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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11-27 15:23
[기타] 식민사관과 역사왜곡이 남긴 한국인의 분열과 지역감정(3편 천황에게 희생된 사무라이)
 글쓴이 : 객님
조회 : 8,096  

그를 살리고 죽어버린 일본 사무라이 정신.

 

19세기 말 중국의 혼란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화로 일본 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1910년) 만주를 제국의

영향권에 넣는 동안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져 있었다.

이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게 된다.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북벌에 나섰고, 이것이

제1차 국공내전이다.

1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군측에 가담, 승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빠른

성장을 한다. 그렇지만 방직공업과 군수산업에만 치우친 산업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1929년 미국발 세계대공황으로 일본경제도 심한 타격을 받는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노동자, 농민의 생활이

몹시 빈궁했으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파시스트 세력이 고개를

들어 국가 개조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은 군부였다.

1931년 9월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 근교의 유조구에서 자신들이 경영하는 만주철도를 몰래 파괴했다.

그리고는 이를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만주사변이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이 지역에 푸이를 중심으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우고, 1차 세계대전때 같은

승전국인 국제연맹을 탈퇴후 삼국동맹을 체결(독일 이태리 일본)하여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 후 일본은 화북지방으로 진출한다. 일본의 방적업 때문에 중국의 민족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국민들은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일본의 파시스트적 군부세력에 대항하고자 상해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선생의 지시를 받은 윤봉길 의사가

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코우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의 상하이 파견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하고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와 제9사단장 우에다 그리고 주중 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은 중상을 입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내에선 1932년 5월 파시스트 청년장교 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5.15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부, 관료의 주도하에 천황제 파시즘이란 일본특유의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즉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담당했던 절대자의 위치에 천황을 앉힌 것이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심으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감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고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주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 및 군수문자 공급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때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2만5천리 장정끝에 섬서성으로 들어간 홍군의 뒤를 쫓아 토벌전을 준비하고있었다.

1936년 12월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섬서성 서안으로 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궁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해왔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중이였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끼리 싸워선 안된다. 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

라는 홍군의 항일 통일전선 전술에 장학량 군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월12일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바람으로 달아났고

뒷산바위 틈에서 그를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길 바랄뿐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으로 된 구국의 요구를 제출, 내전정지와 거국일치의 항일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사건이다. 사건이 터지자 즉시 홍군의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장학량의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군환학교 교장으로 있을때 정치주임을 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할수없이 이를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홍군은 적기를 내리고 붉은별은 떼었으며

장개석 휘하의 제8로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1937년 7월7일 북경에서 남서로 6키로 지점의 노구교 근처에서 한 일본군 부대가

야간훈련중이였다.

별안간 10발의 총성이 울려퍼지고 전부대원에게 집합명령이 내려졌다. 병사한명이 행방불명이었고 일시에

전부대는 초긴장상태가 된다. 그 병사는 용변중이였고 20분뒤 대열로 복귀한다. 그러나 일본은 대대장은

중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고 하며 주력을 현지로 급히 출동시켰다. 당시 노구교에는 송철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주둔중이였다. 새벽5시 일본군은 공격을 개시하여 노구교를 점령한다. 7월11일 양측은 현지협정을 맺어

사태는 일단 해결된듯 했다. 그러나 7월28일 일본군은 갑자기 북경과 천진을 총공격한다. 이로써 노구교사건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중국침략을 감행했다.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무려 30만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남경대학살을 자행한다.

그리고 광동, 무한, 산서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점령한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실로 잔혹했다.

중국인은 이를 삼광작전이라 불렀다. 즉 죽이고 태우고 약탈한다는 뜻이다. 삼광작전으로 학살당한 중국인의 수는

무려 1천2백만에 달했다. 한편 일본은 점령한 남경에 왕조명을 중심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하고 국제연합을 탈퇴하여 삼국동맹을 맺으며 본격적인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한 지하자원 및 원료의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이 중일 전쟁을 치르던 일본 정부에게 중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군대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일으킨 전쟁이기에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미일 통상 조약은 파기되어 양국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철광 등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한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철·석유·고무 등 전쟁 공업품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이나 만주 등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침공이었다.

석유·고무·철광 등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이다.


그러나 당시에 유럽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이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을 모두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서진, 프랑스를 정복하여 페탱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괴뢰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영국에서 망명 정부를 세우고 독일에 항전 중이던 프랑스로서는 인도차이나를 도저히 사수할

수 없었다. 결국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 세력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철수하게 된다.

인도차이나 점령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은 더욱 많은 곳을 점령(또는 침공)하길 원했다.

그러자 1941년 미국의 경제 제재와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일본은 심하게 반발하였고,




1941년 군인 출신인 도조 히데키를 수상으로 한 군부 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군부의 여러 인사중에서도

매우 강경파로서 미국과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도조히데키는 국민에게 천황에 대한 맹복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경전 전진훈을 만들어 배포한다. 이책의 내용을 보면 살아서 포로가 되는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오명을 남기지 마라. 천황을 위해 죽어라 즉 천황=국가 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심고 목숨을 무기로 하는 우리가

카미카제 라고 알고있는 xx특공대 만들어 이제까지 없었던 전술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사건으로 만 4년 8개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말미암아 국내 여론이 비등하자,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일본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참전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세계 1차대전 이후로 기술의 발달, 군부대의 양적 발전에 비해 전선의

전술적으로 발전이 없던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에서 연이은 전투에서 후퇴를 반복해면서 전세는 미국에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는 듯하였으나, 전쟁을 거듭할수록 전술적 교리가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5일), 과달카날 전역(1942년 8월~1943년 2월) 등의 국지적 승리를 기반으로

역습을 계속하여 전황은 이후 일본에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게 전개되었다.




이후 1944년의 사이판 상륙, 이오지마 점령(1945년 2월~3월) 등으로 태평양에 항공 기지를 확보하자

일본은 전쟁의 패색이 짙은것을 느끼게 된다. 이에 고노에 후미마루 수상은 천황에게 종전을 제안하는

고노에 상주문(1945.2.140)을 올리게 된다. 이 내용은 국체를 보존하고 신민의 보호를 위해 천황이 종전을 선언

해야한다는 내용이였지만, 이 상주문은 묵살된다.

한달 뒤 3월10일 미국은 B-29 등의 고고도 폭격기를 동원한 일본 내 대도시에 대한 전략 폭격을 하는

동경대공습을 개시하게 되고 이 공습으로 10만명의 도쿄시민이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히토히토 쇼와 천황은

도조히데키 내각과 함께 산 밑 지하벙커에 은둔하며 본토 결전의 결의를 다지게 된다.

그러자 미국은 급기야 1945년 8월 6일 및 8월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기에 이른다.

일본 천황은 더 이상의 전쟁 지속은 전 국토의 황폐화는 물론이며,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수 있다고 판단,

전쟁을 종결하기로 마음먹는다. 1945년 8월 14일에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달한 뒤,

이튿날인 8월 15일에 항복을 선언하여 태평양 전쟁은 종결된다.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고, 미국은 일본의 무장해제를 하며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해 냉전에서

구소련과 중국을 막는 봉쇄기지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을 펼친다. 하지만 일본의 무장해제와 냉전을 막는 봉쇄기지의

활용인 미국의 일본재건 프로그램은 비무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였다. 따라서 태평양 함대 및 미군의 일본 주둔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비무장에 강력히 반대했다. 황군은 자신을 지키는 호위부대같은 성격이

강한 히로히토로 써는 일본의 무장해제는 자신의 죽음과 동일시 되는 것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이 일본에 상륙하고 일본의 재건 프로그램이 실시되었을때, 국제 여론은 천황을 전범으로

처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히로히토는 자신을 전범재판에 세우지 않는 조건을 걸고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선택하게 된다.




맥아더 사령관 역시 일본에 상륙한뒤 일본인을 보고 가장 놀란것이,

그들의 자식과 그들의 남편 및 식구들은 침략을 위한 전쟁터에 보내 죽음에 이르게한 천황을 원망하거나 처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을 사형하면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미국에 반감을 가지고 반항할 것같은 분위기에

의아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황의 존재란 국가 그 자체이며, 자신의 식구들이 천황의 명령에 의해 비록

전쟁에 희생 되었지만 살아있는 신 자체인 천황에 충성을 다하다 죽은것이기에 죽어서도 신의 영역에 도달했다고

믿고있는 것 이였다.

따라서 맥아더 사령관은 천황을 전범으로 처리하는것보다 미국의 일본재건 프로그램에 천황이 앞서서 일본을

재건하는데 이용하기로 한다. 그뒤 천황과 맥아더 사령관과의 은밀한 거래로 인하여 천황은 전범재판에 서지

않게되고 살아있는 신의 위치를 포기하게된다. 또한 그 댓가로 오키나와와 황군을 포기한다.


당시에 일본의 평화 헌법 조항을 보면

1.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및 그 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2. 육해공 기타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내용이다. 헌법9조는 전쟁을 반성해서 만들었다는 구절은 없다.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하고 2천만 아시아인

들이 죽고 300만 일본인들이 죽은것에 대하여 일본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구절은 하나도 없다.

단지 미국과 전쟁한것이 잘못됐다 미안하다 라고만 적혀있다.


일본의 재건 프로그램이 시작되기전 식민지였던 한반도 내에서 일본의 무장을 해체한다는 명목으로 38선을

기준으로 위로는 소련의 아래로는 미국의 신탁통치가 시작된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이라는 이념은 달랐지만

2차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 소련과 미국의 관계는 나쁘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의 차이로 인해

중국의 국공내전을 지켜본 한반도의 지도자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이제는 민족이 둘로 나누어 분단될까

격렬히 반대하고, 한반도 내의 국민들은 3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식민지를 겪었기에 신탁통치 자체가 말만

일본의 무장해제이지 또다른 식민지 시대의 시작이 될까 라는 생각에 반대를 하게된다.

그러나 한반도 내에서의 일본 무장해제 라는 명목의 신탁통치는 이념이 다른 사회주의 구소련과 자본민주주의의

미국간에 보이지않는 대립이였고 두 열강을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어 신탁통치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구소련에서 시작된 사회주의 국가의 확산은 중국내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45년 8월 평화를 갈구하는 중국 국민의 여망을 배경으로 국민당의 장개석과 공산당의 모택동이 충칭에서

화평교섭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에서 쌍방은, ① 내전회피, ② 정치협상회의 개최,

③ 각 당파의 평등한 지위 승인 등에 관한 협정을 논의하고, 그 결과 10월 10일‘국공쌍방 대표회담 기록요강’,

즉 쌍십협정을 발표,‘어떤 일이 있어도 내전을 피하고, 독립·자유·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한다’라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원조하에 끝내 공산당과의 제3차 국공합작을 거부하고, 장개석은 4대 1이라는

압도적 군사력을 배경으로 협정을 파기하였다.

한편 모택동도 강경히 이에 맞서 응전태세로 나왔기 때문에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국부군을 유도하여 각개격파의 작전을 전개하였고, 또한 그 세력권 내에서 토지개혁을 추진하여

정치적·군사적인 기반을 닦아 나갔다. 또 한편으로‘인민민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국민당을 고립시키는

전략·전술을 전개하였다. 그 위에 국민당정부는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947년 말부터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중공군은 전 전선에 걸쳐 총반격을 개시하여 세력권을 확장해 나갔다.

마침내 중공은 국민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


중국의 사회주의 국가로의 변모는 한반도내에서 두개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고, 중국과 구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에는 김일성의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남한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냉전의 시작에서 지형적으로

대륙과 붙어있는 남한을 사회주의 국가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전초기지로 만들기에는 너무 큰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지상에서는 대륙과 떨어져있는 섬 나라이고 대륙의 세력이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걸림돌이 되는 일본이라는 땅에 사회주의 국가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일본의

재건 프로그램 실시된다. 하지만 이것은 애치슨라인의 설정으로 구체화 되고, 애치슨 라인 설정으로 인해 미국이

남한내에서의 개입 명분이 없어졌다는 것을 확신한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을 만나 한반도를 적화통일

하겠다고 하여 지원받은뒤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전쟁은 북에 의한 빠른 정권교체로 이뤄질줄 알았으나,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과 전쟁의 장기화가 되어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미국에 비난이 쏟아졌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인식하게 되고 천황의 집권시 태평양 전쟁의 1급 전범이였던 기시노부스케를 정치에 들여보낸다.

기시노부스케는 집권후 헌법9조 수정작업에 착수하게된다. 그 명분은 미국 점령군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기에

일본 자체적인 자위를 위해서는 헌법9조가 필수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헌법 조사회 연구결과

헌법9조는 재정 당시 수상이였던 시데하라 수상의 제안이였다는 결과에 도달하여 실패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우익이라 일컽는 일본의 개헌론자들의 주장은 헌법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기를 주장한다.


1. 전력 보유 및 교전권 금지의 폐기

2. 자위군 인정

3. 집단적 자위권은 해석을 통한 개헌으로 허용.


이러한 주장을 하는 우익의 특징을 보면 모두가 일본 민족주의+친미정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들중 아베신조는 대북강경론으로 인기를 얻고있으며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는 대중강경론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대북강경론을 보면 자신들의 머리위에서는 핵무장을 하고 무기를 증강하는데 자신들은 워크맨이나 만들고

있다가 북한에 의해 침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논리가 과거 식민지 시절에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복수 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땅에 미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기에 미국의 군대를 목표로 삼은 침략이 되는

것인지 설득력이 애매하다. 만약 미국의 군대를 목표로 삼아 미사일이 일본에 날라올수도있다는 전제로 삼는다면

그들의 친미적 성격과 원폭에 의한 피해의식, 그리고 헌법의 개정은 너무나도 모순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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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정치 변화와 굵직굵직한 사건 및 노태우 정권의 보통 국민 보통 국가

이런것이 역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기술중인데 너무나 지역 및 좌파니 우파니 민감한 부분이

많아서 지금 조심스럽게 접근중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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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날 10-12-02 05:50
   
객님의글 하루에 하나씩만 읽고 있습니다
글 내용이 너무 좋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라온하제 11-03-04 11:46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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