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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1-13 01:00
[기타] 역사학에서 궁금한점 몇가지 물을께요
 글쓴이 : 덤벨스윙
조회 : 2,661  


1.삼국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인가요? 아니면 역사책중에서 최초라는 말인가요?
2.삼국시대 이전의 사료는 아에 없습니까?
3.조선시대만 해도 실록,승정원일기 같이 기록오타쿠같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거 조선시대와서 갑자기 생긴 현상입니까? 
4.중국도 전란이 적지 않았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전란만 일어나면 사서가 불탔다는게 좀 납득이 안갑니다. 중국은 왜 사서가 많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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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miky 13-11-13 01:08
   
1.[ 현존]하고 있는 역사책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썼고,
그 이전 삼국시대 각 왕조도 역사책을 편찬했지만, 전란으로 소실되었습니다.
2. 삼국시대 이전이라함은, 삼국이 분활되기 전 기원전시대인데,, 이쪽은 차라리 유물연구가 낫지 않을까요?
3.아닙니다. 고려실록도 있었는데, 왜란때 춘추관이 불타면서 잿더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전도 마찬가지구요.
4.중국은 일단 땅이 넓어서 여기서 불타도, 저 지방에서 사본이라도 발견되고 뭐 이런 경우죠.
물론, 중국도 원본구하기는 어려워서 유네스코 기록물 등록하기엔 잘 안되는 경우 많아요.
본초강목이니 황제내경이니 등록하려고 했는데,, 원본이 없어서 못 했거든요.
소시민B 13-11-13 01:18
   
1. 최초라는건 모르겠고요. 기록은 그 이전부터 있었으나 현존하는게 그런거란 말이겠지요.

2. 경우는 사마천의 사기를 참고하는 경우도 있지요. 당시에 이미 천년전에 은나라 왕조의 계보를 거의 오차없이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 신뢰성은 주류사학에서 인정되고 있는데다 사료의 인용이나 실제 답사를 거친 경우가 많아서 아주 훌륭한 사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공자의 춘추필법이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 전형적인 스타일입니다. 고려나 삼국도 비슷하였을거라고 봅니다만 문제는 그 관련 사료가 남아있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제가 대학때(저는 사학과 출신입니다.) 조선시대 사료를 참고하신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어찌어찌 관련 사료가 존재하는것도 있었던것 같은데 그 이후 점점 소실된듯 합니다.

4. 사료를 남기는게 요즘에야 재판할때도 인쇄기로 좍좍 뽑아내면 되지만 당시만해도 필사본(손으로 직접 복사함) 밖에는 없었으니 그 수에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머라해도 인구가 많으니 오랜전란으로 사료가 많이 소실되어도 '필사본'이 많이 남아있을수 밖에 없지요.

쉽게 말해서 종내기가 많으니까 필사본도 많았고 그러다보니 온갖 난리가 나도 어찌어찌 살아남아 후대로 전해지는 사료가 많아질수 밖에 없었던겁니다.

비슷한 사례로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을 들수 있는데 그게 아직 우리가 볼 수 있었던것은 그 많은 기록을 무려 5개소에 '백업'을 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소에 있던것들이 빼앗기거나 소실되었죠. 필사본의 절대수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후대까지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중국은 참으로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의사도 13-11-13 01:21
   
일제 강점기에 조선왕조에 대해 금서로 수거하거나 기존에 보관하고 있던
수많은 사서들이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철저히 강탈을 당했죠
          
소시민B 13-11-13 01:29
   
맞습니다. 일제시기에도 상당수의 사료가 소실되었죠. 당대에 민족사학자들의 한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정의의사도 13-11-13 01:35
   
상해 임시정부 시절 사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를 토대로 나온 신달실기 조선상고사 등등
책들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잇던 사서들을 참조 인용해서 집필이 되었다는 것을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파악하는데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안타깝습니다
초록불 이라는 일제 매국노 식민사관 전파하는 작자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진듯 합니다
                    
mymiky 13-11-13 01:40
   
조선상고사는 신채호꺼라는걸 알겠는데
신달실기는 또 뭐임?-.-;;
네이버에 쳐보니 증산도가 나오는데;;
정말 규장각에 있던거 맞음?
                         
정의의사도 13-11-13 01:45
   
김교헌(1868~1928)이라는 분이 편찬한 사서입니다
조선 말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금기시 되었던
사서들을 보관하고 있던 규장각 출입이 자유로워져
여기에서 근무하던 이들이 일제의 역사 말살에 맞서
수많은 사서를 편찬하게 되고 신단실기는 그중 하나 입니다
상해 임시 정부 시절엔 단군은 당연한 실재 인물 고조선을 건국한 임금이었죠
금청 요나라를 한민족 역사로 당연스레 인식하던 시절 이었습니다
신달신기가 아닌 신단실기 입니다
                         
mymiky 13-11-13 02:03
   
내가 신단실기에 대해 몰라서 찾아봤는데
신단실기는 고조선부터 시작하지, 환단고기처럼 배달국이나 환국은 안 나온다고 하군요. 요나라와 금나라를 우리역사로 포함시킨건 있지만;;
게다가, 사서라고 했는데,, 역사책보단  종교책으로 보는게 합당하다네요
실제로 김교헌이 대종교의 2대종장이기도 하지요.

신단신기2라고 할수 있는 신단민사엔 요금을 넘어
청나라까지 우리 역사라고 집어넣고 있다는 내용도 있고

규장작 출입이 자유로워서 규장각 서적을 보고 썼다?
1909년에 규장각부제학이 되었다고 위키에 나오는데,,
1910년에 경술국치 당한걸 생각하면, 대체 얼마나 몇개월 사이에
연구할 정도나 되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의 명예직 같은데;;
                         
정의의사도 13-11-13 02:19
   
1923년 5월 [조선사 편찬에 관한 고古 기록*문서 등 보존에 관한 훈시訓示]를 시달하여 각급 행정*경찰관서의 협조 아래 치밀한 수거작업을 강화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92p)는 대정大正 11년(1922년) 즉「조선사편수회」가 확대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 204일*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25년에는 15명을 연200일 동안 전국을 누비어 누계累計로 보면 총 259명의 전문요원들이 2800일 동안 조선 사료를 찾아방방 곡곡을 쑤시고 다녔다. 

이어 1926년 12월에 이르러 [사료탐방내규史料探訪內規]를 공포하여 각 관서官署의 강력한 후원을 기반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사료史料와 일본*만주*대마도의 사서史書들도 포함시킨다. 

결국 이 무렵부터 1937년 말까지 15년간이란 장기간長期間에 걸친 끈질긴 수집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전래傳來 고문헌古文獻들이 빠짐없이 수거收去되었는데 중요한 것만도 사책史冊 4950권*문기文記등 453점(대마도의 경우 古문서류 61,469장*고기록류古紀錄類 3576冊*고지도류古地圖類 34장 등)에 이른다.

※ 이 때문에 1922년 8월 2일 열린 제4회 위원회에서 최남선 등의 반발로 수집된 문헌자료 가운데 가장 귀중한 사료는 등사謄寫하여 [복본複本]을 만들어 본문과 함께 대학이나 도서관 등에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925-1937년 3월까지만 해도 수량이 1623책冊에 달하였으니 수거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허나 이것들 역시 해방이 되면서 없어
져 오늘날까지 전혀 행방이 묘연하다.

위에 글을 참조하면 일제가 처음부터 역사말살 정책으로 나간게 아니라
무단통치로 탄압을 해도 도저히 먹히지 않자 방향을 선회하여
문화 정책 역사 말살로 독립의지를 꺾기로 합니다
1910년이 되자마자 규장각 및 다른곳의 출입금지를 당하고
사서 강탈을 당한게 아니라 192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을 합니다
그전까지는 규장각 출입 및 사서 탐독이 가능했기에
그곳이 사서를 참조하거나 인용한 책들이 나오게 됩니다
                    
소시민B 13-11-13 01:44
   
사료에 대한 비판이나 사학자에 대한 비판은 논문이나 반박 사료를 가지고 해야지 쓸데없는 비방으로 하는것은 아닙니다. 아울러 말씀하시는분이 이글루스에 초록불님이지요? 그 분이 주류사학에 어떠한 영향력이 있다고 보기엔 어렵지요.

아울러 그분이나 슈타인호프님 같은 분들의 글을 여러번 봤습니다만 일제 매국노 식민사관이라고 보기엔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사학과 출신으로 님에 생각에 여러가지 이견을 제시하고 싶습니다만, 졸업한지 수년이 흘러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도 현재로선 없고하니 딱히 반박을 할 수 가 없네요.
                         
소시민B 13-11-13 01:47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사학과 재학 당시 저의 주전공은 중국 근현대사였기 때문에 그 부분에 조예가 깊지 않기도 하고요. ;;
                         
정의의사도 13-11-13 01:54
   
초록불의 가장 큰 문제는 거짓말로 시작해 거짓말로 끝난다는 겁니다
신채호 선생의 사서를 멋대로 왜곡하며 자기 입맛대로 갖가 붙여 장난질을 칩니다
주류사학계에서 초록불은 미미할지 몰라도 인터넷에서는 신으로 추앙 받습니다
신채호 선생을 능욕하고 왜곡하는 행태 중 하나가
신채호 선생의 저서 조선사연구초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인용한다는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이 분명 조선사연구초는 역사 연구 초기에 집필해 너무도 부족하기에
전부 수거하고 참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초록불은 버젓이 조선사연구초만을 인용해 후에 나온 조선상고사에서 바로 잡힌
부분은 절대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 식민사학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사연구초와 다르게 조선상고사는 엄청난 인식의 변화가 있고
역사 연구 초기의 오류를 바로 잡는 부분이 많은데 이것을 초록불이 알기에
일부러 조선사연구초만을 들먹이며 고대사를 왜곡합니다
                         
정의의사도 13-11-13 02:25
   
신라 화랑도 운운하며 학도병 모집글을 쓰고
조선 역사 말살을 위해 만든 조선편찬위에 한일 학자 통틀어 최장기 근무에
승승장구를 거듭하고 일왕에게 상금까지 하사를 받은 이병도(최남선은 바로 짤렸죠)를
민족사학자라고 운운하며 아예 조선편찬위에 근무한 사실조차 없다라고 하는게
초록불 슈타인호프 같은 부류들 입니다
역사를 다루는데 대놓고 버젓이 거짓말을 하고 식민사학 자체가 없으며
식민사학 운운하는 이들이 되려 나치 극우 일제 매국노라고 누명을 씌우는데
이들을 보고 분개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 아닌지요?
     
mymiky 13-11-13 01:31
   
왜란크리가 가장 크죠-.-;;
          
정의의사도 13-11-13 01:39
   
임진왜란을 거치고도 수많은 사서들이 규장각 등에 보관되어 있었고
만주 대마도 등에도 한민족 관련 사서들이 존재햇는데
일제 강점기 총독부 놈들이 이걸 수십년을 뒤져서 죄다 강탈해 갔습니다
이때 강탈한 사서만 밝혀진 것이 수천권 분량 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수치는 일본놈들만 알고 있겠죠
               
mymiky 13-11-13 01:50
   
규장각도 병자호란이후 숙종대에 왕건강화와 옛 전통 살린다는 명분으로 두었지만
그닥 효율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왕실 도서관으로 위엄이 서게된건 정조때고
일제강점기때 이왕직 관리하던 총독부나 통감이였던 이토가 사사롭게 대출이란 명목으로
빌려가놓고 반환하지 않은 책들로 말이 많았죠-.- 뭐, 지금 다시 온 것도 있지만..

또한, 수천권이 아니라, 일본에 잔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서적들만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일본인 교수가 있는데, 후지모토 유키오라고 도야마대학 한국학 교수가 2만권정도 연구함.
전에, 엠비씨 뉴스후에 나와서 내가 추측하건데 5만권정도 있지 않겠냐? 하더라구요..
생각보다 훨씬 많아서 깜놀한적 있음.
                    
정의의사도 13-11-13 02:13
   
1923년 5월 [조선사 편찬에 관한 고古 기록*문서 등 보존에 관한 훈시訓示]를 시달하여 각급 행정*경찰관서의 협조 아래 치밀한 수거작업을 강화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92p)는 대정大正 11년(1922년) 즉「조선사편수회」가 확대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 204일*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25년에는 15명을 연200일 동안 전국을 누비어 누계累計로 보면 총 259명의 전문요원들이 2800일 동안 조선 사료를 찾아방방 곡곡을 쑤시고 다녔다. 

이어 1926년 12월에 이르러 [사료탐방내규史料探訪內規]를 공포하여 각 관서官署의 강력한 후원을 기반으로 남아 있을지 모르는 사료史料와 일본*만주*대마도의 사서史書들도 포함시킨다. 

결국 이 무렵부터 1937년 말까지 15년간이란 장기간長期間에 걸친 끈질긴 수집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전래傳來 고문헌古文獻들이 빠짐없이 수거收去되었는데 중요한 것만도 사책史冊 4950권*문기文記등 453점(대마도의 경우 古문서류 61,469장*고기록류古紀錄類 3576冊*고지도류古地圖類 34장 등)에 이른다.

※ 이 때문에 1922년 8월 2일 열린 제4회 위원회에서 최남선 등의 반발로 수집된 문헌자료 가운데 가장 귀중한 사료는 등사謄寫하여 [복본複本]을 만들어 본문과 함께 대학이나 도서관 등에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1925-1937년 3월까지만 해도 수량이 1623책冊에 달하였으니 수거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허나 이것들 역시 해방이 되면서 없어
져 오늘날까지 전혀 행방이 묘연하다.

일제가 강탈한 정말 중요한 사서는 후지모토 유키오가 접근할수 없는 사서입니다
소시민B 13-11-13 01:27
   
4. 이거에 조금 재미난 경우를 첨언하자면 중국역시도 사료가 다 불타서 애매한 시기가 있으니 그게 진의 통일 이전입니다. 진나라가 통일을 하고 진시황제가 과거의 서책과 학자를 다 불태우고 산채로 파묻어버린것(焚書坑儒 - 분서갱유) 이래로 한동안 역사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이후 진이 망하고 어찌어찌 다시 과거를 기록하려고 하니 제대로 남은게 없었죠. 요행이 학자들이 죽기전에 자기집 벽에다가 파묻은 사료를 발견한다거나, 책을 불타우기 전에 달달 외워서 기억하고 있었던걸 다시 써내려 가거나 이런식으로 역사를 복구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위서 논란과 기억의 진위논란으로 후대에 논란이 되었죠.

재미난건 이런일이 현대에도 일어나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이 비슷한 짓꺼릴 저지르죠. 지금 중국이 과거의 영광은 다 날려먹고 저렇게 저급한 수준이 된건 문혁 시기에 충격파가 아직도 남아있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런거 보면 중국은 참.. 신기한 나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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