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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11-01 15:57
[중국] 한사군은 허구다 (펌)
 글쓴이 : sssangi94
조회 : 2,456  

한사군이 구라인 이유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청문회 개요)


식민사학의 결정판 국사교과서를 바꾸기 위해
뜻있는 민족역사학자와
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 11.26 ~ 27 양일간
국회에서
"국사청문회"가 열렸다


민족사학측은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3인 이었고

식민강단사학측은
최영희(崔永禧),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전해종(全海宗),
이기백(李基白),
이원순(李元淳),
안승주(安承周) 7인 이었다

강단측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의 수제자"들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음이라

비전공자들과 토론하는 것이 겪에 맞지 않아 불쾌하다는 둥
거들먹 거리던 그들에게

국회는
국사편찬위원 전원 경질이라는 철퇴와
청문회 내용을 국사책에 반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민족 사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83년 국사교과서" 개편시 다음사항이 반영된다

(1)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사실 수록
(2) 백제의 대륙진출 수록
(3) 한 4군의 한반도 위치설 삭제 등


1) 국회청문회 속기록 자료 있는곳 인터넷 주소

http://search.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1/108/108ia0019b.PDF#page=1

☞ 100여 페이지가 넘는 놀랄만한 방대한 자료들이 단 한마디도 빠짐없이 녹취되어 있습니다
☞ pdf 파일로 되어 있어 보실려면 아크로벳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 한자가 많은점 감안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 국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는 방법


(1) 국회 사이트 접속 http://www.assembly.go.kr/
(2) 중앙메뉴중 회의록 "클릭"
(3) 목차검색 클릭->상임위원회 클릭
(4) 제 11대 클릭
(5) 문교공보위원회 클릭
(6) 제108회 클릭
(7) 제 19차 클릭
-----------------------------------------------------------------
▒ 국회청문회 임승국(5-1) "동화속의 한사군"



(한사군 : 동화 쓰지마라)


제가 맡은 분야는 바로 아까 김원룡 선생께서도 "터치"하신
한사군 문제와 삼국강역 문제인데

그 가운데서도 제일 많이 말씀드릴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백제 강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제가 맡은 "파트"라 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한사군 문제를 저는 세가지 각도에서 분석합니다

첫째는 사료적인 측면에서
두 번째는 상황적인 상식적인 측면에서
세 번째는 아까 말씀하신 고고학적 측면에서 인데
여기에 하나의 분야를 더 보탠다면 지리적인 측면입니다


(중국 한왕조가 300년을 존속한적이 없는데 한사군이 421년이나 존속했다고)


크게 나누어서 서너가지 측면에서 말씀드리겠는데
먼저 상식적 상황적 측면에서부터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교과서가 한사군을 설치한 연대를 BC 108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또 지나가는 중학생 고등학생 누구나 붙잡고
한사군이 언제 멸망했느냐 하고 물어보면 우선 제 딸한테 물어봐도
문교부가 어떻게 국사교육을 철저하게 잘 시켰는지
"낙랑군이 제일 오래 존속하다가 AD 313년에 멸망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기원 313년에다가 기원전 108년을 합치면 총계가 421년이나
되는데 한사군이 421년이나 존속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는 동양사의 ABC만 아는 사람도 이 421년 이라고 하는 숫자를
납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그런지 아세요 ?
중국의 25사라고 하면 25왕조의 역사를 적은 책인데
즉 한나라때부터 명나라때까지 2000년 동안에 중국에서 망하고
흥한 왕조의 숫자가 모두 25개 왕조가 된다는 것인데
그 25개의 역대왕조의 연대가 300년을 "오버"하는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있는 식민지가 421년이나 존속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중국왕조 가운데 200년을 "오버"하는 왕조가 고작 4개예요

후한(後漢), 당(唐)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입니다
청나라도 사실은 혈족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계통입니다마는
하여튼 네 개밖에 없습니다

300년 넘은 왕조는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해외에 나가있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식민지가 400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동화 쓰지마라 - 한사군이 중국 5개 왕조의 전리품인가 ?)


그 421년 동안에 중국측에서 등락한 왕조를 보면
- 한무제의 전한(前漢)이 망하고
- 왕망(王莽)의 신(新)나라가 되고
- 그 다음에는 후한(後漢)
-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삼국지에서 말하는 조조의 위(魏)나라
-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서진(西晉)입니다

이 5개왕조를 거치면서 한사군이 무슨 전리품인가요 ?
내가 가졌던 거니까 네가 물려가져라 이런 말은 있을 수 없는 얘기 아니예요?
5대왕조를 거쳐가면서 역대왕조에 식민지 노릇을 했다

이것이 한사군이다 한다면
이는 "사학"이 아니요
"동화의 소재"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게다가 한사군을 설치 했다고 하는 이 식민지의 종주국이 어떤나라냐 하면
전한(前漢)입니다

그런데 그 전한은 AD 8년에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주국도 망하고 없는 식민지 그런 식민지의 개념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사교과서에는 제가 여러분한테 나누어드린 자료를 보시면
알겠읍니다만 국사교과서에서는 "한나라의 식민지인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설치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식민지라는 정치술어 조차 그런 정치개념 조차 없을 때예요
그런데 겁도 없이 "한나라의 식민지인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 설치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넌센스"예요

그래서 저는 전략적 상황적 측면에서 종주국이 멸망하고나서 300여년 동안
존속되었을 뿐 아니라 망해버린 종주국에 충성을 다하는 이러한 식민지가
존속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또 한편으로 400여년 동안 교통수단이나 통신수단도 없는 한사군이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낙랑군이라고 하는 평양의 북쪽에는 당시 동양최대의 강국인
고구려가 뻗치고 있습니다

만일 한나라 사신이 내 식민지 낙랑으로 갈테니까 고구려 사람한테
길좀 비켜달라고 했다면 고구려 사람들이 좋게 비켜 주었을까요

교통수단이 없으면 통신수단도 없는 것입니다
교통도 통신도 아무 수단도 없는 이러한 식민지가 있었다고 해보았자
그것은 이미 식민지가 아닙니다

이상은 상황적인 혹은 전략적인 측면의 "한사군 부재론"입니다

다음은 사료적 측면에서 한사군 부재론입니다

(계 속)

------------

(운영자 주)

한사군이 설치한 "전한"이 AD8년에 망했는데
한사군은 AD313년에 망했다고 한다

무엇이 상식인가 ?

임승국 교수의 "사료적이 측면"을 더 살펴보면 기가막혀 말이 않나온다
OOO들.....


▒ 국회청문회 임승국 (5-2) "한무제는 기자조선에 패하였다"


제가 국회 국사청문회 자료를 인용하여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조작이니, 잘모르는 비전공자들의 믿을 수 없는 설이니 하는
얼빠진 인간들의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이자료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증언하여
국회가 보관하고 있는 국회 속기록 자료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조작운운하는 얼빠진 소리"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국회 속기록에 기록되어 있는대로
국회 문공위에서 증언한 목소리 그대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국회는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3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한 사연을 담은 속기록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한사군"에 대한 "1차사료"이다)


다음 사료적 측면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얘기입니다

한사군의 설치는 BC108년이고 그 당시 한나라 임금은 한무제입니다

중국의 25사라고 하는 책은 바로 이 한무제때 쓰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필자는 바로 한무제의 신하요 사관인 사마천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무제의 신하가 130권의 사기를 적었는데

그 115권이 이른바 우리가 문제 삼고자하는
한사군의 기록을 적은 "조선열전"입니다

따라서 이 "조선열전"의 기록은 한사군에 관한 한
우리사학에서 얘기하는 "제1차 사료"입니다

말하자면 원전이라는 뜻입니다


(1차사료인 사마천의 사기원전에는 한사군의 기록이 없다)


이 원전속에 오늘날 우리 중고등학생들이나 여기에 앉아계시는
여러분들이 다 잘 알고 또 외우고 있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사군의 이름조차 없습니다

그럼 지금 교과서에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글을
도대체 어디서 누가 창작해 냈단 말입니까 ?

역사라는 것은 창작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사실에는 "플라스 알파"도 안되고
"마이너스 알파"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 어찌 있었는가 ? 그 역사 사실이 본래 어찌 있었는가 ?"를
연구하는 것이 실증사학의 표어입니다

이 말은 독일의 실증사학자 "랑케"가 얘기한 것이예요

저도 여기에 동의해요
역사사실은 본래 있는 그대로 적어야 해요

수치스러우면 수치스러운 대로 영광스러우면 영광스러운 대로
그대로 적어야 합니다

우리들 정사학도들을 가리켜
"한국사의 영광이나 긍지만을 조작하고 칭조해내는 학자"라고
얘기한다면 이는 중상이요 모략입니다

우리야 말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적어내자는 것이 그 주장입니다
우리는 그런면에서 볼 때 훌륭한 실증사학도입니다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는 글은
제 1차사료 "사기 조선열전"에는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식민사학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 한사군의 기록이 1차 사료인 "사기 조선열전"에는 없다)


즉, "수정조선위사군(遂定朝鮮爲四郡)"이라
"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사군이 되었다"라는 기록 다음에
글의 순서로 봐서 "낙랑, 현도, 진번, 임둔야(也)"라 하는
기록이 있어 주어야겠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요즘 식민사학가들이 "그래도 있어 주었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내 쉴텐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하게도 이 "사군"이라고 하는 말
바로 다음에는 글자하나 빼놓지 않고 바로 계속되는
다음의 글이 뭐냐하면

"평주, 날양, 추저, 홰청"이라고 하는
조선사람 네사람이 다스리는 네 개의 지명이 나옵니다

문법적으로 보아서 이는 동격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나의 조국 - 한반도"라 하면 "나의 조국"과 "한반도"는
동격어입니다

또 "고대사학자"인 "나 임승국"하면
"고대사학자"와 "나"는 동격어입니다

따라서 이기록은 "사군"인 "평주, 날양, 추저, 홰청"이라고
읽을 수 있으므로 이 "사군"과 계속되는 네 개의 지명을
저는 동격어라고 보는 것 입니다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사군")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군이 모두가 한나라측 통치자가 아니라
전부 조선사람이 통치자예요

그러니까 우선 대전제로 이 사군의 이름을 저는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사군"이라고 일단 가정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을 입증하기 위해서 전쟁내용을 흝어봅니다

전쟁의 상대자는 보통 "적군과 아군"이며 "피, 아"의 쌍방인데
한사군 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에는 "피, 아"말고도
"어나더 케이스"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고조선족의 세력"입니다


(기자조선의 마지막왕 기준은 인정하면서 기자조선은 부정하고 있다)


저는 위만정권과 그 피치자(被治者)인 고조선족의 세력을
분리해서 봅니다

여러분들은 잘 아시겠지마는 위만이라고 하는 자는
정권은 기자조선을 둘러업고 그 자리를 들어선 정권입니다

"위만이 우리 한국쪽이다. 기자의 성씨는 한(韓)이다"해서
한씨조선으로 말하는 이병도 박사의 말씀도 있지만
여기서 국적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아뭏던 위만은 그의 국적상의 소속은 연나라 사람입니다
위만은 고조선 사회에 망명해 와가지고 사기를 했어요

사기의 내용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한(漢)나라의 병사가 여덟길로 쳐들어 오니까 내가 왕성에
들어가서 성을 지키겠소이다"하고

기자조선의 마지막왕 기준(箕準)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국사에서는 기자조선은 부인한다고 하면서
이상하게도 기준의 이름을 밝혔어요

즉, 국사교과서를 보면 "기준을 내어 쫓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왕 기준은 인정하면서 기자조선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넌센서"입니다

숭늉을 마시면서 휘파람을 분다는 모순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들어선 위만정권이 다스리는 백성들은
고조선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기자조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손자 우거때에 내부적인, 말하자면 갈등이 일어났는데
고조선 사람들이 주동이 돼서 정권을 뒤엎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사군의 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무제의 수륙양군은 기자조선에 참패하였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전쟁이 나고 혁명이 나니까
한나라 무제는 "수륙양군"을 슬쩍 보냈습니다

이는 마치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바구니 들고 도둑질이라도
해볼까 하고 뛰어드는 격이예요

한무제는 수륙양군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륙양군이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패전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계 속)

▒ 국회청문회 임승국 (5-3) "한무제가 보낸 군사는 조선사군에 전멸 당하였다"


(요점정리)


사마천의 조선열전을 읽고도
한무제가 이겨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거나 믿는 사람은

"원문을 안본 무지의 소치거나",
"얼빠진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한무제의 수륙양군은 조선사군과의 전쟁에서 "전멸"을 당했는데
어찌 한사군을 설치 할수 있겠는가 ?

그 "조선사군"의 위치는 한반도가 아닌 "발해만" 즉 하북성 유역이었다
소설 쓰지말라는 것이다

(도표설명 : 추후보완예정)



(주) 기시(棄市) : 사지를 찢어 죽여 시체를 장안 사대문안에 걸어 놓는 극형을 말함



(한무제의 수륙양군은 기자조선에 참패하였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전쟁이 나고 혁명이 나니까
한나라 무제는 "수륙양군"을 슬쩍 보냈습니다

이는 마치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바구니 들고 도둑질이라도
해볼까 하고 뛰어드는 격이예요

한무제는 수륙양군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륙양군이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패전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수륙양군 가운데 "누선장군"이라는 사람입니다
다락 "루(褸)"자, 배 "선(船)"자 니까
아마도 다락같이 큰배를 타고 출전한 해군제독이겠지요

제가 해병대사령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사람이 누선(주1)장군 양복(楊僕)이라는 사람인데
이사람은 아마 중국의 해병대사령관 일꺼라고 했어요

왜 그런고하니 해군제독이니까 큰배를 타고 나갔는데 자기 부하들은 전부 물귀신이 만들고
배는 파선되고 누선정군 "양복"은 "둔산중십여일(遁山中拾餘日)"이라 했으니까

산 속에 10여일 동안 혼자 몸을 피해 도망다녔다고 하는 기록이
조선열전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배를 타고 나간 사람이 "둔산중십여일(遁山中拾餘日)"했으니까
이것이 해병대사령관이 아니고 무었입니까 ?


우리는 한국해병대야말로 귀신잡는 해병대지만
중국의 해병대는 "처음서부터 이렇게 패색이 짙은 해병대인가" 보라고 했어요

이것은 수군에 관한 얘기입니다마는 육군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한무제 군사가 "참패"하여 돌아왔는데 무슨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소설을 쓰는가 ?)


좌장군은 육군사령관인데 그의 부하인 졸정다(卒正多)라고 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죽었습니다

전선에 나가서 패해 가지고 돌아오니까
"너 왜 후퇴했느냐"해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밖에 이 한나라 측의 인물이 "사기 조선열전" 상에 등장되는 인물이 모두 여섯사람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한번 언급해 보겠습니다

섭하(涉何)는 천자(天子)의 사신(使臣)입니다
또 지금 말씀드린 "졸정다(卒正多)"
그리고 또 한사람은 공손수(公孫遂)이며
그 다음에 위산(衛山)인데

이 네 사람(섭하, 졸정다, 공손수, 위산)은 전부 천자의 사신입니다


여기에
육군사령관이 순체(荀 )요
해군사령관이 양복(楊僕)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 여섯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한사람도 살아남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느야 하면

"섭하(涉何)"는 전쟁초기에 전사하였고
"졸정다(卒正多)"도 엮시 법에 의해서 참수(斬首)되고

천자의 사신 두사람과 육군사령관, 공군사령관이 논공행상을 받기위해
한무제 앞에 섰는데 이 사람들에게 어느정도의 논공행상이 내려진 줄 아십니까 ?

높은 상이나 높은 벼슬이던가 ?
아닙니다

"사형"이 내려졌습니다

한나라의 형법에는 사형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사형이 기시(棄市)라고 하는 사형입니다

폐기한다는 "기(棄)"자에 저자 "시(市)"자입니다
즉 시장에 버린다는 말이니 글자도 좀 기분이 나쁩니다

사람을 죽여서 시지를 뜯어서 장안의 사대문에다 걸어 놓은 사형이에요
극악스런 정말 국사범이 아닌 다음에야 처형할 수 없는 이런 사형을 다 받았어요


전원 사형입니다

장수(將帥)나 천자의 사신할 것 없이 전원 처형이라고 하는 이런 승리도 있습니까 ?
"관계자 전원처벌 전원처형"이라고 하는 이런 승리도 있습니까 ?

나는 이제까지 이런 승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누군가 하면
"평주·날양·추저·홰청" 이 사군의 책임자가 된 조선사람들입니다
(조선사람 : 최, 참, 음, 협)

물론 사기는 군(郡)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후(四候)"라고 했어요

이 점에 대해서는 이따가 해명하겠습니다


▒ 국회청문회 임승국 (5-4) "발해만 연안에서 기자조선 유물도 나와"



(기자조선이 승리한 즉 "조선사군의 승전기록"이다)


(이어서 계속)

사군의 통치자로 등장한 고조선족 네 사람이 소속된 고조선,
즉 기자조선이 승리했던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위만조선이라는 통치기구가 무너지고
그 통치기구가 네 개로 갈라지고
그 통치 주체가 "기자조선인"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저께 김철준 박사께서는 "사기연표"를 동원하면서
이렇게 설치된 조선사람의 나라가 오래가지 못하고 10년 20년 뒤에 다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통치기간이 길고 짧은 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예요

여기서 이 전쟁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바로
조선사람 네사람에게 있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딴 사람은 다 사형됐는데
이 사람들만이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하였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땅은 그 옛날 기자조선의 땅이고 또 무너진 위만조선의 강역입니다


(조선사군의 땅은 발해만 연안, 기자조선 유물도 나와)



그런데 이 땅의 위치를 어디라고 사기연표는 밝혔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전부 "발해연안 즉 「뽀하이」만 연안에서 산동반도에 걸치는 곳에 사군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만주대륙도 아니고
한반도는 더욱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는 여기에 착안하셔야 합니다

이형구교수가 79년도에 발표한 것을 보면
(지금 이형구 교수는 대만에 가 계신 줄로 압니다만)
"기자의 유물들이 중국의 객좌현(喀左縣)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객좌현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조선인 사군이 설치된 바로 그 지역이며 옛날에는 기자조선의 땅이었습니다.
이교수는 이 출토물들을 연구하여 석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한반도 이남의 유물로 고조선 입증하려는 시도는 OO한 짓이다)


기자조선 있던 곳에서 기자유물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한반도인 휴전선 이남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을 가지고 고조선 역사를 증명할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고고학이 안고 있는 학문적 한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도 남북통일은 빨리 되어야 되겠어요.
그래서 중국땅에 가서 고고학과 한국고대사를 연구해야겠습니다.


(무령왕릉의 묘제는 백제의 대륙진출을 입증한다)


무령왕릉에 관한 말씀도 했습니다마는

중국땅에 가 보면 무령왕릉과 꼭 같은 양나라의 묘제가 많이 있는데
무령왕릉의 묘제는 이상하게도 양나라 묘제와 꼭 같습니다.

그렇다면
양나라 하고 백제는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이 거의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
그러나 과거와 같으면 의례 이렇게 생각들을 했어요.

즉 "묘제가 같으니 아마도 양나라쪽에서 백제를 쳐들어 왔을 것"이라고 생각 했을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백제가 양나라에 진출했을 런지도 모른다」고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사마천은 스스로 조선에 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찌되었던 사마천은 "사기 조선열전"을 다 적고나서
제일 마지막에(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태사공왈"이라는 대목을 적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기록이냐 하면 자기가 적은 역사기록에 대한 "서평"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태사공왈"에서
"순체쟁로(荀 爭勞)하여"
즉 순채는 육군사령관인데 그가 공로를 다투다가

"여수개주(與遂皆誅)라"
즉 "공손수(천자의 사신)와 함께 죽임을 당하고"

"양군구욕(兩軍俱辱)이라"
즉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욕을 당했다"는 말은
전선사령관이 전선에 나가서 뭐 적장에게 뺨이라도 맞았다는 말인줄 아십니까 ?
아닙니다

이것은 군사술어인데 "졌다"는 뜻입니다.
자기측의 기록을 패라고 적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욕"이라는 말은 졌다는 말입니다.

"졌다"는 말을 한문에서는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패(敗)"나 "항(降)"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까 "삼전도"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마는
우리 인조대왕께서 청태종한테 곤두 칠배하면서 항서(降書)를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서에서는 이를 뭐라고 적었는고 하니 "성하지맹(城下之盟)"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성하에 내려가서 맹서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맹서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
무슨 조약체결이라도 했다는 말인줄아십니까 ?

아니예요
"항복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한문의 「뉘앙스」입니다.
"맹서한다"는 "맹"자나 "강화한다"는 "화"자는 모두 항복을 뜻합니다

(중략)

어쨌던 "맹(盟)"이라 하는 말이나 "화(和)"라고 하는 말은
모두 "항복(降伏)" 했다는 말이며 "양군이 구욕(俱辱)"이라 한 이 말은
"수륙양군이 모두 욕을 당했다"는 말인데
이는 "수륙양군이 모두 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문의 "뉘앙스"를 잘아셔야 합니다

또 "태사공"은 말하기를 "장졸문막후의(將 問莫侯矣)"라 했습니다
여기서 "졸"자는 "졸(卒)"자로 읽습니다

즉 "장교나 졸병이나 간에 아무도 후(侯)가 된자 없다"
"상 받은자가 없다"는 얘기예요

상은 무슨 상입니까 ?
후는 또 무슨 후 입니까 ?
모두 사형당했는데 !

그러므로 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일차 사료상에 명시되어 있지 아니한 한사군은 없었다)
(한무제가 참패를 당하였는데 조선땅에 무슨 "한사군"을 설치할 수 있는가 ?)


동양사에서 역사의 아버지라고 추앙되는 태사공사마천이며
또 한무제 자신의 사관인 사마천이가 쓴 글에
"漢나라가 졌다"고 그랬습니다

진 사람이 식민지를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한국정사"라는 책을 썻는데 대담하게도 "한사군은 없었다"하는
부제를 달아서 책을 냈습니다

이 책이 다 팔렸어요
그러니까 보는 사람이 많으니까 다 팔렸겠지요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우리 "학계에서 한사군은 없었다"고 최초로 떠든 사람은
아마 책으로 낸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에요


(한사군은 없었다)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일차 사료상에 명시되어 있지 아니한 한사군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따가 질문이 나올 것으로 압니다마는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고 하는 사군의 이름을 어디서 채취했느냐
설마 창작은 안했겠지요

물론입니다
사기 다음에 중국 25사는 전한(前漢)서 입니다

사기와 전한서의 시대적 갭이 180년 내지는 200년입니다
적어도 2세기 이상 가까이 돼요

후한시대의 반고가 적은 "전한서"에서 비로소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이라고 하는 여덟 글자가 "가필"이 됩니다

제가 "가필"이라고 하는 말에 "액센트"를 두는 이유가 있어요
반고의 "조선전"은 사기 조선열전을 그대로 복사한 것처럼 그대로 베꼈습니다

글자하나 글자의 순서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다 베꼈어요.
베꼈는데 이상하게도 "수정조선위사군"이라고 하는 대목에서만은
위자하고 "사"자중간에 즉 「수정조선위」 다음에
「낙랑 현도진번임둔」이라는 여덟글자가 불어나고
그 다음에 "사군"이라는 글을 적었어요
(수정조선위 "낙랑 현도 진번 임둔" 사군)

이것은 분명한 가필입니다.

나는 이를 반고 자신의 가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나라 이후 중국의 사필이 이런 짓을 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이 반고의 전한서 이후 우리 한국의 사학이나 동양사학이
한사군을 거론하면서 "사기조선열전"을 증거 자료로 들먹이지 않고 있습니다


(일차사료인 "사기 조선열전"은 감추고 가필된 "한서 조선전"만을 인용하는 학계는 지능적인 역사왜곡 행위다)


이것은 대단히 지능적인 처사예요.
왜 그런고 하니 사군의 이름이 들어있는 "한서조선전"만을 들먹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삼국유사의 "위만조선" 조만 보아도
"한서조선전문"하고 주를 붙인후 "낙랑 현도 진번 임둔야"라고 쭉 적었어요.
정확한 "사기(詐欺)"기록입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없고
그 200년후인 "한서조선전"에는 실려 있는 사군명입니다.
이 200년이라는 시간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차사료상에는 한사군의 이름조차 없으니까
한사군은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원전 곧 등기문서상에 없는 한사군을 한의 식민지라고 한측이 주장한다면
등기부상에 없는 부동산을 자기것이라고 주장하는 꼴입니다.

내가 원전인 사기 조선열전 낙랑 현도… 등 사군명이 없다고 하면
어떤사람은 "왜 그래 있는데…"라고 반론할는지 모릅니다.

요새 번역되어 나오는 조선열전을 보면 사군명이 있다는 얘기지요.
기왕 번역문화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참 기가 막힙니다.

특히 한서번역문화라는 것은 더욱 엉망입니다.
지금 한문세대는 내가 54인데 아마도 내가 마지막 세대인 듯합니다.

한문세대는 지금 간들간들해요.
우리가 해방후 36년 살아왔는데 이제 30년만 더 산다면
나도 안호상박사님 나이보다 많아집니다.
84세가 되니까요.


(잘못된 번역문화, 바로잡아야)


그쯤 되면은 아마 우리 한국의 한문세대가 끊어지기 전에 빨리 국사를 찾아야 되겠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문세대가 없어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보다
번역문화가 큰 일이라는 말입니다.

단국대학 명지대학에서도 나왔습니다.
또 각 유명출판사 을유문화사 삼성문화재단등에서도 사기 조선열전의 번역판이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된 조선열전을 보면
"마침내 조선이 평정되어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사군이 되었다"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적었을까?

이는 번역하는 사람들이 사서의 원문과 "주"를 구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서의 원문과 "주"를 구별한다는 것은 고전의 상식인데
저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25사는 심지어 주를 란외에 따로적고 있어서 구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다른 고전들은 대게 원문을 한줄로 "…이렇게"적고
"주"는 작은 글씨로 두줄로 적어 구별을 짓고 있습니다.

특히 그 "주석"의 서명을 "집해"니 "정의"니 "색은"이니 하고 적고 있습니다.
혹은 직접 "주자"의 이름을 "위소왈" "서광왈…"하고 적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남북조시대~당나라 이후 증서들입니다.

따라서 원문을 쓴 시대와는 대게 500년~800년 사이의 시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과 "주"를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예요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서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을 배웠든 터에
고전을 번역하다 보니까 "수정조선위사군"
그 다음에 " "낙랑 진번 현도 임둔"이라고 "주"를 끌어다 쓰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원문에도 없는 사군명이 번역판 사기에 실리게 되는 것이죠



▒ 국회청문회 임승국 (5-5) "장무이(張武夷)묘와 봉니(封泥)는 가짜"



(고구려에 항복한 "동수( 壽)의 묘"가 한반도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아까 고고학에 관한 말씀을 하였습니다만
김원룡 박사께서는 동수의 무덤을 말씀하셨어요


김원룡교수는 뭔가 의도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의 고고학자 가운데
동수의 무덤을 미천왕(美川王)의 무덤이라고 북쪽 학자들 얘기에 동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동수는 저도 주장하기를 여러 군데 글을 썼습니다마는
동수는 꼭 알아두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동수가 고구려에 항복 했다는 기록은 "자치통감"에 나와..)


즉 동수가 고구려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항복한 자가 그의 무덤을 한반도 땅에 남기는 것은 당연한 얘기입니다.

북쪽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들의 학문적인 주장을 왜 자꾸 북쪽에서 하는 주장과 우리들의 주장이 같다는 식으로
관련시켜서 얘기합니까?

우리 남쪽 학자들이 동수의 무덤을 미천왕 무덤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 측에선 그런 사람 없습니다.


(해방전에 "동수의 묘"가 발견되었으면 일본놈들의 "한사군" 조작에 악용되었을 것이다)


북쪽에서는 동수의 묘를 미천왕릉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 동수의 무덤이 1946년도에 발견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즉 해방 다음해 1946년에 발견되었기 망정이지
해방전에 왜놈이 있을 적에 발견되었다면
이 동수묘도 아마 왜놈들에 의해서 한사군을 조작하는 고고학적인 반증자료로서
이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수묘에도 "낙랑"이라고 하는 묵서가 나왔으니까
사리원땅이 또 한번 "낙랑군"지가 될뻔했던 것입니다.

마침 동수묘가 1946년에 발굴되었기 때문에 이런 화를 면한 것입니다.
동수의 무덤 비명가운데 역사를 날조(捏造)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자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장무이(張武夷)의 묘"도 왜놈들이 조작한 가짜다)


비슷한 예가 아주 많습니다.

김교수가 아까 자주 말씀하셨던 전묘(塼墓)가 있습니다.
☞ 전(塼) : 벽돌 전

중국사람들의 묘지는 당연히 전묘(벽돌무덤)입니다.
전묘가 한반도에 많이 있어요.

제가 아는 장무이(張武夷) 무덤이 있습니다
그는 대방태수(帶方太守)였습니다.

그의 무덤이 사리원땅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반도땅에 대방군이 있다고 하는 하나의 추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왜놈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가짜입니다.


("장무이"도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온 "한인"이었다)


이 장무이도 아까 얘기한 동수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포로로 잡혀온 한인이었어요.

동수에게는 항복의 기록이 있습니다.
즉 "분주고구려운운(奔走高句麗云云)"하는 기록이 자치통감에 나오지요.

따라서
동수가 고구려 망명 항복한 것은 틀림없는데
이 "장무이"에 대해서는 그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비문상에 그가 항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가 나옵니다.


제일 마지막 대목에
"趙主簿가 令搏하니 懃意不臥"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주부가 영박하니 근의불와)


(5등관 주부(오늘날 주사보)의 아래 있던 사람이 태수라니.....)


조는 성씨요
주부는 고구려의 "벼슬이름"입니다.
세상이 다 아는 고구려 벼슬입니다.

삼국사기의 "관직고"를 보면
"주부"라고 하는 벼슬은 "5등관"입니다.

대한민국의 신분법으로 보면 "주사보"에 해당합니다.

"조주부가 영전" 하니의 "령"은 사역동사입니다.
그의 명령으로 "전"하니 "벽돌을 구워서 전묘를 쓰게 되니"라는 뜻이요

"근의"는 "은근한 뜻"이란 말이요
또 "불와"라는 말은 "쉬지 않노라"라는 뜻이므로
"땡큐 베리 베리 마취"하는 뜻입니다.

즉 조주부의 은혜가 대단히 고맙다는 얘기요.
죽은 사람은 태수요.

그의 무덤에다가 "조주부가 영전하니 근의불와"라
즉 "5등관 조주부의 그 고마운 뜻을 길이길이 잊을 수가 없노라"고 했다면

"대방태수 장무이"는
"조 주부"의 명령하에서 이리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가는
명령을 받았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장무이는 현직태수가 아니라 고구려로 망명한 한인...)


현직의 태수라면 그럴 수가 있습니까 ?

"태수"는 한지방의 생사여탈권을 걸머쥐고 있는 지방장관인데
5등관의 명령에 의하여 그의 턱끝에서 놀아났다면
이러한 사람은 포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전묘 즉 벽돌무덤이 발견된 것도 토성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전통적 성법은 "석성"입니다.

그런데 토성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이는 고구려 방어용의 성이 아니고
그 성은 포로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도망을 방지할 정도의 성이었으니까
토성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무이"는
고구려 병사에 의해 사로잡혀온 한(漢)나라 포로가 틀림없습니다.


(김원룡 교수가 얘기한 "봉니(封泥)"얘기는 과거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조작품 가짜다)


또 김원룡 교수는 봉니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다 지난날에 왜놈들이 만들어 놓은 조작품 가짜입니다.

봉니(封泥)라는 것은
옛날에 공문서를 보낼 때 나무 상자속에 서류를 집어넣고
위에다 뚜껑을 덮고 열십자로 끈을 묶은 다음
거기다 아무도 개봉 못하도록 진흙을 뭉쳐서 발송관의 도장을 찍는데

여기서 "발송관"이라고 하는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발송관이 만일 낙랑태수이면 "낙랑태수지랑"이라는 도장이 찍혀서
이 진흙이 마른 다음에 사자를 시켜서 보내는 것인데
말하자면 옛날의 교통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서류를 통한 니" 즉 "니"자가 진흙 "니"자 이니까
"발송관의 도장이 찍힌 진흙 덩어리 마른 것"
그것이 "봉니입니다"


(봉니(封泥)는 현대의 "우표개념"으로 도착지를 의미)


요새 우리들의 통신수단은
편지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우체국의 소인을 꽝하고 찍는데
요사이 우리가 보는 소인찍힌 우표 !
그것을 봉니라고 보면 되요

낙랑태수의 도장이 찍힌 봉니가 평양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면 평양은 도착지입니다

발송관인 낙랑태수는 평양 아닌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발송지는 딴 곳에 있단 말입니다

내 책상위에는 미국의 내친구한테서 온 편지가 많이 있습니다
"워싱턴 디시"의 "스템프"가 꽝 찍혀 있습니다

미국 우표까지 붙은 편지예요
자! 그러면 그 편지를 들고 서울은 "워싱턴"이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

"워싱턴" 즉 발송지는 미국이지요


(낙랑봉니는 왜놈들이 수백개 조작한 가짜)


낙랑봉니 수백개가 나왔습니다

낙랑태수의 봉니 뿐만이 아니라 현리(縣吏)의 봉니도 있어요
옛날엔 이장(里長)은 도장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장의 봉니까지 나왔답니다

이렇게 왜놈들은 낙랑군을 조작하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조작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한사군의 고고학적인 문제는 이따 내 강연이 끝난 다음에
박시인 박사께서 보충 설명을 해 주실 것으로 알고
내 이 정도로 고고학적인 문제는 줄이겠습니다


(다음은 역사지리적으로 본 한사군입니다)



(사진자료 1)


< 중국 요서에서 '임둔(臨屯)' 봉니 출토 >

- 출처 : 연합통신 사진검색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요서지역 해안도시인
진시시(錦西市) 소황띠(小荒地)라는 고대성곽에서 출토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와 "승(丞) 자 봉니"





< 요령성 봉니 출토지역 >

금서(錦西)는 중국 군사지도에 의하면 변경전 지명이 연산(連山)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산해관"에서 북쪽으로 출발하는 고구려 천리장성 남단에 있군요

녹색표시는 "대릉하"입니다







(사진자료 2 : 사리원)





▒ 국회청문회 임승국 (5-6) "낙랑군 수성현은 하북성 산해관 유역에 있었다"


- 요 약 -

고 임승국 교수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학교 4학년까지 살았다고 한다
밤낮으로 갈석산을 보고 자랐는데
안가본 넘(^.^)들이 글자가 같다고 황해도 수안이 갈석산 지역이라고 한다

무엇으로도 말릴수 없는 넘들이다
틀리면 고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서울 안가본 넘들이 우긴다고... 꼭 그꼴이라...


(문) 낙랑군 수성현은 어디에 있었나요
(답) 사료에 의하면 하북성 산해관 서쪽 "갈석산" 인근이라 합니다

(문) 이병도 씨에 의하면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遂成縣)이라는데요. 근거가 있나요
(답) 그거야 수성현(遂成縣)의 첫글자 수(遂)자가 황해도 수안(遂安)과 같지요
---- 그러니 같은 지명일 거 라는 거지요

(문) 그래서 하북성 수성현이 바다건너 황해도 수안이 되었다는 겁니까 ?
(답) 뭐 이병도 씨가 박사인데 설마 거짓말 했겠어요

(유구무언)







(산해관 서쪽 "갈석산" 인근이 "낙랑군 수성현" 이라 했는데, 황해도 수안이 "낙랑군지"라고 ?)


다음에는 한사군의 문제와 연관시켜 역사 지리학적인 측면을 살펴 보겠습니다

요동이라고 하는 땅은
오늘날 요동반도라고만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요하동쪽"이라는 뜻의 요동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상고사회의 요동은 현 요동반도가 아닙니다

요동이 아니라고 하는 한가지 자료를 소개하겠습니다
즉, "갈석산의 사료"입니다

"갈석산(碣石山)은 재한수성현(在漢遂成縣)하니
진축장성(秦築長城)이 동절요수(東截遼水)하고 기어차산(起於此山)이라"

이것은 옛날 요수에 대한 "절대사료"입니다


(사료에서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했다)


무슨 얘기냐 하면 "갈석산"이라는 산은 중국의 산해관 동쪽 해안에 있는
산이름 인데 이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이 산에서 일어났다
꼭대기에는 장서의 유적이 아직도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중국태생입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갈석산은 아침 저녁으로 보면서 해방전까지
중학교 4학년 생도로서 중국땅에서 태어나서 중국에서 컸어요

그렇다면 그 갈석산이 어디에 있어요 ?
"낙랑군 수성현에 있었다"했습니다
그런데 갈석산은 지금도 산해관 동쪽 해안에 있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만주와 중국 국경사이 국경도시 산해관에 있습니다
산해관의 해안쪽을 내려다보면 바위의 돌산인데
나무가 하나도 없는 산이 보입니다

이것이 갈석산입니다
이 산이 바로 만리장성의 출발점입니다


"갈석산(碣石山)은 재한수성현(在漢遂成縣)"이라 하였으니
여기가 낙랑군 수성현이었습니다


(이병도는 황해도 수안(遂安)의 "수"자가 수성현의 "수"자와 같다고 하여 황해도 "수안"이 "수성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병도 박사의 책을 보면 이 "수성현"을 한반도 황해도의 "수안"이라고 했어요
"수"자가 같은 같은 "수"자예요

"수안"이 왜 그놈의 "수"자를 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수"자가 같다고 중국에 있는
"수성현"이 황해도 땅으로 올수 있어요?

이것은 "넌센스"예요

"진축장성(秦築長城)이 동절요수(東截遼水)하고 기어차산(起於此山)이라"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이 동쪽을 요수를 끊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 !
요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
만리장성을 끊고 흐르는 강 그것이 바로 요수입니다

여기에 지도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산해관이고 바로 여기가 갈석산입니다

여기 이 만리장성이 동쪽으로 끊고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오늘날엔 그 강의 이름을 난하( 河)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 강이 옛날엔 "요수"였던 것이예요
물론 최근의 요수는 현 요동반도를 남류하는 요하인데 바로 여기입니다

지명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이동합니다

(난하가 옛 요수)




▒ 국회청문회 임승국 (5-7) "패수(浿水)는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


- 요 약 -

패수에 대하여 기존OO에서는

(1) 대동강
(2) 청천강
(3) 압록강

등등 시간이 흐름에 따라 위치가 점차 북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패수(패수)는 중국대륙에 존재한 것으로
북한학자 이지린은 "수경"이라는 책을 통하여 패수의 한반도 존재설을 주장하는
남한 학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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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요동은 산서성 "요"지역이다)


최초의 요동은 여러분들 상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초의 요동(遼東)은 산서성에 있었습니다
꼭 한번 찾아보세요

왜 이런 자료를 알려주어도 찾아 보지 않고 자꾸 반대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산서성의 "요(遼라)고 하는 지명이 있습니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주1)라고 하는 책은 중국의 최대지리서입니다

거기에 "요주"를 찾아보세요
산서성 조목에 있어요

거기 "요산"이 있고 "요수"가 있고 거기에 "요양"이 있고
현 남만주 요동의 지명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최초의 요동은 바로 이곳이에요
그런데 일반은 13세기 이후의 현 요동만을 요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일입니다

나는 북괴의 사학을 되도록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마는
부득이하게 하나 만 딱 소개하겠습니다


(북한학자 "이지린"은 중국 "수경'지를 인용하여 패수가 대동강이 아님을 증빙하고 있다)


"이지린"이라고 하는 학자에 대해서 여러분도 잘 아실줄 믿습니다
그 사람이 쓴 역사책을 나는 국토통일원 도서관에서 읽어 보았습니다

이 사람도 요동개념에 대해서 신랄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가 동원한 자료는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한 대목이었습니다

"패수출낙랑군누방현 동방과출어임패현 동입간해"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方과出於臨浿縣 東入干海"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바다에 흘러든다)

여기 "패수"를 모두 대동강 또는 청천강 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패수의 위치가 조금씩 북상해서 모두 청천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 나오는데 동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입간해(東入干海)"라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했습니다

이것은 "수경(水經)"(주2)이라고 하는 책의 기록입니다
물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중국 최초의 지리서입니다

그런데 이책에 패수를 이렇게 적었어요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모두 서쪽 바다로 흘러들어갑니다

동서남북의 방위 착각을 일으키지 않는 분이라면 아마 다 아실 거예요
우리 한반도의 물은 모두 "서입간해"지요

대동강도 서쪽으로 흘러들어가고 그 많은 물들이 모두 동쪽으로 흘러드는 물은
아마도 두만강 이외애는 없을 거예요

"서입간해(西入干海)""가 아마도 반도에 있는 수류의 방향일 겁니다

그런데 패수는 동쪽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동입간해"라 했어요
그런데 이 "패수"를 지금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지린"이라는 사람은 수경의 패수기록을 인용하고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

바로 우리 남쪽사학을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경"이러고 하는 책의 서문을 보면

수경은
오늘날 만리장성 남쪽과 양자강 이북 이 사이에 있는 물에 관한 기록이지
만주에 관한 기록이거나 바다나 대륙을 건너 뛰어서 한반도의 물에 대한 기록을 적은 책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거 아주 명쾌한 얘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한반도의 강물이 대동강(패수) 밖에 없나요 ?
청천강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등 얼마던지 많습니다

그런데 "수경"속에는 하필이면 대동강의 패수만을 뽑아서 적었을 리가 없습니다

수경이라고 하는 책의 서술범위가 장성이남의 중국 하천에 관한 기록이지
한반도의 하천에 관한 기록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한국사람들이
이 패수를 갖다가 대동강이다 청천강이다 하는 웃기는 소리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열하일기의 박지원 선생도 패수의 한반도 위치설에 탄식하였다)


열하일기를 적은 우리 실학의 대표 박지원 선생은 열하성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열하일기"라고 하는 책을 적었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중국의 패수를 직접 보고서 적은 글이 있어요

"或指大洞江 爲浿水 或指鴨綠江 爲浿水 或指淸川江 爲浿水 是朝鮮舊彊不戰自虞矣"
"혹지대동강 위패수 혹지압록강 위패수 혹지청천강 위패수 시조선구강역불전자우의"

라고 했습니다



"어떤 자는 대동강을 패수라 하고 어떤 사람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또 어떤자는 청천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나 이는 조선의 옛땅을 싸우지도 않고 남에게 내어주는 꼴이다"

라고 개탄하였습니다

"조선구강역불전자우의"라 !
"朝鮮舊彊不戰自虞矣"

요새 우리들도 이런짓 안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열하일기의 주인공 박지원 선생의 탄식처럼 사학적인 부조리가 우리에게 과연 없는지요

정말이지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상으로 한사군에 관한 결론을 내리고 시간이 많이 간 것같습니다만
기왕 내가 맡아가지고 나온 백제 강역에 관한 것 결론으로 말씀드리고

이 자리를 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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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독사방여기요 [讀史方輿紀要]


중국의 역사지리서.
저자 : 고조우(顧祖禹)
시대 : 1678년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고조우(顧祖禹:1631~1692) 찬술.
본편 130권.
1659년에 착수하여 1678년에 완성하였다.
내용은 중국 전역에 걸쳐 역대 주역(州域)의 지세(地勢)를 약술하고,
이어 성별(省別)로 부주현(府州縣)의 연혁 ·위치 ·산천 등을 적었으며,
끝에는 천독(川瀆:하천 등)으로 하도(河道)·조운(漕運)의 변천과 분야(分野:천문)에 관한 것을 실었다.

또 한(漢)민족을 중심으로 한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정치에의 참고를 목적으로 한 측면도 지니고 있다.
청본(淸本)은 수권(首卷)과 4권으로 묶어졌다.


(주2) 수경주(水經注)

중국 북위(北魏) 때의 학자 역도원이 저술한 중국의 하천지(河川誌).

40권.
황허강[黃河] ·화이허강[准河] ·양쯔강[揚子江] 등
1,252개의 중국 각지의 하천을 두루 편력하여,
하천의 계통 ·유역의 연혁 ·도읍 ·경승 ·전설 등을 기술하였다.

책의 이름은 원래 《수경(水經)》이란 저작(著作)이 있어서, 거기에다 주(注)를 붙인 것이다.

《수경》은 3세기경에 이루어진 작자불명의 책으로,
하천의 발원지·경류지(經流地)·합류지 또는 입해지(入海地) 등을 간단히 기록해 놓은 것으로서,

역도원은
그것을 골격으로 하여 자신의 광범위한 여행 경험과 많은 문헌을 통해 얻어낸 풍부한 지리적 지식을 훌륭하게 정리해 놓았다.

10세기 경부터 내용의 5권이 분실되어,
그 부분에 잔여의 부분을 충당하여 40권의 체재를 맞추는 등 체재 ·순서 등이 혼란을 빚었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중국에서는 이 보정(補訂) 작업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중에서도 전조망(全祖望)·조일청(趙一淸)·대진(戴震) 등의 연구업적이 중요한데,
이들의 연구결과의 결정판이 양서우징[揚守敬]의 《수경주소(水經注疏)》이다.

이것은 청(淸)나라 말과 중화민국 초에 그 일부가 간행되었는데,
그 일을 슝훼이천[熊會貞]이 이어 완성시켜 1957년에 출판되었다.


국회 국사청문회 속기록에 있는 임승국 교수님의 진술내용
"한사군"에 대한 연재를 오늘로서 마감합니다

마감하는 의미에서 그동안 인터넷 상에서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임승국 교수님의 글을
올려 봅니다

처음부터 국회 속기록을 다 읽으신 분들은 "아하" "이러한 내용이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역사에 자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국회청문회 임승국 (5-8) "漢四郡 사건'의 실상과 朝鮮四郡" by 임승국


'漢四郡 사건'의 실상과 朝鮮四郡


저는 백제사를 연구한 사람이고, 주로 학계에서도 제가 주장한 것은 백제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단에 서면, '저사람, 백제사 얘기한다'라고 아주 판이 박혀 있어요.
백제사 얘기를 하도 많이 하다보니 이제는 저 자신도 판에 박혀 버렸나 봅니다.

오늘 한사군과 백제사를 강의하기로 되어있는데,
여기 오신 여러분들도 한사군에 대해 아주 깊은 인식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엊저녁에 정신문화원 원장(김철준)이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한국의 마피아 두목 알카포네'가 죽었어요.
아마 지금쯤 그 빈소에 드나드는 사람은 '마피아 잔당'일 겁니다.
그는 생전에 나하고는 피맺힌 원수였습니다.

고인이 된 사람한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매우 안되었습니다만,
漢四郡얘기가 나오면 그 분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요.

김철준은 '漢四郡이 있었다'는 사실이 한국사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Thanks very much for 한사군', 다시 말해서 한사군 수위론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신문에는 식민사관 청산을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민족사학자로 보도되었습니다.

신문기자들 신문쓰는 것 보면 기가 막히게 내 놓습니다.
국회에서 저와 김철준이 싸웠던 그 현장을 방청했던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기사는 못썼을 겁니다.


여기서 한사군에 대해서는 간략히 알아보겠습니다.
현재까지 학계에 남아있는 한사군의 설치문제, 도대체 한사군의 설치연대가 언제입니까?
서기전 108년이요.
좋아요.

그러면 서기전 108년에 설치된 낙랑·현도·진번·임둔이라는 4군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된 것은 무슨 군이죠?
낙랑군입니다.

낙랑군의 멸망연대는 언제입니까,
그럼? 313년!
전부 박사들만 모였네!

설치에서 멸망까지 도합 421년입니다.
중국의 역대왕조 가운데 하나의 왕조가 400년 이상 존속한 것이 몇개나 됩니까?
단 한개도 없습니다.

그럼 300년 이상 존속한 왕조는 몇개나 될까요?
그것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500년 이하의 왕조가 거의 없습니다.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이하가 없고 중국은 이상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선 역사의 질(質)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200년에서 250년 사이의 왕조가 4개 있었는데,
즉 한(漢)·당(唐)·송(宋)·명(明)나라입니다.

 그런데 한사군의 종주국가는 한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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