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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8 02:22
[통일] 고구려 문명권과 금청사.
 글쓴이 : 굿잡스
조회 : 6,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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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막루국은 물길 북쪽 천여리에 있다. 옛날의 북부여이다. 실위의 동쪽에
 
있고, 동쪽은 바다와 닿아있고, 사방 이천리이다. 그 사람들은 토착하며 살
 
고, 집에 거주하며 창고가 있다. 산과 능,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의 지역에
 
서 가장 평평하다. 땅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
 
은 크고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고, 경계할 줄 알고, 후하여, 노략질 하지 않
 
는다. 그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하고, 읍락에는 호걸과 장수가
 
있다. 읍식은 역시 조두를 사용한다. 삼과 베가 있고, 옷은 고려와 비슷하고
 
모자는 크다. 그 나라의 대인은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형벌은 혹독하고 급
 
하여 살인자는 죽이고, 그 집안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풍속이 음란하거나 투
 
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여, 죽이고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놓고, 썩힌
 
다. 여자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한다. 혹 말하길, 예맥의
 
땅이라 한다.”
 
   -<위서>두막루조
 
 
(두막루국은 5세기에서 8세기에 존재했던 국가임. 백제를 남부여 어쩌고 하
 
듯 윗글에 보면 북부여 어쩌고 하고 저 북방영토에서도
 
농사짓는 오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죠.)
 
 
 
 
 
<고구려 문명권과 금청사.>
 
이건 이전에도 매번 주기적으로 올라왔던 글인데
 
예전에 지나가면서 몇번 말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관련 내용을 이야기 하면
 
반대하는 입장에서도 제대로 연구나 이해도 없이
 
신라계 혈연 어쩌고로만 이야기하면서
 
금사를 따구리 시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사람은 청사를 너무 쉽게 우리 역사의 범주에 넣으려는 사람도 존재함.
 
 
한가지 사실은 여기서 제 관련 글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제가 올린 글에서 내내 이야기 하는게 고구려 문명권임.
 
<문명이란 단순히 한개인이나 한순간의 영웅 혹은 순간적 우연의 산물이 아
 
니라 거대한 인간들의 상호작용속에서 정신과 물질이 과거의 연원을 소산으
 
로 유구한 시간속에서 쌓아온 총제적 산물이라는 점임.>
 
사람들이 이런 문명권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 상당한데
 
<오늘날 학계에서도 따로 우리를 고조선 고구려 문명권 혹은 동방문명권으
 
로 그냥 이야기 하려는게 아닙니다.>
 
이는 신석기 시대부터 이미 만주와 한반도가 거의 동일 생활권으로 교류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이는 이후 본격적 청동기국가인
 
고조선 시기에 가면 이미 제주도까지 우리  고조선의 독특한 묘제인 고인돌,
 
동검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고조선 토착 재지 5부족의 기반하에 나온게 고구려이고 이미
 
초기 고구려 국내성의 건물을 보면 조선 건축물보다 훨씬 상당한 크기를 보
 
이고 있음. 즉 초기부터 상당한 문명역량을 보여주고 있고
 
이는 한반도 북부보다 문명이 열악한 남부에서조차 백제의 초기 한성 시대
 
를 여는 풍납 토성이 발굴되여 십수년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원삼국이니 하는 용어나 삼국 중기에 가서야 고대왕국 어쩌고 하는
 
일제 식민사관식 캐소리 하는 학자는 욕바리 쳐먹는 시대 상황임.
 
그리고 이런 천년사직의 곤고한 고구려는  신라등에 고구려 제국의  한
 
신하국으로 삼았던건 여러 기록에서 나옵니다. 물론 기록이나 고고학적으로
 
경상도 역시 고조선 유민이 세웠고 가야나 경상도 유구에선
 
오늘날 따로 삼한이니 이런식의 개념보다 그냥 부여계가 출토되는 상황
 
임.
 
<뭔 자꾸 삼한 어쩌고 한반도가 섬이라서 배타고 만주와 동떨어진 생활권에
 
서 고조선 삼국시대로 가면서 곤고한 고구려 문명권으로 정착된게 아님은
 
누누히 말해도 이해를 못하는지 억지성인지.>
 
 
 
금사 제대로 공부해보세요. 이건 단순히 한명의 혈통적 황족개념이 아니라
 
고구려문명권이 이후 발해로 이어지고 고구려 문명권의 연장(발해)의 곤고
 
한 도시문명은 요 특히 금나라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주도해서 세운 나라임.
 
도시문명이나 수도 설계,총지위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나 심지어 금나라 황
 
제 옹립과 폐위까지 고구려인 손에서 전성기와 막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금사는 엄연히 이들 유명인들에 한결같이 동명성왕의 후손으로 분명
 
못박고 있고.
 
 
 
조선시대로 오면서 아골타의 후손인 누루하치가 이후 후금을 세우고 다시
 
명에 성명학상 수극화의 원리로 청으로 국호를 개칭하는데 하여튼 이시기의
 
후금과 금사시기의 금나라의 문명은 상황을 달리 봐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금나라 시기에는 여전히 만주일대는 고구려인들의 군사적
 
정치 활동과 고구려 발해부흥운동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여전히 반독립적 군사력을 유지했고
 
발해 도시권안에서 생활하거나 피박을 받았기에 저항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
 
임.
 
 이런 총체적 문명권적 생활상은 보지 않고 애써 결론적 정치적 화두로 학
 
문적 내용을 재단하려는 취지들로 애써 역사를 말아먹고 캐막장질 하고 있
 
는게 짱개국이고 이러니 금나라로부터 송나라를 지키려고 온몸을 다바친 충
 
절의 악비가 역적이 되는 코메디같은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금사는 좀더 연구해 볼 가치가 분명 있는 역사이고 당시 남송과도 대결 국면
 
으로 청사와는 달리 더욱 뚜렷한 내외치의 개념을 가지고 정복활동을 벌였
 
던 상황에 고구려인들의 문명과 정치 주도하에서 일어난 상황이라
 
청사와는 시대적 환경적 문명적으로 어느 정도 개념은 정립하고
 
연구와 이해들이 필요한 상황임을 밝히며 간단히 마무리 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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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잡스 13-06-08 02:28
   
오늘날 대한민국은 조선말기 대한제국의 전통성에서 나온 말이죠.

이 대한제국의 제국이란 단순히 여러 후국을 거느린 개념의 말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우리 스스로의 독자적 주체적 문명권의 지향성과 고유성을 함축한 표현임.

금나라는 도리어 현재의 북경에 고구려인들의 손으로 주도한 힘으로

도시문명을 세우고 정치, 군사활동을 한 곳입니다.

한족의 문명권 아래 포섭되거나 스며들어 나온 시대상이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우선 자각하고 바라보길 권합니다.
나드리 13-06-08 02:34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덕배 13-06-08 02:34
   
아직 부족하지만 앞으로 충분히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봐유.
항상 내용 정리를 잘 해 주시네유.
좋은 글 감사해유.
서라벌 13-06-08 02:38
   
저도 청은 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금나라에 있어서는 우리와의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건 뭐 인정하고 말것도 아니고 사료로서도 검증이 되어 있고 언급하신 고구려 문명권이니 기타 등등 우리와 뿌리가 같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만 후에 고려나 조선이 금나라를 오랑캐 취급하고 그 역사를 자신들과는 다르다고 규정지었으니 오늘날 고려, 조선을 이은 우리로서 함부로 금나라 역사를 한국사에 편입시키니 마니 하기에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죠. 정말 금나라를 한국사로 편입시키려면 지금의 연구 수준으로는 안됩니다. 종래의 역사관을 뒤집어 엎는 그런 학설이 나오지 않는 다음에야..
     
굿잡스 13-06-08 02:46
   
그렇진 않다고 보입니다.

고려말 요동정벌의 고려사를 보면 요동일대를 고려가 새로 개척하는 영토가 아니라

고려 백성을 안녕케 하는 중앙정부의 출정식 정도로 인식하는 기록들이 나옴.

이는 이미 요와의 대전을 통해 자신감과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고려조정내로

북방 세력들이 편입되어 오기 시작했고 요나라도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동만주 일대는 세력권 안으로 떨어졌음)

이런 상황에서 이후 윤관이 여진족 정벌 어쩌고로 출정하면서 무릎 꿇리고 고려신하로

항복 선언시키고 돌아왔구요.

그런 가운데 금나라가 팽창하고 내부에서 고구려인들이 영향력을 발휘했고

이후 금나라가 붕괴되자 이들은 원제국시대 고려왕이 심양왕을 겸하면서

요동일대나 북방영토는 한반도 일대 고려인들과 북방일대에 살던 이전 예맥계등이

혼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정벌을 타영토의 개척이 아니라

고려백성을 안녕케로 봤던 것임.(고려시대 북방영토나 사람에 대해

인식이 없었다는 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런 연원하에 조선 이성계는

일개 신하장수로 여진족 무력을 등에 업은 강력한 군벌 집단으로 조선을 세운

기반이였고요. 물론 이들은 조선내에 벼슬도 하고 세종시기에 가면

여진족 절반이 조선내로 영향력 아래에 떨어집니다. 실제 요즘 관련 연구도 보면

여진족에 대해 조선에 비해 명은 여전히 만주일대는 낯설고 여진족도 조선보다

못한 간접적 영향력 아래에 있던 존재로 밝혀지고 있고요)
          
서라벌 13-06-08 02:52
   
요동이야 금나라와의 친연성 때문이 아니고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입장으로 잃어버린 영토수복을 한 개념이니 그런 것 아닙니까? 원래 요동은 우리에게 친숙한 땅이었으니까요.
고구려 시절에야 여진족이니 말갈족이니 고구려 휘하 부용세력이었으니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지나 그 후대에 갈라졌다고 보는 게 옳죠. 그게 제 논리의 요지이고요. 결국 뿌리는 같다고 하나 그 이후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거죠.
               
굿잡스 13-06-08 03:09
   
대조영을 별종 어쩌고 하는 건 예맥계 즉 부여계를 말합니다.(우리 고구려

백제를 낳은. 가야 경상도 유구에서도 고조선 재지세력인 부여계 어쩌고 나오고)

부여계가 기본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생활하던 세력이였고

이들이 고구려가 커지면서 위에도 잠시 언급한 두막루국처럼 더 윗쪽으로 올라가는

세력들도 나오죠.(백제처럼 남으로 내려가는 세력도 나오고)

하여튼 이들은 전형적 수렵민족이 아니라 오곡등 반농반목형태의 우리 문명적

성향이 강하고 도시문명을 일구는 세력들입니다.

제가 말하는 요지는 발해 멸망당시에도 샹경용청부등 발해 5경이나 기타 지역에는

발해 도시문명을 수백년간 향후한 인구들이 존재했다는 것이죠. 심지어 이중에는

다시 북쪽으로 올라간 세력이 60만이나 됩니다.(김광석씨 논문을 보면 300여만의

발해인중 이름만 동란국으로 바뀌어 요나라에 지배받던 인구가 190만 그외 흩어진

인구가 110만 그중에 10여만이 고려로 넘어오고 60만이 북쪽 여진족 부락으로

들어갔고 1만이 열도로)

즉 이말은 이 북쪽 여진족도 단순히 수렵만 하던 동떨어진 세력이 아니라

발해 문명권하에 도시문명과 정치적 영향력과 풍습속에 수백년을 살면서 동화되다

이후 아골타의 세력 아래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알수 있는 대목이죠. 그기에 직접적

요나라에 피박받던 반요사상의 고구려인(요나라는 고구려가 반란으로 도리어

등을 칠까두려워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군사력을 유지 이용해서 정복활동을 계속했

음)과 연합해서 나온게 금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이점은 금황제가 몇명 없는

와중에서도 무려 발해계황후가 4명이나 있었다는 점에서도 당시에 고구려인들의

입김이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실제 금황제 옹립과

폐위까지 좌지했던게 고구려인들임. 금나라 전성기라는 해릉과 세종이 다름

아닌 고구려계이고 그외 심지어 따로 여진족 어쩌고 하는 세력들까지

고구려계를 황제로 추천하는 일까지 나옵니다. 즉 이 말는 당시 고구려계니

여진족이니 이런 말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통용되던 금나라가 아니였다는

말의 반증이라고 볼 수 있는.)
                    
서라벌 13-06-08 03:18
   
근데 문제는요, 언급하신 발해 유민이라던지 고구려인이라던지 하는 사람들이 금나라에서 주체적인 위치에서 나라를 주도했는가 하는 말입니다. 흔히 발해를 논할 때 지배계층은 고구려인이고 피지배계층은 말갈인이다 하는 식처럼 그런 식으로 우리가 주도권을 쥐었느냐는 거죠. 그리고 금나라가 그런 우리의 유민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해도 자체적으로 고구려나 발해의 계승의식을 표방하지 않는 다음에야 그저 다민족 국가가 될 뿐 어떠한 역사적 민족적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죠. 만약 지도층 자체가 우리와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면 고려가 발해왕족을 우대해 줬던 것과 같이 분명 금나라 사람을 대우해 주거나 그러한 역사인식을 보여줘야 하는데 오랑캐라고 멀리하기나 하고 오히려 친금보다는 친송 쪽이었으니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겁니다.
                         
굿잡스 13-06-08 03:25
   
우선 바로 잡을 내용이

발해국지장편을 보면 발해 지배계급은 317명으로 대다수가 고구려 부여계

성씨들임. 그기에 오늘날은 나머지 다수도 따로 말갈 어쩌고 보지 않습니다.

이는 잽의 유취국사에 근거한 발해 초기 연해주 일대를 잠시 보면서

온 착각일뿐이죠. 실제 발해는 이후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면서 고구려 대다수

의 인구와 풍습을 유지하여 이후 열도와의 외교에서 고려국왕으로 언급하죠



발해인 대다수는 우리 고구려인!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48528&sca=&sfl=wr_name%2C1&stx=%EA%B5%BF%EC%9E%A1%EC%8A%A4&sop=and&page=3


금나라 황실 조정내의 막강한 고구려계(발해인) 파워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8543&sca=&sfl=wr_name%2C1&stx=%EA%B5%BF%EC%9E%A1%EC%8A%A4&sop=and&page=4
                         
굿잡스 13-06-08 03:28
   
그리고 발해 신라 이후 금 고려시기에는 도리어 송나라보다 금 고려가

나름 안정적 평화관계를 유지했음.( 금은 송정벌.)
굿잡스 13-06-08 03:37
   
이 댓글만 적고 저는 마무리합니다.

중세 고려는 기본 4경 채재를 유지했습니다. 수도인 개경 외에 이와 동급으로 중시했던게 서경임(평양)

그외 현 서울인 남경과 서라벌인 동경의 4경 체재에서 서경을 중시한 이유는 바로 북진 정책이죠.

이는 고려의 국호에도 나오고 이후 발해가 붕괴되면서 발해인들이 고려조정으로 들어오면서 북방

영토에 대한 염원과 고구려 발해 부흥운동에 대해 계속해서 정치적 메시지가 조정내에서 화두로

대두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후 요나라와 3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고려의 위상이 높아지자

본격적으로 북방 세력들이 고려조정의 영향력하에 들어오는게 문종시기임.


근데 여기에 좀 정치적 배아리가 있습니다. 뭔 소리인가 하면

고구려도 백제를 백잔이라 비웃고 신라도 같은 계통이지만 고구려 신하국으로 간섭하니 욕하는 소리도

하는데 고려가 힘이 강할때 아래에 있던 세력이 커지자 이후 금나라 세우고 형제지간 어쩌고 하다

실질적 동북아 패자로 대국이 되어 버리니 이제는 신하국 어쩌고 하죠. 고려가 고려사에도

아골타를 자기 고려인 출신 어쩌고 해도 좀 아래로 비웃듯 적은 내용도 보면 어느 정도 배아픈 소리들

나오는 거죠 ㅋ(정치라는게 부자나 형제간에도 노선 달리하면 척을 지거나 칼부림 나는 건 어쩔수 없는데

더 잘나가니 배아픈 소리도 나오곤 합니다.^^)
     
서라벌 13-06-08 03:49
   
그러니까 결국은 고려가 배가 아프니까 금나라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겁니까?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 아닙니까? 단순히 배아파서 그렇다기에는 영 아닌데요. 애초에 금나라가 성립되기 이전 그저 여진족이라느 부족명칭만 가지고 있을 때에도 고려는 여진족을 오랑캐로 봤죠. 같은 동질성을 느끼기 보다는. 다만 그 이후에 신라인 김함보가 와서 그의 후손이 여진을 통합하고 그 와중에 발해인이니 뭐니 연관이 생기게 되는 것인데 그것들 만으로는 금사를 편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거죠. 우리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를까. 아예 한국사에 넣어버리자니..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굿잡스 13-06-08 08:03
   
그 이후에 신라인 김함보가 와서 그의 후손이 여진을 통합하고 그 와중에 발해인이니 뭐니 연관이 생기게 되는 것인데 그것들 만으로는 금사를 편입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거죠>????

님 주장은 좋은데요 좀 앞뒤와 나름의 근거를 들고 와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선 여진족이라는 명칭은 신라인 김함보가 말갈부락을 통합하면서 나온 이후입니다.

발해가 아니고 금나라이고.

님은 여진족 이전 말갈로 불린 세력을 마냥 오랑캐 어쩌고 봤다고 했는데 그럼

발해도 오랑캐임????? ㅋㅋ 요즘 마냥 이런식으로 보는 시각은 없습니다. 위에서도

계속해서 근거를 올렸지만.  발해인 대다수가 단순히 지배계급만 고구려인이 아니라

발해 건국 말갈계 자체가 예맥계라는 말임. 이들은 혈연지역적으로 고구려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우리 삼국시대의 문명의 근간을 연 이전 고조선 문명권의 재지 토

착 세력들임. 그리고 발해시대에 오면 한민족의 원류인 북방 예맥계가 3개 부족과 고아시

아 숙신계가 4개 부족중 3개가 이미 발해에 흡수 통합되고 흑수말갈이라는 세력 조차도

고구려시대 고당전쟁에서 고구려와 함꼐 생사를 건 전투에서 당과 싸웠던 세력임.

이후 발해 초기 일부 독자적 움직임을 보이다 무왕시기에 편입되어 저기

지도상에 표기된 트로이초코예 발해 유적이나 연해주일대고 발해고분과 유물 발해

성곽들이 출토되고 있는 상황이고.

한규철 교수의 연구와 주장을 봐도 오늘날 고구려계 토기 따로 말갈계 토기 따로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즉 토기가 상류층이나 일반

서민층이냐의 질적 차이이지 따로 이질적 형태가 아님.

그외 앞서 말한 김광석씨의 발해속 말갈에 대한 규명과 함께


高麗史에 보이는 발해關係記事에 關한 硏究 -太祖世家의 발해인 處理를 中心으로-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8847016&dir_id=0&page=0&query=%EA%B9%80%EA%B4%91%EC%84%9D%20%EB%B0%9C%ED%95%B4&ndsCategoryId=10102

무슨 북방의 문명이나 세력들을 마냥 이질적 오랑캐로 봤다는 식은 도리어

님의 일방적 시각이군요.(요즘 고고학적 발굴성과나 사서 연구도 마냥 이런식으로

동떨어진 패턴으로 발견되지 않음)
               
굿잡스 13-06-08 08:18
   
제가 이전 북방 영토의 농업에 대한 인식이나 인구에 대해 이야기 할떄

어떤 사람은 조선시대 여진족 몇명이냐 어쩌고를 이야기로 반론을 하던데

누누히 왜 문명권을 이야기 하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주변 여건을 보면서

북방사를 논해야 되는지를 왜 이야기 하는줄 아십니까?

고려말까지 북방은 우리 주도나 이전 부여 예맥계 말갈들에 의해 여전히

도시문명이 건재하고 주도되고 있었고 이말은 그런 도시문명을 향유하고 모일

인구 성립의 조건과 메리트가 있었다는 말임. 그러나 조선시대로 오면서 조선는 여

진족을 점차 조선내의 영향력 아래 통합 흡수화려는 시각에서 적극적 북방영토보

다는 내치에만 치우치니 점차 북방은 사람이 사는 곳보다 야인지역 어쩌고화 된

것임.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발해가 요에 의해 무너지자 이중에서 60여만명이라는

적지 않는 인구가 여진족 부락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외

190여만의 동란국으로 이름만 바뀐 발해인들과 함께 연합해서 세운게

금나라이고. 아골타는 "발해와 여진은 일가"라는 표현을 실제 사용함. 그리고 금

과 고려를 형제지간으로 표현하죠.

당시 고려와 금나라의 관계가 생뚱많은 안드로메다 관계였다는 식은 분명

아닌 것으로 보임. 실제 충돌도 압박해오는 송나라에 대해 투쟁적이였던게

금나라였지 금과 고려는 나름 안정적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이였음.

(발해 신라 남북국시대처럼 초기 좀 날선 관계가 이루어 지다 당나라가 신라보고

발해좀 쳐달라고 해도 겉치레 모양새만 내다 흐지부지시켜 버리는 것처럼

고려도 도리어 금을 통해서 송나라에 막대한 무역적 이득을 챙기면서

송나라에 한푼이라도 더 삥이나 뜯어먹던 시대임^^)
                    
서라벌 13-06-09 20:58
   
제가 여진족 오랑캐 얘기를 꺼냈던 이유는요, 발해와의 차별성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고려는 발해를 같은 고구려의 후손으로써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했지 오랑캐 취급 하지 않았죠. 근데 왜 금나라에 대해서는 그렇게 했느냐는 말입니다. 만약 금 역시 발해처럼 우리와 친연성이 강했다면 발해와 같은 대우를 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죠. 금나라는 배가 아파서 인정을 못했는데 발해는 왜 인정을 한 겁니까?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줬다니 제가 납득하기 힘들죠.
seharu77777 13-06-08 09:23
   
좋은 글 보고 갑니다. 조선 이후 우리는 북방의 역사를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왜 사람들은 동북공정이라고 하면 고구려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동북아의 어느 한 곳도 우리가 정통성을 잃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을 다 같이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민족이 건설하고 정통성을 이어오는 나라는 이제 대한민국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가 그들의 역사를 버리지 말고 같이 포용해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길로틴 13-06-08 11:09
   
내국인 이적집단(친일파, 사대주의자 등등)의 주장을 맹종하다보니
다른 나라가 없던 역사도 만들어 채워넣는 상황에서 우린 그나마 있는것도 잘 간수못하고 있죠
     
파르라니 13-06-08 18:38
   
그렇다고 해도 금 청사를 한국사에 편입 시키는건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 합니다
오늘날은 아예 만주족 ( 여진족 )은 거의 한족에 흡수 되서 없어 지다 시피 했고요
파르라니 13-06-08 18:37
   
좋은글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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