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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9-13 15:10
文化大革命(문화혁명)의 배경-왜 중국은 한국에서 공자제사법을 배워갈수 밖에 없었나?
 글쓴이 : 쿠르르
조회 : 4,897  

 마오쩌둥이 대약진으로 실각하고 재기를 노리면서 벌인 헛짓이 바로 문화대혁명입니다. 그 유명한 홍위병을 앞세워 중국전역을 뒤짚은 대사건이죠.
반우파투쟁부터시작해서 오래된것, 자본주의를 철저하게 경계하고 혁명만이 살길이라 주장한... (홍위병에 대해선 영화 패왕별희를 보면 참고됨)


 이시기 다른걸 다떠나서 중국전역의 수많은 오래된건물들, 서적들, 유물들, 그리고 전통수공업등이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오래된전통을 해악으로 생각한 홍위병들이 유물을 소지하거나 서양물건을 소지하면 마녀사냥식으로 해꼬지를 했기 때문이죠.

 그나마 지금 중국에 이만큼 유물들이 남아있는게 다행이다 싶을정도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수많은 무형문화재들이 문화혁명기간동안 맥이 끊겨 버렸습니다. 전통한지제작, 인형제작, 연제작..중국은 지방마다 전통수공업이 다채로웠다고 하는데 이기간동안 이런 무형문화들마저 씨가 말라버렸죠..지금 중국의 수많은 전통공예들은 모두 복원한거이거나 외국의 화교들이 보유하고 있던 기술을 도입한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통은 끊기고 복원문화들만이 남았다고 봐야죠..

 이과정에서 문묘제례법도 소실되어서 중국정부에서 한국에 와서 제사법을 배워갈수 밖에 없었고..

 대만은 이를 통해 이간질하려고 한국이 공자를 자기꺼라고 우긴다는 낭설을 퍼트린겁니다. 중국과 대만이 잃어버린 제사법을 한국은 원형그대로 보유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여튼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공식적으론 종결되고 등소평이 막후지배자로 부상합니다.



 참 중국인들 스스로 홍위병을 앞세워 자신들 전통문화를 파괴말살한 근대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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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 출처 : 위키대백과


문화혁명은 양이 방대해서 두번에 걸쳐 올립니다.




문화 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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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적, 정치적 격동으로,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 대혁명(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 중국어 간체: 无产阶级文化大革命, 정체: 無產階級文化大革命, 병음: Wúchǎn Jiējí Wénhuà Dàgémìng 우찬제지 원화다거밍[*])이며, 약칭으로 문혁(중국어: 文革, 병음: wéngé 원거[*])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이 기간 동안 전국적인 혁명의 기운과 혼돈 및 경제적 침체를 일으켰다.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인 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요소가 공산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 후의 계급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마오가 문혁을 제창하게 된 동기는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국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한편, 마오쩌둥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 당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이 덩샤오핑류샤오치에게 넘어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1969년 마오는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으나, 사실상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까지 벌어졌던 여러 혼돈과 변혁을 통틀어 문혁기간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 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혁은 대개의 중국인들이나 외부인 심지어는 중국 공산당 내에서도 국가적 재난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문혁의 공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1981년에 이를 마오의 과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린뱌오사인방도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었다.

목차

[숨기기]

[편집] 배경

[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사상 정화 운동

1949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중국공산당이 실시한 여러 개혁정책은 중국사회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전의 지배층들은 "반동분자"의 낙인이 찍혀 재산 및 모든 기득권을 잃는 것은 물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이런 와중에서 무사할 수 없었다.[1] 또한 중국에는 혁명이 거의 성공할때쯤에야 공산당 측에 합류한 약삭빠른 기회주의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공산당 집권후에도 혁명에 동참했다는 과거를 내세워 지배층에 계속 머물 수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이렇게 사회변화로 벌어진 갈등이나 불만을 해결하고 당내의 불순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종종 대규모의 사상정화운동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문화 대혁명 이전에도 공산당의 사상정화운동은 몇차례 실시되었으며, 그 방법론은 집권하기도 전인 1930년대 말에 벌인 연안 정풍운동 기간 동안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즉 이런 운동들에서 초기에는 "올바른 사상의 함양"을 외치다가, 후기로 접어들면 "반혁명세력" 및 "우파"를 숙청하는 것으로 변모하곤 했다.

[편집] 새로운 미디어의 보급

문화 대혁명에는 새로이 보급되기 시작한 미디어인 라디오가 큰 역할을 하였다. 문화 대혁명의 초기 준비단계에서, 중국 정부는 모든 학교, 군부대, 그리고 공공조직에 라디오를 청취한 후 이를 다시 대중에게 전달할 선전자를 임명하도록 하였다.

"중앙인민방송국"의 라디오 방송은 이런 선전활동을 위한 기구였으며, 선전자들은 방송을 듣고 이것을 다시 대중들에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런 선전자의 수는 1960년대에 4억의 농촌 인구 중에 7천만에 달했다.[2]

[편집] 흐루쇼프의 평화 공존 정책과 중소 분열

1953년 스탈린 사후 집권한 소련흐루쇼프는 전임 지도자였던 스탈린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국가적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다. 또한 "평화 공존 정책"을 부르짖으며 서방과 화해를 모색했다. 전 세계 공산주의의 최고지도자로 여겼던 스탈린이 격하되는 모습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에게 충격이었다. [3]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은 서방 제국주의세력을 제3세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라면 혁명이 필요하며 "핵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평화공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4]

1956년에 일어난 헝가리 반소 봉기폴란드 반소 봉기로 인해 소련의 공산주의권의 지도력에 대해 중국은 의구심을 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소련을 추종해왔던 중국의 외교방침을 회의적으로 보게 되었다. [5] 또한 소련은 1962년에 벌어진 중인국경분쟁에서 인도를 지지하였으며, 이는 중국측을 크게 실망시켰다. [6]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MiG-15 제트전투기와 같은 최신 무기를 소련에서 구매했는데, 소련이 공산주의 우방국의 혜택을 주지 않고 중국에 거액을 청구하여 중국측을 격분시켰다. [7] 또한 소련은 중국에 약속한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취소했으며, 이때문에 인민해방군의 현대화와 중국의 산업화는 차질을 빚게 되었다. [8]

결국 마오는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규정하였고, 소련은 "공산전체주의 국가"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전체주의)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과 같은 인민이 소외된 관료제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었다. [9] 그리하여 마오는 중국이 관료의 영향력 하에서 소련의 "잘못된 길"을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대중적 사상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편집] 대약진 운동

이 부분의 본문은 대약진 운동입니다.

1957년 중국의 제1차 5개 년 계획이 끝난 후, 중국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는 자급자족의 공산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니만큼, 마오는 공산주의 이행 속도를 증진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오는 "대약진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을 위해 농촌에 집단농업과 집단동원을 위한 인민공사를 설립하였다. 대약진 운동은 산업발달의 척도가 되는 철의 생산을 촉진시키고 농업생산을 1957년 수준의 두 배로 늘리고자 추진하였다.[10]

그러나 농민들이 농사보다는 질낮은 철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전 산업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철들은 목표량 달성에 급급한 관리들이 농민들을 몰아붙여 농가의 마당에 설치된 구식 화로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산업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 동안 대량의 농기구들이 이런 화로에서 철 생산을 위해 녹여졌기 때문에 농업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지역담당자는 처벌을 면하기 위해 허위생산량을 보고하여 문제가 커졌다.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 및 중일 전쟁, 한국 전쟁으로 타격을 입었던 중국경제는 회복되는 듯하다가 다시 한번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철강 생산량은 연간 520만 톤에서 1400만 톤으로 눈에 띄게 늘어났다. 처음의 목표는 비현실적으로 연간 3000만 톤의 철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후에 더 현실적인 2000만 톤으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생산된 철은 대부분 질이 떨어졌고, 처음에 목표한 산업발전을 위한 기자재로 쓰기에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동안 이상기후와 농업집단화가 광범위한 기근을 초래하였는데도 중국정부는 체면을 세우기 위해 곡물 수출을 계속하였다. 이때 기근으로 사망한 이들은 2,000만-3,000만으로 추산된다.[11]

1959년 루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 원수는 개인적 서한을 보내 대약진 운동을 개시한 마오쩌둥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의 파국은 미숙한 행정도 한몫 했지만, 대약진운동 자체가 "소부르조아 환상주의"라고 규정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에 관해 자신의 과오를 거듭 인정했지만, 대약진운동은 전체로봐서는 70%는 옳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을 방어하였다.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으로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하였고 국가 행정은 새 국가주석인 류샤오치, 총리 저우언라이, 그리고 당총서기 덩샤오핑 등이 운영하였다. 마오쩌둥은 당주석 자리만 유지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덩샤오핑과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그들에게 일시적인 국가운영권을 내 주고 그 반대급부로 펑더화이를 고립시켜 "우익 기회주의자"로 규탄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펑더화이는 국방부장에서 해임되어 실각하였다.

[편집]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갈등

류와 덩의 개혁은 집단화 정책에서 부분적인 후퇴였고, 실용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였다. 류는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는 대여가 더 좋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기며 새로운 경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고,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관과 모순되는 것이었다.[12]

정책차이를 둘러싸고,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간에 점점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한 1959년부터 3년간 자연재해가 극심하여, 식량은 극히 부족했고, 산업생산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자연재해가 극심했던 3년의 끝무렵에 2000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류샤오치는 마오가 실시했던 여러 "도약" 정책을 종식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화를 해체하고,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러한 류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어서 류는 인민들뿐만 아니라 고급 당원들 사이에서도 신망을 얻게 되었다. 덩샤오핑과 함께 류는 마오를 점진적으로 실권으로부터 은퇴시키고, 자신이 최고실권자로 올라서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1963년 "공산주의 교육 운동"을 개시했다.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을 목표로 한것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의 강력한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운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목표로 한 것이어서 현행 정치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몇 년후 마오의 주된 지지 세력, 즉 홍위병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1963년 마오는 계급투쟁의 이상은 항상 이해되고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4년까지 공산주의 교육운동은 "사청운동(四淸運動)"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정치, 경제, 조직, 이념에서 불순한 것들을 청산해야한다는 것이었고 류샤오치를 직접적으로 겨눈 운동이었다.

[편집] 직접적인 계기: 해서파관과 조반유리

1959년 말, 역사가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이 역사 희곡 《해서파관(중국어 간체: 海瑞罢官, 정체: 海瑞罷官, 병음: Hǎiruìbàguān)》(해서가 파면되다)을 발표하였다. 이 극은 청백리인 해서가 타락한 황제에게 파면된다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처음에 이 극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1965년 마오의 부인인 장칭과 그녀의 피후견인인 야오원위안(당시 상하이의 신문인 《문회보(중국어 간체: 文汇报, 정체: 文匯報)》의 편집장이었으며, 그때까지 무명인사였다)은 이 희곡을 비판한 논평을 썼다. 그들은 이 희곡이 독초이며, 마오를 폄하하기 위한 것이고, 황제는 마오, 해서는 펑더화이를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논평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란을 야기하였다. 많은 신문들은 이것이 언론탄압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여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한편 베이징 시장이었던 펑전은 우한을 지지하여 이 비판이 지나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문화혁명오인소조(文化革命 5人小組)"를 구성하였고, 이 소조는 《현재 학술적 문제에 관한 대강(중국어 간체: 关于当前学术讨论等汇报提纲, 정체: 關於當前學術討論等彙報提綱)》 또는 《2월대강(중국어 간체: 二月提纲, 정체: 二月提綱)》 을 발표하여 "해서파관"에 관한 논란을 정치문제가 아닌 순수한 학술문제로 한정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칭은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문예계가 "일부 반당, 반공산주의의 불순세력의 음모"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 국방부장이었던 린뱌오가 합세하고 세를 불리기 시작하였다.

1966년 5월,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다시 한번 우한과 펑전을 비판하는 논평을 발표하였다. 5월 16일, 마오의 주재 하에서 당 정치국은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중국어 간체: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通知, 정체: 中國共產黨中央委員會通知)》 혹은 《5.16통지(五一六通知)》를 발표하였다. 이 통지에서 펑전은 날카롭게 비판되었고, 5인소조는 해체되었다.

이 통지는 펑전과 5인소조가 "표리부동한 자세로 마오쩌둥 동지의 우한에 관한 교시와 마오 주석이 이룩한 위대한 문화혁명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1년 후, 1967년 5월 18일 "인민일보"는 이 고시가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둥 동지의 지도하에 작성된 위대한 역사적 문서"라고 칭송하였다.

1966년의 이후 정치국 회의에서 새로운 "문혁소조"(중국어 간체: 文革小组, 정체: 文革小組)가 구성되었다. 5월 18일 린뱌오는 한 연설에서 "마오주석은 천재이고, 마오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 마오주석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마디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첫 번째 마오 개인숭배의 시작이었다. 이때 장칭과 린뱌오는 이미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있었다.

5월 25일 베이징 대학의 젊은 철학과 강사인 네위안쯔는 대학당국과 다른 교수들이 우파, 또는 반당(反黨)분자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서 붙였다. 며칠후 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적으로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것을 "중국의 첫 번째 마르크스주의 대자보"라고 불렀다. 5월 29일, 칭화 대학 부속 중학교에서 첫 번째 홍위병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마오의 적과 지식분자를 응징하고 무력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다.

1966년 6월 1일, 공식적인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자본주의자과 그의 주구, 그리고 자본주의적 지식인들"을 반드시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대학 총장과 다른 저명한 지식인을 겨냥한 대대적인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6년 7월 27일, 홍위병의 대표단이 마오에게 공식적인 서한을 보내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사회와 정치를 뒤집어 엎고 대량숙청을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마오는 이에 대해 전적인 지지와 동의를 표했다.

8월 8일 인민일보에 마오의 짧은 논평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중국어 간체: 炮打司令部—我的一张大字报, 정체: 炮打司令部—我的一張大字報)》가 실렸다. 여기에서 마오는 반혁명, 우파(실질적으로 류샤오치덩샤오핑)에 대한 투쟁을 전인민에게 부르짖었다.[10] 이로서 문화 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편집]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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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11-09-13 15:15
   
천년식민지인들도 공자가 동이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친  것죠.

중국인(x) 천년식민지인(o)
오잉 11-09-13 18:38
   
tv 보니까 도자기를 가마에서 굽는 법을 몰라서 한국에서 공짜로 배워가더라고요. 중국은 전기로 도자기 굽더라고요  미친 짱개한테 공짜로 줘서는 안됩니다.
     
쿠르르 11-09-13 20:08
   
ㅎㅎ 그런 전통적인 도자기제조법마저 문화혁명기간동안 철저히 소실되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전통문화들은 대부분이 전승이 끊기고 주변국의 도움이나 해외화교들, 그리고 기억으로 복원한 복원문화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청자를 재현해낸다면 그게 전통이겠습니까? 그냥 옛것을 재현한것에 불과하게 되겠죠...


즉 중국의 전통은 이미 끊겼습니다.  조선족들도 많은 문화가 끊겨서 북한이나 남한에서 배워갔고... 그걸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의 문화라고 지네들 문화유산에 추가시키려고 하는게 현실
          
호키보이 11-09-14 18:39
   
그러니 더욱 거저 가르쳐 줘서는 안되지요... 울 나라 사람들 친절이 도가 지나친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 나중에 은혜를 원수로 받게 됩니다...
1 11-09-14 00:08
   
너무 중공 중심으로 글이 올라간것 같네요.문화대혁명은 소위 부루주아를 타도 목표로 한 혁명도 맞지만 역사에 대한 열등감에서도 일어났죠.이것과 같이 중공의 역사도 자세히 봐야하고 과거 중국에서 있었던 역사도 봐야 합니다.과거 중국과 현재의 중공은 다릅니다.수많은 북방민족과 정복왕조 북위,요,금,원,청으로 이뤄진 역사죠.항상 지배자는 이민족이었고 피지배자는 한족이었습니다.인구적으로 월등히 많았으나 제대로된 역사가 없었죠.공자 같은 경우도 춘추의 나라에서 태어났을 뿐이지 그당시 중국에 자기 사상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공자에 대한 책을 참고해보시길 바랍니다.공자가 주장한건 당시 왕조를 위한 중심 사상이었죠.한국의 왕조를 보면 길면 1000년 적어도 500년 입니다.이러면 가장 발전될고 남아있을수 밖에 없죠.그러나 중국은 이에 비해 마지막까지 만주족에 정복당하면서 지배당했죠.여기서 일제와 비슷하게 통제를 당합니다.만한병용제,변발,문자의 옥으로 아예 지배를 당하면서 끊임없이 저항을 하죠.삼번및 오삼계등이 반발을 일으키지만 다 제압당하죠.항상 만주족 청나라는 내부로부터 경계를 느끼면서 주변의 왕조와 제국주의 나라들이 강해지자 중국 국부 쑨원이 반청 사상을 심고 청나라에 대해 독립운동을 하고 게릴라 공격도 합니다.중공 공산당도 같은 입장으로 청나라가 무너진걸 인정하죠.(중공 공산당 역사를 보면 알수있죠.)지금 한국의 유교는 소위 공자의 사상만 있는게 아니라 여러 중국 성인과 조선의 수많은 학자를 비롯해서 5000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인사법,제례,효도등이 다 남아 있습니다.지금 한국이 이것에 대해 교육을 못시켜서 무식한 사람이 많은데 지금 중공의 문화와 과거 중국의 역사는 다릅니다.문화대혁명 이전부터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걸 다시 중공이 파괴하면서 지금은 이걸 그냥 중공공산당 체제를 위해 선전하는 기구 입니다.한가지 예를 들면 이번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류사오보에 대항해서 만든 상이 공자상인데 이건 공자의 사상과는 관련이 없고 중국에는 공자가 이미 없어졌습니다.과거 중국에서 태어난것 뿐이지 이걸 계승,발전을 역사적으로 시킬수가 없습니다.이런데도 지금 한국은 좀 무식하고 이상하게 흘러가서 이부분에 대해 교육을 못시켜서 특히 도대체 왜 중공이나 대만에 유학을 갔는지 모르겠는데 이걸 무조건 중공의 역사라고 하는게 관련이 없습니다.특히 기원,원류 문제에 대해서는 한나라에 딱 나오는게 아니라 서로 넘어가면서 발전하고 계승을 하는데 중국,중화는 절대 역사적으로 이게 없습니다.이건 중공도 인정을 해서 함부로 문화대혁명이나 중국 국부 쑨원의 청나라 독립운동,중공공산당 역사에 대해 금서로 지정하고 토론을 괜히 금지하는게 아닙니다.
1 11-09-14 00:25
   
1 11-09-14 00:26
   
군정부 선언(중국 동맹화 선언)
1.만주족을 몰아낸다.
우리 한인은 지금까지 260년이나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만주 정부를 전복하여 우리 주체를 탈환해야 한다.
2.중화를 회복한다.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고,중국의 정치는 중국인이 담당한다.
만주족을 몰아낸 뒤 우리 민족의 국가를 회복한다.
3.민국을 건립한다.
이제는 평민 혁명에 의해 국민 정부를 세운다.무릇 국민은 평등하고 참정권을 갖는다.
4.지권을 평준화한다.
문명의 복지는 국민이 평등하게 향유한다.사회 경제 조직을 개량하고 천하의 땅값을 조사하여 결정해야 한다.
<원전 중국 근대 사상사>
삼민주의는 쑨원이 주장한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를 말한다.민족주의는 만주인의 처조를 타도하고 한족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는데.뒤에 중국 내의 5족의 공화와 제국주의 타도로 목표가 바뀌었다.민권주의는 모든 국민의 정치상 평등한 권리가,민생주의는 국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개혁이 목표였다.
1 11-09-14 00:49
   
1 11-09-14 01:03
   
http://www.soundofhope.co.kr/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52&bbs_number=22
텐안먼 부근에 세워진 공자상에 中 네티즌 맹비판
http://www.soundofhope.co.kr/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57&bbs_number=11
공자가 위기의 中共을 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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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상 철거는 권력층 암투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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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마오쩌둥 시대로 회귀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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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노벨상에 대한 반란’, 공자평화상 급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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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 공자학원, 웹사이트는 고가에 입찰
봉달이 11-09-14 12:42
   
문화 대혁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실각한 모택동이 권력을 잡기위해 벌인일임

그이상이하도 아닌 권력다툼임

덕분에 등소평이 물러나 중국의 발전이 20년이상 미뤄짐
     
1 11-09-14 18:45
   
이봐요 최소한 역사를 보고 위에 글을 보고 리플을 달아야지?그럼 당신은 권력 다툼한다고 자기들의 문화 유산을 파괴 합니까?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지금 배우는 역사를 부정한적이 있나요?최소 중공의 역사를 보고 리플을 다세요.중공공산당의 과거 역사 인식도 보고요.
중공이 저때 발전을 한다고 하더라도 미안하지만 20년이 발전이 안됩니다.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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