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또 욕쪽지 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뚫린 입이니 말은 바로하자는 뜻에서..)
정확히 말하면 간도는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충" 백두산 북쪽에서 연변을 지나 두만강 하류 혼춘까지 이르는 정도에 해당되는데, 원래 이 간도라는것이 정확한 행정구역의 이름도 아니고, 처음부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결정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조선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가서 그 땅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것을 빌미로 우리쪽에서 영유권을 주장했던 것이 전부이고 이 때 조선인들이 정책해서 살던 곳들을 대강 총칭해서 "간도" 또는 "북간도" 라고 불렀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서간도 동간도 북간도" 운운하는 지도들을 보면, 북간도와 동간도, 서간도가 분리되어 있는가 하면 그 영역이 거의 만주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이런 지도들은,
죄다 거짓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떤 지도는 가톨릭 교회에서 만든 주교 관할구 지도를 모사해서 만든 것이고, 또 어떤 지도는 중국 성계(省界)를 대충 흉내내서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 일제시대의 상식적인 지명 호칭으로서의 "간도" 는 대충 동간도가 오늘날의 "연변" 에 해당하고, 백두산 부근이 서간도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삼원보가 있는 통화현 쪽도 서간도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디까지나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책봉-조공의 형식상 명나라의 제후국이었을 뿐, 중국내의 제후왕국(이런 것들은 독립국이 아님)과는 달랐습니다.
아래는 간도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지식in 에 썼던 글 복사해 넣었습니다. 흔히 간도가 조선땅이었다고들 주장하는데, 이런 것들은 잘못되었습니다. 또한 소위 간도 영유의 증거라고들 하는 괴지도들은 유조변이 뭔지도 모르던 서양인들이 작성한 것으로, 어떤 것은 여전히 명나라 영토를 그려놓기도 했고 어떤 것은 행정구역과 아무 상관없는 것을 그려놓기도 했으니 말 해 무엇하리. 굳이 이 질문에서 다른 분들이 올린 지도가 뭐에 해당하는지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니까.
간도 영유 주장하시는 분들은 딴거 보지 말고 일단 "대동여지도" 에 간도가 있는지나 찾아보고 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이번에는 "대동여지도 전부 일본이 조작한겁니다" 라는 얘기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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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 비슷한 문제에 답을 달았다가 워낙 비합리적인 인신공격을 많이 받아 좀 자제할까 싶기도 했지만,
역시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니다.
간도는 조선 땅이 되었던 적이 없습니다.
이 문제는 현행 국사 교과서가, 민족주의적인 시각에 의해 왜곡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1. 백두산 정계비에 토문강이 국경이라고 나와 있는데 토문강은 송화강 지류
2. 간도에 사는 사람들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 고려사람들이며 조선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간도는 우리땅
3. 서양 선교사들이 지도를 만들었는데 간도가 우리땅으로 되어있음
...뭐 이런 것들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 2, 3번 모두 잘못된 주장입니다. 특히 2, 3번은 아예 거짓말입니다.
조선후기의 실제 국토 개념이 어떠했는지, 말씀하신 이중환의 택리지를 살펴보면,
택리지 팔도총론 함경도 편에서는, "함경도의 동북쪽 경계는 두만강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복거총론 산수편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안쪽이 우리나라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간도 얘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토문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북로연혁편을 보면 두 차례에 걸쳐 "토문(土門)은 두만이다." 라고 적시하고 있으며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라고 쓴 것이 또 한 차례입니다. 합치면 세번에 걸쳐 토문강=두만강이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역시,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라고 쓰고 있으며,
연려실기술에도 "두만강은 바로 토문강이며 백두산 큰 못에서 비롯된다."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라고 하는 견해는 이 책들의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전하는 토문강이라는 강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이 왜 전부 이렇게 썼는지 의문스러워집니다. 조선왕조 실록 숙종 38년조를 보면 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백두산 정계비가 건립될 당시의 상황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와있는데, 매우 길기 때문에 맨 뒤에 붙여 넣겠습니다만 요약하면,
"청나라 사신이 토문강으로 국경을 정했는데,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니 토문강은 두만강과 아무 관련도 없는 강이었다. 청나라 사신이 너무 경솔하게 판단했던 것이다. 뒷날 난처하게 될 염려가 있으니 목책을 세워서 분명히 해 놓도록 하자."
이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즉,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당연히 두만강인데, 청나라 사신이 촐랑거리다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착각했다는 것이지요.
한편 조정의 자세한 논의를 접하지 못한 지식인들은 국경이 두만강이라고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서를 저술할 때 한결같이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라고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토문강 문제는 하나의 해프닝이지, 역사적 전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한편 간도는 원래 청나라의 발상지역으로, 청나라는 이 신성한 땅에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봉금지역으로 설정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봉금을 어기고 조선인들이 간도에 이주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백두산 정계비 건립의 발단이 된 것입니다. 즉, "여기부터 우리땅이니까 더 들어오지 마" 라는 의미에서 국경을 확정한 것입니다.
간도에 본격적으로 조선인들이 많이 가서 살기 시작한 것은 세도정치 시대인 19세기 중반부터입니다. 이 때 청나라는 이미 쇠약해져서 봉금을 철저하게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측에서는 "간도에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산다" 는 이유로 "간도관리사" 를 파견하는데, 이것이 1882년의 일입니다. 이에 청나라는 마침내 봉금을 해제하고 주민들을 간도에 이주시키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살았으니까 간도가 우리 땅" 이라고 하는 주장은 일본이 "울릉도하고 독도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으니까 다 우리땅" 이라고 하는 것과 판박이처럼 닮았음을 알게 됩니다.
간도가 청나라 봉금지역이었던 데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엄연히 청나라 땅이었습니다. 그것도 살기 싫어서 안 살았던게 아니라 신성한 곳이니까 함부로 들어가면 안된다고 생각해서(특히 한(漢)족이)봉금을 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시대부터 발해 시대까지 우리 민족은 주로 요동 지방에 살았으며, 오늘날의 길림성 중심부에 해당하는 간도는 "백산말갈" 의 영역이었습니다.
말갈이 한민족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 근거없는 주장에 불과합니다. 말타고 활 쏘면 다 우리민족이라고 하는 주장이지요. 그런 것은...
고려시대 유민들도 주로 이주한 곳은 심양, 요양 등지였고, 간도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명 "괴지도" 들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괴지도는 주로 서양 선교사들이 작성한 것인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주교 관할 구역 경계" 를 "국경" 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실제 지도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말로만 슬쩍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http://orumi.egloos.com/2733115
이 블로그에 가시면 소위 괴지도라는 것에 대한 얘기가 몇 개 나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조선의 영토 확장 사업은 4군 6진 설치와 세종의 사민 정책으로 일단락됩니다. 발해가 망한 이래 간도가 조선땅이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조선왕조 실록 내용)
“신(臣)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豆滿江)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빙설(氷雪)에 막혀 전진(前進)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북우후(北虞候) 김사정(金嗣鼎) 등이 추후(追後)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 도로(道路)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水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下流)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여러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비록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먼저 비(碑)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木柵)을 세우기로 한다. 오늘날 조정의 명령이 당초부터 한 차례 거행으로 역사를 마치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빨리 마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견고하게 하기를 힘쓰되 이른바 물이 나오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여 우선 역사를 정지하고 돌아간다. 강의 수원을 변통하는 것에 있어서는 서서히 조가(朝家)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내년 역사를 계속할 때 진퇴(進退)하는 바탕으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차원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許樑) 등이 미봉(彌縫)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疆域)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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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지식인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