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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2-02 02:43
[몽골] 몽골제국
 글쓴이 : 한시우
조회 : 5,679  

몽골제국(蒙古帝國)


우이구르(오르콘)제국이 840년 키르기즈에 의해 멸망당하여 수 개로 분열된 후, 우이구르부족은 감주국, 사주국, 고주국 등 소왕국으로 우이구르 집단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이 후기의 우이구르 공국들은 중앙스텝, 즉 몽골민족의 중심 활거지역에는 직접적인 영향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골민족의 중심 거주지역은 셀렝가, 오논, 케둘렌, 오르콘, 이르티쉬 등의 강들이 누비고 있는 대체로 오늘날의 몽골 지역이었다.


한편 튀르크계 돌궐제국과 우이구르제국이 멸망하였다고 스텝지대에서의 정치 활동이 종료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기간은 분열과 정쟁(政爭)과 내란의 과도기였으며, 그 결과로 발생된 세력의 공백이 중국 변방에 제국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중앙 스텝은 10세기와 11세기 전 기간을 통하여 비교적 체계가 잡힌 우이구르족, 탕구트족, 거란족 등 군소 半정착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정착국가들의 관심은 주로 자신들의 변방국가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중앙스텝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되었고, 스텝의 서쪽에 있던 튀르크계 제국들도 극심한 내부 분열로 인해 중앙스텝에 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중앙스텝에 대한 세력의 공백기에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유목민족제국사에서 흔히 재현되는 것으로 힘의 공백을 메꾸는 새로운 제국의 탄생인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미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맹고(萌古)족 등의 부족들이 모두 몽골계일 가능성이 많다.


몽골제국은 대체로 3기로 구분될 수 있다. 제 1기는 신생 부족 연맹의 지도자였던 테무진이 1206년 귀족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지도자로 추대받고 칭기스칸 이라는 왕명을 채택한 때부터 몽골의 통치 지배 체제를 확고히 구축한 몽케가 사망한 1258년까지의 창건과 평정 시대, 제 2기는 지리적으로 4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분리되었던 시기로 쿠빌라이를 황제로 즉위시킨 쿠릴타이로부터 카이두의 추종자들이 최후로 톨루이 가문에 항복하였던 1260년부터 1303년까지의 제국시대이다.

그리고 제 3기는 제국의 쇠퇴와 멸망이 점차적으로 시작된 1355년경까지로 나뉜다.

 


 

1) 제 1 기 : 창건과 평정(1206 - 1258)


몽골 세력의 등장은 후일에 칭기스칸으로 추대된 테무진의 등장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칭기스칸은 1155년에서 1167년 사이의 어느 날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칭기스칸이 출생할 때, 그의 부친 예수게이(Yesugey)는 타타르족의 두목 테무진 우게를 포로로 잡았고, 기념으로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이라 지었다.

이는 돌궐족과 몽골족에서 흔히 발견되는 관습으로 신생아의 이름을 출생 직전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에 관련하여 이름을 짓거나, 산모가 해산한 후 제일 처음으로 본 물건의 이름으로 짓는 것이다.

테무진은 9세때에 그의 부친이 타타르인에 의해 독살되면서 빈곤과 어려움이 계속되는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스텝의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양아버지 토그릴칸의 도움으로 몽골 부족들을 통합하고, 1203년 그의 추종자 19인과 함께 서약한 맹약을 거쳐 1206년 봄, 오논강에서 열린 몽골 부족들의 부족장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족 최고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그 때 그에게는 칭기스칸(바다의 왕)의 칭호가 주어졌는데, 그는 바로 이 이름으로 전 세계에 돌풍을 몰고 온 강력한 군주, 두려움의 존재가 되었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을 창건한 후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스텝의 독점 정복과 주위 정착국가들에 대해 세력을 확장하려는 야망을 갖게 되었다.

몽골의 일차적인 관심은 아시아 문화와 경제의 주도자였던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있었다. 중국 정복을 위해서는 탕구트의 지배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당초 칭기스칸은 탕구트 정복 계획은 없었으나 중국과의 전쟁에 앞서 1207년 탕구트와 먼저 전쟁을 치루어야 했었다.

 

그러나, 강인한 탕구트의 군사력에 부딪쳐 전쟁은 별 성과없이 끝났고, 칭기스칸은 1209년의 제 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결국 이 전쟁은 칭기스칸의 승리로 끝났고, 탕구트의 군주는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협조를 약속하게 되어 중국으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몽골제국은 1211년 봄, 금나라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 전쟁은 중국의 한민족과 유목민족인 몽골족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같은 알타이계 민족인 몽골족과 퉁구스계 여진족과의 싸움이었다.

이로부터 중원 정복은 1234년, 즉 칭기스칸 사망 후 근 10년 후까지 계속되었다.

칭기스칸은 중국 정복을 보지 못하고 탕구트의 반란을 제압하려 간 어느 여름 병사하고 말았다.


여진족(女眞族)의 금(金)나라는 몽골군에게 점령당하고 정복당한 최초의 정착국가였다. 이것은 몽골민족에게 뿐만 아니라 역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제국으로서도 최초의 정착왕조정복이라는 면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동과 이서지역 정복」


1206년을 전후로 하여 칭기스칸의 조정에 중동 지방의 이슬람 콰레즘제국으로부터 사절들이 왔다. 이들은 단순히 무역적인 관심과 그 가능성 타진에만 목적이 있었는데 반해, 몽골 조정은 이들을 외교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외교사절로 극진히 예우했으며, 이들이 귀국할 때에 방문에 대한 예의와 콰레즘과의 관계 증진을 목적으로 칭기스칸의 친서와 함께 몽골귀족 일행을 동행케 하여 콰레즘 국왕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칭기스칸은 처음에 콰레즘이나 그 이서지역을 정복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몽골의 사절단이 콰레즘국에서 두차례나 걸쳐 잔인하게 처형당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콰레즘왕이 새로 부상한 스텝제국 몽골의 존재를 너무 무시했던 것 같다.

몽골은 1218년부터 그 보복 전쟁을 중동과 이서지역에서 시작하였다.

전쟁의 목적은 다분히 콰레즘에 대한 보복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고, 몽골군은 거센 공세로 콰레즘국을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중동지역의 이슬람 제국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도망하는 콰레즘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부하라, 사마르칸트를 비롯하여 아르메니아등의 전지역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자, 중동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은 극심한 심리적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무슬림군대에는 이미 이전에 이곳에 정착한 같은 유목민족인 튀르크계 군인들이 많았으나, 몽골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저항한 군대는 하나도 없었다.

콰레즘에 대한 칭기스칸의 침공작전으로 몽골군은 페르시아지역 뿐 아니라, 러시아도 침입하게 되었다. 코카사스를 횡단한 몽골군은 큽착스텝에서 1230년 5월 큽착-러시아 연합군을 패퇴시켰다.

이들 몽골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는 노브고로드, 서쪽로는 드니에프르강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오고데이의 통치」


한편, 칭기스칸 사망 후 그의 셋째 아들 오고데이(Ogodei)에 의해 계승된 몽골 제국은 정복 전쟁을 계속하면서 동시에 무력국가로부터 중앙 집권적 관료국가로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오고데이는 등극하자마자 칭기스칸이 시작한 정복사업을 재개하고 강화하였다. 그

리하여 그는 금조의 분쇄(1233년)와 중원 및 고려 평정, 페르시아의 콰레즘 완전 제거와 함께 중동의 이슬람 압바스왕조 판도내로의 침투 확장, 풍부한 러시아 곡창 지대와 동유럽(폴란드, 헝가리등)까지 정복 사업을 수행하였다.


몽골은 정복한 지역들의 특성들을 최대한 살려주면서 조공을 바치게 하는 형태로 점령지 통치 행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몽골인과 친근 종족인 튀르크계 우이구르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한인, 여진인, 거란인, 페르시아인 그리고 심지어는 유럽인까지를 포함한 범민족적 중앙 행정부를 창설하였다.

여전히 국가 형태는 군사조직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나 이들 이민족의 영향으로 유목민족국가의 성격과 정착민족국가의 성격을 혼합시킨 국가모습으로 점차 변하게 되었다.


「구육의 통치」


오고데이의 뒤를 이어 1246년 왕위를 계승한 구육(Guyuk)은 오고데이 통치 말년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발생한 각 지역의 자치독립적 경향과 제국 내부분열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1248년 사마르칸트에서 서거하고 몽골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251년 몽골의 쿠릴타이는 유럽 원정시 뛰어난 공을 세운 몽케(Mongke)를 대칸(Great Khan)으로 승인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의 통치 치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몽케의 통치」


칭기스칸이 몽골 세계제국의 건설자였다면 몽케는 그 제국의 진정한 의미의 제 1대 황제였다. 몽케는 제국의 어려운 상황의 타개를 위해 유럽식의 봉건제도 성격을 결합한 정치형태를 발전시켰다.

후에 5인 총독제도를 채택하여 중앙 수도 카라코룸(Kara Korum)의 행정에 아릭 부게를, 중국 통치는 쿠빌라이에게, 중동 지방(일칸)은 홀레구, 칭기스칸의 둘째 아들 차카타이가 다스리던 중부스텝 유목 지역은 카라 홀레구, 큽착 스텝 지역(金호르드)은 베르게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

리하여 각각 담당한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고 지방 행정 관계사를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다.



 

[쿠빌라이칸]

 

2) 제 2기 : 세계 제국 시대


1258년 몽케가 사망한 후, 카이두를 중심으로 한 오고데이 가계(家系)와 쿠빌라이를 중심으로 한 톨루이 가계의 분쟁이 재현되었으나, 1260년에 열렸던 쿠릴타이는 쿠빌라이를 지배자 대칸으로 선언하였다.

중국 정착문화에 도취되었던 쿠빌라이는 대칸에 선출된 후 곧 몽골제국의 행정 수도를 자신이 통치하던 영역내의 북경(北京)으로, 즉 유목지역으로부터 정착지역으로 옮겼다.

그 후 그는 계속 중국에 남아 정착민족지역에 근거를 잡고 몽골을 통치하였다.

그는 신속함과 신중함을 고루 갖춘 정치를 하였는데 특별히 중국문화에 비중을 두어 중국 자원을 고갈시키지 않으면서 몽골인에게 유익한 행정을 구상하였다.


쿠빌라이는 정착 지역 내부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장악하지 못하면 유목 제국이 아무리 강성해도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믿고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북경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천도는 제국의 광대한 판도로 인하여 통신 시간의 증가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중앙스텝의 카이두로부터 천도문제로 인해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앙 카라코룸에 대한 경제 봉쇄 조치와 무력 제재를 병행하여 이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였다.


쿠빌라이는 정복 사업도 계속하여 송(宋)을 완전히 정복하였을 뿐 아니라 동남아를 공략하고 중동과 왕래하는 해양로 확보를 위해 수마트라와 자바 공략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실질적으로 몽골제국 역사상 그리고 전체 유목민족 역사상 전례없는 혁혁한 공적을 이루었다.


 

「일칸」


한편, 총독 분할 통치제도에 의해 4개의 칸국으로 분리된 지역들은 각각 계속적인 정벌과 함께 통치권을 확고히 해나갔다. 페르시아 중동지역 일칸(Ilkhan)의 통치자 홀레구는 칭기스칸이 시작한 정복 활동을 완성하는 일과 함께 중동 각 지역을 단일한 행정 체제로 평정코자 하였다.

특히 이슬람교의 정신적, 문화적 지주인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프를 복속시키기에 노력하였다.

칼리프가 몽골의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한, 정복된 무슬림들은 몽골 지배층보다 칼리프에 대해 더 충성심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1257년 가을 몽골군은 바그다드 압바스 왕조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이락 영토를 통과하여 대대적인 진군을 하였다.

1년 후, 칼리프 군을 섬멸시킨 몽골군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압바스 왕가를 잔인하게 멸종시키고, 여러 도시를 약탈하여 비이슬람교도로서 절대적인 중동 이슬람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이슬람 문화권에 위치한 일칸제국은 말기에 들어서는 지배층까지 서서히 이슬람화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295년 일칸 통치자 가잔이 개종함으로써 몽골제국이 아닌 이슬람 국가로서 단순히 몽골인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가 되었다.

초기 몽골 국가의 중동 정벌 때에 기독교를 보호하고 이슬람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몽골은 가잔의 개종과 함께 완전히 이슬람 국가가 된 것이다.

가잔은 개종 후 제 1차 명령으로 기독교와 유대교 회당 불교 사원을 파괴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부친에 의해 건립되었던 불교 사찰이 그 때 모두 파괴되었다.

이것은 일칸에서의 스텝과 스텝 전통의 종식을 의미하며, 이 후에 일칸은 자신들의 근본을 중동에 두었고 중앙아시아의 조상들을 찾지 않았다.


「금(金)호르드」


몽골제국의 4개의 칸국 중 러시아 대륙의 金호르드朝(큽착칸국)와 차카타이칸국은 스텝 지대를 그 영토로 하고 있었다.

그 중 금호르드가 더 넓은 영토를 함유하고 있었으며, 중국이나 중동의 일칸과는 달리 영농정착민족의 거주지역인 러시아내에 위치하지 않으면서 그 곳을 지배하는 형태를 가졌었다.

큽착 칸국은 칭기스칸이 그의 장남인 조치(Jochi)에게 이르티쉬江과 알타이산맥을 연결하는 지역을 급여하고 큽착스텝과 그 이서(以西) 지역을 통치하도록 명령한 이후, 바투(Batu)에게 계승되어 동유럽까지 더욱 판도가 확장되었다.


大칸이 카라코룸에서 통치하던 시기에도 금호르드는 몽골제국내에서 다른 칸국에 비해 비교적 半자치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미 이전에 이슬람화되었고 금호르드의 지배층에 많이 진출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러시아계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형성하고 있는 튀르크족의 영향으로 일칸과 비슷하게 일찌기 이슬람을 수용한 금호르드는 현지 튀르크계 백성들과 튀르크계 지도층의 영향으로 튀르크화가 급속하게 촉진되었다.

 

「차가타이칸국」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던 차카타이(Chagatay)칸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몽골제국 내에서 유일한 순수 유목국가였다. 이 칸국은 튀르키스탄(T?rkistan)과 스텝 서부의 트란속시아나 지방을 포함하고 있었고 제국 내에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같은 도시도 존재했으나 아직 정착화되지는 않고 있었다.

정복지역 내에 거주하는 주민의 대다수는 유목 혹은 반유목 생활을 하는 튀르크족이었다.

몽골족의 원래 거주지역을 제외하면 피정복민족과 정복민족이 동일한 전통을 소유하고 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차카타이칸국의 성격은 수적으로 적은 몽골인 지배층이 도리어 다수의 튀르크족에 의해 흡수되어 완전히 튀르크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3) 제 3기: 쇠퇴와 멸망기


몽골제국이 몰락한 원인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려면 역사적 시대구분을 해보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모든 지역에 공통적으로 영향을 끼친 요소들과 원조(元朝), 일칸, 차카타이칸국과 큽착칸국(금호르드)등 각 제국에서 발생하였던 여건들을 분석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스텝 유목제국의 전통적 내부 분열성」


스텝의 전통은 몽골제국의 쇠퇴와 멸망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몽골족은 스텝 전통의 성실한 계승자들이었으며, 또 그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튀르크계 고대 돌궐과 우이구르 및 기타 다른 여러 스텝 민족들의 제국 역사를 고찰해 보면 몽골제국이 붕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2세기말 수십년간의 스텝의 정치정세가 어떠하였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 당시 그 곳에서 끊임없는 혼란과 격렬하고 급작스러운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몽골제국은 건설 과정에서 스텝의 전통을 그대로 따랐는데, 과거의 스텝제국들은 비교적 단일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었으나, 몽골제국은 건설과정에서 비몽골계의 여러 부족 집단을 포함시켰고, 이들은 곧 새로운 제국의 구성분자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이러한 부족연맹체가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스텝의 전통과 같이 칭기스칸이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의 영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영도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자 제국의 내부는 긴장과 멸망으로 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칭기스칸은 몽골제국이 과거의 유목민족제국들이 걸어간 운명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으려는 조처들을 취하였으나, 그가 결정한 몇몇 사항들은 死후 심각한 「내부적인 불화」를 낳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정들의 첫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지휘관들의 독자적 행동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방주의적 입장은 칭기스칸 사망후 즉시 지방 자치적인 분리주의 경향으로 발전하려는 추세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수도 카라코룸에 있는 제국의 황제는 이를 제거하기 위해 상당한 자원과 노력을 소모해야만 했었던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다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 칭기스칸의 정책은 제국을 네 아들에게 분할한 것이었는데, 그러한 분할은 이권 추구에 따른 잠재적 분란이 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발전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요 이유들로 인해 결속과 전쟁의 상태가 수시로 바뀌는 끊임없는 정치적 긴장, 즉 스텝 정치의 전형적인 현상이 몽골제국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부적 갈등으로 인한 전쟁들 가운데 제국의 약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몽골 오고데이家의 지도자였던 카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시작해 30년간 지속되었던 복위(復位)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칭기스칸이 세운 제국을 붕괴시켰던 단일 원인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카이두의 무력행사는 전통적으로 반역이라고 기술되어 왔으나, 「복위(復位)를 위한 투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카이두는 오고데이家의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했을 뿐 아니라, 스텝에 그 다이나믹한 근거를 둔 유목민족제국을 재건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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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우 11-12-02 02:43
   
출처 돈미니 블로그
객님 11-12-02 09:24
   
이건 액박
러브사냥꾼 11-12-02 11:58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입니다...잘 봤습니다...예전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단어들이 좀 생소해서 첨엔 궁금햇다는 ㅎㅎ.. 큽착??-->킵차크? , 오고데이가 아마도 오고타이로 배웠던.....콰레즘???....호라즌....드니에프르??...아마도 드네프르강인듯...ㅎ.어쨌든 상당히 재밌습니다...
호호동 11-12-13 16:33
   
뭐 다른 내용으로는  흑사병을 들기도 하던데요...  흑사병이 유럽에서 건너와서, 중국대륙을 휩쓸었는데, 중국은 워낙에 인구가 많아서 괜찮았지만,  항상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상대했던 원 제국으로써는.... 그 병력마자 대부분 병마에 쓰러져서, 주원장의 군대를 막지 못했다는..... 그런 설도 있읍니다
호호동 11-12-13 16:33
   
참 유익한 내용 잘 보고 갑니다  인사 먼저 했어야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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