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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1-04 13:35
중국공산당의 문화파괴(네이버 지식인출처)
 글쓴이 : 스탈린
조회 : 6,670  

들어가는 말
 
문화란 한 민족의 영혼이며 이것은 인종과 토지, 이런 물질 요소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정신 요소이다.
 
한 민족의 문명사는 바로 그 민족의 문화(文化) 발전사이며, 민족문화의 철저한 훼멸은 곧 한 민족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휘황한 문명을 창조했던 그런 오랜 민족들은 아마 운 좋게 그들의 인종이 여전히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민족은 오히려 전통문화의 소실과 함께 완전히 소멸되었다. 예를 든다면 마치 사람들이 오늘날 중남미(中南美)의 토착인들과 옛적 마야민족을 동등하게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연속 5천년의 오랜 문명을 전승(傳承)한 나라로서, 그 문화에 대한 파괴는 곧 거대한 죄악임에 틀림없다.
 
반고(盤古)의 천지개벽’, ‘여와의 사람 만들기’, ‘신농(神農)이 백가지 풀을 맛보고’, ‘창힐(倉힐)이 문자를 만든 것’은 신(神)이 전한 문화의 시작이었다. “인법지(人法地), 지법천(地法天), 천법도(天法道), 도법자연(道法自然)”이란 도가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이 문화의 혈맥에 융입(融入)하였고, “대학(大學)의 도(道)는 밝은 덕을 분명히 하는 데 있다(大學之道,在明明德)”라고 하면서 공자는 2천년 전에 서당을 차려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대표로 하는 유교사상이 사회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서기 1세기 ‘자비로 널리 구도한다(慈悲普度)’란 석가모니 교의 불법(佛法)이 동(東)으로 전해지면서 중화문화는 더욱 풍부하게 되었다. 유(儒), 불[釋], 도(道) 삼가(三家)의 사상은 서로 어울려 빛을 뿌림으로써, 성당(盛唐)시기에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휘황한 절정에 올랐다.
 
비록 중화민족이 역사상 여러 차례 파괴와 타격을 받아왔지만, 우리의 전통문화는 줄곧 지극히 거대한 용합력(容合力)과 생명력을 표현해 왔고, 그 정화(精華)는 줄곧 유전해 내려왔다. ‘천인합일’은 우리 조상들의 우주관을 대표하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것은 사회적인 상식이며,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는 것은 사람으로서 최저한의 미덕이며, ‘충효절의(忠孝節義)’는 사람이 처세하는 표준이며,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과 사회의 도덕을 규범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중화문화는 성실, 선량, 화합, 포용 등 우수한 특징을 체현하였다. 백성들이 모시는 위패의 ‘천지군친사(天地君親師)’는 천지(天地)로 대표되는 신(神)을 공경하고, 군(君)으로 대표되는 사직(社稷)에 충성하며, 가정[親]을 중히 여기고, 사도(師道)를 존경하는 문화적 내포가 민간에까지 깊이 뿌리내렸음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는 천인의 조화를 추구하고 개인적 수양을 중시하였다. 또 유불도(儒彿道) 수련의 신앙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포용(包容)할 수 있었으며, 발전할 수 있었고, 인간의 도덕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사람에게 올바른 믿음[正信]이 있도록 하였다.
 
법률과 같은 이런 종류의 강제적인 구속과는 달리 문화적인 구속이란 유연하다. 법률은 범죄 후의 징벌에 치중하지만, 문화는 도덕적인 교육을 중히 여기면서도 오히려 범죄를 예방하는 작용을 일으킨다. 한 사회의 윤리와 가치관은 흔히 문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반영되어 나오기 마련이다.
 
중국 역사상 전통문화가 전성기에 이른 당조(唐朝)는 바로 중국의 국력이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으며, 과학도 이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 당시 유럽, 중동,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모두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당나라의 문화와 과학을 배워오게 하였다. 주변 국가들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여겼으며 수많은 나라들이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왔고 번역하여 자국에 소개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진(秦)나라 이후 중국은 수(隨), 당(唐), 원(元), 청(淸) 왕조와 기타 소수민족이 할거한 왕조를 포함해서 흔히 소수민족에게 점령 당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거의 모두 한화(漢化)하였는데, 이는 중국 전통문화의 거대한 동화력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먼 곳의 사람들이 불복할 경우, 학문과 덕을 닦으면 자연히 온다(故遠人不服,則修文德以來之).”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정권을 탈취한 이후 국력을 기울여 민족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절대로 공산당이 산업화에 열광하거나 또는 서양문화에 치우치려고 해서 나타난 일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이는 공산당이 의식형태에서 민족의 전통문화와는 마치 물과 불처럼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공산당의 민족문화에 대한 파괴는 조직적, 계획적, 체계적이었으며 아울러 국가폭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공산당의 설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공산당의 중국문화에 대한 ‘혁명(革命)’은 여태껏 멈춘 적이 없으며 또한 확실하고도 철저히 중국문화의 ‘생명[命]’을 제거[=革]하려고 시도해 왔다.
 
더욱 악랄한 것은, 중국 공산당은 전통문화에 대하여 줄곧 바꿔치기를 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전통문화를 이탈한 후에 생긴 궁중(宮中) 암투, 권모술수, 독재정치 등등을 ‘더욱 널리 확대 발전(發揚光大)’시켰고, 공산당의 일련의 선악 표준, 사유방식과 언어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당(黨) 문화’만이 비로소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심지어 ‘당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일보로 중국의 진정한 전통문화를 저버리게 하였다.
 
이는 중국에 재앙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의 마음이 비단 도덕적 구속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중공에 의해 그것의 사악한 학설을 강요받게 되었다.
 
1. 공산당은 왜 민족문화를 파괴하는가?
 
(1) 전통문화
중국인의 진정한 문화는 5천년 전에 황제(黃帝)가 창립하였다. 때문에 황제(黃帝)를 ‘인문초조(人文初祖)’라고 한다. 실제상 황제는 또한 중국 도가사상(즉, 黃老之學)의 창시인이다. 유가사상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이런 까닭에 공자는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거닌다.(志於道,據於德,依於仁,遊於藝.)”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라고 했던 것이다. 천지, 음양, 우주, 사회와 인생의 법칙을 기술(記述)한 『주역』을 유가에서는 ‘모든 경전의 으뜸[群經之首]’이라고 받드는데, 그 중의 예측학은 현대과학마저도 따르기 힘들다. 한편 불가(佛家)사상, 특히 선종(禪宗) 사상은 지식인들에게 은연중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유가사상은 전통문화 중 ‘입세(入世 역주: 속세에 참여한다는 의미)’ 부분으로서 가족윤리를 중시한다. 그 중에서도 ‘효(孝)’는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백가지 선(善) 중에 효가 으뜸이다(百善孝爲先)’라고 주장한다. 공자는 ‘인, 의, 예, 지, 신’을 제창했지만 또한 “효도하고 공경하는 그것이 바로 인(仁)의 근본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가족윤리는 자연히 사회윤리로 발전할 수 있다. ‘효(孝)’를 위로 연장하면 군주에 대한 신하의 ‘충(忠)’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대함에 공경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자가 윗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其爲人也孝悌,而好犯上者,鮮矣.)”란 말이 있다. 공경함을 나타내는 ‘제(悌)’란 형제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횡적으로 뻗어나가면 친구 사이의 ‘의(義)’로 될 수 있다. 유가는 가족 중에서 부모는 자애롭고[父慈], 자식은 효도하며[子孝], 형은 동생에게 우애가 있고[兄友], 아우는 형을 공경할 것[弟恭]을 제창한다. 그 중 ‘자애[慈]’를 아래로 연장하면 신하에 대한 군주의 ‘인(仁)’으로 될 수 있다. 오로지 가족 중에서 전통을 유지한다면 사회윤리 역시 자연히 유지될 것이며,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修身齊家, 治國平天下)’할 수 있는 것이다.
 
불가와 도가사상은 전통문화 중에서 ‘출세(出世 역주: 속세를 벗어난다는 의미)’한 부분이다. 일반 민중들의 생활에 대한 불도(佛道)의 영향은 없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도가사상과 연원이 깊은 한의, 기공, 풍수, 점치기와 불가의 천국과 지옥,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등의 사상과 유가윤리는 중국 전통문화의 핵심이다.
 
유(儒), 불(佛), 도(道) 3가지 신앙은 중국인에게 한 세트의 아주 안정한 도덕체계를 수립해 주었는데 이른바 “하늘이 변치 않는 한 도(道) 역시 변하지 않는다.”이다. 이 한 세트의 도덕체계는 사회가 존재하고 안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기초였다.
 
정신적 층면(層面)에 속한 도덕은 흔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문화의 한 가지 중요한 작용이라면 바로 도덕체계를 통속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4대 명작을 예로 든다면, 『서유기(西遊記)』는 그 자체가 바로 신화(神話)이고, 『홍루몽(紅樓夢)』 첫 편에 등장하는 대황산 무계절벽의 공공대사(空空大士), 묘묘진인(渺渺眞人)과 통령보옥(通靈寶玉)과 나누는 대화와 신화(神話)는 『홍루몽』을 관통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또 『수호전(水滸傳)』 첫 편에 나오는 “홍태위가 요괴에게 잘못 걸려들다(洪太尉誤走妖邪)”란 단락은 양산박 108명 장수의 내력에 대한 신화이고, 『삼국지(三國誌)』는 자연 재해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분분한 세상사 끝이 없어도 천수(天數)는 망망하여 벗어나지 못하네.(紛紛世事無窮盡,天數茫茫不可逃)”라는 천명관(天命觀)으로 마무리 짓는다. 또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誌)』 혹은 『설악전전(說岳全傳)』도 다 유사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것은 절대로 소설가들의 창작과정에서 생긴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중국 지식인들의 자연계와 인생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였다. 그들의 문화작품은 후세 사람들에게 대단히 깊은 영향을 남겨 주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의(義)’를 언급할 때 흔히 단순히 하나의 개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며, 관우(關羽)라는 ‘의박운천(義薄雲天)’의 인물이, ‘토산에 갇혀 3가지 일을 약속하고’, ‘백마(白馬)의 포위’와, ‘다섯 관문을 지나고 여섯 장수의 목을 베며’, ‘화용도(華容道)’에서 최후에 맥성(麥城)으로 패배하기까지 ‘의리와 절개를 지키고, 부자(父子)가 모두 신(神)으로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충(忠)’을 이야기하자면 자연히 악비의 정충보국(精忠報國)을 연상하는데 ‘12 금패(金牌)’로부터 ‘풍파정(風波亭)’에 이르는 이야기가 그러하다.
‘충의(忠義)’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의 찬미는 이렇듯 지식인들의 창작으로 다채롭고 생생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독자들 앞에 펼쳐졌다. 다시 말해서 추상적인 도덕설교를 문화적인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형상화한 것이다.
 
도가는 ‘진(眞)’을 주장하고, 불가는 ‘선(善)’을 주장하며, 유가는 ‘충서(忠恕)’와 ‘인의(仁義)’, ‘겉으로 형상은 달라도 안으로 성리(性理)의 동일함을 실증하나니......사람들과 더불어 선(善)으로 돌아가고자 함’을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유불도’ 신앙을 근본으로 하는 전통문화의 가장 가치 있는 곳이다.
 
전통문화 중에는 ‘천(天), 도(道), 신(神), 불(佛), 명(命), 연(緣),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염(廉), 치(恥), 충(忠), 효(孝), 절(節)’ 등이 관통하고 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일생토록 일자무식(一字無識)일 수도 있지만, 전통연극과 평서(주 : 評書, 중국 민간 문예의 일종, 장편 이야기를 부채 등 소도구를 이용하고 손짓을 해 가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화형식은 모두 민간 백성들이 전통적 가치관을 얻는 데에 중요한 경로가 된다.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전통문화 파괴는 곧바로 직접 중국의 도덕을 망가뜨리는 것이며 또한 사회안정과 상화(祥和)로운 기초를 파괴하는 것이다.
 
(2) 공산당의 사설(邪說)과 전통문화의 대립
 
공산당의 ‘철학’은 중국의 진정한 전통문화와 마침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전통문화는 천명(天命)을 경외(敬畏)하는 것이다. 공자는 “생사는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死生有命,富貴在天)”라고 했다. 불가와 도가사상은 모두 유신론(有神論)이다. 그러므로 생사윤회와 선악에는 보응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공산당은 비단 ‘무신론(無神論)’을 신봉할 뿐만 아니라 ‘무법무천(無法無天)’이다. 유가는 가정을 중요시하나 『공산당 선언』 중에서는 ‘가정의 소멸’을 명확하게 표시하였고, 전통문화는 ‘명이하지변(明夷夏之辨, 역주 : 공자의 말로, 이민족과 중화민족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나 『공산당 선언』은 ‘민족의 소멸’을 고취하였고, 유가문화는 ‘인자애인(仁者愛人)’를 중요시하나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주장하고, 유가는 임금에 충성하고 애국(愛國)할 것을 주장하나 『공산당 선언』은 오히려 ‘조국의 소멸’을 제창하고 있다.
 
공산당이 중국에서 정권을 탈취하고 공고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인륜을 부패시키는 사상이 중국에서 자리잡아야만 했다. 마치 마오쩌둥이 말한 것처럼 “무릇 하나의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늘 먼저 여론을 조성해야 하며, 늘 먼저 의식형태 방면의 작업을 해야만 한다.” 중공도 보았다. 순전히 총으로 가까스로 지탱해 온 서양사상의 쓰레기 공산주의 ‘학설’이란 5천년 중국역사의 박대정심(博大精深)한 문화와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예 하는 김에 끝장을 보자는 심사로 중화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해야만 마르크스-레닌 ‘주의(主義)’가 중국에서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음을 보아낸 것이었다.
 
(3) 민족문화는 공산당 독재의 걸림돌
 
마오쩌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승려가 자기 마음대로 우산을 드는 것처럼 법도 없고 하늘도 없다(無法無天)!” 민족문화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이 중공의 ‘무법무천(無法無天)’에 거대한 걸림돌이었다.
 
전통문화 중의 ‘충(忠)’은 절대 ‘어리석은 충성’이 아니다. 민중의 눈에 황제는 ‘천자(天子)’이고 그 위에 또 ‘하늘[天]’이 있다. 황제도 영원히 정확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황제의 과오를 지적할 수 있도록 간관(諫官)을 둘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중국의 역사기록제도[信史制度]는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황제의 일언일행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사대부(士大夫)는 가히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었으며, 황제의 잘잘못은 유가 경전으로 가늠하였다. 심지어 임금이 부패하고 극악무도할 때에는, 사람들이 일어나 그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예컨대 성탕[成湯, 역주 :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을 치고 상(商)나라를 세운 임금]의 걸왕 토벌과, 무왕[武王, 역주 :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폭군 주왕(紂王)을 치고 주(周)나라를 세운 임금]의 주왕 토벌 등은 전통문화에 입각해서 본다면, 비단 충성스럽지 아니한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하늘의 뜻에 따라 도를 행한 것이다. 문천상(文天祥)이 남침한 몽고군에게 포로가 된 후, 원래 송나라 황제가 친히 나서서 그에게 투항할 것을 권고했지만 문천상은 이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유가는 “귀한 것은 백성이요, 그 다음이 사직(社稷)이고, 임금은 그 다음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것을 독재적인 중국 공산당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공산당이 원하는 것은 ‘핵심 인물을 신격화하는 것’이지 그 위에 또 ‘천(天)’, ‘도(道)’, ‘신(神)’ 등이 있으며 이런 전통문화 중의 뿌리 깊은 개념이 그것을 구속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만약 전통문화의 표준으로 중공의 일체를 가늠한다면 모두 하늘의 뜻을 어기고 도를 배신한 큰 죄악임을 알고 있었으며, 만약 전통문화가 여전히 존재한다면 인민은 공산당을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것이라고 칭송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지식인들은 ‘끝까지 간언(諫言)하고’, ‘사생취의(捨生取義)’하며, ‘정권보다는 백성이 귀하다’는 등의 가치관을 유지하고 공산당의 어용 문인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전 인민의 ‘사상통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전통문화 중 천지자연에 대한 경외(敬畏)는 중공이 ‘천지를 개조하고.’ ‘천지와 투쟁한다.’는 슬로건에 걸림돌이고, 전통문화 중 ‘인명(人命)은 하늘에 달려있다’는 식의 생명 존중은 중공의 ‘집단학살’식 테러통치에 걸림돌이며, 전통문화 중 ‘천도(天道)’야말로 도덕과 선악을 가늠하는 최종적 표준이라는 것은 중공의 도덕에 대한 해석권을 빼앗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중공은 전통문화는 공산당이 정권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인정하였다.
 
(4) 전통문화가 중공의 집권 합법성에 도전
 
전통문화 중에는 ‘유신론(有神論)’과 ‘천명론(天命論)’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천명(天命)’을 승인한다면 곧 자신이 ‘도가 있는 현명한 군주(有道明君)’라는 사실과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명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만약 ‘유신론’을 승인한다면 곧 ‘왕권은 신(神)이 준 것’임을 승인해야 한다. 그러나 중공의 집권 이론은 “여태껏 무슨 구세주가 없었으며, 또한 신선(神仙)이나 황제(皇帝)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인류의 행복을 창조하려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 의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공은 ‘역사적(歷史的) 유물론’의 관점을 선전하며 ‘공산주의’가 ‘인간 천당’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인간 천당’으로 가는 길이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선봉대’인 공산당의 영도에 의지해야 한다고 선양(宣揚)해 왔다. 그러므로 유신론을 승인하는 것은 직접 중공의 집권 합법성에 대한 도전이었다.
 
2. 공산당은 어떻게 전통문화를 파괴했는가?
 
중국 공산당의 일체는 모두 그 정치를 위해 복무한다. 정권을 탈취하고 자신의 폭정을 유지하고 공고(鞏固)하게 하기 위하여, 중공은 사악한 당성(黨性)으로 인성(人性)을 대체할 필요가 있었으며, ‘거짓, 사악, 투쟁’이란 당(黨) 문화로 중국 전통문화를 대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파괴와 대체는 단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물 고적과 고대 서적뿐만이 아니며, 더욱이 인간의 행위, 사상과 생활방식 등 여러 면에서 사람들의 전통적인 가치관념, 인생관과 세계관을 개변시켰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방면으로 문화적으로 그다지 긴요하지 않은 표상(表象)을 ‘정화(精華)’라고 여기며 보존해 오면서 다시 이러한 ‘정화’를 얼굴로 삼아 뒷면의 내포를 당(黨) 문화로 바꿔치기하였다. 그런 다음 중국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는 허울을 내걸고 인민과 국제사회를 기만하였다.
 
(1) 3교를 함께 소멸
 
전통문화가 기왕에 유, 불, 도 사상을 근본으로 한 까닭에 중공이 문화를 파괴하는 첫 걸음은 바로 그들의 세간에서의 구체적인 체현인 종교를 깨끗이 제거하는 일이었다.
 
상기 3교는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모두 파괴 당한 적이 있다. 불교를 예로 든다면, 역사상 4차례 큰 법난(法難)을 겪었는데 역사로 칭하면 이를 ‘삼무일종(三武一宗, 역주: 멸불정책을 실시한 황제들의 연호에 武 3명, 宗이 한 명이라 삼무일종이라 하며 멸불정책을 의미)’ 멸불(滅佛)이라고 한다. 그러나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와 당무종(唐武宗)은 모두 도교를 일으키는 대신 불교는 소멸시켰고, 북주(北周) 무제(武帝)는 불교와 도교를 함게 소멸시켰으나 유교(儒敎)는 존중하고 숭상했다. 후주(後周 역주: AD 907-960 사이 중국 오대십국시대에 5대에 속한 왕조의 하나)의 세종(世宗)이 불교를 소멸한 것은 단지 불상을 녹여 돈을 만들기 위한 것이며, 유교와 도교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중공만이 3교를 함께 소멸시켰다.
 
중공은 정권을 잡자마자 사찰을 불태우고 스님이나 비구니를 환속(還俗)하도록 강요했는가 하면, 기타 종교 장소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파괴하였다. 60년대에 이르러 중국의 종교 장소는 이미 몇몇 곳에 불과했다. 문화혁명 시기의 이른바 ‘4가지 낡은 것 타파(破四舊)’는 더더군다나 종교와 문화에 대한 한 차례 대겁탈이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는 동한(東漢) 초기에 낙양성 밖에 지은 것으로 중국 불교의 발상지였다. 그러나 ‘4가지 낡은 것 타파’ 시에 당연히 재앙을 피할 수 없었다. ‘사찰 옆에 백마사 생산대대가 있었는데 당지부 서기가 농민들을 거느리고 백마사에 가서 혁명을 하였다. 결국 어디라 할 것 없이 부수는 바람에 1천여 년 전 요(遼)나라 때 만든 18나한 조각이 부서졌고, 2천여 년 전 인도 고승이 갖고 온 패엽경(貝葉經)이 불타버렸다. 그리고 세상에 희귀한 보물인 옥마(玉馬)가 산산 조각났다. 몇 년 후, 캄보디아의 해외 망명 군주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가 백마사를 참배하겠다고 신청하자, 당시 중국 총리였던 저우언라이가 급히 베이징 자금성 안에 있던 패엽경과 베이징 근교 향산 벽운사(碧雲寺)의 청나라 시대 18나한을 낙양으로 운송하라고 지시를 내려, 가짜문화재로 대체해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였다.(딩수(丁抒)가 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불태워졌는가?)중에서 인용)
 
1966년 5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이 ‘혁명’은 확실히 중국문화의 목을 자른 셈이었다. 그해 8월부터 시작해서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뜨거운 불길이 중국 대지를 휩쓸었다. 사찰, 도관(道觀), 불상과 명승고적, 서예와 그림, 골동품은 ‘봉건주의, 부르주아, 수정주의’로 간주하여 즉시 홍위병들의 주요 파괴대상이 되었다. 불상을 예로 든다면, 베이징 이화원(이和園) 만수산 꼭대기에 유리(琉璃)로 만든 천 개의 불상이 있었는데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함을 거쳐 단 하나도 제대로 남지 못했다. 수도가 이러하거니와 전국 각지 역시 다 이러했다. 심지어 멀리 떨어진 외딴 마을까지도 이런 재앙이 미쳤다. 아래에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보도록 하자.
 
“산시(山西)의 다이(代)현에 천대사(天臺寺)가 있었는데 1천6백 년 전 북위(北魏) 태연(太延) 년간에 지은 것으로 조각상, 벽화는 그야말로 진귀한 명품이었다. 그곳은 비록 현성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자들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서 조각상이며 벽화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산시 저우즈(周至)현 경내에는 2천5백년 전에 노자가 『도덕경』을 강의하면서 후대에 남겨 준 누관대(樓觀臺)가 있었다...... 노자가 당시 경을 강의한 ‘설경대(說經臺)’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내에 50여 곳에 고적이 널려 있었다. 여기에는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세워준, 지금까지 1천3백여 년 역사를 갖는 ‘종성궁(宗聖宮)’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누관대 등 고적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도사들은 전부 강요로 그곳을 떠나야 했다. 도교의 규정에는, 도사들은 출가한 후, 영원히 수염과 머리를 깎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강제로 머리를 깎고 도복을 벗었으며 인민공사 사원으로 되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현지 농가의 사위로 변해버렸다......
 
산둥(山東)의 노산(노山)은 도가의 성지(聖地)였는데 태평궁, 상청궁, 하청궁, 두무궁, 화엄암, 응진관, 관제묘 등 곳곳의 ‘신상(神像), 공양 그릇, 경서, 문물, 묘비는 몽땅 파손 당하고 불에 타버렸다.’ ......
 
지린(吉林)시 문묘(文廟)는 전국 4대 공자묘 중의 하나였으나 ‘4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는 중에 심한 훼손을 당했다.”(이상은 모두 딩수(丁抒)가 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불태워졌는가?』중에서 인용)
 
(2) 종교를 말살한 특수한 방식
 
레닌은 “보루(堡壘)는 내부에서부터 공격하여 파괴하는 것이 가장 쉽다.”고 말하였다. 중공은 마르크스-레닌의 후예로서 이 말 한마디에 대해 자연히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한 바가 있었다.
 
석가모니부처는『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그가 열반한 후 마왕(魔王)이 승녀, 비구니 남녀 거사(居士)로 환생하여 불법을 파괴하고 교란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우리는 물론 석가모니부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검증할 방법은 없지만, 불교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파괴는 확실히 통일전선에서 시작하였으며 일부 출가인들이 시작한 것이었다. 심지어 지하당원을 직접 종교 내부에 침투시켜 파괴하였다. 문화대혁명의 한차례 비판대회에서 중국 불교협회 부회장을 맡은 자오푸추(趙樸初)에게 이렇게 질문한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공산당원인데 어찌하여 불교를 믿는가?”
 
석가모니부처는 ‘계(戒).정(定).혜(慧)’를 통하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 正覺)을 수련해 냈으며, 열반 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간곡히 가르치기를, “계율을 지켜야 한다. 절대 범(犯)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파계(破戒)한 사람은 천(天)용(龍)귀신(鬼神)이 모두 증오한다. 나쁜 소리[惡聲]가 널리 퍼진다...... 죽으면 곧 지은 업(業)에 따라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된다. 액운을 다 겪고 나서야 지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데, 그 다음에는 아귀(餓鬼)나 축생(畜生)의 몸을 반복적으로 받게 된다. 마치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해탈할 시기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런 불타(佛陀)의 경고는 정치승려들에겐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불과했다. 1952년 중국 대륙에서 ‘중국불교협회’를 설립할 때 중국 공산당은 사람을 파견하여 출석하였고 회의에서 수많은 교도들은 불교의 청규계율(淸規戒律)을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아울러 이런 전장(典章)은 수많은 청춘 남녀를 해칠 수 있다고 하였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교를 믿는 것은 자유인데 승려가 장가들고 비구니가 시집가며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것도 모두 반드시 자유로워야 하며 누구도 상관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허운(虛雲) 법사는 불교가 곧 소멸될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는 일어나서 항변하였으며 계율과 불교복장을 보존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허운법사는 ‘반혁명’으로 몰렸고 방장실에 감금하고 음식물조차 주지 않았다. 대소변도 밖으로 보내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명령을 내려 황금, 은, 총을 내놓게 하였다. 허운은 “없다.”고 말한 후 잔혹한 구타를 당해 머리가 터지고 피를 흘렸으며 근육이 끊어졌다. 그 당시 허운은 이미 112세였다. 군경(軍警)은 그를 평상에서 끌어내려 바닥에 넘어뜨렸다. 이튿날 다시 왔을 때 허운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또 혹독하게 구타하였다.
 
1952년에 설립한 중국불교협회와 1957년에 설립한 중국도교협회는 그들의 발기서(發起書)에서 모두 “인민정부의 영도 하에”라고 명확히 표시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당의 영도 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양 교(敎)는 모두 생산건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정부 정책 등등을 실행하겠다고 표시하였다. 완전히 세속화한 조직이 된 것이다. 아울러 정진하며 계율을 지키는 출가인들은 오히려 반혁명분자, 회(會)도(道)문(門)이라는 모자를 씌워 “불교와 도교의 대오를 순정히 하자!”란 혁명구호 하에 구금하거나 노동 개조시키고 심지어는 처형까지 하였다.
서양에서 전해 온 기독교와 천주교도 불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58년 출판한 『중공은 기독교를 어떻게 박해했는가』 란 책의 통계를 보면 문서상으로 폭로한 자료만으로도, 대륙의 성직자 중 지주, 악질 토호라는 누명을 씌워 살해한 사람의 수가 8,840명에 달했다. 그리고 노동개조를 당한 사람이 39,200명에 달했다. 한편, ‘반혁명’이란 누명을 쓰고 살해당한 사람이 2,450명에 달하였으며 이 죄명으로 노동개조 당한 사람도 24,800명에 달했다(바이즈(百志)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 이론과 실천』중에서 인용)
 
종교는 세속을 벗어나 수행하는 법문으로서 ‘피안(彼岸)’과 ‘천국(天國)’을 중히 여김은 의심할 바가 없다.
 
석가모니는 전에 인도의 왕자였으나 청정(淸靜) 적멸(寂滅)의 해탈을 위하여 왕위를 포기하고 산림 속에 들어가 힘들게 수행하였다.
 
예수가 도를 이루기 전에 사탄은 그를 데리고 산 위에 갔고 천하 만국의 영화(榮華)를 그에게 보여주며 “네가 만약 나에게 허리를 굽히고 절하면 나는 이 일체를 너에게 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의 통일전선 전술에 말려든 정치승려, 정치목사들은 오히려 ‘인간불교’, ‘종교는 진리이지만 사회주의도 진리이다.’ 등 일련의 거짓말과 “이 세상과 저 세상은 모순되지 않는다.”란 말들을 만들어냈으며 이를 통해 출가인들에게 현세(現世)의 행복과 부귀영화를 추구하도록 하고 종교의 교의와 내포를 변질시킬 것을 고무 격려하였다.
 
불교는 살인을 금지하는데 중공은 진반(鎭反)할 때 사람들을 마구 죽였고 정치승려들은 “반혁명을 죽이는 것은 더욱 큰 자비이다.”란 설법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에는 직접 승려들을 전선에 내보내 살인하게 하였다.
 
기독교의 예를 들어보자. 우야오쭝(吳耀宗)은 1950년에 ‘자치(自治) ×자양(自養)×자전(自傳)’이란 ‘3자(三自)’교회를 만들었다. 말로는 제국주의와 연결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역주 : 직역하면 ‘미국에 반대하고 조선(북한)을 원조한다’는 의미로 한국전쟁을 미국의 북한침략으로 단정짓고 북한을 돕기 위해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함]’에 투입한다고 하였다. 그의 한 친구가 ‘3자’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20여 년 동안 갇혀 갖은 매질과 치욕을 당하였다. 그 친구는 우야오쭝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예수께서 하신 기적[神跡]들을 어떻게 보느냐?” 우야오쭝은 “나는 그것들을 모두 버려버렸다.”고 대답하였다.
 
예수의 기적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천국을 승인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의 천국마저 승인하지 않는데 어찌 기독교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야오쭝은 오히려 3자교회의 창시인이 되어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이 되었다. 그가 인민대회당에 들어갈 때 예수가 말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당신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는 계명 중의 첫째이자 아울러 가장 큰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게.”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중국 공산당은 “절의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와 비구니더러 마르크스주의를 배우도록 강요하고 강제세뇌를 강화하였으며 승려, 비구니가 노동에 참가하도록 강요하였다. 예를 들어 저장성 닝버에는 ‘불교공장’이 하나 있고 그곳에서는 25,000명에 달하는 이전의 승려, 비구니들의 노동력을 짜낸다. 더욱 황당한 것은 중국 공산당은 스님과 비구니를 결혼하도록 장려하여 불교신앙을 와해하였다. 예를 들어 1951년 3.8절(역주: 여성의 날) 전에 후난성 창사 부녀연합회는 전 성(省)의 비구니들에게 반드시 며칠 내로 결혼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외 젊고 힘센 남자 승려들은 전쟁에 참가할 것을 강요하였고 전쟁터에 보내 총알받이를 만들었다!”[바이즈(百志) 『중국 공산당의 종교탄압 이론과 실천]중에서 인용]
 
중국의 각종 종교단체는 공산당의 폭력적인 탄압 하에 와해되었다. 불교계, 도교계의 진정한 엘리트들은 탄압 당하고 남은 사람들 중 아주 많은 이들이 환속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비밀 공산당원으로서 전문적으로 가사, 도포, 목사의 옷을 입고 불경, 도장(道藏), 성경을 왜곡하며 이런 경전들 속에서 중국 공산당의 운동을 위한 근거를 찾아주고 있다.
 
(3)문물파괴
 
문물에 대한 파괴 역시 중공이 전통문화를 훼멸한 중요한 부분이다. ‘4가지 낡은 것의 파괴(破4舊)’ 중에서 지식인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아주 많은 유일한 희귀본과 서화(書畵)들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거나 혹은 펄프로 되었다. 장보쥔(章伯鈞)의 집은 장서가 1만권을 넘었으나 홍위병 우두머리가 이것으로 불을 지펴 난방을 하고 남은 것은 종이공장에 보내 펄프로 만들었다.
 
서화표구 전문가인 훙츄성(洪秋聲) 노인은 사람들에게 고대 서화의 ‘신의(神醫)’로 불렀으며 무수한 절세의 가작(佳作)들을 표구하였다. 예를 들어 송나라 휘종 황제의 산수화, 소동파의 대나무 그림, 명대(明代)의 유명한 화가인 원정명(文征明)과 당백호(唐伯虎)의 그림들이다. 몇 십년 동안 그가 표구한 수백가지의 고대 서화는 대다수가 국보급 소장품에 속했다. 그가 심혈을 다하여 소장한 이름난 서화들이 4가지 낡은 것을 파괴한다는 미명하에 모두 불태워졌다. 그후 훙선생은 눈물을 머금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백여 근의 서화가 아주 오랫동안 불에 탔습니다!” (딩수(丁抒)가 쓴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불태워졌는가?』중에서 인용)
 
“세상 일은 신진대사가 있기 마련
지난 일은 과거요 새로 오는 것은 지금인데
강산은 뛰어난 명승고적을 남겼으니
우리들은 다시 오른다네……
 
人事有代謝,往來成古今,江山留勝跡,我輩復登臨……”    
 
현대 중국인들이 만약 역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기억이 있다면 맹호연(孟浩然)의 시 「여럿이 더불어 현산에 오르다(與諸子登峴山)」를 읊으면 아마도 유달리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강산의 명승고적’도 4가지 낡은 것을 파괴한다는 광풍 속에 짓부셔지고 소실되었다. 왕희지가 쓴, 천년을 내려온 『난정집서(蘭亭集序)』의 난정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희지 본인의 묘마저 훼손되었다. 명대의 저명한 문필가 오승은(吳承恩)의 장쑤(江蘇) 옛집도 헐렸고 오경재(吳敬梓)의 안후이(安徽)에 있던 옛집도 헐렸다. 소동파가 직접 쓴 『취옹정기 (醉翁亭記)』라는 비석도 홍위병들에 의해 깨어졌고 비석 위의 글자들도 지워졌다……
 
중국 문화의 이런 정화(精華)들은 수 천년 동안 전승해 내려온 것으로 일단 훼손되면 복원할 수 없다. 그러나 중공은 오히려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아주 떳떳하게 없애버렸다. 우리가 영불(英佛) 연합군이 정원 중의 으뜸인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워 없앤 데 탄식하고, 침략자들이 훼손한 『영락대전(榮樂大全)』에 대해 탄식할 때, 우리는 왜 중국 공산당의 파괴가 침입자들보다 더욱 광범하고 더욱 지속적이며 더욱 철저했음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4)정신방면의 훼손
 
중공은 물질방면에서 종교와 문화를 훼손한 것 외에 또 모든 방법을 다하여 정신적으로 사람들의 신앙과 문화에 대한 승인을 훼손하였다.
 
예를 들면 중공은 회교도들의 풍속이 4가지 낡은 것에 속한다고 여기고 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회교도 농가집과 청진사(淸眞寺 역주: 회교 즉, 이슬람교 사원)에 돼지를 기르도록 명령하였으며 매 가구마다 매년 두 마리씩 바치게 하였다. 홍위병은 심지어 티벳불교의 제2대 활불인 판첸라마에게 강제로 대변을 먹였고 하얼빈 최대의 근대사찰인 극락사(極樂寺)의 스님 3명에겐 종이로 만든 팻말을 들게 했는데, 위에는 “불경은 무슨 불경인가? 모두 헛소리 치는 것이다.”라고 씌여 있었다.
 
1971년 마오쩌둥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린뱌오(林彪)는 도망가다가 몽고의 운둘칸(Undurkhan)에서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나중에 린뱌오가 살던 베이징 마오자완에서 공자어록을 뒤져냈을 때 전국에서는 공자를 미친듯이 비평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량쇼우(梁效)는 『홍기(紅旗)』 잡지에서 『공구 그 사람(孔丘其人 역주: 구(丘)는 공자의 이름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존경 받던 스승인 공자를 폄하한 글.)』이란 글을 발표하여 공자를 ‘역사를 뒷걸음치게 한 복귀광’이자 ‘허위적이고 교활한 정치 사기꾼’이라고 묘사했으며 공자를 추하게 만든 애니메이션과 노래가 잇달아 세상에 나왔다.
 
이렇게 종교와 문화의 장엄함과 신성함을 깡끄리 파괴하였다.
 
(5) 끊임 없는 파괴
 
중국 고대에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현(縣)까지만 미쳤고 현 이하는 전부 종족(宗族)자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므로 진시황의 분서갱유이든 4차례의 멸불(滅佛)정책이든 모두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온 운동으로서, 이런 파괴는 중앙의 권력이 닿지 않는 곳까지 철저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불가와 유가의 전적(典籍)과 사상은 민간에서 거대한 생존공간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공은 사춘기 중학생들까지 선동하여 ‘4가지 낡은 것을 파괴(破4舊)’하는 운동을 진행했는데 오히려 전국적으로 일종의 ‘자발적이며 열정적인’ 성격을 띤 풀뿌리 운동이었다. 동시에 ‘마을마다 당지부가 있는’ 엄밀한 사회통제체계로 인해 이런 ‘혁명’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모든 사람, 모든 지역으로 뻗쳐 나갔다.
 
아울러 역사에서 그 어떤 황제도 폭력을 사용한 외에, 중공처럼 비방하고 매도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들이 가장 신성하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을 송두리째 뽑은 적은 없었다. 의식형태의 소멸은 때론 단순한 물질적인 소멸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오래가는 것이다.
 
(6) 지식인 개조
 
중국의 한자(漢字)는 5000년 문명의 정화(精華)로, 자형(字形), 자음(字音)에서부터 이로 만들어진 성어(成語)와 전고(典故)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오한 문화적 내포를 포함하고 있다. 중공은 한자를 간체(簡體)로 만들고 이외에 병음화 정책을 채택하여 살아있는 언어 문자 중에서 문화 중의 일체 전통을  없애려 하였다. 나중에 도저히 현실적으로 실시할 수 없게 되어서야 그만두었다. 그러나 전통문화를 이어받은 지식인들게는 이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1949년 이전에 중국에는 약 200만 명의 지식인이 있었다. 비록 그들 중 일부는 서양에 유학을 갔다 온 사람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부 유가 사상을 이어 받았다. 중공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사대부계층 사람들의 사상이 민간의 의식형태에 적지 않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9월 중공은 베이징대학에서부터 기세 높게 지식인들의 사상개조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성실한 역사청산운동을 조직하여 그 중에 반혁명분자를 청리하였다.
마오쩌둥은 본래 지식인들을 싫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하나의 진리를 알아야 하는 바, 많은 지식인들은 사실상 가장 무식한 노동자×농민보다 때로는 지식이 더 적다.”
 
“개조하지 않은 지식인과 노동자×농민을 비교할 때 지식인은 정신적으로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체 역시 깨끗하지 못하다. 가장 깨끗한 것은 그래도 노동자와 농민이다. 비록 그들의 손은 검고 발에는 쇠똥이 묻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지식인들에 대한 중공의 박해는 여러 가지 형식의 대비판으로 착수하였다. 1951년, 행걸판학(行乞辦學)의 우쉰(武訓 역주 : 1838-1896 원래 집안이 가난하여 구걸로 모친을 먹여 살려 효자 거지로 알려졌다. 나중에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는 구걸한 돈으로 학교를 만들었다)을 비판하는 데부터 1955년 마오쩌둥이 직접 후펑(胡風)을 반혁명으로 몰아 세울 때까지만 해도 공산당은 지식인들을 아직까지는 특별한 부류로 갈라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1957년 전통 종교에 통일전선 전술을 통해 아주 고분고분하게 만든 이후 중공은 지식인들에게 손을 뻗쳤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반우파 투쟁이다.
 
1957년 2월말, 중국 공산당은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호소하면서 지식인들에게 공산당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라고 격려하면서 말한 자는 죄가 없다라고 간절하게 표현하였다. 일찍이 중공의 진반(鎭反),숙반(肅反)과 당이 일체를 지도하고 당이 문외한으로서 완전히 모르는 과학, 철학, 문화예술 영역에서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 지식인들은 중국 공산당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는구나 싶어서 내심의 말을 꺼내기 시작하였고 하는 말도 갈수록 격렬해져 갔다.
 
세월이 지난 후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지식인들의 중공에 대한 비판이 한계를 넘는 상황 하에서 마오쩌둥이 더는 참을 수 없자 할 수 없이 반격을 가한 것이라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1957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글을 써서 당내 고위 간부들에게 전달하였다. 글에서 “최근 한 시기, 우파는 가장 견결하고 발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 땅에서 7급 이상의 태풍을 일으켜 공산당을 소멸하려고 시도한다.”고 썼다. 이어서 그런 대명대방(大鳴大放)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각급 당의 관리들은 갑자기 지극히 열성적이며 성실해지기 시작했다.
 
장보쥔(章伯鈞)의 딸은 자신의 회고록 『지난 일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에서 이렇게 썼다. “중공 통일전선부 부장 리웨이한(李維漢)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장보쥔(章伯鈞)에게 정풍(整風)좌담회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고는 맨 앞줄에 앉혔다. 아버지는 그것이 계략인 줄 모르고 많은 의견을 제출하였다. 전 과정에서 리웨이한(李維漢)은 매우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대화에 찬성하는 줄로 알았다. 그는 사냥감이 올가미에 걸린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었음을 누가 알았으랴!. 장보쥔(章伯鈞)은 그 후 중국 최대의 우파분자로 몰렸다.
 
아래에서 1957년 당시 이른바 우파분자들의 의견과 비판이 제기된 날짜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장보쥔(章伯鈞)의 『정치설계원(政治設計院)』이 5월 21일, 룽윈(龍雲)의 『소련의 황당무계한 논리를 반대한다』가 5월 22일, 뤄룽지(羅隆基)의 『명예회복(平反) 위원회』가 5월 22일, 린시링(林希翎)이 베이징대학에서 『중공의 봉건사회주의를 규탄한다』는  강연이 5월 30일, 우쭈광(吳祖光)의 『당은 일찌감치 예술사업을 지도하지 말라』가 5월 31일, 추안핑(儲安平)의 『당의 천하』가 6월 1일이었다. 이 모두는 마오쩌둥이 칼을 갈아 놓은 후 지식인들을 초대’하여 발표한 언론이었다.
 
물론 이런 지식인들은 그 뒤에 우파로 몰렸고 이런 우파는 전국에 55만 명이나 되었다.
중국 전통문화 중에는 “선비를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이 있다. 그러나 중공은 모욕을 당하지 않으면 그에게 식권을 발급하지 않았고 가족들까지도 연루시켰다. 그리하여 많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굴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지식인들은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적발하여 많은 사람들을 상심(傷心)하게 하였다. 진정으로 모욕할 수 없는 지식인은 닭을 잡아 원숭이를 겁주는데 이용하듯 죽임을 당했다.
 
전통 사회도덕의 본보기인 선비[士]계층은 이렇게 쓰러져갔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시황이 다 무엇인가? 그는 460명의 유생을  파묻었지만, 우리는 4만6천 명의 지식인을 묻었다. 우리가 진반(鎭反)하면서 일부 반혁명분자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나는 민주 인사들과 변론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당신들이 우리를 진시황과 같다고 욕한다는데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진시황을 백배 이상 초월하였다고 말했다.”
사실 그가 어찌 지식인만 묻었겠는가? 더 엄중한 것은 그들의 신앙과 마음을 타파한 것이다.
 
(7) 내용은 없고 외관만 그럴 듯한 표면 문화
 
중공이 개혁×개방을 한 이후, 아주 많은 절과 도교의 사원, 교회를 다시 수리하여, 국내에서는 각종 종교행사를 하고 국외에서는 문화 페스티벌 행사를 펼쳤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이 그나마 남아 있던 전통 문화를 마지막으로 한 차례 파괴하고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한 이유는 한편으로는 인간성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선량함이 ‘당(黨) 문화’를 파산으로 나아가게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공이 전통문화를 빌어 자신을 꾸미고 중공의 ‘거짓(假), 사악(惡), 투쟁(鬪)”의 사악한 본성을 덮어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문화의 근본은 도덕적 내포이며 오락 작용을 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중공은 문화 표면의 오락기능을 회복하여 도덕적 내포의 실질을 파괴한 것을 덮어 감추었다. 중공이 아무리 글, 그림, 골동품을 전시하고, 용춤, 사자춤을 추는 문화 페스티벌, 식품 축제를 주최하며, 아무리 많은 전통 건축을 짓는다 해도 모두 문화의 표면을 회복한 것에 불과하며 문화의 정수(精髓)는 아니다. 아울러 이를 이용하여 국내외에서 중공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끌어올리려 했는데 실질적으로는 공산당 통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불교 사찰(=절)을 예로 들어보자. 이곳은 본래 아침에 종을 울리고 저녁에 북을 치며, 등불을 밝혀 부처님께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때로는 속세의 사람들이 참회하고 예배하는 곳이다. 수행은 청정(淸靜)함과 무위(無爲)를 중요시하며 참회와 예배도 장엄하고 엄숙한 환경을 요구한다. 그런데 지금은 돈벌이를 위한 유람 명승지로 탈바꿈시켰다. 절을 찾아 온 사람 중, 몇 사람이나 목욕재계한 후 진정으로 경건하게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가?
외관만 꾸미고 내포를 훼손하는, 이것 역시 중공이 세인(世人)을 미혹하려는 책략이다. 불교이든 기타 종교이든 아니면 파생문화이든지 막론하고 중공은 전통문화를 이 지경에까지 타락시킨 것이다.
 
3. 당(黨) 문화
 
중공은 전통적인 반신(半神)문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끊임없는 정치운동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공 자신의 당 문화를 수립하였다. 당 문화는 구(舊)세대를 개조하였고 젊은 세대를 독해(毒害)하였으며 어린 세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력은 너무나 깊고 광범위한데,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중공을 폭로하려고 시도할 때조차도, 불가피하게 공산당 문화의 낙인을 지니고 중공의 선악(善惡) 표준과 사유방식, 언어 계통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당 문화는 외부에서 들어 온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화의 ‘사악(邪)’한 영향을 많이 받은 것 외에도, 중국 사람이 몇 천 년이래 누적해 온 반면적인 요소들, 예를 들면 궁중암투, 패거리를 짓고 사리사욕을 추구하기, 권모술수로 사람을 혼내주기, 바꿔치기와 공산당이 선전하는 폭력혁명과 투쟁철학을 효과적으로 결합하였다. 공산당은 지난 수십 년간 생존위기 속에서 발악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거짓(假), 사악(惡), 투쟁(斗)’의 특징을 보강하고 더욱 확대 발전시켰다.
당 문화의 성격은 전제정치와 독재로서 공산당의 정치투쟁과 계급투쟁을 위해 봉사한다. 그것은 4개 방면에서 공산당의 테러적이며 독재적인 ‘인문(人文)’ 환경을 구성하였다.
 
(1) 통치방면
1) 폐쇄 문화
공산당 문화는 폐쇄적이며 독점적이다. 사상, 언론, 결사, 신앙 등의 자유가 없다. 당의 통치는 마치 한 세트의 수압시스템처럼 높은 압력과 봉폐에 의지하여 유지된다. 하나의 자그마한 구멍마저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6.4 때 공산당은 학생들과 대화를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는데 바로 이 구멍이 열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구멍이 일단 열리기만 하면 노동자, 농민, 지식인, 군인 등이 모두 대화를 요구할 것이고 중국은 민주화 될 것이다. 이것은 일당독재에 도전하는 것과 같으므로 차라리 살인을 할지라도 이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공산당은 인터넷을 봉쇄하고 있는데 이 역시 인민들로 하여금 중공이 원하지 않는 내용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2) 공포 문화
공산당은 지난 55년 동안 공포로 중국 인민의 영혼을 압박하였다. 높이 걸린 채찍, 높이 든 칼, 어느 때에 드리워질지 모르는 재난은 사람의 행위방식을 ‘규범화’하였다. 사람들은 공포 속에서 고분고분한 순민(順民)이 되었다. 민주화 운동 인사, 자유 사상가, 체제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 각종 종교단체 구성원들은 모두 하나를 죽여서 여러 사람에게 경고하게 만드는 대상이 되었다. 또한 공산당은 자신과 다른 것은 맹아상태에서 싹이 자라기 전에 소멸시켰다.
 
3) 네트워크식 통제 문화
주민등록과 호적제도, 가도(街道) 주민위원회 제도, 각급 당위원회 구조, “각 직장마다 당 지부를 건설하고”, “마을마다 당 지부가 있다.” 또한 공산당과 청년단 조직 생활을 통해 "자기 문단속을 잘하고 자기 사람을 잘 감시하며" "상방(上訪 역주: 중국의 전통적인 청원방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인이 해당 기관에서 민원을 받아주지 않을 경우 상급기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차단하고". “자신이 맡은 임무를 철저히 책임지고 책임추궁제를 단호히 실행하여 엄밀하게 통제하며, 규율을 엄숙히 하여 24시간 방범관리가 통제를 잃지 않도록 확보한다.” “610사무실(역주: 중국의 전 독재자 장쩌민의 지시로 파룬궁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전문조직으로 나치의 게쉬타포와 같은 초법적인 비밀조직)은 감독팀을 조직하여 각 지역과 회사에 대해 부정기적으로 감독한다!”
4) 연좌문화
‘지주, 부자, 반동, 나쁜 사람, 우파’로 낙인 찍힌 가족, 공산당이 보기에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는 자녀’에 대해 공산당은 이른바 대의(大義)를 위해 친족을 무시할 것을 요구한다. 인사에서는 개인의 일생동안의 정치적인 동향을 기록하는 문서를 조직하여 사람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할 것을 요구하며 당의 요구에 부응하는 경우에는 포상과 재배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가령 파룬궁 수련생이 베이징에 가서 청원을 할 경우 직장 책임자는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조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책임 추궁을 당하고 비판 받기도 하는데 더 심한 경우에는 징계를 당한다.
 
(2)문화선전 방면
1) 일언당(一言堂) 문화
‘최고지시’,‘(마오쩌둥의) 한 마디가 만 마디를 능가하고 구절마다 진리이다’. 모든 매스컴이 다 몰려들어 단체로 맞장구 친다. 필요 시에는 각급 당, 정부, 군대, 노조, 청년단, 부녀회 지도자를 데려와 태도를 표시하도록 시켜, 지지하게 하고 사람마다 고비를 넘게 한다.
 
2) 폭력문화 고취
“8억 명이나 되는데 싸우지 않고 되겠는가?(역주: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다스리려면 반드시 투쟁이 필요함을 강조한 말)”,“때려 죽이면 그만이다(역주: 중국의 독재자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할 때 수련생을 죽여도 관계자를 책임추궁하지 않겠다는 말)”,“한계를 뛰어 넘는 전쟁”,“원자탄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중국 사람 절반을 죽인다 해도 남은 절반의 사람들이 폐허 위에 다시 세울 것이다.”
 
3) 원한 선동문화
“계급의 고달픔을 잊지 말고 피눈물나게 만든 원수를 잊지 말자.”가 국시(國是)가 되었고 계급의 적에 대한 잔인함을 미덕으로 삼는다. “원수를 깨물고 한(恨)을 깨물고 원한을 씹어서 억지로 삼키면 원한은 마음속에 들어가 싹을 틔운다.(역주: 문화대혁명 당시 유행했던 중국의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가사)”
 
4) 거짓말 문화
“1무(畝)당 식량 생산량이 만근을 넘었다.” “6.4 톈안먼에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우리는 이미 사스를 통제하였다.”,“지금은 중국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이다.”,“3개 대표.” 등은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5) 세뇌 문화
“공산당이 없으면 신 중국이 없다.” “우리 사업을 지도하는 핵심 역량은 중국 공산당이며, 우리 사상을 지도하는 이론 기초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당 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 “이해한 것은 집행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도 집행해야 하며 집행하는 중에 이해를 깊이 해야 한다.”
 
6) 아첨 문화
“천지(天地)가 아무리 크더라도 당의 은혜보단 못하다.” “모든 공(功)은 당에 있다.” “나는 당을 어머니에 비유한다.” “생명을 바쳐 당 중앙을 보호한다.”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당” “모든 전투에서 패배를 모르는 당” 등등이다.
 
7) 금세 사라지는 문화
한번 또 한번씩 모범을 세우고 전형을 잡아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과 사상교육을 실시한다. 그 결과 운동이 지나가면 모두들 전에 하던 그대로 계속 하는데 모든 보고회, 독서회, 심득교류는 모두 연극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배역처럼 일시적인 것이고 사회 도덕은 계속 크게 뒷걸음질 친다.
 
(3)인간관계 방면
1) 질투 문화
절대평균주의를 선전하며 자신보다 능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사람을 질투한다. 홍안병(紅眼病, 역주 : Red Eye Syndrome이라고도 하는데 남이 자신보다 출세하거나 수입이 많은 것을 보고 부러워하면서 샘을 내는 병적인 심리를 의미)이라고도 한다.
 
2) 사람이 사람을 짓밟는 문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투쟁하며 뒤에서는 폭로 비판한다.” 밀고(密告) 하거나, 남을 폭로 비판하는 자료를 쓰게 하고, 터무니 없는 것을 날조하며, 하찮은 것을 끊임없이 과장한다. 이 모든 것들은 당 조직에 의해 당과 얼마나 가까운가를 판단하는 지표로 되었다.
 
(4) 사람의 내재적인 정신과 외재적인 행위를 은연중에 변화시키고 규범시킨 방면
1) 사람을 기계로 만드는 문화
공산당은 민중들에게 ‘혁명의 기계에서 녹슬지 않는 나사못’이 되고 ‘당에 순종하는 도구’가 되며 ‘당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 할 것’을 요구하였다. “마오 주석의 전사는 당의 말을 가장 잘 듣는다. 당이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나 가고 당이 어려운 곳이 있으면 그곳에 정착한다.”
 
2) 시비(是非)가 뒤집힌 문화
문화대혁명 기간에 공산당은 “사회주의의 풀을 가질지언정 자본주의의 곡식을 갖지 않는다.” 총으로 살인하는 것은 ‘20년 간의 안정을 얻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킨다(己所不欲,要施于人).’는 말은 공산당의 속성을 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3) 자아 세뇌와 절대 복종 문화
“하급자는 상급자에 복종하고 전당(全黨)은 중앙에 복종한다.”, “이기적인 생각이 떠오르기만 해도 그것과 혹독하게 싸운다.”,“영혼 깊은 곳에서 혁명을 폭발시켜라.”,“당 중앙과 고도의 일치를 유지하라.”,“사상을 통일하고 발걸음을 통일하고 명령을 통일하고 지휘를 통일한다.”
 
4)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문화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은 곧 혼란해질 것이다.”, “이렇게 큰 중국을 공산당이 아니면 누가 지도할 수 있겠는가?”, “중국이 넘어지면 세계의 재난이다. 때문에 공산당을 도와 그것의 영도를 수호해야 한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오랫동안 공산당의 압력을 받은 단체들에 늘 공산당이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보아왔기에,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과 자아를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공산당보다 더욱 좌파적임을 수시로 표현해야 한다.
 
무릇 이와 비슷한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중국인이라면 모두 당신이 직접 겪은 경험 속에서 당 문화의 각종 요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들은 여전히 모범극(역주: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성행한 일종의 가극) 과 어록가(語錄歌, 역주 : 마오쩌둥의 어록으로 만든 노래), 충자무(忠字舞)에 대한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이외에도 『백모녀(白毛女)』,『지도전(地道戰, 역주 : 항일전쟁시기를 배경으로 중국 인민들이 일본 침략자들에 맞서 땅굴을 이용해 용감히 싸운 것을 표현한 영화로 1965년 작품)』,『지뢰전(地雷戰, 역주 : 1940년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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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 11-01-04 16:28
   
홍위병ㅋ
자금성도 마오쩌둥 사진 걸어놓아 겨우 지킬 수 있었던 문화재ㅋ
안 그랬으면 지금 현재 완전히 파괴됐을 듯ㅋ
ㄹㅇㄴ 11-01-04 18:14
   
자금성은 원래 철거계획이 있었는데 자금부족으로 미뤄져서 살아남았다던걸요.

그리고 쉽게 말하면 문화혁명이란 모택동이 그의 정적들을 모두 죽이고 반대세력(여타 지식인들)을 깨끗이

숙청하기 위해서 홍위병(자발적? 모택동 친위대)을 조직하기 위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홍위병들

이 너무 커지자 뭐 그들마저 숙청당하기 시작했지만요.
중국문화라… 11-01-05 21:21
   
이 글을 보면 중국 문화가 어마어마했는데 문화 대혁명으로 다 파괴되었다 그러는데...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민족 말살 정책을 당했습니다.
문화재도 조선 팔도를 다 파헤쳐서 왜구들이 싹쓸이해서 가져 갔지요...그거 실제로
어마어마하지요?? 하지만 그 정신적인 문화 유산이 남아 있다면 다시 일으킬 불씨는
어디에든 있습니다. 남의 민족에 의해 계획적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문화도 일으켜
세우는데...중국 문화가 뿌리깊어 살아 날 수 있다면 그건 필연일겁니다.
서양의 문화가 중국 전통 문화와 어떻게 접목되어 나타날지 모르겠지만...홍콩이 한때
누렸던 홍콩 영화같은 것일까...음악 미술 문학 등등 전반적으로 문화의 꽃이 피어나야
하는데..어떤 모습이 될지 진정 궁금합니다. 홍콩 영화는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진정으로
중국 문화가 꽃피웠다고 말하긴 좀 뭐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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