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와 고구려는 이미 서기전 12세기에 난하 유역에 있었다.
<상서(尙書)> '주관(周官)' 편, '무왕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와서 축하했다'는 구절에 대해 공안국이 주석하기를, '해동의 여러 이족은 구려(駒麗)•부여•한(馯:韓)•맥 등과 같은 족속인데, 무왕이 상(商)을 이기니 모두 길이 통했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중국의 서주 무왕시대인 서기전 12세기 무렵에 이미 부여가 존재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일주서> '왕회해'편에도 서주 초기에 성주대회에 참석한 나라에 고이(高夷)가 보이는데, 주석에 '고이는 동북의 이로서 고구려다'라고 했으니 고구려는 중국의 서주 초기 서기전 12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부여는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
위만조선에 뒤이어 한나라의 침공으로 고조선 연맹체가 주도력을 서서히 잃어가자 부여가 고조선의 뒤를 이어 주도권을 이어간다.
그러나 난하 유역에 있던 고조선의 여러 거수국들은 한나라의 영향력 때문에 민족대이동을 경험하게 된다.
난하 상류에 있던 부여는 더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가 되었고, 해부루는 북부여에서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세웠다.
부여의 또 다른 일파는 동남쪽으로 내려와 졸본부여를 세운다.
부여의 시조가 자신을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칭한 것을 보면 단군 계열의 후손일 것이다.
해모수는 단군의 또 다른 명칭일 수 있다.
고구려 역시 여러 갈래로 이동했는데, 주몽은 북부여의 보호를 받다가 남하하면서 옛 부여 땅을 거쳐 졸본부여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다른 부류의 흔적도 여기저기에 산재하여 남아있다.
출처. 한국 열국사 연구, 윤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