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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7-25 00:59
[일본] 천하의 개쌍놈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글쓴이 : 취사반장
조회 : 7,296  

천하의 개쌍놈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伊藤博文(いとうひろぶみ)
이등박문, 천하의 개쌍놈 
 
역대 일본 총리
 
초대 이토 히로부미 제2대 구로다 기요타카
제3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4대 마츠카타 마사요시 5대 이토 히로부미 6대 마츠카타 마사요시 7대 이토 히로부미
 
 
8대 오쿠마 시게노부 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10대 이토 히로부미 11대 가쓰라 다로
 
1841.10.16[1] ~ 1909.10.26
  
수상 임기
초대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3년 4개월)
제5대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4년 1개월)
제7대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6개월)
제10대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7개월)

도합 8년 6개월(2720일)을 지냈다(역대 3번째로 김).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 (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그리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조선 침탈과 식민화에 착수한 원흉.
야마구치 현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3좃"으로 불리는 인물.
한자 발음으로는 이등박문이며 국내에서는 이런 호칭으로도 많이 불린다. 아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한국인에게 나쁜 쪽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역사 속 인물. 한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 사람을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2]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일본인 중 한명. 워낙 한국에서 이미지가 나쁘다보니 이토 성씨를 가진 다른 일본인들마저 한국인들의 편견에 힘들어할때가 많다. 심지어 한국을 굉장히 좋아하던 한 일본인 유학생이 한국에서 자신의 성씨에 대한 편견을 버티지 못하고 울면서 유학도중에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충격적인증언 도 있다. 이 글을 본 위키러들은 이런 편견을 가지지 말자.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김씨인데, 한 외국인이 자신에게 "김정일 친척이냐?"고 물어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이토 씨는 일본에서 인수로 따지면 5~6위나 될 정도이다. [3]
일본에서는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현 일본의 의회제도와 양원제를 확립한 인물로서 위인으로 분류된다.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히노 아키히로의 대표적인 별명[4]이기도 하며, 가끔 비유되는 경우가 있다.
 
 

목차

1 출생과 정치활동
2 암살
   2.1 1차 시도
   2.2 2차 시도
3 인격
4 평가 - 전형적 제국주의 정치인, 온건파는 훼이크
5 지폐 속 인물

1 출생과 정치활동


원래 천민이었으나 히로부미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주조가 이토 미즈이 다케베라는 하층 무사에게 근실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사실 주조가 이토의 양자가 될 당시 이토는 무사 계급이 아니었지만, 몇년 뒤에 하층 무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층 무사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서민에 불과한 낮은 신분이었으며 젊어서는 몸이 빼빼 말라 호리병이라고 불렸다 한다. 그래도 무사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당대 조슈번의 교육자로 유명했던 요시다 쇼인 문하에 들어 공부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공부한 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유신 3걸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의 부하가 되고, 영국 유학을 통해 조슈번의 외국통으로 인정받게 된다.
대단히 두뇌가 명석했는데, 오래 공부한 것도 아님에도 서양제도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번에서 일하며 전후 평화협상 등에 종사하였고, 조슈와 막부 사이에 막장전쟁(幕長, 막장이 아니다)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 참여했으며, 조슈와 사츠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덕택에 여러 요직을 거치며 영향력을 쌓아 이후 알력다툼 끝에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관련이 깊은데,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간섭을 시작해 을사조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뒤에는 초대 통감에 취임해 식민화 작업의 기초를 닦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침략 원흉으로 악명이 높다. 한국과 관련되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도 입지전적인 인생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되어 총리가 된 후 '이마타이코(今太閤: 오늘날의 태합.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에서 물러난 뒤에 불린 칭호다)'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토의 행적이나 인물됨을 보면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5]

2 암살
2.1 1차 시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놀러 갔다. 이 와중에 안양[6]에 사는 농부인 원태우라는 사람이 있었다.[7]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조국을 몰수당하게 만든 을사조약에 대단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양에서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배신자가 생겨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열차가 오는 것이 목격되자 이 배신자가 바위를 치우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럼에도 원태우는 짱돌을 집어서 그걸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힘껏 던졌다.[8] 짱돌은 유리창을 깨고 이토 히로부미의 마빡에 정확하게 헤드샷 되었다. 이 때 깨진 유리조각도 같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조치를 해서 살아났다.[9]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성불구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경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았는데, 다행히 대한독립을 보고 1950년에 돌아가셨다. 미수에 그쳐 안중근 의사에 비해 알려진 정도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로 뛰어든 고인의 명복을 잠시나마 빌도록 하자.'
이분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이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안양역을 다니시는 분들 계시면 한번 보고 묵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 동판이란 게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저게 누군지 이름 읽기도 어렵다. 꼬라지가 이 모양이라 안양 사는 사람 대부분이 저게 그냥 장식인지 원태우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2.2 2차 시도
안중근은 합이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합이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합이빈역에 정차했다. (우덕순 열사도 잊지 말자.)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세 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네 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힘,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힘,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힘.[10]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1]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까레야 우라![12] 까레야 우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고 그대로 사망. 참고로 이토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으며, 그의 손자도 "유언은 없다"고 증언했다.
긔 외의 내용은 # 이 기사 참조. 유언, 제2 암살설 외 다른 떡밥도 분쇄한 기사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이토는 한일합방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운 이런식의 의견이 나왔다는 말이 정설화 되있으나 책 본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일본편에서의 묘사는 이토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는 식으로 내용 전개된다.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암살로 인해 한일합방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건과는 별개로 이토 주재이토의 자택에서 열린 1909년 4월의 회의에서 조선병합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여하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막바지에 다른 한직이나 다름없었고, 신진 정치인들이 꾸물꾸물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던 때였다. 또한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른 시각도 있는데, 사실상 한일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왕세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조선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았다는 것 등을 보자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여담으로 이토는 이 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복장이나 신체 등의 요소로 분간하기 어려웠던 것. 이에 안중근 의사는 체념했으나 군중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바람에 안중근 의사가 바로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13]
참고로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KBS 역사스폐설에서 그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전 독립기념관 관장인 김삼웅 교수는 안중근 평전에서 안 의사가 이토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14]고 썼는데 이는 당시 시간이나 주변에 있던 사람 등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취재진도 꽤 있었다는 듯. [15]
 
 
3 인격
"남자는 배꼽 밑으로 인격이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가히 원조
색욕마인이라 불리기에 적절한 것. 일제강점기 때 널렸던 대표적인 견공자제분(그런데 정작 히로부미 본인은 한일병합 전에 사망). 오죽하면 여자문제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말도 있다. 이토 마코토의 성을 여기서 따왔다는데, 저 말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게다가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뭇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다. 다행히(?) 돈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지냈다고 한다. 한국인 양녀로 알려진 배정자도 애첩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사망했을 때에도, 이토의 여자 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일본 신문에 실렸을 정도.
해석: 여자 밝히는 자의 최후
 
 
4 평가 - 전형적 제국주의 정치인,
일본 내에서는 온건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던 탓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그가 죽은 덕분에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 IF는 의미 없는 추측일 뿐이다. 대표적으로 복거일비명을 찾아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은 역사를 다루는 소설.
물론 이 사람이 온건파인양 했던 건 사실이다. 초대 총리로 입헌군주제의 확립 등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며,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평화주의자적인 행보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모두 개전에 반대했다. 이 점이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취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안중근 의사에게 죽었을 때 실제로 기뻐한 것은 이토의 정치적인 적들이었던 보수파 정치인들인 것도 사실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경비가 많이 드는 합병보다도 조선을 완충지대로 두고, 강력한 일본의 영향력안에 드는 "조선의 속국화"를 기획한 약간은 온건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지만 그가 한 행동을 봐선 최종 목표가 합병인 건 확실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달리 식민 통치에 있어서는 완전 견공자제분스러운 일들을 서슴치 않았다는 점에서 아귀가 안 맞는다. 실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정적으로 두고 있었던 보수파에 만만치 않은 탄압과 정치공작을 하는데 일본에서는 특히 이 점을 감추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출신 성분에 있다는 견해가 보통이다. 일단 정치적 성장 배경이 진보적 유신지사들이 주축이었던 죠슈파였고, 그곳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기에 온건파의 이 들어있을 뿐이지 내면이 정치성향까지 균형을 중시하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초대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안 그래도 서양화에 박차를 가하는 중인 일본에서 영어에 능통하다는 점이 크게 먹고 들어갔다는 점.[16] 즉 자기 실력 이전에 정치적 뒷배경이 그를 온건파로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거기다 온건파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총리가 되었으니 코드 인사 등은 당연할 수밖에….
또 영어에 능통하여 서양 문물과 당시 세계 정세를 잘 알다보니 이 사람의 정책 기조가 서양식 국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니 민주주의니를 도입하며 국가간 평화 등을 강조하나 아무렇지도 않게 식민지를 소유하는 서구 열강의 모습까지 그대로 카피했다는 점. 이 때문에 약육강식의 논리 + 강대국의 입장에서 약한 나라를 보호해야 하니까 다소의 희생을 치뤄서라도 일본에 식민지를 두어야 한다는 심각하게 모순된 근대 제국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제국주의 정치가였다. [17]
결국 역사에 있어 만약은 없는 셈이다. 이 사람이 살아있건 죽었건 일본은 이미 풀파워로 제국주의를 향해 내달리는 중이었고, 이 때의 흐름을 일본에서 온건파 몇명이 멈출 수 있는 상태는 이미 아니었다.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반환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원.
이토 히로부미는 규장각 장서들을 현 일본 왕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버렸고, 이 장서들은 현재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돌려줄 맘따위 없ㅋ엉ㅋ였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책을 겨우 반환받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조선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조선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조선인 [18]도 있었다. 조선옷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는데, 심지어는

자기 본마누라에게 조선옷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코스프레? 가운데의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에 당시 총리였던 이토를 비롯해서 무츠 무네미츠 등 일본 내각이 개입했다는 증거 자료가 공개되었다.이토 히로부미가 친한파이며, 한국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병크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어디라고 설명이 필요할까? 근데 자칭 진보라는 김기협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주화입마하기도 한다[19]
한마디로 조선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게 슬금슬금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던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인물보다 이런 인물이 더 무섭다.
안중근 항목에서도 나와있지만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많은 인물이다. 오죽하면 웬만한 일본 위인들에게 바쳐지는 신사가 없을까.[20]

5 지폐 속 인물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독립을 맞이했다. 이후 1963년에 1000엔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어 1984년도까지 이 지폐가 사용되었다. 다만 이 지폐가 사용되는 기간동안 대한민국,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과 대만에서도 거센 반발을 했다. 최고의 범죄자가 지폐속의인물이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논지에서였다.
한마디로 1000마르크 화폐에
아돌프 히틀러를 새겨넣은 셈. 그래도 1984년까지 꿋꿋이 사용하다가,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의 경제교류가 늘어나면서 결국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였다.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지폐는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현재는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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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이버 프로필에는 14일로 나와 있는데 위키백과에는 16일로 나와 있다.
[2] 이 자를 기리기 위해서 남산에 지어진 절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이다.
[3] 어쩌다 서로 동성동본이란 걸 알게 되면 즉석에서 거의 의형제 사이(...)가 되는 한국인에 비해 일본인은 성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 그러니 이런 소리를 듣게 되면 황당함을 넘어서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4] 히노 아키히로부미 혹은 히노 히로부미. 몰론 나쁜 의미로 부르는 거다.
[5] 뒷날 이마타이코라는 별명이 붙은 총리가 또 나오는데 바로 다나카 가쿠에이
[6] 당시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 1914년 이후에는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현재 안양시 안양동.
[7] 안양시 안양동 출신, 1950년 수푸루지(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에서 서거.
[8] 서리재 고개(현 안양육교, 현재 제2 경인고속국도와 1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 부근, 석수 체육공원 및 안양자동차학원이 있는 곳이다)에서 돌을 던져 맞췄다.
[9] 돌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조선시대의 평민들은 석전이라는 돌 던지기 싸움 놀이를 심심찮게 했었다.
[10] 세발 다 급소를 맞췄다고 한다. 당시 사용한 M-1900은 반동이 심해 양손으로 쏴야했는데 안중근의사는 그냥 한손으로 저격.
[11] 네이버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12]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 우라돌격의 그 우라다.
[13] 안중근 의사의 후손의 증언.
[14]<span style="fo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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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사반장 13-07-25 01:05
   
麻구라님!!! 저런 개쌍놈을 친한파니 백제계 후손일지 모른다.. 하며 호의적인 글 올리지 마세요!
한마디로 역겹습니다!!!
     
麻구라 13-07-25 01:15
   
ㅎㅎㅎ 그게 말이죠..... 아무리 이토를 보면 혈압이 오르고 가슴이 벌렁벌렁해도 저런 글만 읽고 다른 쪽을 등한시 하면 분명히 잃는게 있다 이 말이죠... 글쎄 그게 그렇다니깐요!

솔직히 일본인들이 한국을 더 많이 연구하고 더 많은 저작물들을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요? 역겹더라도 볼건 봐야죠. 한국정부가 엉뚱한데 세금나가는거 막고 이런 연구하는데 지원을 많이 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음헛헛!
취사반장 13-07-25 01:24
   
한국정부 드립....ㅎㅎㅎ
역사를 뒤집어 보고, 다른 시각 다른 관점과 사상에 보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마구라님은 역사와 인물에서 제일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하찮은 의문으로 저런 인간을 호의적으로 본다는 게 문제입니다.
나무를 보지말고 숲을 보세요!!
     
麻구라 13-07-25 01:39
   
원래 사건을 접근하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는 겁니다. 만일 이토가 백제계라는 것이 사실로 판명되면 난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뭐 이거 백제계라고 다 좋은게 아니구만... 지금까지 좋게 생각했는데 더 악날빤스네!!" 이렇게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 좀 더 프로적인 능수능란함을 우리가 보여야 합니다. 한국인들이 너무 쉽게 흥분하는데 그러면 일을 그르칠 확률이 많아지죠 머.....
팬더롤링어… 13-07-25 04:14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닯은점이 출생뿐만이 아니라 한국하고 관련되서도 많네...둘다 한국을 수탈했고 결국 마지막도 이토히로부미는 안중근 열사의 한방에 토요토미는 왜란땜시 혼자 열쳐맏고 골로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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