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3-06-20 03:08
[통일] 고려말 수복한 요동 8참과 심양왕 툭타부카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9,835  

 
 
 
 
 
 
 
잡게에서 금나라 역사의 한국사 편입 어쩌고에 대한 여러 견해에서 근거없
 
는 매몰찬 반대 의견부터 좀 더 적극적 부분을 말하지만 발해인은 고려가 포
 
용했지만 금나라는 이후 고려가 포용하지 않았다는 문구등이 있어 그 시대
 
의 폭넓은 이해를 돕고자 한 글 올립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분단됨으로 대륙과 끊어진 섬 아닌 섬의 위치에 있어서인
 
만주와 한반도를 대단히 이분법적 공간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이 틀어
 
박히다 보니 만주에 대한 공간적 역사적 친여성의 인식에 대한 일반인들의
 
사고가 상당히 뒤틀어진 고정관념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일제 식민반도사관도 알게 모르게 주된 역할을 여전히 하고 있고)
 
 
우선 첫번째 지도는 1718년 청나라에서 제작된 황여 전람도(皇與全覽圖)의
 
유럽판 지도원본인 보곤디(R.de Va ugondy.1750년)입니다.
 
좀 이상하죠? 조선은 딱 한반도 안??이여야 하는데 ㅋㅋ
 
 고려말 요동정벌에서 이성계가 오라산성과 요양을 정벌했다가 퇴각했지만
 
압록강 이서 지역의 8개의 교두보를 확정, 보와 진을 운영하였습니다. 그리
 
고 이는 조선시대까지도 압록강에서 이 8참로를 따라 봉성까지
 
서간도로 조선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공간임.
 
청대사서인 길림통지(吉林通志)에는  “조선의 변경이 선양(沈陽)∼지린(吉
 
林)에 접하였다”고 적고 있고 동문관지는  펑황청(鳳凰城·지금의 펑청) 부근
 
을 조선과의 경계로 했습니다.
 
조선초기, 동국지도와 팔도지리지를 제작하였던 양성지의 글(눌재집)을 인
 
용하면
 
“(우리나라 강역은) 요하를 경계로 하여 요동과 장백 이남을 포함하는
   만리의 강토를 우리의 영토로 해야 할 것이나, 우선은 적어도 명황제가 스스로 약속한 것처럼 요동의 180리에 위치한 연산(連山 :만주 本溪縣)으로 경계를 확정지어야 한다.”
  “따라서 明이 요동지방의 동팔참로(東八站路)에 장장(長墻)을 설치하고 개주(開州:지금의 만주 鳳城지방)에 진(鎭)을 설치하려는 중국의 계획을 중국에 요청하여 폐기하도록 하는 한편, 북방의 경비를 철저히 강화해야 한다”
 
조선초기 명과 조선의 국경선이 봉성보다 더 북쪽으로 멀리 있는 본계현 이
 
었으나, 힘의 논리에 밀려서 봉성이 국경선이 굳혀져 가는 과정임을 알수 있
 
습니다. <따라서 조선초기 봉성은 확장된 조선의 영토 국경선이 아니라 축
 
된 영토 국경선이었음을 알수가 있음.>
 
 
이게 뭘 말하는 지 아십니까?
 
간도는 조선 말 우리 민족이 이주하면서 얻어진 땅이 아니라 수천년간 우리
 
의 터전이였고 고려를 지나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왔던 우리
 
역사의 실질적 공간이였다는 점임.
 
서토 한족 왕조와는 다른 요나 원제국 시기에도 이곳은 우리의 영유권이나
 
통치권을 상실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다시 뒤돌아 가서 금나라로 가봅시다.
 
 
저는 아래에서도 금나라에 대해 단순히 금나라가 신라계황제라는 혈족적 개
 
념만으로 볼수 없는 부분을 여러 차례 몇가지 근거를 들어 이야기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금나라는 선비족이 남하하여 연 북조사와 다른 성향에 청사처럼
 
단독 여진족사(무리한 한민족사로 보기도)로 보기보다는 도리어 우리에 대
 
한 여러 친여성과 결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물론 아직 연구가 더 필요한)
 
 
 
그기에는
 
첫째 금나라의 문명사는 선비족이나 청처럼 한족 문명권에 스며들어 이원적
 
으로 다스린 형태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고구려인들이 주도하는 정복 팽창
 
력에 따른 고구려 문명으로 이룩한 세력 확장이라는 점임. (금나라가 세운
 
북경의 중도 역시 금사에서는 금나라 국무총리격인 고구려 동명성왕의 후예
 
인 장호가 주도해서 도시개발를 진두지휘했다고 분명히 기록함 그외 금나라
 
행정이나 병권 도시문명등 다방면과 외척 황실도 발해계가 장악)
 
 
둘째의 요지는 발해 멸망 당시에도 발해는 고구려 5부의 영향을 받아
 
유럽 최대 도시라는 로마 크기 이상의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5경체재에 기
 
타 지역에는 발해 도시문명을 수백년간 향후한 인구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죠.(물론 이들은 천년제국 고구려 문명권에 있던 사람들임)
 
심지어 이중에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 세력이 60만이나 됩니다.(김광석씨
 
논문을 보면 300여만의 발해인중 이름만 동란국으로 바뀌어 요나라에 지배
 
받던 인구가 190만 그외 흩어진 인구가 110만 그중에 10여만이 고려로 넘어
 
오고 60만이 북쪽 여진족 부락으로 들어갔고 1만이 열도로)

즉 이말은 이 북쪽 여진족도 단순히 수렵만 하던 동떨어진 세력이 아니라

발해 문명권하에 도시문명과 정치적 영향력과 풍습속에 수백년을 살면서 동
 
화되다 이후 신라계 아골타의 세력 아래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알수 있는 대
 
목이죠. 그기에 직접적 요나라에 피박받던 반요사상의 고구려인(요나라는
 
고구려가 반란으로 도리어 등을 칠까두려워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군사력
 
을 유지 이용해서 정복활동을 계속했음)과 연합해서 나온게 금나라라는 사
 
실입니다. 이점은 금황제가 몇명 없는 와중에서도 무려 발해계황후가 4명이
 
나 있었다는 점에서도 당시에 고구려인들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실제 금황제 옹립과 폐위까지 좌지했던게 고구려
 
인들임. 금나라 전성기라는 해릉과 세종이 다름 아닌 고구려계이고 그외 심
 
지어 따로 여진족 어쩌고 하는 세력들까지 고구려계를 황제로 추천하는 일
 
까지 나옵니다. 즉 이 말는 당시 고구려계니 여진족이니 이런 말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통용되던 금나라가 아니였다는 말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럼 남북국 시대 발해 신라 이후 신라가 패망하고 이어받은 고려왕조는 어
 
떠했는가?
 
다들 아시듯 고려 왕건은 이미 5세기 고구려라는 국호가 고려로 불리었고
 
이를 계승한 뚜렷한 흔적으로 고려라는 국호를 이어 받아 세움. 그리고 북진
 
정책을 최국책 과제로 두고 수도인 개경과 동급으로 서경(평양)을 중시하고
 
다시금 복원, 큰 도시로 키운 이유도 이러하죠.
 
이후 발해가 멸망하자 발해인들이 고려로 일부 들어오면서 점차 고려 조정
 
내에서는 북방에 대한 고려의 직접적 움직임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화두화
 
됩니다.
 
이런 가운데 고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사적 대국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
 
시키고 다시 고려와 충돌하면서 3차대전을 가지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고
 
려는 결국 3차 대전을 승리하면서 동북아의 3강 즉 고려 요 송의 힘의 관계
 
를 주도적으로 만들면서 국제적 위상이 실질적으로 높아지게 됩니다. 이와
 
중에 문종 시기에 오면 이런 북방의 예맥계 여진이나 발해인들이 더욱 고려
 
조정에 귀의하면서 동만주 일대가 고려의 영향력 아래 들어오고 이후 다시
 
북방에서 신라계 아골타가 북방의 세력을 규합하면서 커지자 이들을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윤관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 7백리 밖에
 
선춘령비를 세우고 동북 구성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려 조정의 충성을 다시 확인 시키고 돌아오죠.
 
그리고 이후 아골타는 반요사상의 발해인들과 연합하여 요나라를 멸망시켜
 
버립니다. 이후 송까지 멸망시켜 버리면서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죠.
 
 
자 세번째 이유입니다.
 
금나라 이후 고려는 금나라를 포용하지 않았는가?
 
도리어 정확히 말해서 다들 아시는 원제국 시기 고려왕은 심양왕을
 
겸하면서 만주 일대에 대한 독자적 관할 지배권을 가지게 됩니다.
 
1279년, 충렬왕은 고려에서 대도에 이르는 교통로인 심주와 요양 사이, 압
 
록강 내에 고려 주민 400호를 이주시키고 이르겐(伊里干=백성)이라는 특수
 
촌락 3개를 세웁니다. 이들 이르겐은 고려의 관할로 이후 선왕이 심양왕
 
이 되는 기반으로 작용하며 이후 충선왕은 심양왕을 겸하면서
 
만주와 남북한 일대에 대한 자치적 관할권을 가지게 됩니다.(점차 이 만주
 
일대로 고려인들이 들어서게 됨으로서 이미 고려 말에는 고려 여진의 비율
 
이 3:7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그기에 이 여진도 앞서 말한 예맥계여진이나
 
발해인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거죠)
 
 
일반 분들이 원제국 시기 고려 조정에 패악 어쩌고 하지만 도리어 고려가 부
 
마국이 됨으로서 고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자치적 독립성을 더욱 부여
 
받고 만주 일대에 대한 고려인들의 생활 터전화나 활동은 더욱 빈번해 집니
 
다. 도리어 원나라 제국의 황후에 오른 고려여인 기황후의 기씨 집안이나
 
역적 홍씨들이 고려 내에서 패악질과 쓸데없는 간섭이 노골적이였던.
 
 
충선왕이 개혁을 하면서 원에 붙어 권세를 누리던 홍씨 집안의 손자들이 원
 
조정에 끊없는 투기를 부리게 되어 고려내 버러지 같은 권문 세족들에
 
의해  결국 이후 심양왕은 조카에게 주어지고
 
고려왕은 장자가 잇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심양왕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말임>
 
 
뭔 소리인가?
 
바얀티무르는 누굴 말하는 줄 아십니까??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임
 
그럼 툭타부카는?  고려 왕실의 왕고라는 사람입니다.
 
 
즉 이렇게 고려내의 버러지 같은 권문세가들의 입성론이 먹혀들지는 않았지
 
만 이원적 정치 지배 구조가 됨으로서 심양왕은 심양왕대로 고려왕을 통합
 
해야 할 당위성을 가졌고 고려왕은 고려왕대로 심양왕 즉 만주의 지배자로
 
서 계승의식을 뚜렷히 가지면서 서로 치열한 신경전과 대립전으로 마치 현
 
재의 남북한이 서로가 서로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부르짖는 상황이
 
거듭됩니다.
 
 
왜!! 고려사에서 고려의 요동정벌이 난데 없는 새로운 영토의 개척이 아니라
 
고려 백성을 안녕케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출정식과 다르지 않았는지 분명히
 
이 시대의 우리는 이해해야 할 것이며 간도는 조선 말기 조선민들의 이주역
 
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 우리의 영토와 생활 공간으로 지속되어
 
져 왔다는 사실을 주지 해야 할 것입니다.(그 속에 있는 금사에 대한 시각도
 
좀 더 열린 공간과 역사성으로 재해석 연구가 더욱 필요할 것임.)
 
그리고 이런 고려말의 시대흐름 속에서 여진족이라는 무력을 등에 업은 이
 
성계라는 군벌 집단이 조선을 개국한 힘의 원동력 중 하나도 바로 이런 고려
 
가 비록 이원적 심양왕과 고려왕으로 서로가 서로를 현재의 남북한처럼
 
합쳐야 하는 역사적 계승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신경전을 펼쳤야 했던
 
당시의 동북아의 역사적 배경을 보지 못한채 늘 피상적인 부분으로만
 
보아선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굿잡스 13-06-20 03:11
   
왜 아골타는 발해와 여진은 일가라고 했을까요?

왜 금나라는 고려를 형제국 어쩌고 했을까요?

고려는 왜 요동출정을 고려 백성을 안녕케로 말했던 것일까요?

왜 오늘날 학계의 연구에서도 여진족이 명보다 조선의 영향력 아래

명에게선 여진족은 여전히 낯설고 거리가 있는 실제 관계였을까요?
     
덕배 13-06-20 03:27
   
항상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히 잘 보고 있어유.
유물이 말하는대로 과학이 말하는대로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안되는 게 아쉬운 현실이네유.
다저스도 아쉽고...
     
치우비 13-06-20 08:31
   
이게 다 반도사관을 주창한 일제의 식민사관 때문이죠
더 큰 문제는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을 확대 재생산 시키는 초록불 및 그 광신도들에 있습니다
강단사학에서 얘기하는 사관에서 벗어나면 마녀사냥 음해 인신공격을 거침없이 하다보니....
나드리 13-06-20 18:08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서라벌 13-06-20 18:40
   
항상 수준 높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특히나 고려왕과 심양왕의 관계성에 대한 해석은 흥미롭군요..
다만 금사를 한국사로 편입하기에는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좀 더 높은 수준의 연구, 종래의 전통적인 역사관을 흔들어 놓을 그 어떤 것이 필요하죠. 오랫동안 우리 역사에서 잊혀졌던 발해사가 조선시대 유득공에 의해 알려진 이후로 결국은 오늘날 한국사에 편입되었듯이 말입니다. 금사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새로운 증거, 새로운 논리를 세울 수 있다면 미래에는 금사가 한국사의 한 축이 될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seharu77777 13-06-20 19:38
   
오 훌륭하신 글 감사합니다.
눈틩 13-06-20 20:45
   
심양왕과 고려왕에 대한 글 잘 봤습니다.

여진이 고려 북쪽에서(현재 만주지역이겠죠) 자꾸 고려민가를 약탈해가자
윤관이 여진을 토벌하자,
여진족들이 고려더러 '부모의 나라' 라며 용서해달라는 기록이 있죠.

현재 여진족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숙신-읍루-말갈-여진-만주족(시대별 명칭변화)은 중국 한족보다는
확실히 우리민족과 강한 친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사에서 주변국 학습을 할 때 말갈, 여진에 대한 비중을 높이고
이들과 우리의 친연성을 강하게 부각시켰으면 합니다.
도밍구 13-06-20 23:31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Total 19,97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388
2530 [일본] 일본의 파렴치한 태도 내일신문 04-06 5219
2529 [기타] 음‥‥‥ 방금 뉴스 게시판에서 대마도나 독도가 한… (4) Jogiches 02-24 5221
2528 한국분들 좀 보세요~~~~~~~~~!!!!! (34) 한반도 05-16 5221
2527 [기타] 만주 북중국 몽골 초원은 원래 우리민족의 활동영역 (9) 슈퍼파리약 10-07 5221
2526 [기타] 가림토 문자는 정말 실존?? (48) 진이 09-15 5221
2525 [일본] 임진왜란 해전사 (1) 애국자연대 08-16 5223
2524 [일본] 日자민 ‘극우공약’ 파문… 韓·中에 영토 분쟁·역… (9) doysglmetp 11-21 5225
2523 [중국] [질문]중국에 순수 한족이 얼마나될까요? (2) 중국에 01-08 5227
2522 칭찬할만한 일본인이라니까 이사진이 생각나는 군요 (5) 567 03-18 5228
2521 [통일] 통일의 기회는 반드시 한번은 올꺼같습니다. (27) 임페라토르 01-05 5228
2520 [기타] 고구려 존속기간은 1000년? (22) 대은하제국 12-13 5228
2519 [일본] 조선호랑이섬멸작전 일본의 속내 혹 아시는분 계신… (13) 아무나 03-31 5229
2518 [한국사] 요서 백제 추적(bc 3세기~ad 5세기) (23) 감방친구 06-16 5230
2517 [일본] 왜의 기원은 중국 복건성, (5) 유토피아니… 05-12 5231
2516 [기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에 대해 생각해 보면요.... (136) 맥주군 11-18 5231
2515 [기타] 금,청사 우리역사인가???그럼 일본사는??? (22) toshake 07-16 5232
2514 발해의 역사 (5) 환웅 12-30 5233
2513 [기타] 세계지도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들 (29) 관심병자 04-16 5233
2512 [기타] 일본 중국 북한 부디 망해라 (4) 용트림 04-02 5234
2511 [통일] "유럽과 아시아 철도 민영화는 부작용뿐" (13) 굿잡스 12-12 5234
2510 [한국사] 백성이 굶어 죽어도 신경도 안 쓰던 조선 클라스.jpg (23) 로마법 09-24 5234
2509 [중국] 내부자 증언, 中共이 한국전쟁에 군대를 투입한 이유 (4) ㅛㅛㅛ 03-02 5235
2508 [다문화] 곳곳에 스며들며 조직을 넓혀가는 화교들 (7) 내셔널헬쓰 04-12 5236
2507 [통일] 발해의 대다수는 고구려인들. (5) 굿잡스 07-19 5238
2506 객님 라택스 IP접근 차단한거 취소좀요! (8) 251 01-05 5240
2505 [중국] 현대차, '황폐한 사막이 황홀한 초지로' (4) 굿잡스 05-28 5240
2504 번역 요청합니다 중국애들이 한국인들 얼굴 가지고 … (5) ㅇㅇ 04-05 5241
 <  641  642  643  644  645  646  647  648  649  6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