다. 비록 나뉘어졌어도 훈구의 이념은 갖고있기 때문에 중국에 무조껀 사대가아닌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지키려고 노력할것이고, 쓸때없는 권력다툼에 휘말리지 않고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mymiky 13-11-21 01:38
   
훈구에서 의견이 갈리며 나뉘어졌겠죠. 저도 동의합니다.
잘 아시네요. 훈구에서 여러 당으로 나뉘어졌을게 자명합니다.
따라서, 당쟁은 계속 있었을 겁니다.

아시죠? 노론과 소론도 원래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것들이죠.
훈구에서 뭐 어떻게 나뉘어졌을진 모르겠지만.. 같은 뿌리에서도 이렇게 수 틀리면 나뉘어지는 겁니다.

또한, 이념이란 시기마다 다르게 흘러갑니다.
훈구파들이라고 해서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건 님의 추측상황일 뿐이죠.

또한, 님은 뭔가 역사를 너무 단접적으로 접근하시는데,
사림파들도 엄연히 우리나라 정통성을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소중화? 님..-.- 조선후기 골수 노론인 김약행이 영조에게 건원칭제 하라고 상소올린 일을 아십니까?
지금정치는 13-11-21 01:37
   
제자계열이여도 엄연한 스승의 학파이며 그들의 학문을 계승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mymiky 13-11-21 01:40
   
계승이야 당연히 했겠죠-.-
그래서 님이 말씀하시는건 사림파들이 고려말 온건개혁파들의 제자들이니
그자들도 파릇파릇한게 아니라, 썩은 놈들이다 뭐 이런건가요?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되죠.
님이 뭐라고 하셨든, 성종대 사림들이 받아지게 된 것은 그들이 新세력들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정치는 13-11-21 02:16
   
동감하지만  그결과 나쁜쪽으로갔으니깐전  그냥 아예첨부터없을까에대해 생각해본것입니다.
     
mymiky 13-11-21 03:20
   
역사에 이프if란 없지요..
지금정치는 13-11-21 08:09
   
그것에대해선 앞에 언급햇습니다. 잘읽고 말해주세요
KNVB 13-11-21 16:21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해진 답이 없다고 봅니다. 모른다가 답이겠죠. 제가 말씀드릴수 있는 것도, 추측의 범주일뿐이지만, 한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훈구파는 정체성(?)을 중시한다. 사림은 소중화를 강조하고 사대를 강조한다라고 한마디로 무 자르듯이 규정하기란 어렵습니다. 훈구파는 한마디로 당세의 권력가였고, 세상에 좀 더 세속적, 현실적이었다고 보는 쪽이 맞겠네요. 예를 들면, 정도전, 한명회, 유자광.. 마지막으로 명종 대의 윤원형정도? 사림은 명분을 중시했다라고 보는게 맞겠죠. 삼강오륜.. 부자=군신이라는 논리 확장으로 효에서 충을 끌어냈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논리적 헛점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은 천고 불변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엄연히 다르죠. 이성계는 한낱 고려의 신하였지만, 조선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고려가 혼미한 틈을 타서요. 그렇다면, 임금이 처음부터 이씨만의 독점산물은 아닌 것입니다. 능력있는 다른 성씨가 왕이 되어도 괜찮은 거죠. 현대의 대통령제가 그렇듯이요. 하지만, 불효는 곧 불충이다고 논리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장유유서, 남존여비, 철저한 반상제로 사회를 흐르는 물이 아니라, 고여서 혈액 순환이 안되는 폐쇄적인 상태로 고착시켰죠.
KNVB 13-11-21 16:36
   
물론 유교는 자체적으로 보수적인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신분간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한 것은 애초에 인간으로서 한계를 정해놓았음에 다름 아니지요. 맹자는 전국시대 양 혜왕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백성은 백성답게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면 국가가 부강해질 거라구요.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이다 싶지만, 사회의 안정을 토대로 각자 태어난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에 주어진 신분 위를 넘보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 분수를 알라는 거죠. 통치계급이 계속 기득권을 철밥통처럼 누릴 수 있게 만드는 논리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천인으로 태어나면, 천인으로 대접받으며 죽어가는 것이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념적으로 합리화 시킨 것이 성리학입니다. 유교와 성리학은 다릅니다. 성리학은 일종의 통치 철학입니다. 유교에서 상당히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심화된 부분이지요. 훈구파도 기본적으로 유교를 의식 바탕으로 했지만, 사림은 유학을 좀 더 심화시킨 성리학을 기반으로 했다 하겠습니다. 다만, 성리학자들이 처음부터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명종 대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은 둘째 며느리를 개가시켰습니다. 다른 집안으로 재혼을 허락했죠. 이이의 아버지는 부인 신사임당과 처가살이를 했습니다. 즉, 임란 이전까지만 해도 성리학의 이념이 기존 훈구파의 권세 횡포와 향락을 경계하는 수준이었지, 그만큼 폐쇄적이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위에서 조선 말의 외척의 세도정치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고 하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명회도 세조의 아들과 성종의 비로 두 딸을 들여보낸 외척권신이었으며, 윤원형 또한 명종의 외척이었습니다. 훈구파라서 외척 세도정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림의 보수성이 임란 이후 숙종대까지의 예송 논쟁을 거친 당쟁으로 심화된 것은 사실이나, 영조, 정조 시대에 이런 당쟁이 탕평책으로 진정되고, 실학자의 등용으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전 다큐멘터리에도 나왔지만, 1800년 정조의 급작스러운 타계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봅니다. 그 이후 어린 순조를 끼고 외척 세도정치가 이어지면서, 가장 세계가 급변하고 있던 순간에 정체하고 말았던 것이 결정적이었죠.
KNVB 13-11-21 16:50
   
정조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는 견제 세력을 만들어놓지 못하고 세상을 떴기 때문입니다. 당쟁이라고 우리가 폄하할 수도 있지만, 사실 조선 사회는 상당히 견제와 균형이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동인 대 서인, 대북 대 소북, 서인 대 남인, 노론 대 소론.. 일당 독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견제와 균형이 있어왔고 누구의 일방적인 독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것이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의 추진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쪽으로 흘러가며, 실학파를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세계사에서 18세기 당시 유럽의 절대주의 왕권강화와 시기상으로도 맞물리는 시기입니다. 영, 정조 시기 왕권강화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의 실학자, 서얼 출신들의 등용은 마치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왕권 수립과 이후 프랑스 혁명에서 부르주아 세력이 귀족을 몰아내고 혁명을 했던 부분과도 시기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거죠. 실제로 정조는 더 나아가 노비 해방을 추진했습니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공 사노비를 완전 해방했을거라 보는 관점이 많죠. 정조가 사망할 즈음에는 이미 세부계획이 짜여져 있었고, 어린 순조가 등극했지만, 공노비만 해방하는 측에서 아버지의 유훈을 실천한 것입니다. 다만, 정조가 워낙 확실히 탕평책으로 붕당싸움을 정리해서, 갑자기 정조가 사망했을 즈음에는 궁중에 서로 견제할 만한 정치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 권력 공백을 틈타서, 재빠르게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한 것이죠. 정조 임금 자신도 그렇게 갑자기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붕당 세력을 정리하고 아들인 순조가 성인이 될 즈음이면 아주 강력한 왕권을 물려주겠다는 계산이 모두 어그러진 것입니다.
KNVB 13-11-21 17:01
   
만약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아서, 그가 계획하던 수원성으로의 수도 이전과 그가 총애했던 이가환, 정약용 등이 조선의 재상이 되고, 아들 순조가 성인이 될때까지 후계를 이을 기반을 마련해두고 죽었다면, 1832년 영국의 상선 로드 암허스트 호가 처음 통상을 요구했을때 이미 조선은 유럽과 개국했을지도 모릅니다.  덤으로 일본의 경우, 1840년 아편전쟁이 있었을때, 청나라가 영국에 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은 나름대로 그때부터 개국에 대한 준비를 합니다. 그때 서양의 세력과 힘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네덜란드 상인들과의 이전부터의 교류를 통해 개방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미국이 1853년 흑선을 이끌고 개국을 요구했을때, 별다른 저항없이 개항을 받아들인 겁니다. 정조가 절대왕권을 이룩하고, 실학자들을 정계의 중심으로 등용하여, 공 사노비를 해방하고, 해외 문물과 문화를 수용할 분위기를 조성했다면, 조선의 미래는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그렇게 저는 보고 있습니다. 글쓴 분께서 훈구와 사림을 비교하여, 사림이 정권을 잡은 것이 조선의 미래에 영향을 주었는가 라고 질문하신 것에는, 너무 근원을 멀리 잡았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설령 사림이 권력을 잡고 당쟁의 역사가 있었다고 한들, 그것을 수정할 기회는 후대에 얼마든지 있었다는 점을 저는 말씀드리고 싶은 것 뿐입니다.
바이오팜 13-11-22 02:05
   
KNVB/ 정조가 살아서 계획대로 실천했더라는 가정만해도 가슴이 설레네요. 명쾌한 설명잘봤습니다.
영웅문 13-11-22 21:27
   
훈구파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차라리 우리나라에 유학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으로 바꾸는 것이 더 현명할거 같은데요...

유학이란 것은 사람의 생각을 가둬두는 학문인거 같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초기와 후기의 기술수준 차이가 거의 없죠.

유학이란 기본틀에서 왕이 조강을 할 정도로 유교가 국교인 국가에서 생각을 가둬둔 사람들이 할수 있는 것은 결국 조그만 점하나에 말싸움으로 끝나죠.
그것으로 패당을 만들고 그것으로 권력을 잡을 것이고...
그 권력을 잡은 것들끼리 또 다시 패당을 만들고 또 싸우고를 반복하겠죠.

조선의 몰락은 유학이란 닫힌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시작했다 보여집니다.

첫번째 전환점은 임진왜란 이었지만 결국 유학이란 닫힌 학문으로 인해서 더욱 쇠퇴해져 갔죠.
     
KNVB 13-11-22 22:19
   
물론 저도 윗글에서 유교에 보수성이 잠재하고 있다는 말을 드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유교의 순기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유교의 긍정적인 측면은 사회 혼란의 안정화에 있습니다. 춘추 전국 시대 당시 공자와 맹자의 유학은 백가 사상의 하나일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만, 후세에 이들이 죽은 후, 중국 왕조의 통치 철학으로 채택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선은 유교에 너무 심취했다구요. 어느 정도선까지만 유교를 이용해먹고 바꿨어야 했는데, 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너무 하나만 고집했다는 것이죠. 몸에 좋은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해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듯이 무엇이든 편식하면 몸에 탈이 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고려 말기 북에서는 원명 교체기, 홍건적의 침입, 남에서는 왜구의 노략질로 외세의 침략이 성했고, 내부적으로는 고려를 이끌던 근간이었던 불교 이념의 타락으로 극심한 혼란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유교는 분명히 순기능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이 지지한 유교 사상, 그리고 중소 지주층인 신진 사대부는 고려의 권문 세족에 대해서는 분명히 개혁 세력이었습니다. 또,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을 바탕으로 유교의 철학화, 형이상학 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학의 실리적인 면을 추구한 양명학파, 그 이후 중농, 중상학파로 이어진 실학 계통의 유학도 꾸준히 연구되었습니다. 임란 이전에는 조선이 유학을 따른다고 해서, 보수적이었던 것만도 아니었고, 임란 이후도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실리적인 외교노선을 걸었던 군주였죠. 유학이 성리학으로 이어지고, 그 속에서 사회의 보수성이 폐쇄성으로 이어져,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세계사의 발전에 뒤쳐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 흐름을 따라간 결론만 놓고 판단한 이야기입니다. 유학을 적절하게 이용만 잘하고, 다음 시대로 넘어갔다면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영, 정조 시기의 절대왕권 추구, 붕당 타파를 말씀드렸지만, 그 과정에서 정조가 백성과 신하들의 유교 이념에 내포된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이 왕권 강화를 꾀하는데 도움이 된것도 사실입니다. 유능한 군주라면 유학을 이용해, 절대 왕권을 확립하고, 그 후 유럽의 절대주의 왕조처럼 군주가 원하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 유학이 조선을 정체된 사회로 이끌고, 패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조선은 유학을 적절한 시기에 잘 활용한 후, 적절하게 버릴 시기를 놓쳤을 뿐입니다. 그런 식의 부정이야말로, 일본이 조선시대를 낙후된 사회로 인식하게 만들어, 일본이 구한 말 조선을 망하게 하고, 지배하게 된 것을 정당화 시키는 것입니다.
     
KNVB 13-11-22 22:34
   
제가 너무 길게 장황하게 말씀드린거 같네요. 요점만 간추리자면, 유학은 고려 말에 등장한 시점에서는 개혁 사상이었다는 것이고, 성리학은 사변적, 철학적 이념을 심화한 부분은 유학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유학을 조선 초기 사회 안정을 위해 적절히 활용하고, 특히 조선 후기 정조 임금 같은 경우, 절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도구로 유교적인 충성을 이용한 후, 새로운 이상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유학도 사람들이 나름 활용하기 따라서는 유용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조선 초기부터 길을 잘못 간것이 아니라, 중기, 후기 넘어서면서부터 어느 순간 갈림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죠. 결과가 나빴다하여 조선 시대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일본이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요. 한국사 시험에서 실학부분이 많이 출제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의 이런 조선을 비하하고 부정하려는 공격에 대해, '아니다' '조선도 나름 발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 일본에 조선이 흡수되고 망해야 할만큼 후진적 사회가 아니었다' 라는 정당성을 내세우는 소중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우리 스스로를 비하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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