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와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국가입니다.
그리고 여진족은 우리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계층이며 끊임없이 우리민족과 교류를 하던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고대 국가의 한 축을 이루었던 여진족이 건설한 국가도 우리역사에 편입해야 한다는 것이 찬성 측의 주장 같습니다. 더군다나 후금의 시조인 아골타는 신라왕조 출신으로 역사서에도 분명 우리고대국가 출신임을 밝히고도 있죠.
이와 비슷한 논쟁이 과거 발해에도 있었습니다. 발해를 우리 역사로 편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당시에도 엄청난 대립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발해' 는 소위 듣보잡 국가였습니다. 일반 백성(국민)들은 물론 역사학자들조차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국가였죠.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 으로 내려오는 계보만이 정설로 여겨지던 때였으니까요. 지금의 금청사 논란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국 발해는 우리역사로 편입되었는데 구한말 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지배이념으로 자리를 잡고 서양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우리민족 스스로의 사상을 고취하는 자주적인 역사의식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금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와 중화사상을 빼먹을 수가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기 당시 중국과 갈등을 빗던 고구려는 진취적이고 독자적인 문화, 세계관을 가진 반면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실제로는 속국관계죠)하면서 중국 중심의 질서에 편입합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는거죠. 이때부터 중화사상이 서서히 유입되면서, 고려시기에 금나라의 사대관계 요구 수락, 중국의 유교사상 유입 등으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대국화' 하며 우리나라를 '소중화, 작은중국' 으로 칭하는 사상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더 강해져서 명나라를 섬기기면서 중화사상을 넘어 '모화사상, 존화사상'으로까지 발전됩니다.
과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화주의 질서에 위배되는 '오랑캐' 들은 철저히 하류민족으로 여겼고 그런 오랭캐들과는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고려와 조선시대 지배 사상이었습니다.
거란족이 고려를 3번이나 공격한 이유도, 고려가 송나라는 섬기는데 거란(요나라)은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였고
여진족이 조선을 2번이나 공격한 이유도, 조선이 명나라는 섬기는데 여진(청나라)은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였죠.
이런 중화주의사상 때문에 수백년 간 우리민족은 철저히 중국중심의 천하관,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당대 사람들은 중국이 제1의 국가이고 그 다음이 '소중화'인 우리나라, 그리고 나머지는 오랑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존화주의' 의 상징이었던 '어버이의 나라'인 명나라를 멸망시킨 여진족은 철저히 배격해야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당시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습니다.
분명 후금의 시조는 신라왕조출신이라는 것이 역사서에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기에 사실이지만 지금와서 그런 이유로 여진족을 우리역사에 편입해야하고 그들이 건국한 금청도 우리 역사로 편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혁신적이면서도 뜬구름 잡는 소리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오랑캐라고 부르던 여러 민족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중국에 의한 사고관 때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천하관인 중화사상이 수백년 간 우리민족의 천하관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여전히 현대에 와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해의 우리역사 편입에도 금청사 편입과 비슷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인가? 발해의 대조영이 고구려 출신이라는 역사서의 기록은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우리국가라고 볼 수 있는가.
더군다나 발해에 대한 연구는 후대 고려나 조선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구한말이 되어서야 만주를 연구하면서 발해에 대한 의식이 본격적으로 생긴 것이지 그 전에는 거의 비중조차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중화사상에 탐닉되어 있었기에 더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죠.
이런 문제가 있었지만 결국 발해는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족(후대 여진족)으로 구성된 이원적 사회라고 규정짓고 우리역사로 편입이 되었습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여러 증거 문헌들도 존재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금청사를 본다면 발해와 비슷하면서도 더 복잡합니다. 특히 중원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중국과의 마찰도 피할 수 없고 역사전쟁으로 번질 위협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청사에 우리역사 편입에 있어서, 더 많은 문헌증거나 다른 증거가 있다면 과감히 우리역사로 편입해야 함이 옳다고 봅니다. 비록 현재 여진족은 중국에 흡수되어 모두 동화되었고 그 문화나 언어조차 남지 않았지만 우리역사의 일부분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국은 금나라와 청나라가 단지 자국의 영토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국역사로 편입을 하였고, 민족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자 중국은 다민족국가라는 주장을 하며 모순까지 겪고 있습니다. 즉, 중화민족 중화주의라면서 다민족국가다? 이건 다민족국가가 아니라, 중화민족(한족)이 모든 이민족들을 지배하겠다는 침략적 사상에 불과하죠.
역사는 이런 사실관계 이외에도 현재 정치적, 미래 외교관계 등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쓰이는데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 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그 근거가 바로 '신공왕후의 남한 정벌설' 입니다. 이는 일본의 천황이 한반도 남부를 공격해서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고 지배하였다는 '신화'인데, 이 신화를 마치 '사실' 로 각색하여 역사로 만들고 그에 따라 '임나일본부설' 이라는 역사적 허구체를 만든 뒤 실제 현실의 침략을 위한 명분으로 사용했습니다. 즉,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신화를 역사로 바꾸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서 침략에 대한 '명분과 당위성'을 만든 셈입니다. 현재도 그렇고 당시 일본인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알았으며 과거에 일본이 지배했으니 지금 다시 지배해도 된다는 국민여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여전히 일본이 '임나일본부설, 광개토태왕 비문조작설' 등을 왜곡하는 것도 미래에 혹시 모를 일 때문이죠. 그 혹시 모를 일은? 미래에 또 다시 한국과 전쟁이 발생한다면 이런 저런 명분을 만들기 위한 장치인 것이죠. 중국의 동북공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반도 통일과 통일한국의 간도귀속문제 등을 놓고 마찰이 발생할 것 같으니, 미리 수를 써 놓는겁니다. 이정도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가 정치와 외교논리에 쓰입니다. 비록 우리입장에서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른 역사를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바르고 정직한 사람이 꼭 성공하고 잘 살던가요??
더군다나 금청사는 역사의 왜곡도 아니고 실제 문헌에도 남아있는 부분입니다. 일본이 신화를 각색하여 역사를 만들어 조선을 침략하고 여전히 그 신화를 역사로 가르치고 있고,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왜곡 날조 역사 프로젝트를 미래의 외교를 위해 준비하는데, 우리는 역사를 역사 그 자체의 학문만으로 봐야할까요?
금청사의 편입은, 역사 그 자체만의 진위 여부로 볼 것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와 외교관계를 위한 시각으로 함께 봐야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당장은 금청사 편입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청사 문제를 그냥 사장시켜버리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 봅니다.
지금 제 생각에도, 당장 금청사를 우리 국사에 포함한다는 건 굉장히 무리수이고 부작용도 심할 것이라 봅니다만 그렇다고 연구자체를 하지 않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자는 것이 아니라, 주변국의 정황을 고려하여 사실여부가 충분한 역사에 대해서는 꾸준히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 문제에 있어서 과거 역사문제가 무슨 명분이 될 것이고 된다 한 들 경제나 다른 더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크게 비중을 차지 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중국과 일본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이 나옵니다. 한중일처럼 역사문제에 민감하고 역사를 학문 그 이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국가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