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난하가 요수였음은 “水經注(수경주)”에서도 확인된다. 지금의 난하는 濡水(유수)라고도 불리어졌는데, “수경주” “유수”조를 보면 앞에 소개된 “관자” “소문”편의 환공이 고죽국을 정벌한 내용이 실려있다. 그리고 비여현 근처의 산 위에 있는 사당에 얽힌 전설도 소개하고 있는데 전설에 등장한 그 지역의 강명이 요수로 불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으로써 지금의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이로써 “수경주”의 편찬자인 곽도원도 지금의 난하를 요수로 인정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지금의 요하를 고조선. 위만조선시대의 요수로 인정하고 그 동족지역을 요동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요수라는 강명이 어느 시기에 지금의 요하로 이동해 왔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漢書(한서)”“지리지” 현토조를 보면 “한서”의 편찬자인 班固(반고) 자신의 주석으로 요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강은 중국의 문헌에 등장한 요수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그 위치나 흐름 방향으로 보아 지금의 요하이다.
다시말하면 한서 지리지에 보이는 요수는 지금의 난하가 아니라 지금의 요하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라 서한시대와 그 이전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것은 “漢書(한서)”는 東漢(동한)시대에 편찬 되었으므로 서한 말까지의 역사와 지리가 수록되어 있는데 서한 초로부터 말기 사이에는 서한의 동북지역의 영역에 크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즉 서한 무제가 원봉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여 서한의 영토가 지금의 요하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요수는 고대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해서 부르던 명칭 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ㅊㅊ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