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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2-02 02:37
[중국]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랑캐 땅으로 끌려간 여인들
 글쓴이 : 한시우
조회 : 7,459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랑캐 땅으로 간 여인들

by 첫걸음 2011/01/19 14:59 songij21.egloos.com/1317792



진한 시대 이래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화제국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왔다. 중국의 정사에는 중화제국이 지난 2000년 동안 오랑캐들을 압도하며 화려하게 주도권을 행사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중화제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가 화려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어두운 단면도 존재하였다.
중화제국이 늘 오랑캐들을 압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랑캐들에게 압도당한 적도 있고, 평화를 위해 그들과 타협한 적이 많았다. 특히 북쪽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은 청 제국이 준가르 부를 토벌할 때까지 중화제국의 변경을 끊임없이 위협하였다. 중화제국은 2000년 동안 유목민들의 위협에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어쩌면 유목민들에 대한 두려움과 피해의식이 유목민을 중국사 속에서 오랑캐로 낙인찍은 것인지도 모른다.
중화제국은 유목세력을 막고 변경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한 대 이후로 평화라는 이름 아래 많은 여인들이 고향을 떠나 황량한 초원으로 보내졌고, 그 곳에서 최후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한 여인들을 역사에서는 화번공주(和藩公主)라고 표현한다. 이 글에서는 전한 시대에 초원으로 보내졌던 세군(細君), 해우(解憂), 왕소군(王昭君)의 기록을 통해 전한과 유목 세력 간 외교의 단면을 알아보고자 한다.

2.  화친정책(和親政策)의 시작
기원전 200년, 평성의 백등산에서 일대 전투가 벌어졌다. 한 고조가 이끄는 30만의 보병과 전차부대와 흉노의 묵특 선우가 이끄는 40만의 유목 기병대가 격돌한 것이다. 하지만 전투의 실상은 흉노의 일방적 공세에 한의 군대가 포위된 상태였다. 한 고조는 강추위 속의 백등산에서 흉노의 기마부대에 의해 7일 간 고립되었다. <사기><흉노열전>은 한 고조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 백등산에서 한의 대군을 포위하는 묵특 선우


△ 백등산

"(......)고제는 친히 정벌하고자 군사를 출병시켰으나, 때마침 겨울이라 추위가 심하고 큰 눈이 내렸기 때문에, 병사 중에 동상자 수가 열에 2~3명 꼴이었다. 묵특은 때를 노렸다는 듯 패주를 가장하여 한나라 군을 계속 유인하였고 한 군은 그의 예상대로 추격하였다.(.......) 고제 자신이 전군의 선두에 서서 평성에 이를 때였다. 보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묵돌의 정예기마병 40만이 고제를 백등산 위로 몰아 넣고 포위하였다. 한 군은 7일 동안이나 후진과 단절되어 보급과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 <사기>110<흉노열전>
건국 초기 흉노를 확실히 제압하여 북방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던 한 고조는 도리어 흉노에게 도리어 확실하게 제압당한 꼴이 되었다. 한 고조는 결국 포위를 풀기 위하여, 묵특의 연지(閼氏: 흉노의 황후, 후비)에게 뇌물을 주어, 묵특을 구슬리게 하고 포위를 풀게 하였고 결국 장안으로 귀환하였다. 비록 목숨은 건져 왔지만 황제인 한 고조로서는 백등산의 패배가 국제적 망신이었고, 그로 인해 더욱 강성해진 흉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이었다.  이에 유경(劉敬)이 고조에게 계책을 내놓았다.
"폐하께서 만일 적출 장녀 공주를 묵특에게 시집을 보내시고, 후한 선물을 내려주신다면, 그는 한나라가 적출공주를 시집보내고  선물이 후한 것을 보고 비록 이적일지라 하더라도 반드시 공주를 존경하여 연지로 삼을 것이고, 공주께서 그의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서 선우의 대를 잇게 할 것입니다." <사기>99<유경숙손통열전>
고조는 유경의 계책을 채택하여 자신의 장녀 노원공주를 막대한 패물과 함께 묵특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에 제동을 건 사람이 등장하였다. 바로 고조의 부인 여후였다. 여후로써는 자신의 딸을 삭막한 초원으로 보내기 싫었던 것이다. 여후는 고조에게 밤낮으로 울면서 사정하였고 결국 고조는 노원을 보내지 않고 궁녀 한 명을 공주로 가장하여 묵특에게 막대한 물품과 함께 보내고 유경에게 흉노와의 맹약을 맺게 한다. 이것이 한과 흉노의 화친의 약(和親之約)이었고, 화번공주의 시작이었다.
사실 화친이라는 것은 한과 흉노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최상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한 왕조로써는 군사적으로는 더이상 흉노를 압도할 수가 없었지만, 황제국가로써의 체면을 살려야 했다. 따라서 화친관계를 통해 흉노를 무마할 수 있었고, 명분상으로나마 흉노 선우의 장인으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동시에 챙기는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흉노로써도 좋은 방책이었다. 묵돌의 연지가 ""한나라 땅을 얻어봤자 선우께서 그곳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今得漢地,而單于 於終非能居之也?)"라고 말한 것처럼 한나라의 영토를 전쟁으로 얻는다 해도 유목민인 흉노는 경제적으로 이득이 없다. 하지만 한나라와 화친을 한다면, 공주와 함께 들어오는 막대한 한나라의 문물을 얻을 수 있고, 비록 가짜 공주라 할 지라도 한 황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해서 선우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다. 이러한 화번공주와 막대한 패물을 골자로 한 화친 관계는 중화왕조와 흉노 등의 초원 유목세력 간의 중요한 외교 관계로 발전한다. 

3. 세군과 해우
고조 이래로 경제 대까지 이어져온 한과 흉노 간의 화친 관계는 무제가 친정을 하면서 급격히 바뀐다. 무제는 군현을 기반으로 한 황제지배체제를 이적의 영토에 실현하기 위해 대대적인 대외정벌 사업을 벌인다. 무제의 주 공격 목표는 바로 흉노였다. 기원전 133년 한나라 군대가 흉노의 군신선우를 마읍에서 유인하여 기습공격을 시도한 이후, 이사장군 이광리가 흉노에 투항할 때까지 한의 흉노 공격은 수 차례 계속되었다.
흉노와 한의 주요 격전지는 몽골 초원 지대가 아니었다. 뜻밖에 하서회랑 일대와 지금의 신강 일대인 서역을 두고 한과 흉노 간의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서역은 흉노에게는 돈줄과 같은 곳이었다. 흉노는 타클라마칸 사막 가장자리에 분포한 오아시스 국가들을 위성국으로 거느리면서 막대한 세입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한은 장건이 구사일생 끝에 탐험한 서역의 사정을 파악하고 서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 그 길목인 하서회랑과 서역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였다.
당시 서역 일대에는 다양한 국가들이 병존하고 있었다. 타클라마칸 일대의 오아시스 문화 이외에도 천산 산맥 북쪽에는 초원지대가 펼쳐져 있기 때문에 유목민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유목 국가 중에서 오손(烏孫)이란 국가가 있었다. 오손은 본래 돈황 일대에 거주한 투르크, 혹은 아리안 계의 유목 세력이었는데 흉노가 영향력을 미치자 천산 산맥 북쪽, 지금의 일리지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되었다. 
△ 오손의 주요 거주지역 이리분지

오손은 곤막(昆莫)이라는 걸출한 지도자로 인해서 천산산맥 이북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서역을 견문하고 돌아온 장건은 무제에게 오손과 손을 잡을 것과 한 황실의 공주를 오손 왕의 부인으로 들일 것을 권했다. 무제는 장건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한 왕조로써는 오손과 손을 잡아 흉노를 양쪽에서 공격할 수 있었고 게다가 오손은 명마 산지로 유명했기 때문에 좋은 말에 혈안이 되어 있던 한 무제로서는 오손과의 동맹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오손의 곤막 역시 당시 아들들의 왕위 다툼과 흉노의 잇단 공격으로 한과의 동맹을 바랐다. 결국 오손이 한에 명마 천 필을 바치는 대가로 한은 오손과 화친을 맺고 종실의 공주를 오손 왕의 부인으로 들이기로 했다.
△ 곤막과 세군이 결혼하는 모습을 재연하는 모습

곤막의 부인으로 오손으로 보내질 종실의 여인은 강도군왕(江都郡王)의 딸 세군(細君)이었다. 그녀와 함께 수레, 의복 등의 물품과 세군을 보필할 환관, 시종 수백 명이 오손으로 향했다. 궁성에서 온갖 대접을 받은 중국 황실의 공주로써, 멀고 황량한 초원지대로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신랑이었던 오손 왕 곤막은 연로한 인물이었다. 결코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오손 왕의 부인이 되었지만, 오손에서의 세군의 위치는 불안정 하였다. 한에서 오손 왕에게 공주를 보낸 사실을 알고 흉노에서도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손 왕에게 여인을 보냈기 때문이다. 곤막은 흉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교묘한 계책을 냈다. 세군을 우부인(右夫人)으로 삼고, 흉노의 여인을 좌부인(左夫人)으로 삼았던 것이다. 동양에서는 좌측이 우측보다 상위이기 때문에 흉노 여인의 지위는 세군보다 높았다. 세군은 비참한 심정이었다. 초원의 음식은 중원과 서로 통하지 않았고, 남편은 연로한데다가 말조차 통하지 않았다. 세군은 자신의 비참한 심정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 가문은 나를 하늘 한쪽 끝으로 시집보내서
  먼 다른 나라 오손왕에게 내 몸을 의탁했다네.
  궁려를 집으로 삼고, 모전을 담장으로 삼으며
  고기를 밥으로 삼고 유즙을 장국으로 삼았네.
  마냥 떠오르는 것은 고향생각 뿐, 마음은 에이는 듯
  원컨데 노란 고니되어 고향에 돌아가기를
  吾家嫁我兮天一方,
  遠托異國兮烏孫王。
  穹廬爲室兮?爲墻,
  以肉爲食兮酪爲漿。
  居常土思兮心內傷,
  願爲?鵠兮歸故鄕.
 
<한서>96<서역전>

세군 공주의 이러한 심정은 장안에서도 전해진 듯하다. <한서>에 의하면 세군의 소식을 들은 무제도 세군에게 연민을 느껴, 사자를 파견하여 휘장과 비단을 하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왕조가 그녀에게 베푼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후, 중원 여인인 그녀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전개된다. 오손 왕 곤막의 아들 잠취가 태자가 되면서 그녀를 부인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중원 문화에서는 패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초원과 요동 일대에서는 형이나 아버지가 죽으면 동생과 아들이 그 부인을 부인으로 맞는 수계혼 풍습이 존재하였다. 잠취에게는 당연한 권리였지만 중원 여인인 세군은 수계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군은 무제에게 고향으로 귀환하고 싶다고 상서했으나, 무제에게서 돌아온 말은 "그 나라 풍속을 따르거라. 짐은 오손과 함께 흉노를 멸하고 싶구나.(從其國俗,欲與烏孫共滅胡)"라는 싸늘한 한마디였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오손 왕 곤막은 죽었고 태자 잠취가 오손 왕으로 등극하면서 세군은 울며 겨자먹기로 잠취의 부인이 되었다. 잠취는 세군을 총애하여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았다. 이후 <한서>는 세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공주가 죽었다고만 기록하였다. 아마 잠취 재위 기간 중에 오손에서 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군이 죽자, 한은 오손 왕 잠취에게 또다시 종실의 여인을 보낸다. 이번에 오손으로 간 여인은 초왕 유무의 손녀인 해우라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해우는 세군과 달리, 초원 생활에 금새 적응하고, 상당히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잠취가 죽자, 그의 형제였던 옹귀마가 비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옹귀마 역시 해우를 다시 아내로 삼아서 사이에서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원귀마이고, 차남은 만년으로 차사왕으로 삼았고, 막내 아들은 대락으로 좌대장으로 삼았다. 장녀 제사는 구자왕의 부인이 되었고 차녀 약호흡후의 아내가 되었는데, 이는 어머니 해우가 오손과 주변 국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고, 오손이 해우의 수완으로 인해 한나라와 밀접해졌음을 의미한다.

해우의 수완으로 인해, 오손이 한과 밀접해지자, 흉노는 오손을 쳐들어 온다. 해우는 흉노가 공격해오자, 한에 직접 편지를 올려 원군을 요청했고, 한은 15만에 이르는 대병을 이끌고 오손과 연합하여 흉노를 격파하게 된다. 또한 해우는 비왕이 죽은 후, 전 남편 잠취가 흉노의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이 광왕(狂王)으로 즉위하자, 그와 다시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얻었다. 광왕은 해우에게는 배다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광왕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그는 매우 포악한 인물이었다. 또한 흉노의 피가 섞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해우는 결국 한과 결탁하여 광왕을 암살하는데 일조하였다.
해우가 일궈낸 정치적 성과는 상당한 것이었다. 오손이 한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서역의 오아시스 국가들 역시 한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서역이 한으로 등을 돌렸다는 것은 흉노로는 중요한 세입원을 잃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흉노는 무제와의 대규모 공격과 이치사 선우 사후 벌어진 선우 계승 전쟁으로 인해 분열된 상태였다. 그 결과 기원전 51년, 전한 선제 시기 남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친히 장안에 입조하여 한에 신하를 청하게 된다.  
해우 역시 호한야 선우가 장안에 입조한 기원전 51년, 그리던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물론 고국으로 귀환하고 싶다는 그녀의 청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한으로써도 흉노의 선우가 장안에 입조하였기 때문에 해우 역시 이용가치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토록 그리운 중원 고향 땅으로 귀환한 해우는 세월의 풍파를 겪은 연로한 노파였다. 해우가 비록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는 등 강인한 여성으로 사서에 기록되었지만, 과연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쩌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 속으로 쓴울음을 참지 않았을까? 해우는 그동안의 회한과 그리움을 모두 털어 논 듯 장안으로  귀환한 지 2년 후, 세상을 떠난다.
<下편에서 계속>

 
△ 중국 신강 위구르자치구 이리 지역의 세군 공주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

 

4. 왕소군, 초원에서 눈물의 비파를 뜯다.


기원전 51년, 한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을 사건이 일어났다. 한과 항상 대립해 오던 흉노의 선우가 친히 장안으로 들어와 한의 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청한 것이다. 당시 흉노의 선우는 호한야 선우였는데, 이미 2년 전부터 한에 입조칭신을 하겠다고 서신을 보내 왔다. 흉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한의 조정은 당황스러웠고 2년 간의 논의 끝에 흉노 선우에 대한 예를 제후왕의 위에 두어 칭신불명(稱臣不名: 신하로 칭하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의 예로 대우했다. 이로써 한과 흉노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되었다.

△ 호한야 선우 기마상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에 신하의 예를 취하게 된 데에는 흉노의 국내 사정이 있었다.  무제가 수차례 흉노를 공격한 이후, 흉노는 국력이 쇠퇴해졌고 곧 선우 자리를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5명이 선우를 자칭하는 이른바 5선우 시대가 도래한다. 이 5선우 시대를 곧 통합한 인물이 바로 호한야였다. 하지만 호한야의 형인 호도오사가 호한야에 반기를 들면서, 질지선우라고 자칭하게 된다. 질지 선우의 세력은 호한야 선우를 압도하게 되었고, 호한야는 질지 선우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 한에 입조 칭신을 하게 된다.
호한야는 기원전 51년 장안에 입조한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장안에 입조하였고, 호한야와 한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게 되었다. 한은 호한야 선우와 오손 등의 서역 제국과 연합하여 질지 선우의 세력을 공격하였다. 더군다나 질지가 한나라 사신 곡길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한-오손 등 서역-호한야 간의 연합체제는 더욱 굳건해져서 질지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질지의 세력은 지금의 사마르칸트인 강거로 도주했고, 결국 기원전 36년 한의 서역도호 감연수와 부교위 진탕이 강거까지 침투하여 질지를 살해하였다. 흉노-훈 동족론설을 제기한 학자들은 훈의 조상이 질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호한야 선우의 세 번째 장안 입조는 질지선우가 살해된 후인 기원전 33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호한야 선우의 3번째 장안입조에서 우리가 잘 아는 왕소군(王昭君)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뒤에도 언급하겠지만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대에 부풀려지고 각색된 흔적이 많다. 왕소군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한서><흉노전>이다.
"경녕 원년(기원전 33년), 선우가 다시 입조하였다. 선우를 대접하는 예와 하사품은 처음 입조할 때와 같았고, 더하여 의복과 비단, 솜옷을 주었는데, 모두 황룡 연간 때보다 갑절이었다. 선우 자신이 한의 사위가 되어 친척이 되고 싶다고 말하였다. 원제는 후궁 양가자(良家子) 왕장(王牆)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주었다."<한서>94<흉노전>
△내몽골 자치구 호화호특의 왕소군 무덤 앞에 있는 왕소군, 호한야의 기마상



△ 왕소군과 호한야 선우(드라마<왕소군>)

왕소군의 신분은 앞서 본 세군, 해우와는 달랐다. 세군과 해우는 제후왕의 딸로 종실의 여인이었다면 왕소군은 일개 궁녀 신분이었다. 위 기록에서 양가자라는 말은 한나라 대에 3대 이상 범죄 등에 이르지 않은 가문으로 평범한 가문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범엽이 지은 <후한서><남흉노전>에 의하면 왕소군 이외에도 4명의 후궁이 호한야 선우에게 내려졌다고 하니, 왕소군은 애초에 특수한 지위로  흉노에 간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한에 입조한 흉노 선우에 대한 하사품이었던 것이다. 
<한서><흉노전>은 왕소군이 초원으로 떠난 이후의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서술된 기록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왕소군이 영호연지(寧胡閼氏)라고 불려졌고 아들 이도지아사를 낳았는데, 후에 우일축왕이 되었다. 호한야는 28년 재위했는데 건시 2년(기원전 31년) 사망하였다."

"복주루 선우는 왕소군을 다시 처로 맞아 딸 2명을 낳았는데, 장녀는 수복거차라고 하였고, 차녀는 당우거차라고 하였다."

<한서>94<흉노전>

 

우선 왕소군은 흉노로 가서 호한야선우로부터 "영호연지"라는 칭호를 받았다. "연지"는 선우의 부인을 말하는 것이고 영호라는 것은 "흉노를 안정시킨다."라는 의미의 칭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호한야선우가 왕소군과의 결혼에 흉노가 오랜 분열과 대외적인 전쟁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았다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왕조 역시 왕소군의 결혼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을 가던 해, 원제가 연호를 변경의 안녕을 바란다는 "境寧" 으로 고친 것에서 알 수 있다. 후에 흉노와 한의 관계가 상당히 평화로웠다는 것을 보면 왕소군의 peace maker 역할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흉노 사회 내에서의 왕소군의 지위도 상당한 것이었다. 왕소군은 호한야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도지야사를 낳았다. 이도지야사는 일축왕으로 봉해졌다고 <한서>는 전하고 있고 <후한서>는 이도지야사가 좌현왕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일축왕은 흉노의 오른쪽 날개를 담당하는 제후이고, 좌현왕은 흉노 선우의 후계자 자리로 선우 다음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복주루 선우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두명은 각각 수복거차, 당우거차라고 하는데, 여기서 거차(居次)라는 단어는 흉노어로는 공주를 의미하고, 수복(須卜)과 당우(當于)는 흉노의 유력한 귀족 가문을 말하는데, 이는 왕소군의 딸들이 흉노의 유력 가문으로 시집갔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흉노에서의 왕소군의 삶이 후세에 알려진 것처럼 그다지 고달프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 우리에게 왕소군이 비련의 여인으로 인식되는 것은 무엇일까? 문제는 <한서> 이후의 사서들과 여러 기록들이 왕소군을 점차 비련의 여인으로 만든 사실이다. 왕소군이 비련의 여인으로 인식된 것은 서진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서진시대의 도가 사상가로도 유명한 갈홍이 편집한 <서경잡기>라는 책에 왕소군이 흉노로 간 배경이 적혀져 있고, 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의 원형이다. 

△금을 연주하는 왕소군(드라마<왕소군>)


△ 왕소군과 한나라 원제(드라마 <왕소군>)

간단히 언급하자면, 원제는 화공이 그린 궁녀들의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궁녀와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궁녀들은 원제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오늘날 말하는 뽀샵처리를 부탁했다. 그런데 왕소군만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고 화공은 왕소군을 추하게 그렸다. 호한야가 장안에 입조할 때 황제는 그림을 보고 왕소군을 선택했지만, 왕소군의 미색을 보고 곧 후회했다. 하지만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서 결국 황제는 왕소군을 포기하고 말았다.
<서경잡기>의 이야기는 원 대의 잡극인 <한궁추> 등 많은 왕소군 관련 소설의 기초로 애용되었다. 어떤 이야기는 원제가 분노해서 화공을 처단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한궁추>의 경우,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가 흉노로 도망가서 흉노선우를 꼬드겨 한나라를 침공하게 하는 악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경잡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다. 누가 편찬자인가를 두고도 전한 말의 유흠이 기록했다는 설, 유흠이 기록한 것을 서진 시대 갈홍이 새롭게 편집했다는 설 등이 있고 잡기라는 제목에서 보이듯, 정사(正史)가 아닌  일종의야사라는 점으로 인해, 이 기록이 확실한 사실인지는 의심해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서경잡기>의 기록이 후대 중국인들에게 왕소군을 비운의 여인으로 인식하게 하는데에 일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

 왕소군을 비련의 여인으로 인식하게 하는데에는 남조 시대 송나라의 범엽이 편찬한 <후한서>의 기록들도 들 수 있다. <후한서> <남흉노전>에는 남흉노의 선우들이 호한야 선우의 자손들이라고 언급하면서 왕소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소군의 자는 장이고, 남군 사람이다. 처음 원제 시기에 양가자로 뽑혀 액정에 들어갔다. 이 때 호한야가 입조했는데, 황제는 5명의 궁녀를 뽑아 그에게 주었다. 소군은 입궁한 지 수년이 지났으나,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슬픔과 원망이 지극하여, 액정령에게 청하여 흉노로 가려 하였다. 호한야가 연회에서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때, 황제가 다섯 명의 궁녀를 불러서 그에게 보였는데, 소군이 풍만한 얼굴을 단장하여 한나라 궁궐을 밝게 비추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배회하여 좌우를 숙연하게 하였다. 황제는 그녀르보고 크게 슬퍼하며 그녀를 붙잡아 두고자 했으나, 흉노와의 신의를 저버리기 힘들었기 때문에 마침내 흉노에게 주었다."

<후한서> <남흉노전>


 <후한서>의 기록 역시 왕소군을 비련의 여인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범엽의 <후한서> 역시 중국의 정사로 평가되지만, 이전의 <사기>, <한서>, <삼국지>에 비해 역사서로는 비교적 평가절하된 것이 사실이고, 원사료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왕소군에 대한 서술이 사실로써 다소 의심되는 이유는 이 서술의 바탕이 되는 사료가 후한 말의 저명한 학자 채옹이 편찬한 <금조(琴操)>의 <원광사유가>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금조>는 거문고 곡조와 그 곡조의 유래에 대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그 글들은 문학적으로는 가치가 있으나, 역사적 사료로는 가치가 적다고 평가된다. 게다가 <금조>가 전하는 왕소군의 결말은 <한서>의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금조>에 전해지는 왕소군의 결말은 다음과 같다.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왕소군은 자기가 낳은 친아들과 재혼할 것을 강요받는다. 왕소군은 친아들에게 "너는 한인으로 살고 싶으냐, 아니면 흉노인으로 살고 싶으냐?"라고 물었는데, 친아들은 "흉노인으로 살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낙담한 왕소군은 자진하였다. 
흉노의 계수혼제도가 아버지의 계모나 형수와 결혼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금조>가 전하는 왕소군의 결말은 사실과 맞지 않고, 왕소군이 복주류 선우와 결혼했다는 <한서>와의 기록도 맞지 않는다. 비록 범엽이 <후한서>에 <금조>의 결말 내용은 싣지 않았으나, <금조>의 내용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왕소군이 눈물을 흘리며 흉노행을 선택했다는 <후한서>의 서술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최소한 <금조>가 등장한 후한시대부터 중국인들에게 왕소군이 비운의 여인으로 인식되었고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러한 인식이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이후 왕소군은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초원에 보내진 비운의 여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울러, 왕소군의 눈물젖은 이야기는 시인묵객들의 소재로 활용되면서 왕소군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비극으로 굳어진다. 대표적인 시가 바로 당대의 시인들이었던 이백과 동방규의 <소군원>이란 작품일 것이다.
  왕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昭君拂玉鞍
  말 위에 오르니 붉은 두 뺨에 흐르는 눈물 上馬啼紅頰
  오늘은 한나라의 궁인이지만 今日漢宮人
  내일 아침이면 오랑캐의 첩이 되는 구나. 明朝胡之妾
  한나라 시절 옛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漢家秦地月
  그림자를 흘러내려 명비를 비추고 流影照明妃
  한번 옥관 길에 올라 一上玉關道
  천애로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구나 天涯去不歸 
  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에 떠오르는데 漢月還從東海出
  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서 돌아올 날이 없다네 明妃西嫁無來日
  연지산의 긴 추위는 눈으로 꽃을 만들고 燕支山長寒雪作花
  미인의 눈썹은 초췌해져서 오랑캐 땅 모래에 사라지는구나. 蛾眉憔悴沒胡沙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 잘못 그리게 하더니 生乏黃金枉畵工
  죽어서는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네 死遺靑塚使人嘆

이백, <소군원>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어 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라. 春來不似春
자연히 옷과 띠가 풀어진다네 自然衣帶緩
허리를 가늘게 하려는 것도 아닌데. 非是覓腰身  

동방규, <소군원>


이백의 시나 동방규의 시나 우리에게는 익숙한 시일 듯하다. 특히 이백의 시의 "오늘은 한의 궁인이지만, 내일 아침은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라는 구절이나, 동방규의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더라."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진 장구로 동아시아인들에게 왕소군의 비극적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특히 "한나라의 궁인"과 "오랑캐의 첩", 혹은 "화려한 한나라의 궁궐"과 "삭막하기만 한 오랑캐 땅"의 극적 대비는 초원으로 내쳐진 왕소군의 운명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어주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아울러 중원과 오랑캐 초원을 대비하면서 유목민의 생활을 더욱 삭막하게 만든다.
<서경잡기>, <후한서>, 여러 비극적인 시, 희곡 등의 이미지를 통해 왕소군은 비련한 중국의 대표적 미인으로 굳어졌다. 아울러 현대 중국에서는 민족 간의 통합을 이끌어 낸 영웅적인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후대의 이미지들이 과연 왕소군이라는 한 여인의 참모습을 가리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왕소군을 다루고 있는 그 시각이 왕소군 자신의 시각이 아닌, 타인들 특히 왕소군이 초원으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남성"들의 시각이라는 점이다. 물론 당대나 후대 남성들의 눈에는 왕소군이 "피스메이커"로 보일 수도 있고,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으로도 비춰질 수 있지만, 왕소군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군공주처럼 평생을 슬픔 속에 살았을까? 아니면 해우처럼 초원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을까?

5. 結: 한과 흉노, 여인들에게 평화를 빚지다.

△ 내몽골 자치구 호화호특의 왕소군의 청총이라고 알려진 무덤

지금까지 세군공주, 해우공주, 왕소군의 이야기를 통해, 전한시대 한나라와 흉노, 오손 등의 초원 유목민들 간의 외교관계를 알아보았다. 전한시대 한은 흉노를 군사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면서 흉노와 이른바 화친관계를 맺게 되었다. 화친관계의 기본 골자는 한의 공주나 궁중 여인이 막대한 재물과 함께 흉노 선우의 아내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화친관계는 전한시대 이후 하나의 전례가 되면서 중화왕조가 초원 혹은 티베트 지역의 국가들과 맺은 관계에서도 등장한다. 토번의 송첸캄포에게 시집을 간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사서에서는 흔히 이러한 외교관계를 오랑캐에 대한 중국의 교화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외교관계의 이면을 들추어 보면 이러한 외교관계는 어디까지나 중국인들의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화친관계라는 자체가 중화왕조가 오랑캐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랑캐들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화친관계의 역사는 그것을 통해서 중국과 오랑캐 간의 외교관계를 또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그러한 화친관계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사실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정치사나 외교사는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동아시아의 역사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전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여성사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역사 속의 여성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등장하면서 남성중심의 역사라는 틀이 점차 깨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화친관계를 비롯한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혼인외교사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여성의 역사적 위치와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화친관계 속에서 많은 여인들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삭막한 초원으로 보내졌다. 비록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짧은 기록, 아니 짧은 기록조차 남기지도 못했지만, 그들을 통해서 한 왕조는 오랑캐의 위협 아래에서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한과 흉노는 여성들에게 평화를 빚진 셈이다. 이 글을 통해 평화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먼 땅에 묻어야만 했던 여성들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다.
<結>

참고문헌
1. 1차사료
<사기>(
http://www.guoxue.com/shibu/24shi/shiji/sjml.htm
)-번역본: 정범진 외, 까치출판사, 1996
<한서>(
http://www.guoxue.com/shibu/24shi/hansu/hsuml.htm
)
<후한서>(
http://www.guoxue.com/shibu/24shi/hhansu/hhsuml.htm
)
 시 2편 참고:
http://blog.naver.com/brucelee55?Redirect=Log&logNo=150040640251
2. 단행본
김한규, <천하국가>, 소나무, 2004.
박한제,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 사계절, 2003.
박한제 외,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 2007.
사와다 이사오(澤田 勳), <匈奴-古代遊牧民族 興亡>, 김숙경 옮김, 아이필드, 2007.
Nicola Di Cosmo, Ancient China and Its Enemy: The l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이재정 역, <오랑캐의 탄생>, 황금가지, 2005. 
Thomas J Barfield, The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 221BCc to AD1757,
윤영인 역,<위태로운 변경>, 동북아역사재단, 2009.
*포스팅 후기
 
참 연재글 쓸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역시 연재글은 힘들다는 점입니다. 그래도 무사히 글 한 개를 마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번주는 이 글 쓰느라, 할머니 댁 다녀오느라, 군대 휴가나온 친구 밥 사주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빴습니다. 이 글 상편이 이글루스 이오공감에 추천되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댓글이 한꺼번에 6~70개가 달렸습니다 ㅎㄷㄷㄷㄷㄷ 
부족한 글에 성원해 주시는 네티즌 분들께 감사드리고 죄송하다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선 댓글 문제입니다. 제가 요새 바쁜 일이 겹쳐서 댓글에 신경을 못 썼습니다. 아, 이거 내일은 왠종일 댓글에 열심히 답을 달아야겠습니다. 내 댓글에 왜 답장이 안달리는 거야? 주인장 싹수 없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 게으른 제 탓입니다. 
그리고 댓글 다신 많은 분들이 어쩌면 문성공주 이야기까지 원하시는데, 제가 왕소군으로 끊어먹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제가 글 시작할 때 쓴 것 처럼, 이 글은 전한시대까지의 이야기를 범위로 하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욕심 같아서는 채문희 이야기도 다루고 싶고, 문성공주 등 당나라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아직 제가 <구당서>나 <신당서>를 제대로 공부하지를 못해서 죄송스럽게도 그 부분을 다루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또 공부를 하여 당나라 이야기를 꼭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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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우 11-12-02 02:37
   
출처 돈미니블로그
월하낭인 11-12-02 12:28
   
- 화번공주 너무 이쁘게 그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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