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1-01-09 20:06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들.
 글쓴이 : 만주족의 …
조회 : 6,124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들.

명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 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천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 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청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 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연당견문잡기 >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xx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가정대학살: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간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가정을유기사])

조주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명계남략])

각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순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연당견문잡록>)

순치2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순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뾰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한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xx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xx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청사고]),이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xx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xx했다.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필자가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이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만주족의 … 11-01-09 20:07
   
대고구려의 한 갈래인 만주족에게서

한족은 바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바퀴는곤충 11-01-09 21:03
   
한족이란 명나라가 위구르지역, 윈난성, 만주 에서 행한 학살은 모르나보군  청,몽고야 워낙쪽수가
작다보니 정벌과정에서 시범케이스를 보여야하는 절박함이라도 있지만  절대다수한족인
명,한  들이  유목민들 길들인다는 이유로 부락단위로 몰살하는건 물론    정기적으로 돌아가며
주변 소수민족들의 남자 5명중 1명을 죽였지...  물론 이런 폐습이 어케 유목민들 사이에서도
퍼지는 나쁜걸 배우기도 했지..
..
한족들의 잔학성은 재미,본보기로인한 살육이었담..  소수민족들의 한족에대한 저런행휘은
절대소수가 다수를 정복하기위한 어쩌면  필요악일수밖에..한족벌레야..
rina 11-01-09 23:23
   
진짜 한족은 저렇게 다스려야 답일듯..
dsa 11-01-12 00:33
   
금나라  청나라는  신라의 김함보에서 시작된  우리의 역사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19
3128 [북한] 북한 뭐하는걸까요? (6) 갈갈갈 06-10 3008
3127 [다문화] 다무놔가정 장애아 출산 확률이 무려 20% (3) 내셔널헬쓰 06-10 2346
3126 [기타] 내가 생각하는 세계10대 자뻑국가 (11) 리츠 06-10 3784
3125 [다문화] 다문화를 중단하라 (김규철 저서) (2) doysglmetp 06-10 2341
3124 [중국] 만리장성 조선족이 고려장성보고 만리장성이라고 구… (3) 냐옵니 06-09 2640
3123 [다문화] [펌]연봉 2500안 되면 외국노동자들 동정말길, 당신이 … (4) doysglmetp 06-09 3342
3122 [다문화] 다문화 대학 특혜? '역린(逆鱗)'을 건드린 대… (4) gagengi 06-09 2510
3121 [다문화] 이자스민, YTN 말고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도 '의대 … (12) doysglmetp 06-09 2586
3120 [일본] [관심좀!] 日 정부 "韓 위안부 기림비 빈 조약 위반 (13) doysglmetp 06-09 2538
3119 [다문화] 이번 파주 사건은 련변족의 청부살해다??? (1) 내셔널헬쓰 06-09 2192
3118 [다문화] 이제 본격적으로 교과서를 통해서 다인종혼혈화하려… (1) 내셔널헬쓰 06-09 1771
3117 [중국] 배고프면...다 먹어요. (2) 내셔널헬쓰 06-09 2116
3116 [중국] 설마이거..혹시...원피스 카피한건가??? (4) 삼촌왔따 06-09 2074
3115 [일본] [권혁태의 또 하나의 일본] 재일동포들은 수급자도 … (1) doysglmetp 06-09 2288
3114 [기타] . (6) 천하무적 06-09 438
3113 [다문화] .만취상태 중국동포에게 술 팔기 거부했더니 종업원 … (12) doysglmetp 06-08 2737
3112 [중국] 미녀가수 나나, 수차례 성폭행 후 건물서 추락 뇌사..… (9) 휘투라총통 06-08 3691
3111 [기타] (반크) 코리안 네트워크 2.5 (KOREAN NETWORK)|……― (3) doysglmetp 06-08 1932
3110 [다문화] [단독인터뷰] 이자스민, 학력의혹에 입열다 "부풀려… (9) doysglmetp 06-08 3460
3109 [일본] WHO, 일본發 '슈퍼임질' 전세계 확산 경고 (11) doysglmetp 06-08 2815
3108 [중국] 짱깨놈들 입으로 만리장성 두배확대ㅋㅋㅋ (8) 쏴로도라쏘… 06-07 3090
3107 [기타] [불체자문제] 불법 체류자 신고 요령과 확인 (2) 머리좋은놈 06-07 3073
3106 [일본] “일본은 원래 백제땅 일컫는 말이었다” (11) gagengi 06-07 3943
3105 [중국] 중국이 분쟁지역으로 몰고 가려고 하는 이어도 질문 … (4) 갤럭시T 06-07 2527
3104 [일본] 8체질과 일본인 체질의 상관관계. (14) 리츠 06-06 4030
3103 [중국] 몽골제국이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은 적당히 쪼개졌… (8) cordial 06-06 3088
3102 [북한] 종북주의와 햇볓정책~~~무서워여 @@ (19) 봉순경 06-05 4246
 <  621  622  623  624  625  626  627  628  629  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