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검색질 댓글들 사양합니다. 머리에 있는걸로 대화를 나눴으면 하고,
저 역시 검색질 능력이 뛰어나 검색질러들이 말하려는거 대부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주세요.
검색질로 얻은 지식의 검증이나 습득 연구는 평상시 혼자 하세요.
면적당 인구 부양능력은 초기와 낙랑 대방 축출이후로 나눠야 하고,
국력 역시 나눠 고찰해야 하는건 기본입니다.
초기를 살펴 보자면 밭농사 곡류 품종은 부여에 준하는 것으로 오곡을 살펴보면
콩 보리 수수 피 깨가 있는데, 콩은 원산지 자체가 만주한반도 지역이고,
한반도에서 보리 경작시기 추정은 bc10경으로 꾀 오랜 기간 경작되어 왔으며
수수 피의 경우는 한반도 남부에서도 늦은 시기까지 주식으로 섭취했습니다.
이건 중국도 같습니다. 중국무협에서 쌀밥으로 끼니 떼우는거 구경하기 힘들죠.
수수 보리의 경우 부여 북쪽 실위까지 농작을 행했다고 합니다.
면적당 부양능력은 경작방법에 따라서 천차 만별이며 지력유지 측면까지 봐야 하지만,
비율로 치환 생각해 보면 쌀이 20 이면 보리는 13 현대적 경작기술일때 이야기 입니다.
대략 반입니다.
수도 벼의 경우는 밭과 물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경작지를 구축하는데 한계가 존재합니다. 즉 경작면적의 제한성이 있고, 두번째 시비법이 이뤄지지 못한 시기에 지력유지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쌀이 그만큼 에너지 효율이 좋은 작물인 만큼 그만한 영양분을 땅에서 흡수한다는 이야기고 에너지보존의 법칙이기도 하죠. 그리고 온도에 민감해서 아직까지 한반도는 연 1모작만 가능합니다.
더구나 병충해에 취약한 곡물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서 콩+보리 조합의 경우엔 연3모작도 가능합니다. 더구나 콩의 지력유지 능력이 발휘되어 경작 지속성이 뛰어 납니다.
한랭 건조 기후에도 적응능력이 뛰어나며 논보다 밭의 경우 확장성이 뛰어 나죠.
문제는 현대의 생각과 달리 한반도 남부까지 살았던 고대인들은 곡류보다 육류 섭취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치아가 더 건강했다고 하구요.
경작에 따른 인구 추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감을 잡았다면,
역사적으로 우리 삼국시대와 같은 중국 삼국의 인구 추정을 살펴보면,
2모작 가능한 오나라는 200만정도에 우리와 같은 단모작 지대인 위나라는 오나라의 두배에 이릅니다.
오는 대략 100만. 부정확 하지만, 대소 순서는 거의 이견이 없고, 위>오>촉 순입니다.
어라
착각하시는 분들중 상당수는 현대의 관념을 과거에 투영하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겁니다.
과거엔 개척할 땅이 부족한 시대가 아녔다는 것을 머리에 로드해 주세요.
바로 부족한건 경작할 노동력이 인구를 증가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뫼비우스같은 논리가 아니라 고구려 본래 노동력이 비교국보다 많았다면
노동력이 적지만 쌀을 두그릇 먹는 국가보다 칼로리로 환산 농작물 생산량이 더 많다는 겁니다.
고구려는 초기부더 잉여곡물을 축적 구휼하는 제도를 시행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쌀을 펑펑 생산하는 더운지방은 작물이나 사람에게
병이 만연할 가능성이 높기도 합니다.
낙랑 대방 축출한 뒤라면 인구와 생산능력은 기존보다 배 이상 증대되었다고 봐야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산성은 수십개에 이르고 내부에 10만이 사는 곳도 있으며,
산성곽 주변과 사이에 수 많은 촌락이 존재 했었습니다.
더구나 전쟁시 후방생산활동을 지속하는 정주민 패턴을 보입니다.
나라인구가 즉 군사력이란 등식은 반은 틀린 이야기 입니다.
장비가 좋고 인구가 펑펑 남아 돌며 온갖 병법을 미리 고안해 낸 뒤라도,
소수의 전투특화 민족에게 쓸리는 예는 허다 합니다.
아울러 일만이 모이면 두려울것 없다는 말갈의 세력을 복속시키고
수백년 억제하는 세력이 고구려 입니다.
고구려 시기에 후금이니 청나라니 요나라같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몽골이 존재 했나요? 이 유목제국들은 고구려 한참 뒤의 세력이고,
거란 말갈등은 고구려에 복속되 있던 세력이고
실위는 고구려에서 철을 훔쳐가는 좀도둑 였습니다.
동시대 유목국가중 초원지배자인 제국입네 하는 돌궐의 경우
거란말갈 관할권의 상충을 원인으로 카간 다음 서열2위의 샤드인 이계찰이
한판 신청하지만 오히려 고구려에 격파당합니다.
기록엔 일천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나오고,
실제 이후 고구려는 말갈은 물론 거란등에 영향력 유지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런 사실이 돌궐에 의해 전해져 동로마 역사에 편린으로
돌궐 동쪽에 모크리가 매일 전투력에 힘쓰며 투지가 높았다고 기록이 남겨있고.
비슷한 시기 돌궐보다 오히려 신라에 고구려는 10개의 성을 탈취당합니다.
초원의 거대 영토(환상에 잡혀있는 사람들 억수로 많습니다.) 제국보다 경상도와 전라도 연합팀에
한강유역을 경상도에 함남지역을 내놓게 됩니다.
일본풍 오덕식 지식 연마로는 깨우치기 힘든 것들이 많죠.
문제는 이런 오덕들은 고집이 쎄다는 점이고 자신들만의 환상을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