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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4-25 19:20
[중국] 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글쓴이 : 예맥
조회 : 6,627  






고조선 뿌리는 숙신, BC 2000년 이전 은나라 방계국가




1 갈석산의 전경. 『사기』에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산의 틈새에 하나로 모이는 곳으로, 동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오랑캐는 동이, 즉 고조선이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고조선 연구에서 중요하다. 2 대릉하 상류. 고조선 영역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패수인데 사서들을 종합하면 패수는 란하 또는 대릉하다. 대릉하의 발원지 가까이에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의 인류문화 발상지인 홍산문화의 유적지가 있다. 3 고조선 영역에서 발견된 구멍무늬토기. [사진=권태균] 


⑤고조선의 실체Ⅱ

청나라 고증학자 호위(胡渭)는 우공추지(禹貢錐指)에서 “산동반도는 요(堯) 임금 때부터 조선의 땅”이라고 썼다. 사기에 “요(堯)임금은 의중을 시켜 우이(<5D4E>夷:또는 욱이[郁夷])의 땅, 즉 해 뜨는 곳(양곡·暘谷)에서 일출을 경건히 맞게 하였다(卷1 五帝本紀 堯)”고 하는데 주석에 “우이(<5D4E>夷)의 땅은 청주(靑州)”라고 했다. 청주는 현재의 산동반도다. 이 기록은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우이는 누구인가.

우공추지에 “동이 9족은 우이이고, 우이는 조선의 땅(四庫全書 經部 禹貢錐指 4卷)”이라고 했다. 나아가 사기에서 “양곡은 바로 해 뜨는 곳(日所出處名曰陽明之谷)”이라고 한다. 양곡을 매개로 산둥반도=양곡=조선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일단 이 기록이 고조선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시기, BC 2400년경의 기록이다.
그 러나 고조선 연구에서 더 중요한 부분은 숙신(肅愼)이다. 고조선 그 자체이거나 고조선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숙신은 물길(勿吉)·말갈(靺鞨) 등으로 불리다 후일 여진족·만주족이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에 는 “정시(240~248) 때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왕 궁(동천왕)은 매구루(買溝婁)로 달아났고, 관구검은 현도태수 왕기를 파견해 추격하게 했는데 옥저를 1000여 리 지나 숙신씨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6BCC>丘儉傳)”고 나온다. 옥저는 현재 함흥·신포 지역, 매구루는 현재 원산에 가까운 문천이다. 그러므로 숙신씨의 남방 한계선은 최소 금강산 일대 또는 강릉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한반도를 숙신의 나라 가운데 남부 지역으로 지칭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 는 “건녕 3년(896) 왕융(王隆)이 군(郡)을 들어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자 궁예는 크게 기뻐하여 왕융을 금성태수로 삼았다. 그러자 왕융이 말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숙신·변한의 땅을 통치하는 왕이 되시려면 무엇보다 송악에 먼저 성을 쌓으시고 저의 맏이(고려 태조 왕건)를 그 주인으로 삼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자 궁예가 이를 따라 왕건을 그 성주로 삼았다(太祖紀)”고 돼 있다. 이때 조선은 한반도라기보다 고조선의 옛땅, 숙신은 만주 또는 한반도 중부, 변한은 한반도 또는 남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신은 고조선 중심부라는 느낌을 주는 말이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의 머리글에는 금사세기(金史世紀)를 인용, “숙신은 한나라 때는 삼한(三韓)이라 했다”고 돼 있다.

이처럼 숙신과 조선(고조선)이 혼용되는 사례는 많다. 고조선 혹은 그 일부를 숙신으로 보거나 조선과 숙신을 상호연결된 독립 주체로 보는 식이다. 이런 혼용은 전설의 시대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숙신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에 나온다. “(우 임금은) 남으로는 북발, 서로는 융적 강족, 북으로는 산융과 발식신(發息愼) 등을 위무했다.”(卷1 五帝本紀 舜) 우(禹)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로 정확한 시기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BC 2000년경 인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 때 대학자 정현(鄭玄)은 “식신(息愼)은 숙신으로 동북방 오랑캐”라고 해설했다. 일주서(逸周書)에도 “직신(稷愼)은 숙신(王會解篇)”이라고 한다. 숙신은 중국 전설의 시대부터 존재해왔던 나라 또는 민족이며 ‘발식신=발숙신’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용된 발식신은 다른 용례를 찾기 어렵고, 가장 가까운 표현이 관자에 나오는 최초의 조선 언급인 발조선(“發朝鮮文皮”:管子 卷23)이어서 발조선은 발식신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된다. 즉 ‘식신=숙신=직신 =조선’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숙신이나 조선은 어떤 민족명을 한자를 빌려 표현한 음차어라는 점과 고조선은 전설시대 때부터 중국민과 함께 존재했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죽서기년에는 “식신(또는 숙신)이 BC 1120년(무왕 15년)과 BC 1107년(성왕 9년)에 각각 사신을 주나라에 파견했다”고 한다. 이는 후한서에 “주 무왕이 은나라를 타도한 후 숙신 사신이 왔다”는 기사(卷115, 東夷傳)와 일치한다.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형제국)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정비된 형태의 국가였으며, 숙신이 고조선의 전신이라면 은나라의 북부에 있던 숙신이 은나라 유민과 결합해 고조선이 발전적으로 통합됐을 가능성이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주나라 왕이 신하를 진나라에 보내어 한 말 가운데 “무왕이 은나라를 이긴 후(BC 1100여 년경) 숙신·연·박이 주나라의 북쪽의 땅이 되었다(昭公九年)”고 한다. 즉 주나라의 북쪽에 숙신·연·박이 연하여 있다는 말이고 연(燕)은 현재의 베이징 부근이다. 이 박은 고대 한국인을 지칭하는 발(發)의 전음(轉音)으로 추정되고, 중국에서도 고구려의 선민족인 맥족(貊族)으로 보고 있다(劉子敏古代高句麗同中原王朝的關係). 이것은 이후 순자의 “진(秦), 북으로 호맥(胡貊)이 접한다”, 사기의 “진(秦) 승상 이사(李斯)가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았다”는 기록과 대체로 일치한다(<5회 참고>). 나아가 박·숙신은 발신식(발조선)의 다른 표현으로도 추정된다. 결국 주(周) 초기 숙신 영역의 남방 경계가 고죽국에 근접한다.

사기(史記)에 “공자(BC551~BC479)가 진나라(현재의 카이펑 인근)에 머물 때 화살 맞은 매들이 떨어져 죽자 공자가 ‘이 화살은 숙신의 것’이라고 했다(卷47 孔子世家)” 고 한다. 공자가 숙신의 화살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화살 맞은 매가 멀리 날지 못했을 것이니, BC 6세기 숙신의 영역은 넓게 잡으면 현재 허베이(河北) 북부, 황하 이북이나 연나라 이북인데 이는 고조선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 기록은 국어(國語:춘추시대 8국 역사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전한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卷18 辨物篇), 한서(漢書)(卷27五行志) 등에도 전한다.

한나라 말기 양웅(揚雄·BC53~AD18)이 저술한 방언(方言)에 는 “조선과 열수 사이”라는 말이 20회 이상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은 “연의 경계 밖으로 더러운 오랑캐인 조선과 열수의 사이(第1)” “무릇 초목이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북연과 조선 사이를 일컬어 초망(가시덤불)의 땅이라 한다(第2)” “연나라의 동북쪽과 조선, 열수의 사이를 일컬어 목근(무궁화)의 땅이라고 한다(第5)” 등을 들 수 있다. 대체로 고조선을 낮춰 보는데 이런 경우는 중국을 괴롭힌 경우 많이 나타난다. 다루기 힘든 상대라는 의미다. 방언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보면, 고조선은 연나라 북쪽에 연이어 있다. 이는 숙신과 고조선 영역이 일치함을 확인시킨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열수(列水)다. 지난 2000여 년간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대동강 중심설이 일반적 견해였다. 고려 때 삼국유사, 조선의 동국통감(東國通鑑)과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사강목(東史綱目)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을 거치면서 견고해졌다. 고조선의 수도는 현재의 평양, ‘패수(浿水)=청천강(또는 대동강)’ ‘열수(冽水)=대동강(또는 한강)’ 등으로 보고 있다.

중국 최고(最古)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BC3~4C로 추정)에는 “열수 동쪽에 열양(列陽)이 있고 그 동쪽에 조선이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해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卷12 海內北經)”고 한다. 같은 책에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고 이 나라를 조선이라고 부른다(卷18 海內經)”고 한다.

그 런데 열수가 대동강이라면 이 기록은 틀렸다. 대동강(또는 한강) 동쪽에 열양이 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다면 고조선은 현재의 함흥이나 강릉이다. 고조선은 이 지역을 단 한번도 지배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열수는 대동강이 아니다.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으로 실린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 등의 강이 있는데 이 세 강이 합해 열수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나 조선은 이 강의 이름을 따서 지었을 것이다(朝鮮列傳)”라고 한다. 그런데수경주에는 습여수(濕餘水)가 나오는데 이 강이 유수(濡水:란하의 다른 명칭)와 합류하는 강이라고 한다(濡水). 현대의 대표적 고대사가 리지린은 “이 습여수가 바로 습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열수는 란하다. 리지린은 “열수는 란하의 지류인 무열수(武列水)와 같은 강”이며 그 근거로 수경주에 “유수가 흐르는 도중 무열계(武列溪)를 지나면서 이곳을 무열수라 하고 무열수의 약칭이 열수”라고 한 기록과 열하지(熱河志)에 “란하가 과거 무열수”라 하고, 건륭황제의 저작인 열하고(熱河考)와 수경주에서도 “열하는 무열수”라고 하는 기록을 들었다. 즉 ‘란하=무열수=열하=열수’라는 것이다. 열하지의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 이전까지는 란하를 유수라 했고 그것을 난수(難水)라고 썼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 란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열수는 란하 유역이나 대릉하 유역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산해경에 나오는 동해는 현재의 서해, 북해는 발해인 것이다.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베이 지역과 남만주 지역에서 나타나고, 한 이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나타난다. 이는 고조선의 영역과도 일치한다. 고조선 기원을 연구했던 러시아의 L. R. 콘제비치도 한국의 역사적 명칭에 서 “사료에 나타나는 고대 조선족과 숙신족의 인구 분포가 지리적으로 서로 일치하고, 숙신과 조선족의 종족 형성 과정이 유사하며 새를 공동 토템으로 가지고 있으며 두 민족 모두 백두산을 민족 발상지로 보고 있다”는 점 등을 토대로 조선이라는 말이 숙신에서 나왔다고 했다.

숙신과 조선이 동계(同系)라는 점을 대표적 선각인 신채호도 지적했다. 신채호는 “발숙신(發肅愼)이 발조선(發朝鮮) 대신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숙신’인데, 만주원류고에서 건륭대제가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음도 결국은 주신이 된다”고 했다. 고대 문헌에서는 조선·숙신·식신 등이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조선=숙신=식신’이라고 봐야 한다.

그 러므로 숙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보면, 고조선은 전설의 시대부터 역사에 뚜렷이 존재해온 민족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가졌으며, 황하 유역 이북을 지배하다 은나라 멸망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보다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초기 고조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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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하 교수 "고조선 유입세력이 탐라국 세워"

      14일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서 탐라국 건국 관련 학설 제기

 

▲ 신용하 교수가 14일 열린 2012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서 탐라국의 건국 과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누구나 '탐라국'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누가 그 탐라국을 세웠는지, 어떤 형성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있지 않다. 

이처럼 대중들에게 생소한 탐라국의 건국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14일 오전 11시 제주대학교 국제교류회관에서 국제학술대회 ‘바다로 열린 세계, 제주의 해양문화’가 막을 올렸다. 

이 날 발표는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의 기조발제로 시작됐다. ‘탐라왕국의 건국과 해양문화 형성’이라는 주제로 탐라국의 기원과 당시의 해양문화를 고찰했다.

신 교수는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탐라국 건국에 대해서 신화적 부분까지 신봉하는 고정관념이 이미 설정돼 있는 경우가 많다”며 “기성 고정관념의 입장에서는 기이하고 불경스러운 견해로 들릴수도 있지만 탐라왕국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히겠다”는 전제로 말문을 열었다.

탐라국 건국에 대해 신 교수는 ‘북방계의 민족들이 남하해 건설한 국가’라는 내용을 제시했다. 이는 신 교수가 지난해 5월 제주대학교에서 열린 역사박물관대학 시민강좌 ‘탐라국 형성의 원류’ 강좌에서도 제기했던 학설.


   

▲ 신용하 교수가 14일 열린 2012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서 탐라국의 건국 과정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제주도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긴 했지만 탐라국을 건국한 세력은 외부 이주 세력이라는 것.

그는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과 고구려, 백제, 신라 신흥고대국가들의 격렬한 정치변동으로 동남방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시기에 고구려족, 양맥족, 부여족을 비롯해 고조선 계열의 민족들이 제주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역사적 문헌에 남아있다며 사실상 제주지방에 외주인들이 대거 이주했던 점을 강조했다.

이후 3개의 민족이 연맹해 현재의 제주시 지역에 고을국가를 건국한 국가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제주도의 고대국가 ‘탐라국’이라고 설명하며 “고문헌 자료와 고고유물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시기는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경 사이”라고 말했다.

또 “이주민들은 당시 선박의 규모상 수백명에 불과했을 것으로 그들이 국가를 건국했다 할지라도, 그보다 훨씬 많은 수천명의 선주민을 포용해야 했다”며 작은 고을국가였던 탐라국이 제주도 해안의 마을공동체들을 포용한 고대왕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 14일 2012 탐라대전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발표자들과 내빈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탐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벽랑국’에 대한 연구도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3을나 설화’에는 탐라국에 세 명의 공주와 곡물씨앗, 목축이 도입돼 온 곳이 ‘벽랑국’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탐구한 것.

신 교수는 “벽랑국은 탐라국 건국기에 한반도 남해안의 지금의 강진, 완도, 해남을 포괄한 소왕국의 명칭인 동시에, 통일신라시대에 장보고가 완도에 설치한 군영,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완도 옆에도 ‘벽랑국’이라고 표기된 내용이 있다”고 말해 신화 속 벽랑국이 일본의 섬이나 가상의 공간이 아닌 한국 내륙지방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중 한 명인 신 교수의 발표는 제주 역사를 민속학이나 역사학이 아닌 실증적 사회과학으로 색다르게 접근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시간이었다.

이 날 신 교수의 발표에 이어 열린 첫 번째 섹션에서는 ‘제주문화의 형성 과정과 특징’에 대해 주강현 제주대 교수, 이영권 제주대 교수, 조성윤 제주대 교수가 무대에 올랐다.

두 번째 섹션에서는 외국에서 온 학자들이 ‘아시아 태평양의 바다와 제주’를 주제로 바다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와 태평양의 해양사를 다뤘다. 한흥용 중국 상해 해양대 교수, 토드 아메스 미국 괌대 교수, 모리타 마사야 일본 관서학원대 교수가 차례로 자신의 국가와 제주의 해양문화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오는 15일까지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제주문화의 특징과 제주 해양문화의 보편성을 논구하면서, 제주문화 전승의 올바른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날 개회식에는 윤용택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소장, 김형선 제주도 행정부지사, 허향진 제주대학교 총장이 참석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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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전국시대 7웅 연나라와 힘 겨룬 북방 강국




1 갈석산에서 바라본 창려현 창려현은 기록에 고조선의 도읍으로 나오는 곳이다. 사기의 “위만은 왕검(王険)으로 도읍을 삼았다”라는 기록에 대한 주석으로 후한의 서광(徐広)은 “창려현에 험독현이 있었다”, 응소(應劭)는 “요동 험독현은 조선의 옛 도읍”이라고 했다. ‘왕검=험독’임을 설명한다. 이 지역은 현재 베이징에서 멀지 않다. 연나라의 침입으로 상실한 이후 진한 교체기에 고조선이 재점령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서 봐도 천연 요지임을 알 수 있다. 멀리 발해가 보인다.2 란하 고조선의 도읍지인 창려를 끼고 흐르는 강이다. 3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동검. [사진=권태균]


⑤고조선의 실체Ⅰ

고 조선의 실체는 무엇인가.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고조선은 신화의 세계 혹은 문명의 변두리에 있던 세계인 것처럼 그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서에서 고조선의 역사는 유장하다. 공자의 춘추시대에 이미 뚜렷한 자취가 있다. 후대 한반도 왕조보다 역사가 길다. 2000여 년 전 후대들이 한반도로 들어온 뒤 잠긴 고조선의 문을 열려는 노력이 오늘 활발하다.

 






고려사에 “평양에 도읍한 단군이 전조선(前朝鮮)이고 기자조선은 후조선(後朝鮮)이며… 41대 후손 준왕(準王)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나라를 빼앗아 왕검성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卷58 志 卷12 地理)”라고 한다.

이것이 당시의 역사 인식이었다. 그러나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은 실체가 없다. 위만조선만 불쑥 나타나 사기에 충실히 기록돼 있을 뿐이다. 사기의 미스터리다. 이런 기록은 ‘은나라와 기족의 역사를 제외하면 한국사는 BC 190년께 연나라에서 온 중국인 위만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자인하는 꼴이다. 위만 이전, 41대 왕까지 이어져 왔다는 고조선에 관한 구체적 기록은 어디에도 없고 왕궁의 유적이나 유물도 발견되지 않아 온갖 억측이 난무한다.
고조선과 관련해 한국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시경(詩經)의 주나라 선왕(BC
827~782) 때 일이다. “왕이 한후(韓侯)에게 준 것은 그 추족과 맥족(貊族), 북쪽 땅을 받고 제후가 되었다(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因以其伯, 大雅)”는 기록이다. 이 한후를 상당수 한국 사학자들은 한국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기록으로 이해한다. 역사의 시작을 중국의 한반도 지배에서 찾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AD 1세기 중반 한나라 때 유명한 학자 모장(毛<8407>)은 시경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을 ‘북방의 제후급 인물이 오랑캐를 토벌한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했다. ‘한후’는 주나라 왕실의 신하인 제후를 의미하는 것일 뿐 한민족과는 관계없다는 의미다. 한민족을 의미하는 한(韓)의 개념은 당시엔 형성되지도 않았다. 시경에는 한후가 주나라 왕명을 저버리지 않고 밤낮으로 노력하면 제후의 지위를 유지시켜줄 것”이라는 구절과, “한후가 분왕(汾王) 조카딸과 결혼(韓侯取妻 汾王之甥, 大雅)”한 후 그 제후와 연나라 백성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이다. 즉 주나라 제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시경에 나오는 ‘주나라 선왕 때 일’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단어는 한후(韓侯)가 아니라 맥족(貊族)이다. 맥족은 예족(濊族)와 더불어 고조선의 근간을 구성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예맥은 관자에 처음 나타난다. 관자(管子)의 “제나라 환공(桓公, ?~BC 643)이 북으로 고죽·산융·예맥에 이르렀다(北至於孤竹山戎濊貊, 小匡)”는 기사가 예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고죽은 은나라의 후예로 기족의 영역(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 지역)을 바탕으로 한 나라다. 고조선의 뿌리인 예맥은 요서~북만주에 걸쳐 활동했고 이후 부여와 고구려·전연·북위 등을 건국한 역사 주체다.






이어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엔 “진(秦) 북쪽으로 호(胡)와 맥(貊)이 접한다(强國)”는 기록이, 사기엔 “진(秦) 승상 이사(李斯)의 글에 ‘저는 (진시황을 보필하여) 북으로는 호맥(胡貊)을 쫓고…(李斯列傳)”라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맥은 현재의 내몽골이나 요서 지역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BC 3세기에 편찬된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북해의 동쪽인 이예(夷穢)지방에서는 큰 게와 능어(陵魚)가 난다(北濱之東 夷穢之鄕大解陵魚, 卷20)”라고 한다. 여기서 북해는 발해로 보고 있다. 따라서 BC 3세기를 전후해서는 예족이 이미 요동 지역으로 많이 이동해 와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예맥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을 종합해 “원래 예가 거주한 요하 동쪽에, 요서나 중국 북방의 맥이 이주해 ‘예맥’을 형성했지만 예맥이 언제 어떻게 하나의 종족 집단을 이루고 동으로 이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사기 기록에 ‘예맥’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종족 연합체로 등장하고 흉노와 동쪽에서 접경한 사실에서 BC 3~2세기 무렵 예맥이 하나의 종족으로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본다”고 했다.
고대 한국인들의 영역은 현재의 베이징에서 북만주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중앙집중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해 고도의 행정조직을 갖췄다면 남았을 정리된 기록과 사서가 일절 없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없어도 역사는 계속됐다.


고조선과 연관된 ‘조선(朝鮮)’이란 단어도 관자에서 처음 나온다. 사실 ‘고조선’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계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가 만들어낸 말이다. 관자에는 “발조선에서 생산되는 범가죽(發朝鮮文皮, 卷23)”이라고 하면서 “(천금을 주어야) 8000리나 떨어진 오월이 (제나라에) 조공할 수 있을 것이고 범가죽은 금같이 귀하니 그 정도 지불해야 80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발조선이 조공할 것이다(然後八千里之吳越可得而朝也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卷24)”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발조선(發朝鮮)’이라 하여 여러 조선이 있는 것처럼 돼있고, 제나라를 기점으로 오월과 발조선이 모두 8000리로 되어있다. 발조선은 북방이다. 서쪽은 이미 여러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발조선의 남방한계선은 과거 고죽국(孤竹國)의 위치와 대체로 일치한다. 관자는 BC 7세기께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영지를 정벌하고 부지산(鳧之山)을 지나 고죽을 짓밟고 산융과 대치하였다”(大匡)고 했다. 고죽국이 멸망하고 이 일대는 연나라의 세력 범위에 들어간다. 과거 고죽국 지역이 자연스럽게 발조선의 남쪽 한계선이 됐을 수 있다. 결국 ▶은의 후예인 기국 또는 그 계승 민족이 이 시대에는 발조선으로 불렸거나 ▶이들 기국과 북방에서 남하한 맥족이 혼합하여 발조선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일 수도 있고 고조선의 전 단계 국가일 수도 있다.


따라서 BC 7세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은 발조선이며 그들의 위치는 현재의 베이징에서 요하에 이르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발조선의 구체적인 모습은 사료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 지역은 중앙아시아에서 발달된 청동기와 금·은 세공기술의 이동통로로 비파형 동검을 사용하고 신화적으로는 남방계(난생)와 북방계(천손)의 혼합지역이며,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산업기반을 바탕으로 온돌문화를 발달시킨 지역이다. ‘조선’은 이후 당당한 정치적 주체로 사서에 등장한다.


위략(魏略)에 “과거 기자 이후에 조선후가 있었고 주나라가 쇠퇴해가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으로 공략을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쳐서 주왕실을 받들려 했는데,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므로 이를 중지하고 예를 파견하여 연을 설득하니 연도 전쟁을 멈추고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라고 하였다.


조선이 주왕실을 받들었다는 것은 명분일 것이다. 이 구절은 고조선이 전국 시대의 강국 중 하나인 연나라와 힘을 겨룰 정도의 강성한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당시 연나라는 수십만의 대군과 700여 대의 전차, 6000여 필의 말, 10년을 지탱할 수 있는 군량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나라 때 전국책(戰國策)은 기록하고 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연이 왕을 칭하고 조선후도 왕을 칭했다는 점이다. 연이 왕을 칭한 것은 역왕(易王, BC 332~321)의 시기. 그러므로 고조선은 전국 칠웅과 유사한 제후국 형태를 유지하다가 BC 4세기께 들어와서는 이미 본격적인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국 7웅과 어깨를 겨루는 북방의 국가, 이것이 고조선의 실체다.

BC 4세기 이후 고조선과 연나라는 항쟁기에 들어선다. BC 3세기께 “연 장수 진개가 동호(東胡)를 기습하여 동호는 1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다(史記 匈奴列傳)”고 한다. 삼국지에는 “(조선왕의) 자손들이 교만해져서 마침내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은 매우 약화되었다(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三國志魏書 東夷傳 韓)”고 했다.(동호가 고조선임은 이미 1회에서 밝혔다.)

만번한은 평북 박천 또는 현재의 랴오양(신채호의 견해) 등으로 비정되지만 랴오양 서쪽(요하 하류)으로 보는 것이 옳다. 요하 지역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645년) 진흙이 200여 리나 돼 인마가 통과할 수 없다… 대습지여서 당태종조차 말의 칼집에 장작을 메었다(寶藏王)”고 나온다. 따라서 연나라 대군이 요하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일대에는 후일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요동성·백암성(白巖城)·안시성(安市城) 등이 건설됐다. 결국 진개는 고조선(동호)의 서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동호라는 단어가 사기에 처음 등장한 이후 ‘조선후’라는 말은 주로 동호(선비, 모용, 요 등)가 계승했다.

고조선은 진시왕의 진(秦)나라와도 관계가 있다. 삼국지에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까지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 부(否)가 왕이 되었는데 진의 습격을 두려워해 진에 복속했지만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하였다(魏書 東夷傳 韓)” 는 기록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고조선의 역사는 길다. 은나라의 유이민과 숙신, 북방의 맥·동호 등을 기반으로 형성돼 BC 7세기에는 발조선으로 춘주 5패국이나 전국 7웅국과 같은 제후국 형태로 유지됐다. BC 4세기께엔 보다 독립적인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연나라와의 대치했고 연의 공격으로 국력의 소모가 있었으며 BC 3세기 말에는 진(秦)나라와 화평을 유지하면서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것이다. 강국 고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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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드 13-04-25 23:11
   
숙신?
뭔 숙신입니까?
숙신은 만주족의 조상이에요!
한국인이 아닙니다!
한국인의 뿌리는 한강이남의 삼한인이 한국인의 뿌리입니다.
그 삼한에서 지금의 한국이라는 국명이 나온것이에요.

이제 편하게 글 좀 쓸께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글쓴이을 향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과 고구려가 한강이남의 삼한사람과 언제 한번 합쳐서 살아봤나?

5세기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쫒겨서 충청도 웅진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만주계 백제인이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온 역사가 없어!
그들이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오기전인 4세기까지는 충청도 이남으로 일본계 장구형묘(왕묘)가 성행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것이 일본계 왕묘라고해서 한낱 장삿꾼의 묘로 호도를 하지 않나?
뭔 노무 장삿꾼이 지배자의 묘를 쓴다냐?
그 시대에 뭔노무 화패가 있어서 재벌이 있었다냐?
그럼 4세기까지 마한의 각지역을 다스리던 왕의 묘는 어디가고 장삿꾼의 묘만 남았다냐?

웃기고들 있어!
그것은 마한땅에 살던 조상의 왕묘야!

마구잡이 반일사상이 조상도 못알아보는 세상이 되었네!
쯧쯧.

나는 일본(왜) 역시 한반도를 뿌리로 한, 한반도에서 치열하게 경쟁한 백제나 신라와 같은 뿌리라고 본다.

그리고 백제는 웅진으로 내려오기 전인 아신왕 6년(396년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냄) 이후로 마지막 왕자인 풍왕자까지 일본에 태자를 볼보로 보냈다.

볼모가 아니고 왜국을 다스리려 갔다고?
쯧쯧.

역사상 어느 나라에서 왕자가 죽을 줄 모르고 그 나라의 왕이 버젓이 있는데 무방비 상태로 다스리러 가나?
장군은 뭐하고? 무방비상태의 왕자가 왜 가는데?

마지막 왕자(태자)인 풍왕자는 그가 다시 백제로 돌아와 복신과 함께 백제 재건운동을 하기 전까지 일본 삼륜산에서 벌이나 치고 조용히 살았다고 하더라.

이것이 볼보냐?
아니면 왜국을 다스리러 간 지배자의 모습이냐?


그리고 또 한가지는 신라 역시 일본에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는 것이야!

내물왕때 실성이 광개토대왕의 볼모로 끌려가고

실성왕때 내물왕의 차남은 고구려 장수왕에게 볼모로 끌려가고
            내물왕의 삼남은 왜국으로 볼모로 끌려갔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신라로 5만군사를 돌리기 6년전인 광개토대왕 원년에 이미 일본 왜군과의 해상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빈번하게 한반도 역사에 등장하는 왜군은, 도대체 어느 지역에서 출발해서 한반도를 종횡무진 활동한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한반도에 그들의 세력, 즉 본거지가 엄연히 존재했었다는 얘기다.
여기서 임나일본부의 실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스스로 유추해 보기 바란다.

백제를 지원하는 왜의 침략으로 신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였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5만의 지원군으로 참가한 이 전쟁은 사실상 동북아의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왜는 잠시 물러났지만, 신라로부터 왕자를 인질로 삼았다.

다시 말해서 백제와 신라의 전쟁에서 고구려와 왜의 지원으로 국제전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고구려와 왜가 각각 신라로부터 인질을 데려간 막상막하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백제가 왜의 상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묻겠다.
왜? 이 전쟁에서 고구려와 왜는 각각 신라의 왕자를 인질로 데려갔는데 백제는 그러지 못했을까?
백제가 일본 왜의 종주국이었다면, 백제의 수도로 인질을 데려가야 않하나?
그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왜 조선 전기의 역사서인 동국통감에서 조차, 이런 사실을 전해야만 했을까?

왜? 백제와 신라는 일본에 왕자를 인질로 보냈는데, 왜? 우리가 서술한 우리 역사서에서 조차 그 반대의 경우는 기술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중국의 역사서나 문집서에서 조차 백제와 신라는 왜의 속국이라고 기록했을까?

왜? 왜는 일방적으로 한반도에서 종횡무진 활동하며 백제나 신라로부터 왕자를 볼모로 데려갔을까?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韓민족의 이야기를 하면서 샛길로 새버린 느낌이지만

만주계의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쫓기어 충청이남지역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이곳 지역에 일본식 왕묘가 존재했었다는 얘기다.

이들이 바로 삼한의 마한사람이며 변한사람이며 진한사람이다.

역사 이래 한강이남에 머물며, 일본과 관계를 주고 받았던 이들이야말로 진짜 韓國人이다.

그리고 역사 이래로 한강이북의 고조선인이나 고구려인과 이들은 합쳐서 살아본 기록이 없다.


신라가 한강이남의 세력을 통일하고 대동강까지 진출한 것이 통일신라 300여년의 일이다.

그리고 고려의 왕건이 대동강을 넘어 평양에 입성한 이후 평안남도를 지배한 것이 고려 500년여년의 일이다.

그리고 조선의 세종. 세조시대에 평양을 넘어 평안북도 압록강과 함경남북도의 두만강에 이른 것이 조선 500여년의 일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조선왕조의 이성계에 대한 언급이다.

그는 과연 고려인이었을까?
아니면 한강이남의 삼한사람들이 역사상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두만경변의 회령 만주족이었을까?

왜 전주이씨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그들의 근거지인 회령에 집착했을까?
그리고 왜 조선왕조실록에는 전라도에 대한 험담이 많은 것일까?

세종대왕 스스로도 전라도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던데...

왜 그들은 전주이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것 역시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내주변에 살고 있는 100여년전에 만주로 건너간 조족이 우리의 동족이고

탈북자가 우리의 동족이고 그리고 동남아 어딘가에서 시집와 애를 낳고 사는 그녀들이 동족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들아.
동족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상고시대에서 찿지 마라.

조선전기에 왕의 명으로 기록한 동국통감에서도 고조선에서 삼한시대의 일은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외기로 따로 분류하였다.

상고시대의 엉터리 족보를 들여대기에 앞서서, 내 주변의 동족부터 생각해 봐라.
 
그리고 분명하게 말하지만 몽고의 에벤키족과 현재 한국인의 언어와 풍습이 비슷하다는 얘기는, 상고시대의 에벤키족과 한국인은 같은 뿌리라는 얘기가 아니라 고려말 몽고침략기 100여년에 몽고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에벤키족의 영향으로 몽고에 남아 있는 에벤키족과 그 언어와 풍습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유전학적으로 한반도(한강이남)의 순수 韓國人을 가장 변화시킨 사건은(마치 야요이인의 일본침략처럼) 고려말 몽고침략기 100여년의 일이다.

이때 상당수의 몽고인과 서역의 위구르인 그리고 특히 북중국의 유목민집단이 대량 이주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주한 미8군처럼 한반도에 이주한 몽고인 가운데 에벤키족의 이주가 두드러졌다는 얘기다.
     
그리고 동북공정?

동북공정의 시작은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이 깊다.
이미 김일성시대에 이 문제는 제기 된 적이 있다.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조선족 자치지역을 넘겨달라고 했는데, 이것이 중국으로 거부된 이후 김일성은 반중친러 성향으로 돌아섰다고 하더라.

이렇듯 동북공정은 언제든 중국과 한반도의 불씨가 될 수있는 조선족 자치지역을 미연에 방비하고자 하는 계략에서 나왔다고 한다. 

북한이 약해지면 북한을 무력점령한다느니하는 허무맹랑한 말은 그만 두기 바란다.
조선전기이래 600여년을 다스린 압록강변과 두만강변을 요즘 시대에 누가 무력으로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명나라도 청나라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리고 만약에 중국군이 북한에 진군한다면, 그동안 주체사상에 가려서 잠들어 있던 참 민족주의가 그곳에도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고 남한과 미국등이 후방에서 지원하면 중국은 스스로 고립되고 분열할 것이다.
중국이 바보인가?
러시아는 그것을 용납하겠고?

그리고 중국의 자본 진출에 놀라지 마라.
저 정권은 누군가가 찢어 놓아야 한다.
그것이 중국의 사명이다.
일단 저 정권이 찢어지고, 중국자본이 들어가 간다면
남한의 자본과 미국. 일본등의 서방자본이 가만히 있겠는가?

기다리면 열릴것이다.
조급해 하지 말아라.
사이비 민족주의 종북들아.

그리고 고조선이 우리민족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면, 고구려 발해 여진 거란 등 만주를 활동무대로 했던 민족은 우리와 같은 뿌리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유전학적인 것과는 별개로...
그러나 이미 고려말기 몽고침략기 100여년에 유전학적인 문제도 세탁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한 민족의 역사도 인생처럼 세옹지마일세!

읽어주신분께  감사드림.
하하하
     
아뒤도업네 13-04-26 00:13
   
이 사이트에 대책없는 민족주의자들 답 없지만 너같은 놈도 답 없는 건 마찬가지일세.

어그로인 거 알지만 몇몇부분 좀 덮썩 물어줄께.

주구묘로 계속 뭐라 떠드는데 주구묘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떡밥이야.;;
1996년 이후 마한 지방(전남 영광 군동리, 충남 보령 관창리)에서 일본보다 최소 한 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주구묘가 대량으로 나왔는데? 이것 때문에 한 때 일본에서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덤문제는 현재 한- 일 양국간 엄청나게 조심스럽게 다뤄지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확실히 확언된 건 아무것도 없어. 이 부분에서는 글 좀 가져올께

[일본이 주장하는 건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 상에서 4세기 후반에 설치된 기구이고 4세기 후반을 묘사한 호태왕비 해석 문제도 이와 얽혀 있는데, 장고형 무덤의 등장은 이보다 1세기 가량이 늦다. 특히 5세기에는 백제와 일본의 유대 관계가 상당히 끈끈했던 때라 백제를 무시하고 전남 지역에 일본이 진출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설령 백제의 약화를 노려 야금야금 한반도에 진출한 것이라고 해도, 6세기 초반에는 왜 사라졌는지도 의문이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은커녕 관계가 좋았음을 암시하는 기록만 있으니 '백제의 일본 구축'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크다.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상황.]


그리고 중국역사서 언급 하는데 이거 당시의 언론플레이인걸로 알고 있잖아.
 당시 백제가 받았던 진동대장군이라는 작위가 일본이 받았던 안동대장군보다 두 단계 높은 직위였는데고 그리고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높은 정동대장군 직위;;;,
진덕여왕이 '신라낙랑군왕'이란 직책을 받았는데 낙랑이 신라시대 어디의 지명일까? 진덕여왕시절에는 통일도 안됬는데? 중국사서에서 이런 명예직 상당하다.


그리고 혈통물갈이니 뭐니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보다 몽골한테 '갈렸던' 여진족은 어떻게 근-현대 까지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계승될 수 있을까? 당시 고려 인구가 200~300만은 넘는데 그럼 그 수백만 이 싹 다 죽고 강간당했냐?
          
그렌드 13-04-26 01:19
   
996년 이후 마한 지방(전남 영광 군동리, 충남 보령 관창리)에서 일본보다 최소 한 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주구묘가 대량으로 나왔는데? 이것 때문에 한 때 일본에서 난리도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장구묘에 관한 역사스페셜이라도 봤던 사람이면 이런 엉터리 글을 쓸까?
한국의 것이 일본천황묘보다 시기도 늦고 규모도 작다보니 지금 그 묘의 주인을 장삿꾼의묘이니 용병의 묘이니 하면서 여기서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것인데
한국이 기대하는 것은 위례성쪽에서 최소한 시기라도 빠른 것이 나왔으면 하는 것인데 그것이 매번 헛탕인것도 모르나?
쯧쯧

[일본이 주장하는 건 임나일본부는 일본서기 상에서 4세기 후반에 설치된 기구이고 4세기 후반을 묘사한 호태왕비 해석 문제도 이와 얽혀 있는데, 장고형 무덤의 등장은 이보다 1세기 가량이 늦다. 특히 5세기에는 백제와 일본의 유대 관계가 상당히 끈끈했던 때라 백제를 무시하고 전남 지역에 일본이 진출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게다가 설령 백제의 약화를 노려 야금야금 한반도에 진출한 것이라고 해도, 6세기 초반에는 왜 사라졌는지도 의문이다..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군사적 충돌은커녕 관계가 좋았음을 암시하는 기록만 있으니 '백제의 일본 구축'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크다. 말 그대로 혼란스러운 상황.]

역사서의 기본적인 앞뒤 순서도 모르는 인간일세
스스로 당신글을 잘 읽어보슈.

그리고 중국역사서 언급 하는데 이거 당시의 언론플레이인걸로 알고 있잖아.
 당시 백제가 받았던 진동대장군이라는 작위가 일본이 받았던 안동대장군보다 두 단계 높은 직위였는데고 그리고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높은 정동대장군 직위;;;,
진덕여왕이 '신라낙랑군왕'이란 직책을 받았는데 낙랑이 신라시대 어디의 지명일까? 진덕여왕시절에는 통일도 안됬는데? 중국사서에서 이런 명예직 상당하다.

어느 역사서를 참고 했나?
쯧쯧

그리고 혈통물갈이니 뭐니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보다 몽골한테 '갈렸던' 여진족은 어떻게 근-현대 까지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가지고 계승될 수 있을까? 당시 고려 인구가 200~300만은 넘는데 그럼 그 수백만 이 싹 다 죽고 강간당했냐?

몽고군이 고려를 침략할때 가장 많이 끌고온 집단이 옛 금나라의 여진족인것을 아나?
그리고 그들이 몽고세력 이후에도 만주에서 살아 남아서 만주족이지
만주족에 뭔 의미가 있것나?
누르하치도 지 스스로 몽고의 유민이라고 않했나?
만주족은 뭔 노무 만주족이여?
유전학상으로 만주족을 어떻게 정의할것인데?
그리고 만주족이 단일민족이야?
쯧쯧

그리고
이 양반 웃긴 사람일세
누가 다 강간을 당해?
쯧쯧

어그로?
내글이 그렇게 보였나?
하하하
역사의 가장 기초적인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쯧쯧

그냥
뒤죽박죽
당신이 믿고 싶은대로 믿게
어짜피 역사라는 것이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명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과거나 미래는 아닐테니깐.
미래는 미래 사람들의 몫
과거는 과거 사람들의 침묵일뿐
               
꼬퉁퉁이 13-04-26 07:37
   
저 꼬투리 잡고 싶은건 아니지만 고조선 멸망하고 많은 고조선 세력들이 한반도 남쪽으로 남하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 북방민족만의 유물이 출토되는가 하면 부여고분과 똑같이 생긴 가야고분이 나오기도 했었구요.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면서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왜 이제와서 고조선과 고구려 같은 북방국가를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어기 안통했다구요? 중국은 더 심했습니다. 요즘에 와서도 서로 대화가 안되는 중국인들도 있어요.
어차피 고조선 멸망 이후로 고구려가 세워지고 고구려에서 백제가 나오면서 이미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하나의 뿌리가 된것입니다. 단일민족 단일민족 하면서 어느 하나의 지역만을 고집하는게 오히려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13-04-26 11:37
   
그렌트인지 당신이 구체적인 근거내용도 없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모습 잘보았소,,
다른건 다 집어치우고 당신이 왜놈들이 백제,신라,가 왜의 속국이라고 말하는 주된근거가 전방후원분이 우리나라 남쪽 여기저기에서 발굴되는 이유가 가장큰 근거인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일본에 최초로 발견된 전방후원분이 일본에서 발견됐으니 우리나라에 있는 전방후원분이 왜놈들꺼라는 논리인데,,
천만에 말씀 전방후원분은 만주까지도 골고루 퍼져있고 왜놈왕 전방후원분보다 무려 연도가 500년가까이 앞서있는게 허다하고 처음 일본 전방후원분은 방자형이였으나 고분을정토하며 전방후원분으로 만들었다는걸 일본측 자료에서 확인된거요 전방후원분이 물고기형태라는건 아시겠죠?  최초의 왜놈고분은 항아리 형태였소 하다못해 구글에 검색이라도 해보시요,,
그리고 달랑 사서한줄로 백제와 신라가 왜의 속국?
그럼 현재중공이라는 국가이전에 그땅에 존재했던 수많은 종족들의 사서에 기록된 우리의 기록은 개무시하고?

말을하자니 한도 끝도 없는것 같고 내가볼때 정상적인 한국인은 아닌것 같은데
네가 존중받으려면 상대방에게 예를 를 갖추기 바랍니다,,
주제넘게 남의 민족정체성을 왈가왈부하지말고 우리민족이 그렇게 호락호락
말장난에 당할것 같소?  가소로운자이구만,,ㅎㅎ
          
그렌드 13-04-26 16:15
   
이 양반아
이넘 저넘이 근거없이 써내린 역사소설을 읽지 말고
조선왕조가 중앙차원에서 써내린 동국통감을 참고해 봐.
뭔 노무 무덤타령이여?

지금 내가 무덤타령을 했나?
내글도 잘 않읽었구만.
그리고 그런 장구묘는 만주는 물론이고 한강이북에는 없다.

내말이 의심스러우면
고두심이 나오는 장구묘에 관한 역사 스페셜이라도 봐라.
고두심이 어거지로 갖다붙인 장구모양의 아궁이는 있어도 한강이북에 그런 묘는 없다고 나온다.

한국인이고 외국인이고 간에
기본적으로 가치관이 정상적이면 그런 동영상은 그냥 보다가 창피해서 도중에 끄는 것이 정상이다. 
 
얼마전 위례성쪽을 기대하고 파봤는데
보리 개떡하고 엿만 나왔다더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런거 한강이북에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장구묘의 주인들이 한강이북을 넘어 간 기억도 없고
한강이북의 사람들이 한강이남으로 넘어 온 기억도 없으니깐
적어도 국가가 형성되던 시기인 장구묘 건설시기 이후로 말야.
그때부터는 함부로 오가도 못했어.

여기서 역사게시판에 댓글질하는 양반들은
백제만 알지 그 많은 마한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고 싶지 않는 모양들이네.
쯧쯧

장구묘는 한강이남세력 또는 열도이주세력이 만든것인데
아직까지는 열도세력이 건설한 것이 한강이남세력이 건설한 것보다 규모도 크고 시기도 빠르다.

반일을 외치는 한국입장에서 
그것이 문제야.
오로지 경쟁을 해야 하는데 이러다간 물리게 생겼거든

내말이 않믿기면
천안함사건에서 뻘파고 돌아 다닌 민주당 뭔 국회의원처럼
한강이북의 묘라는 묘는 다 파보던가?
파다보면 나오것지
장구형 아궁이라도 말야
쯧쯧

한강 이북에서 찿으면 연락하게
그럼 학실히 니들이 좋아라 하는 만주계 왕묘이고
건설 시기도 빠를 테니깐

하하하

 
 

학생 말마따나 세뇌가 된 종북하고 나하고 백날 얘기해 봐야 끝도 없는 얘기니...
스스로 공부하게나.
종북은 그냥 비유이고 학생이 종북이라는 얘기는 아닐세.

여기 양심적으로 역사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한마디 해주소.
외국서 공부하고 한국서 일자리 챙기려 억소리 나는 창작역사소설을 쓰는 학생들은 말고...
하기야 한국에 뭔 역사 자료가 있간?

조 아래 굿잡스봐라.
또 소설 한뭉치 검색해서 나타나셨네.

이 양반은 매일 여기서 죽치고 살다가
전에 나한테 한마디 쳐먹고 또 나댄다.
쯧쯧.

기본만 대답해.
쓸데없이 마늘먹고 용꿈 꾼 단군신화소설쓰지 말고...
쯧쯧
               
아직도 13-04-26 19:37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과 고구려가 한강이남의 삼한사람과 언제 한번 합쳐서 살아봤나?

5세기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쫒겨서 충청도 웅진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만주계 백제인이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온 역사가 없어!
그들이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오기전인 4세기까지는 충청도 이남으로 일본계 장구형묘(왕묘)가 성행하고 있었어!
-----------------------------------------------------

그렌트선생 업무중에 잠깐 들어와서 뜸금없는 댓글을 싸지르고 갔더군요
당신이 써논 일본계 장구형무덤이 이라고 해서 댓글을 달았는데
당신 장구형 무덤의 정의나 아시요?
나도 배우는 입장이라 내주장만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한가지는 알아두시요
방대형분, 원형분, 사다리꼴고분, 장고형고분,등등의 시대에따라 조금씩 변화되는
형태의 고분들의 패턴속에  전방후원분(일본)도 생겨난거고 여러형태의 고분들이 분화되는 겁니다
그럼 이런 고분들이 어느날 갑자기 생겨난거냐?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이 위에 말하는 장고형고분도 변화되는 비슷한 고분중에 한형태로 전방후원분이 후기 일본형고분의 형태라 이겁니다,,
그럼 이걸 누가 만들었느냐
내가 누가 만들었다하면 또 잡설이 생겨날테니
학회지에 발표된 각지역 고고학 발굴현장의 무덤형태
일본서기,삼국유사,삼국사기,조선왕조실록,등등의 사서및 사료적교차검증
발표논문들도 읽어보십시요,,
딱 단정지어서 숙신,선조선,부여,고구려는 백제,신라,왜와
아무관련없다 단정 짓는 겁니까?
그런 극단적적이고 아집에 똘똘뭉친 자칭 고대사를 연구했다는 사람에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만,,
저도 틈틈히 사서연표와 고사기,일본서기,등등을 비교해보시는분들의 교차검증에
탄복도하고 미쳐 생각못했던 가르침이나 깨닮음도 느끼고 배웁니다만,,
대단하십니다,,
제가 학생들이나 교수분들이 교차검증하고 발굴현장의 자료비교 목록들과
서로 논의하는 싸이트를 가르켜 드리고 본인 생각과 어떤 모순점과
차이가 있는걸까 한번 비교해 보시라고
알려드리고 싶어도 이거야원 아집이 하늘을 찌르니,,ㅎㅎ
     
굿잡스 13-04-26 14:36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고조선과 고구려가 한강이남의 삼한사람과 언제 한번 합쳐서 살아봤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뭔 초딩 국사도 안배운 화교인감?? 아님 번역기 돌리는 왜인부대 소속임? ㅋㅋ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시조혁거세거서간)

"(고)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다"


(고구려 본기 제 5 동천왕 21년)

"평양이라는 곳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누군가는 왕의 도읍을 왕검이라 한다."
 
 
삼국사기 박혁거세 신화


사기 혁거세전기에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
 
 
시조의 성은 박씨, 휘는 혁거세다.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갑자, 4월 병진[혹은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왕호를 거서간이라 하였다. 그때 나이 13세였고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유민>이 산곡간에 나누어 살며 여섯 촌을 이루었다. 첫째가 알천 양산촌, 둘째가 돌산 고허촌, 셋째가 취산 진지촌[혹은 간진촌], 넷째가 무산 대수촌, 다섯째가 금산 가리촌, 여섯째가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들이 진한육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어느 날) 양산기슭 나정 옆의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어 가서 보니 홀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만 있었다. 알을 깨니 어린아이 하나가 나왔다. 거두어 길렀더니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빼어나게 숙성하였다. 六部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이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인들은 ‘호(瓠)’를 일러 ‘박(朴)’이라 했는데 처음에 (났을 때의) 큰 알이 박[瓠] 같다 하여 ‘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어로 왕을 이른다[혹은 귀인의 칭호라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굿잡스 13-04-26 14:43
   
그리고 고조선 준왕이 기존 고조선 세력권에 있던 남부로 내려가 한왕 어쩌고 하던

기록들은 뻘글들임???

유물 유적으로 이미 한반도 남부 저 멀리 제주도 까지 고조선계 문화들이 나오구만

뭔 헛소리임.
          
그렌드 13-04-26 16:23
   
네 굿잡스님

마늘 먹고 용꿈 꾼 아기 곰얘기
잘 들었읍니다.

혹시 굿잡스님
인터넷 검색으로 역사소설을 쓰는 마늘형 소설가?
               
굿잡스 13-04-26 21:46
   
헛소리 꼴통짓은 본인 국적 나라 사이트에 일기장에나 적기 바람.
               
81mOP 13-04-30 16:37
   
역시......

뭔 장황하게 쓰길래 봤더니....
     
굿잡스 13-04-26 14:48
   
5세기 백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쫒겨서 충청도 웅진으로 내려오기 전까지는 만주계 백제인이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내려온 역사가 없어!
그들이 충청도 이남으로 내려오기전인 4세기까지는 충청도 이남으로 일본계 장구형묘(왕묘)가 성행하고 있었어!

그런데 이것이 일본계 왕묘라고해서 한낱 장삿꾼의 묘로 호도를 하지 않나?
뭔 노무 장삿꾼이 지배자의 묘를 쓴다냐?
그 시대에 뭔노무 화패가 있어서 재벌이 있었다냐?
그럼 4세기까지 마한의 각지역을 다스리던 왕의 묘는 어디가고 장삿꾼의 묘만 남았다냐?

웃기고들 있어!
그것은 마한땅에 살던 조상의 왕묘야!

마구잡이 반일사상이 조상도 못알아보는 세상이 되었네!
쯧쯧.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 횡설 수설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참

이미 왜 학자 岡內三眞가  우리나라  현지조사 보고서를 통해 뽀록나면
 
서 울고 갔다는 후문이(역시나 본토에는 안돼..) 난게 언제인데 ㅋㅋㅋ
 
 이 양반의 논문을 보면 기본적으로 영산강 일대의 전방후원분을 잽 모델과
 
비슷하나  즙석이나 단축 등이 없고 부장품에서도 백제 이외의 제품으로 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하니와[埴輪]( 열도 고분시대(250경~500경에 무덤 위
 
와 주위에 놓아둔 토용(土俑)에 있어서도 형태는 비슷하나 구체적인 제작기
 
법에서는 재지 토기제작기법이 적용된 점 등으로 보아 백제 서남부 지역의
 
재지수장들이 왜와의 교류를 심화하는 가운데 그들 스스로 수장묘로서 조영
 
한 것으로 보고 있고 이들은 6세기까지는 아직 백제의 완전한 세력 아래에
 
놓여 있지 않았으며, 백제, 가야, 왜 사이에서 등거리 관계를 유지하
 
면서 때로는 백제, 때로는 왜의 세력을 이용하였을 것이라고 말함.
 
 
그럼 원형적 측면에서 어디쪽 고분이 연대가 더 앞서느냐?(아직 기원에 대
 
해 완전한 도출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힌 상태임)
 
전방후원분의 기원이 되는 고분으로는 대체로  전방후방무덤, 쌍방 중원무
 
덤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전방후방분과 전방후원분은 고구려에서  이미 기원
 
1세기에 발견 됨.(고구려의 전방후원분은 자강도 송암리 무덤떼외에
 
도 송암리 무덤떼, 압록강과 장자강근처 무덤떼에서도 발견)


 열도의 전방후원분은 큐슈지방에도 있지만 주로 깅끼지방(우리나라 지방
 
사투리로 금줄을 ‘깅기줄(깅깃줄, 깅끼줄)로 표현됨) 에 소위 똘기들이
 
그나마 위안을 가진다는  야마도 지방을 중심으로 동서로 퍼져 있는데 초기
 
전방후원분(3세기말)의 크기는 5세기에 등장하는 인덕릉이나 응신릉 같은
 
거대고분이 아니고  그리고 5세기 거대 전방후원분이 전방을 인공적으로 만
 
든 것에 비한다면 초기 전방후원분은 높은 경사면에서 봉분은 짓고 마당형
 
식으로 앞을 깍은 것이 유래가 되어 전방후원분이 된 것으로 공주 우금리에
 
서도 보이는 바이며 앞서 언급한 거대 하니와 같은 경우에도 그 기원설을 한
 
반도로 보기 때문에 전방후원분이 한반도 즉, 고구려나 백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 졌다는 가능성은 더욱 큰 것으로 보고 있음.
 
 
따라서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 있다 하여 그것을 임나일본부설과 관련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임.
 
그리고 야마도 지역 유적을 보면 일본에서 기내 야마도 지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마련된 것은 그나마 기원 7세기에 이르러서 임.

일본서기 초대 천황인 신무천황기에 사도 장군을 보내어 일본 전국을 통일
 
하였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없지만 유적을 봐도 작게는 10군데가 넘는 무덤
 
떼, 크게는 3곳 혹은 4곳으로 나뉘어져 있는 거대 고분떼의 분포로 보아서
 
도 7세기 이전에는 야마도 정권이 한반도로 진출할 가능성은 희박함.

 7세기나 6세기 이전 야마토정부는 기내지방의 소국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부
 
전범 잽 황국사관에 물든 정신병자  똘끼 학자들은 야마도정부의 힘을 과대
 
평가한 나머지 야마토정부의 열도통일을 이른시기에 보려고 노력하지만 송서등의 기록을 봐도 당시 이곳은 여러 소국들의 연합체에 불과.

 
한마디로 전범 잽 똘끼 극우들 이미 박살난 임라 일본부설 근거로 지금도 똘끼 판타지 역사 가르치고 있는
 
교과서의 근거랍시고 하는 전방후원고분은 이런 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걸 끌고 와서

캐소리할 듣어 줄만큼 울 나라 사이트가 만만한줄 아시남? ㅋㅋ
     
굿잡스 13-04-26 14:50
   
그리고 그렌드 저 무식한 양반은 무슨 가야왜나 이후 백제휘아의 왜에 대한

주변 역사적 지식없이 왜 킹왕짱 헛소리질 열심히네 ㅋㅋ.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것 없이 어디서 주워들은 대뇌망상으로 혼자 광난증세하면 ㅋㅋ


무식한 잽극우들 대뇌망상질 자위스토리 집약해서 올려놓았네 ㅋㅋ
          
그렌드 13-04-26 16:44
   
하하하

이 양반아
검색질을 하려면 똑똑히 해
영산강 장구묘에서 나온 유물이 백제계 유뮬이야?
일본계 유뮬이 아니고?
내가 말해서 뭐하것나?
고두심이 나오는 장구묘에 관한 역사스페셜을 찿아보게
그것이 초딩이 공부하기에는 딱 일테니깐
쉽잖아?
고두심 찿아보게
그리고 뭔 말을 하나 잘 들어보게

그리고 일본의 국가형성시기가 7세기여?
이양반이 실성을 했구만.
그래서 검색질도 잘해야 한다고 않했나?
일본의 국가 형성시기는 2-3세기여
백여개국이 이미 존속하고 있었고
각자 중국에 조공을 하고 있었어
그런 것들이 한 30개국으로 연합하면서
지금의 일본이 형성된거여

그 시기에는 한반도도 그런 소국들이 천지였고
그 소국들과 일본의 소국들은 이러 저러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거여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이 강화되면서
일본과 우호를 맺고 태자를 인질로 보낸 것이고
왜?
장수왕에게 깨지고 웅진으로 와서
왜 왕들마다 죄다 나가 죽었는 줄 아나?
사실 그쪽 지역은 완전한 백제의 세력권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왕들마다 제명에 못살고 다 나가 죽은거여
그래서 사비로 천도를 한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마지막 마한세력에 대한 복속과정이 진행됐던 것이야
그런 마한세력이 만든 묘가 당신과 내가 언급한 장구형묘여.
이것이 장구묘의 진실이여.

굿잡스님
마늘형 소설쓰는데 참고 하기 바람.
               
굿잡스 13-04-26 16:55
   
그렌드 이양반은 무슨 번역기 돌리남?? ㅋㅋ

버젓히 전방후원 무덤에 대한 여러 논문 내용 올려줘도 엉뚱한 헛소리 쳐하는 ㅋㅋ

쯧.

그냥 방숭국 나라에서 맞는 2초이 유형끼리 무식한 자위 삽질이나 쳐하지 뭐하려

남의 나라 사이트에서 말귀도 못알아 들으면서 헛소리질 하남? ㅋㅋ
     
StarName 13-04-28 05:03
   
일본 날조 역사교과서보고 감명받은사람 여기있네 ㅎㅎ
혹시 꿈이 망상가??
치우천황 13-04-25 23:25
   
잘났어요
틸크 13-04-26 00:13
   
글 맞춤법 많이 틀리셨네요~~
고프다 13-04-27 00:51
   
쯧쯧 댓글에 역겔 일뽕 한마리 기어들어왔구만.

캬~~ 주모 거 일뽕 한사발 가져오소~~일뽕 한사발 쭈욱 들이키니 세상 스시녀가 다 내것 같구나아~~

ㅅㅂ 븅신들 쯧쯧..
그렌드 13-04-27 17:10
   
이주노동자와 역사교육

여기서 이주자노동자들을 까는 사람들은 도대체 직업이 뭐 길래 이리도 야박하게 그러실까?
적어도 동생이나 형이나 누나나 그 형제들이 이국 멀리 외국에서 산다면 이러지는 않을텐데...

개구리 올챙이 쩍 시절을 모른다더니..
이런 글을 보면 가본 기억도 없는 저 2ch의 번역글이나 다름없다고 생각이 되는데...

내가 댓글질할때마다 하는 말이 있잖수?
알지도 못하는 원시 조상을 찿지 말고
내주변에 사는 탈북자나 조족이라고 하는 100여년전 新만주족을 둘러보라고!

여기 역사게시판의 댓글질을 보면 만주족을 어지간히 좋아들하더만...
역사교육이 가장 시류에 영합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모르나?

왜 한국역사교육에서 야만족의 땅인 만주를 이상향으로 생각할까?
이유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주인이 사라진 텅빈 만주...
만약 조선을 처절하게 짓밟았던 청의 후신인 만주국이 현재도 존재한다면
과연 이 나라의 역사교육은 또 다시 어느 방향으로 뛌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하다.

약한 나라에서 사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것나?
강대국에 의해서 독립을 쟁취했으나 강대국은 강대국대로 따로국밥이요
그동안 빌빌대며 살던 자들은 스스로 용비어천가를 지어대며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 권력투쟁질이나 해대고
결국은 이런 시뻘것들과 시퍼런것들이 6.25을 일으키지 않았나?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뒤에 남북은 분단되고
모든 것이 부서진 공허한 세상에서
그나마 이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이나라 나름대로의 정신교육이 있어서이겠지.

그것에 중추적인 담당은 역사교육이라는 가장 시류에 영합하는 개였으리라.
그런 이데오르기가 이제는 2ch 못지 않는 짐승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제는 똑바로 가르쳐야 한다.

여기 역사게시판을 보면
한국 이데오르기의 투쟁의 장과 같이 느껴진다.

무엇인가?
가짜에 홀린듯 진실은 없다.
미친듯이 자신이 배운 역사만을 선전한다.
결론은 한국이라는 나만 존재하는 천상천하무아독존의 세상이다.

도대체 이런 역사투쟁은 누구를 위한 역사투쟁인가?

요즘 안아무개씨가 국회의원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을 위한 정치입문인가?

세상을 개혁하려고?
아니면 스펙 좀 더 쌓고 싶어서?

안아무개씨
이명박씨가 평생 모은 재산 350억을 골고루 나눠줘서 공중분해하지 않았다고 비아냥거리더만...
안아무개씨는 골고루 나눠주고 공중분해하려나?
기대해도 될까?


야 임마이들아
니들을 위해서 엉터리 역사교육을 해야 하니?

남보고만 개혁하라고 하지 말고
이제는 입싼 니들부터 스스로 개혁 좀 혀라.

그리고 남북분단을 넘어서서
이제는 국제 글러벌시대로 진입했다.
남북분단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다문화가정도 그런 맥락에서 옳다고 생각한다.>>

나만 알던 텅빈 역사교육에서
나와 남이 더불어 사는 역사교육이 필요하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고대부터 많은 민족의 이동이 있었다.
만주족만이 우리가 용납할 수 있는 그런 집단이 아니다.
만주계 백제인이 아직 한강유역에 머무르고 있을때
한강이남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자리를 잡은 진짜 한반도의 주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교육은 그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주계 백제인이 장수왕에게 쫒기어 남하하기까지 그들은 장구형태의 왕묘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시류의 앞잡기인 역사교육이라는 멍멍이는
오로지 이데오르기적 경쟁만을 외치는 반일교육에 휩싸인체

그들의 왕묘가 왜의 왕묘와 동일하다고 해서
또는 그 부장품이 왜의 것과 동일하다고 해서
또는 그 곳에 잠든 시신의 DNA가 지금의 일본인과 동일하다고 해서
마한의 여러 왕묘들은 한낱 왜인 장삿꾼의 무덤으로 낙인찍은 체 오로지 그것을 위장할 방법만을 모색중이다.

만약 한강이북에서 이와같은 왕묘를 발견한다면 이들은 기뻐 외칠 것이다.
이 묘는 만주에서 시작된 고조선의 왕묘라고...
그래서 우리는 역사 한일전에서 승리했노라고...!!!
 
그러나 만약 그 왕묘에서 똑같은 DNA가 발견된다면 무엇이라 둘러댈 것인가?
그때서야 한강이남의 고대 왕묘는 한국인이었다고 말 할 것인가?

왜?
한국인은 신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의 DNA가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왜 지금의 한국인과 그들의 DNA가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쯧쯧.
     
81mOP 13-04-30 16:39
   
'여기서 이주자노동자들을 까는 사람들은 도대체 직업이 뭐 길래 이리도 야박하게 그러실까? '
---------------------------------------------------------------------------------------------------------------------------------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도 직업이 뭔지 필요한가?

역시 먼가 잼있는 분이었군요.ㅋㅋㅋㅋㅋㅋㅋ
StarName 13-04-28 05:06
   
일본의 날조 역사교과서에 매료된 매국노 하나 추가요

그렌드 이넘은 일본의 세뇌로 인해 더이상 다른말은 들리지않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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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8 [기타] 중국 공산당이 밝힌 한민족의 진짜 영토!! (10) 유리수에요 04-16 7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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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2 [기타] 중국, '축구공한증' 말고 '전쟁공한증'… (14) 두부국 02-27 7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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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0 [기타] 1명 국적주니 친척 16명이 딸려와..한국녀는 그들 수… (42) 슈퍼파리약 01-23 7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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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8 [한국사] 우리나라 시대별 갑옷 (5) 고이왕 11-19 7187
18937 러시아사학자 한국 비난 (31) 깐따삐야 07-05 7186
18936 [중국] 중국의 식인문화의 진실 (인용) (16) 휘투라총통 03-20 7184
18935 [일본] 일본 아베총리는 조선인의 후손 (9) 츠나 05-09 7181
18934 [기타] 만주, 간도 그렇게 간단히 통일한국의 경제권이 될까 (2) 런던 08-07 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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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2 [한국사] (질문) 고구려 인구 (15) 여름좋아 03-28 7164
18931 화교 대청소 운동을 벌어야겠다. (3) ㅁㄴ 11-22 7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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