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견(중국인민대학보편집부,북경100080)
요점 개요: 중국과 조선반도의 수 천년간의 교류중에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는데 그 연원은 까마득하다. 중국으로부터 조선반도로의 이민을 하게된 주요 원인은 살기 위해서(전란을 피한다거나 죄를짓고 피하기 위해서, 가문을 넖이기 위해서, 바다 건너가 살아보기 위해서), 정치적 원인(정치적 망명, 외교사절로 출국, 외교적 원인,정략 결혼, 일본 침략 원정), 경제적인 까닭(무역 장사), 어쩔수없는 우연(폭풍 표류) 등등이라 하겠다. 길고 오랜 기간을 지나 그들은 다달은 지역 사회에 점차 융화하면서 많은 역사적 흔적을 남겼다.
(관련 검색어; 중국; 조선반도;이민;역사;)
이민은 하나라.상나라.주나라때부터 시작하여 수천년간에 걸처 이루어젔기 그 수를 따질 수없다. (이민의 주요원인:위 중첩 생략). 아래에 역사적 시대 순으로 핵심적인 분석을 하고자 한다.
○公元前11世纪末-—公元前1世紀(箕氏朝鮮时期)(未完)
○公元前4世纪晚期至公元前3世纪早期(未完)
○秦汉时期(未完)
○魏晋南北朝时期(未完)
○隋唐时期(未完)
○宋元时期(未完)
○명청 시기 (一部 未完)
BC 1368년 명나라가 건국하다. 고려는 첫번째로 명과의 속국 관계가 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은 사절을
고려에 보내 전쟁 방지 목적으로 심양에 군민 4만여 호를 불러오게하였다.(고려사,136권)
<명사.태조기>에 홍무5년(1372년) 진우량의 아들 "진리" 와 명옥진의 아들 "명승"이 고려로
피신(이주)했다고 실려있다.
1373년 원나라 함초(화약) 거상 "이원"이 표류하다 예성강에 도착하여 조선의 유명한 군사 과학가
최무선에게 화약 제조 기술을 전수하였다.
명 홍무15년(1382년) 주원장이 운남을 정벌하자 원나라 종실 양왕의 가솔들이 제주로 피난하였다.
명 문연각학사 선윤지가 사신으로 고려에가서 보성에 머물러 보성선씨의 시조가 되다.
명 한림학사 호극기가 숭정16년(1643년) 답방 사신으로 고려에갔는데 다음해에 중주(명)의 멸망으로
한남에 은거하였다. 그 후세들이 파능을 본관으로 (가평호씨)시조로삼았다.
BC 1392년 이성계가 스스로 왕이되어 다음해에 국호를 조선으로하였고 1394년 한양(지금의 서울)
으로 천도하였다 조선왕조와 명나라는 사절의 왕래가 잦았으며 더불어 경.사.시문에 정통한
자들을 서로 교환하였다. 두 나라의 무역은 더욱 증가하였다.
○近现代(未完)
○성씨, 지명으로 보는 중국 이민
한국인 성씨 중 한자에서 비롯하지 않는 대부분의 성씨는 역사상의 중국 이주 성씨인데 귀화인이라 하기도하고 또는 투화인, 향화인 이라고도 한다. "향화인"이라 함은 옛날 중국인들이 표류(떠돌다) 우리땅에 당도한 원인으로 자국 백성이 된 자들을 이른다(숙종 실록,34권, 숙종26년). 조선 학자 이중환 저서에는 중원에서 와서 떠돌다 가문을 이룬 성씨로는 온양맹씨, 연안이씨, 여주이씨, 남양홍씨, 원주원씨, 해주오씨 의녕남씨, 거창신씨, 창원황씨들이라 했다. (<지리지> 총론에 이르길) 역사상 인구의 천사(이동)는 빈번했는데 혹은 전난을 피해(타피전란), 혹은 결혼으로, 군대의 주둔(주찰)에 따라 머문다거나, 바다를 표류하다 동으로 건너는등 여러가지가 원인라 하였다.
○성씨와 지명
씨족들이 사는곳은 왕왕 선조들이 왔던지역(중국에서 살던)과 관련되는데 "한국귀화성씨 및 그 연원 일람표"를 보면 연안씨, 소주가씨, 진주강씨, 고성남씨, 함양여씨,안강노씨, 강능유씨, 광주안씨, 곡부공씨, 청해이씨, 소주가씨, 협천마씨, 청주사씨,요양자씨, 휘주요씨, 회양이씨, 절강팽씨, 조주석씨, 통주양씨, 제남왕씨,신창맹씨, 항주왕씨,대동배씨, 봉화금씨, 해동임씨, 등등이 그 예이다. 관은 시조가 처음 살던곳을 대표하기도한다. 한국 지명중 단양,강능, 양양, 여수, 함양,진주,협천,진해,양산,태안,광주,안성,횡성,황산,안동,등등과 같은 지명도 선조의 내력과 관련이있다. 그 지명중 한성, 한양, 북한산, 남한산, 한강 등은 바로 한(중국)인과 관련된다. 한국인 성씨 중 한자에서 비롯하지 않는 대부분의 성씨는 역사상의 중국 이주 성씨인데 귀화인이라 하기도하고 또는 투화인, 향화인 이라고도 한다. "향화인"이라 함은 옛날 중국인들이 표류(떠돌다) 우리땅에 당도한 원인으로 자국 백성이 된 자들을 이른다. 조선 학자 이중환 저서에는 중원에서 와서 떠돌다 가문을 이룬 성씨로는 온양맹씨, 연안이씨, 여주이씨, 남양홍씨, 원주원씨, 해주오씨 의녕남씨, 거창신씨, 창원황씨들이라 했다. 역사상 인구의 천사(이동)는 빈번했는데 혹은 전난을 피해(타피전란), 혹은 결혼으로, 군대의 주둔(주찰)에 따라 머문다거나, 바다를 표류하다 동으로 건너오는등 여러가지가 원인이 되었다
○각종 자료 발췌
남양 8학사: 639년, 고구려 영류왕 때, 남양 8학사 홍, 위, 길, 서, 방,육,기,은,봉 오랜 옛날 건너감.
연안이씨: 660년, 당 고종 때 무장 이무근이 당나라 명장 소정방을 따라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연안백
(책임자)에 봉해젔는데 나중 거주지명을 따라 연안으로함.
김포공씨: 755년, 백우경이 입적하고 황제 헌원씨의 후예라 칭함.
정선이씨: 1126년, 금국의 전란을 피해 남안국 남평왕의 셋째 아들 이양이 광주에 살게됨.
남원승씨: 원나라 말 대하국의 왕 명옥진의 아들 명승의 후소손들, 송도에 입적함.
청주사씨: 1372년, 명나라 에부상서 사요의 큰아들 "중"이 고려에 망명,청주에 살다. 동국사씨의 시조.
소주가씨: 1592년, 명나라 신종때, 추밀원사 병부상서 벼슬에 오른 문연각 대학사인 가유륜이 소요 안찰사
신분으로 조선에 파병되다. 1597년 아들 양과 더불어 재차 부대를 이끌고 임전하여 부산 전투
중 부자가 전사하였다. 양의 아들이 상을 치른 후 입적하였다.
수안계씨: 시조는 명나라 예부시랑인 계석손
보성선씨: 명 문연각학사 선윤지 고려에 사신으로가서 보성에 머물다.
파능호씨:명 한림학사 호극기 1643년 조선에 답방 사신으로 갔다가 이듬에 명나라
망하자 한남에 은거하다. 그 후손들이 고향(파능)을 본관으로 (가평호씨)시조로 삼다.
한씨: 옛 주선왕시절 한후(한나라 제후)가 있었는데 연나라 인근 국가였다.
그 후손 한서의 성 또한 한이였는데 위만이 침공하자 해중(해동)으로 옮겼다.
왕계배 해설:한서는 조선의 착오
명 홍무15년(1382년) 주원장이 운남을 정벌하자 원나라 종실 양왕의 가솔들이 제주로 피신하여
운남을 본관으로 지금의 원, 양, 안, 강씨로 바꿨다
<명사.태조기>의 기록: 홍무5년(1372년), "진리(진우량의 아들), 명승(명옥진의 아들)이
조선으로 이주(피신)하다.
자료에 의하면 임씨 성은 당나라 말에 조선 반도에 도달했다. 복건성 포전(푸첸시) 사람 임온의 5세손
임팔급이 복건성 팽성(지금의 혜안 동령 일대)에서 바다를 건너 표류하다 신라에 도착한 후
강화만 부근의 평택에 정착하고 평택 임씨라 불렀다. 그 후손들이 서울,진천, 안동,경주,부산,
부안, 예천 등지까지 번창하였는데 이미 40여세에 이르렀고 인구는 120만명에 다달했다.
임진년(1592년)에서 정유년에 이르는 대 일본 전쟁 기간 중 명 나라 원군은 20여만명에 달했고 지휘관들은
270명이였다. 입적한 성씨들은 절강 시씨, 서씨, 편씨, 팽씨,유씨,장씨,상곡마씨,해주석씨,
광주동씨,소주가씨 등이다
씨족들이 사는곳은 왕왕 선조들이 왔던지역(중국에서 살던)과 관련되는데 "한국귀화성씨 및 그 연원 일람표"를 보면 연안씨, 소주가씨, 진주강씨, 고성남씨, 함양여씨,안강노씨, 강능유씨, 광주안씨, 곡부공씨, 청해이씨, 소주가씨, 협천마씨, 청주사씨,요양자씨, 휘주요씨, 회양이씨, 절강팽씨, 조주석씨, 통주양씨, 제남왕씨,신창맹씨, 항주왕씨,대동배씨, 봉화금씨, 해동임씨, 등등이 그 예이다. 관은 시조가 처음 살던곳을 대표하기도한다. 한국 지명중 단양,강능, 양양, 여수, 함양,진주,협천,진해,양산,태안,광주,안성,횡성,황산,안동,등등과 같은 지명도 선조들의 이주 내력과 관련이있다.
○중국 유명인들의 후예
중국역사상 조선반도로의 이민자들은 부지기수이다. 그중 많은 중국 유명인들의 후예는 다음과 같다.
공자의 52세손(54대라는 설도) 공손소, 1349년, 노국공주를 따라온 후 정착하다.
맹자의 40세손, 당나라 5경박사 맹승훈이 888년 유교의 전파차 가다. 51세손 맹의피를 신창맹씨 시조로
여긴다.
한고조 유방의 41세손 유전,1082년에 입적하다.
동중서의 43세손 동승선이 명조 접위사로 고려에가서 고려말에 영주에 정착하다.
제갈공명의 20세손 제갈공순,신라 흥덕여왕때(626-836)에 입적. 고려 고종때 그 33세손 제갈홍과 제갈형 형제가 제씨와 갈씨로 나뉘다.
주희의 증손 주잠,1224년, 나주에 들어와 능주에 정착하다.
악비의 7세손 이지란,이성계가 조선을 건립하는데 공을 세우다.
문천상의 17세손 문가상。
이밖에 명나라 원군의 군인들과 그 후예들이 적지 않은데 각자의 영역에서 한반도의 역사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국의 역사서, 지방지, 문집, 족보, 실록, 문서나 데이터 중에 많이 기록되어있다.
중국과 한반도의 수 천년간의 교류 중 , 사람들의 빈번한 왕래는 상호간의 이민이라 할 수있다(조선반도로 부터 중국의로의 이민: 당령문의 논문). 중국에서의 조선반도로의 이민은 최초의 원인이 무었이든 역사 발전중에 이루어저 점차 이주한 지역사회에 융화하였는데 많은 흔적은 유보하지만 역사적 사실이고 가치임은 인정해야한다. 끝맺음
○참고문헌
열거 생략
[처음 실림《연변대학학보》(사회과학판),2009년제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