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에 우리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을 갔을 적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우리 나라에 글을 보내어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마(軍馬)를 정돈하여
일본과 더불어 연합해서 곧장 명나라를 침범하자고 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의리를 들어 거절하고 바로 그해 4월에 성절사(聖節使)
김응남(金應南)의 사행(使行) 편에 그 사유을 갖추어 주문(奏聞)하였다. 명나라는 먼저
허의후(許儀後)를 통하여 역시 왜적의 음모를 듣고는 우리 나라로 하여금
섬라(暹羅)·
유구(琉球) 등과 결합하여 병사를 합쳐
일본을 정벌하여 무찌르도록 하였다. 우리 나라는 또 동지사(冬至使)
이유인(李裕仁)의 사행 편에 재차 왜적의 실정을 아뢰기를,
“왜노(倭奴)의 흉패한 말이 소방(小邦)에서는 비록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알 수는 없으나 일이 상국(上國)과 관계되었으므로 제때에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배신(陪臣)에게 당부하여 그 실정을 아뢰도록 하였는데, 황공하게도 황상(皇上)께서 멀리 여기지 않으시는 은혜를 받아 권장하고 상을 주심이 전후에 겹치고 적을 무찌르는 일을 권면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은 노둔하고 용렬하여 성지(聖旨)에 부응할 수 없으니 감격스럽고 송구스러워 눈물이 나와 어떻게 아뢰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소방과 일본국이 비록 동쪽 바다에 함께 있다고는 하지만, 거리가 아득히 멀고 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그들의 소굴이 험하고 요원하니 이것은 바로 천지(天地)가 추악한 종족을 구별해 놓은 것입니다. 저들은 배를 집으로 삼고 침입하여 약탈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바람에 돛을 달고서 신속하게 움직여 정처없이 왕래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배타는 데 서툴고 바다로 다니는 일을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변방의 관리가 된 사람들은 오직 수비(守備)만을 도모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나라는 대대로 과 같이 보시는 황은(皇恩)을 입었는데 신은 또 성스러운 황제를 만나 특별한 은혜에 젖었으니, 충성하고 싶은 이 마음이 진실로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하찮은 소추(小醜)가 감히 하늘을 거역하는 꾀를 내었으니 천조(天朝)의 입장에서는 동병(動兵)할 계책을 세울 것도 없겠지만, 신자(臣子)의 분통함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불측스런 말을 날조하여 우리 나라에 덮어씌워 원근에 전파하고 있는 데이겠습니까. 신과 온 나라 신민(臣民)들은 분통함이 뼈속까지 사무쳐 음식을 먹거나 쉬는 사이에도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왜적의 실정을 상세하게 파악한다면 반드시 신발이 닳도록 달려가 아뢸 것이며, 만약 왜적을 치게 된다면 반드시 용기를 분발하여 적성(賊城)에 앞장서서 오를 것입니다. 신은 명을 내리지 않으셔도 그 뜻을 받들 것인데 하물며 지금 은혜로운 유시에 거듭 감격한 데이겠습니까. 더욱 정신을 가다듬어 힘이 미칠 수 있는 일이라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왜적 때문에 부모의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예부(禮部)가 아뢰기를 ‘왜적의 환란이 매우 위급하니 속히 조선을 구원하여 울타리를 튼튼히 하고 군량도 보내어 위급함을 구제하라.’고 하니, 천자(天子)가 이르기를 ‘조선은 본래부터 공손함을 비치어 우리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니 외침이 있는데 좌시해서야 되겠는가. 요동으로 하여금 즉시 정병(精兵) 2부대를 보내어 응원하게 하고 이어 은 2만 냥을 내어 조선국에 가서 호군(犒軍)하며 대홍(大紅)·저사(紵絲)의 두 표리(表裏)로 국왕을 위로하여 관병을 독려하여 힘을 다해 왜적들을 무찔러 평정하도록 하라. 만약 혹시라도 형세가 지탱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구원병을 청하여 대응하는 것도 무방하니 기한을 정해 적을 섬멸하여 우리의 울타리가 되게 하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21책 504면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