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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0-27 19:54
[일본] 류큐왕국의 비밀!
 글쓴이 : 한시우
조회 : 12,003  

 
지금은 일본어명으로 오키나와인 이곳은 1868년부터 현재까지 일본의 식민지인 나라이다. 류큐가 역사에 첫번째로 등장하는 시기는 1372년에 쥬잔(中山)이 명나라와 진공 무역을 했고, 1404년에 최초의 책봉 사절이 중국에서 왔다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우리 나라와는 1388년에 쥬잔 왕 찰도(察度)가 고려에 국서를 보냈으며, 고려인 송환 문제로 국교가 개시되었다고 합니다.
1429년 쇼하시가 난쟌(南山) 왕을 멸하고 3산(三山) 통일함으로써, 사실상의 류큐 왕국(유구국)이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왕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냈고,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인도어, 아라비아어에 이르기까지 7개 국어에 능통했던 범옹 신숙주는 1471년(성종 2)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찬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유구국지도(有球國地圖)가 삽입되어 목판으로 간행되었다고 하니. 조선 시대 초기부터 상당히 알려진 왕국이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당시 역사상 실존 인물로 밝혀진 홍길동(洪吉童;1440~1510)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전라도 장성현 출신의 홍길동이 강상죄(고위관직을 사칭하여 관리를 능욕한 죄)로 충청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갇혀 있다가 1500년(연산군 6년) 11월에 남해 삼천리 유배형을 받아서 간 곳이 바로 류쿠 왕국(유구국) 부근의 섬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고, 유구국은 중국의 속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부근의 섬으로 유배가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홍길동은 1500년 12월 5일에 하테루마지마(파조간도)에 도착하여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답니다.
당시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安南米)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는데, 3남 2녀를 둔 홍길동의 부인 ‘고을노’가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을 그곳에 가져가 재배하여 질 좋은 쌀을 먹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 지역에서는 ‘고을노’를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후, 홍길동은 1502~1503년 경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대병촌) 후루수토 지역에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 등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했고, 1504년 에는 미야코지마(궁고도)의 추장인 나카소네의 혹독한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카소네 집단을 섬의 동북부 밀림지역으로 몰아내고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1505 ~ 1508년 경에는 구메지마(구미도;久米島)에 상륙, 추장인 마다후쓰를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했답니다.
그 때 건설한 성(城) 중 우에구수쿠(上城-섬의 최정상에 위치, 현재 일본 자위대 레이다 기지)는 홍길동의 장남이 구축했고, 나카구수쿠(中城)는 홍길동의 차남이 조성했다고 하며, 그 외에 구시가와구수쿠(具志川城)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차 오키나와 열도 일대에 해상 왕국(일명‘율도국’)을 건설한 듯합니다.

1510년 경 홍길동이 사망하고, 홍길동의 후예들이 해상 무역 활동을 하면서 왕국을 다스려 나갔답니다.
그러다가 1609년 ,일본 본도의 싸쓰마번(임진, 정유재란시 조선인의 코와 귀를 가장 많이 베어간 인물)의 침공으로 오키나와 열도의 지배권이 일본에 넘어갔습니다.
아마도 용맹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본군의 신식 조총에 활이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1609년 이후, 글말인 문자는 이전부터 빌려 쓰던 중국 글과 강요된 일본 글을 사용했지만 입말인 언어만큼은 ‘류쿠어’,즉 류큐 우치나’라고 하는 자기 나라 고유의 말을 써 왔습니다.
’류큐 우치나’는 일본 말과 그 음운 구조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말을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류큐 우치나’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답니다

이렇게 일본의 속국이 된 채 지탱해오던 류쿠 왕국은 1867년 일본 메이지 유신이 되자, 1868년 권력을 일본 천황에게 이양함으로써 왕국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류쿠 왕국 몰락 직후, 중국(청)에서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청일전쟁에서 보듯이 근대화된 일본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였습니다.

결국, 조선 왕조보다 조금 늦게 출현하여 조선 왕조보다 조금 앞서 제국주의 일본에게 몰락 당했고, 그만큼 일제 시대가 먼저 시작된 비운의 왕국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류큐로 부활하여 왕조시대의 황금기대신 공화국으로써 비상을 다시 시작
할 것입니다.
 
 

오키나와의 야에야마 제도를 여행하다 보면 낮은 음색의 독특한 민요를 끊임없이 듣게 됩니다. 그 중 야에야마를 대표하는 민요는 ‘아사도야 윤타’. 다케토미지마(죽부도)의 미녀가 오키나와에서 온 관리의 청혼을 거절한다는 내용으로 다양한 가사와 리듬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습니다. 이 ‘아사도야 윤타’는 식당에 가건, 물소차를 타건 흘러 나와 이틀만 지나면 친숙해집니다. 힘든 노동을 하면서 부르던 이 민요들은 현재 오키나와 전통문화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시가키섬의 대표적인 전통민요 공연단을 이끌고 있는 하나시로 도시아사(50)씨는 “오키나와 방언을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해졌다”며 “민요에는 수백년전의 말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방언중 특이한 점은 가족 호칭이 우리말과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아빠, 할아버지는 아부제, 어머니는 안마라고 부른다. 오키나와엔 조선에서 전래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문화들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오키나와 스모라고 불리는 씨름은 샅바를 잡은 채 일어서서 경기가 시작됩니다. 일본 스모와는 전혀 다르고, 한국식 씨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이시가키 섬에서 만난 80대 할아버지는 “살아계셨다면 130살 됐을 할머니는 조선식 주름치마를 입고 다니셨고, 웃사람을 존중하는 문화도 조선과 같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에는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아나 맷돌 등 농사도구에서부터 가옥 구조등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 전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집니다.45년 4월 1일 미군이 상륙, 이른바 옥새작전이라는 3개월간 계속된 전투로 민간인들까지 건투에 말려들어 20만여명의 사망자중 오키나와 현지 주민이 9만 4펀명이었다. 그곳에 가보기 전까지는 패전 위기에 몰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마지막 발악으로 옥쇄작전이라는 것을 감행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류큐의 마지막태자가 지은 시조

 

堯語難明傑服身 걸복 입은 몸에 착한 말 밝히지 못하니
臨刑何暇訴蒼旻 형장에 임하매 푸른 하늘에 호소할 짬도 없네
三良入穴人難贖 세사람 묻혀죽어도 속죄받은 사람 없고
二子乘舟賊不仁 우리 두 왕자 배를 탔지만 도적은 어질지 않도다
骨暴沙場纏有草 이제 뼈는 백사장에서 풀에 덮힐 것이고
魂歸故國吊無親 혼은 고국에 돌아가도 누가 조문할 것인가
竹西樓下滔滔水 죽서루앞의 물 도도하듯
遺恨分明咽萬春 남긴 한은 만년을 울어도 모자르리

류큐의 해저유적지

 

류큐 앞바다에서 발견된 해저 유적

 

류큐열도의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바다 및에 고대 유적이 발견되어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1996년 류큐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섬 근처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던 잠수부들은 우연히 수심 25m 지점에서 이상한 형상의 지반을 발견합니다.이 구조물을 예사롭지 않게 본 잠수부들은 몇장의 수중 사진을 촬영한 뒤 곧바로 일본의 한 TV 방송국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몇 일후 TV 방송국의 관계자들과 함께 잠수를 하여 사진등을 촬영하였던 잠수부들은

 

1. 발견되었던 암석들이 모두 조각을 한 듯 정교히 깎여있었고,

 

2. 그 지반들은 모두 요새 건축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층층히 계단처럼 쌓여있었고,

 

3. 곳곳에 알 수 없는 구멍들이 나 있었으나 그 구멍들이 너무 깊어 탐사를 못했다는 것 등의 의문점들을 발견하였으나, 아직까지 그들은 그 수중도시의 흔적이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에 관한 이유는 못 밝혀내었습니다.

 

 

지질학계 학자들 사이에 그것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다,  아니다,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98년 12월 29일, 아카보시요타로씨가 수심 25미터 지점에서 인공으로 만들어진 석판을 발견했다. 4, 5톤이나 되어보이는 바위 아래, 모래에 파묻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석판의 표면에는 굴등과 조개류, 그리고 석회질등이 잔뜩 부착되어 있어,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석판에는 직경 2, 3 센티 정도의 구멍이 두 개 있는데, 그 부분의 표면은 매끈매끈했다.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고대 유적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지질학의 전문가, 류큐대학의 기무라(木村政昭) 교수는, 구멍이 타원형임을 지적했다.

 

사진의 아랫부분이 마모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석판은 구멍에 밧줄을 꿰어 큰 석판들을 끌어 올리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구멍의 옆에 새겨져있는 {십자}도 수수께끼이다. 확실히 인공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일설에 의하면 (태평양 바다 밑에 잠들어 있다고 하는)  "무"대륙의 심볼에도 이 십자 모양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후에 이루어진 암석의 지질조사에 따르면 이 지반들은 적어도 5000년, 많게는 25000년동안 물속에 침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이 수중도시의 흔적은 예전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의 레무니아 대륙이 아니었을까요?

 

 

 

 

 

 

 

 

 

(사진 설명: 해저 거대 조각물 조감도)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고대 유적사진들

 

    

다이버들이 구멍을 보고 있다.     옆은 건축에 구멍

 

 

  

사람얼굴       옆은 가까이에서 찍음

 

 

직각으로 꺽인모양

 

옆으로 휘여진 모양

 

자연적으로 생길 수가 없다.

구부려진 모양

  

구멍들

 

한국과 일본영토 속 류큐인 비율

 

한편 이 연구자료가 밝힌 한국인의 DNA유형별 인구구성을 보면 한국인이 한국고유의 DNA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40.6%였고, 중국 유형은 21.9%, 류큐인은 17.4%, 아이누는 1.6%였다. 그러나 일본 본토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비율은 0%였다.


중국의 경우는 중국인 고유의 DNA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60.6%였고, 한국고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중국인의 비율은 10.6%였으며, 일본 본토인의 유형 1.5%, 류큐인 7.6%, 아이누유형 1.5%였다.
 
일본본토에 본토인(죠몽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4.8%에 불과하고, 오히려 중국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이 25.8%였으며, 한국인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중국보다 약간 적은 24.2%였다. 류큐인과 아이누족은 각각 16.1%, 8.1%였다. 일본 원주민으로 간주되고 있는 죠몽, 아이누, 류큐 3집단을 모두 합쳐도 30%를(정확히 29%) 넘지 않았다. 이는 한국, 중국인의 DNA를 가진 사람의 비율 50%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이다.
 
 

일본의 대만 정벌은 1874년의 일입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에서는 급진파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정한론(조선 정벌)이 대두되게 됩니다.

 

하지만 오쿠보 도시미츠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점진적 정한론을 내세우며 급진파를 견제하게 됩니다.

 

1871년에 대만에 표착한 류큐(琉球)의 어민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메이지 정부는 류큐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과 급진파의 불만을 잠식시키기 위해 1874년에 오천여명의 군사로 대만 정벌을 단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청나라가 즉각 무력으로 대결할 태세를 갖춘데다가 서구 국가들의 비난으로 인해 일본은 북경 주재 영국, 프랑스 공사의 중재를 받아들여 50만원의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게 됩니다.

 

 

 

대만 출병과 류큐 병합에서 보이는 침략성을 간과하다

1874년 정한론에 반대한 집권세력은 대만에서 일본인과 류큐의 선원들이 살해된 사건을 빌미로 대만 출병을 단행하였다. 대만 출병은 안으로는 사이고 일파의 퇴진으로 인한 사족세력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그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리고 밖으로는 중국의 약화를 틈타 대만을 정복하고 당시 중국과 일본에 조공을 바쳤던 류큐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즉각 무력으로 대결할 태세를 갖춘데다 서구의 국가들로부터 비난이 빗발치자, 일본은 북경 주재 영국·프랑스 공사의 중재를 받아들여 이 사건은 50만 원의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타결되었다.

대만 출병
"기묘년(민종묵은 1879년이라고 썼지만 1874년이 옳다)에 대만 동부에 우연히 표류한 류큐 사람 54명과 일본인 4명이 살해되자, 사이고 쓰쿠미치가 미·영 공사를 통해 나가사키에서 배를 빌려 병사를 이끌고 가려 했으나 공사들은 중국과 일본이 모두 수교국임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 쓰쿠미치가 분연히 대만으로 가 땅덩어리를 불사르고 소굴을 초토화하고 식량 보급로를 끊었다. 대청(大淸)의 군함 2척이 대만을 향해 오자 쓰쿠미치는 반드시 싸울 생각이었으나, 그때 조정의 의논이 어지러이 일치하지 않았다. 대청에 주재하는 영국 공사가 조정해 서로 합의문안을 교환했으나, 교만하게 병세를 뽐내는 뜻이 없지 않았다. 쓰쿠미치는 바로 다카모리의 동생이며 자못 병략에 뛰어나다고들 한다."(민종묵)

대만출병을 둘러싼 청국과 일본의 교섭
1874년 청국과 일본 대표단은 대만출병 문제를 놓고
7차례나 회담을 가졌지만 결렬되었다.
그후 청국 주재 영국 공사의 중재로 양국의 화의가 이루어졌다.

류큐의 조공선

 

그후에도 일본은 류큐에 대한 종주권 문제로 중국과 상당한 마찰을 빚었다. 민종묵의 말에 따르면, "일본 주재 중국 공사 하여장이 일본인에게 류큐의 독립을 누차 청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자, 이홍장은 병력을 동원해 일본을 공격할 태세이고 이에 일본은 의견이 크게 두 파로 갈리었는데 "우대신 이와쿠라는 분연히 맞서 싸우려 하나, 태정대신 산죠는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약소국 류큐를 둘러싸고 강대국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라든가 일본 내 분쟁은 파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류큐의 일본 복속은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의 일환인 점을 대부분의 조사들은 간파하지 못했던 것 같다. 비록 조사들이 일본의 대만 출병과 류큐 병합에 깔려 있는 침략성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본이 중국에 직접 도전할 만큼 세력이 커져서 청일 양국의 위상이 역전되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특히 연행사와 조사시찰단원으로 중국과 일본을 경험한 민종묵은, 고종이 일본의 형편과 국력이 중국에 비해 어떠한지 물었을 때 "신은 병자년(1876)에 서상관(書狀官)으로 연경(북경)에 갔을 때 대략 듣고 본 바가 있습니다. 일본을 중국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사람이 많고 국토도 넓으나 서양인에게 피해를 입었으니 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은 작은 나라이긴 하나 부강의 방도에 힘써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니 약하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옛 류큐왕국의 영토?

 

고대 중국에서는 유구()·대원(大冤)이라고 하였다. 원주민은 고산족()이며,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이 출병한 이주()가 고산국으로 추측된다.

또 《수서()》에 보이는 유구가 고산국을 가리키는지, 지금의 류큐[]만을 가리키는지, 양자를 포함하여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일본에서는 다카사고노쿠니[]라 하였으며, 포르투갈인()도 타카사군(Tacasagun)이라 기록하였는데, 서해안의 타구산()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류큐는 지금의 타이완섬, 일본의 남서제도 까지인 것으로 쓰여져있다. 그리고 해저 속에 뭍혀진 류큐의 해저지형도 포함한 것입니다.

 

류큐왕국의 유적

 

일본 오키나와현에 있던 옛 왕국으로, 류큐는 현재 오키나와[沖繩]의 옛 지명이다. 12세기부터 몇 개의 집단이 세력을 다투다가 1429년 등장한 통일왕국으로 오키나와 중심지인 나하[那覇]의 동부에 있는 슈리[首里]를 도읍으로 삼았다.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로에 위치하여 무역으로 발전하였고, 중국은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약소국으로 오랫동안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1609년에 일본 사츠마씨[島津氏]의 침입을 받은 후에는 그 지배 아래 놓였다. 이후 1879년에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450년간의 왕조를 끝내고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도읍지였던 슈리에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특히 슈리성 정전[首里城正殿]은 국왕이 업무를 보던 곳으로 중국과 일본의 양식이 함께 공존하는 특이한 유적이며, 슈리성의 정문인 슈레이문[守禮門]은 중국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류큐왕국의 독창적인 기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손꼽힌다.

이러한 유적들은 홍길동이 찾아나섰던 율도국이라는 설이 전해지는 구수쿠의 유적과 함께 2000년에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하여 구슈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의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안내도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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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탱탱촉… 11-10-29 12:58
   
흠. 결국 우리의 피라는 소리인가. 이런 쓰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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