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시대에 이르러 국경의 초소가 진시대보다 후퇴된 지역에 설치되어야 했던 이유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진시대의 초소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만 전하고 있는데,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있는 보충설명이 필요 할 것같다. 그것은 서한 초의 정국을 살펴보면 분명하여질 것이다.
기원전 202년에 서한의 통일전쟁은 종결을 보게 되지만 오랜 기간의 전쟁에 의한 피해로 경제와 사회는 크게 파괴되었다. “사기 평준서”와 “한서 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정을 출입하는 將相(장상)들이 마차를 사용하지 못하고 우차를 사용하는 형편이었고, 민중은 극도의 기근에 처하여 인구가 줄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권력은 아직 충분하게 강화되지 못하였고 지방에서 빈번히 반란이 일어났다. 기록에 나타난 것만 하더라도 기원전 202년부터 기원전 154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에 무려 13차례의 반란을 겪게 되었다. 국내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 정부는 우선 지방의 세력을 약회시키는 정책의 실천이 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시대 이래 지방의 귀족세력과 각국의 왕실 후예및 토호들을 장안으로 대거 이주 시키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방의 봉지를 받고 候(후)가 된 공신들이 현지로 가지않고 장안에 거주하고 있는 현상의 개선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실천을 위하여 문제는 후들에게 봉지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렸고 승상인 주발도 해임시켜 봉지로 가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였던 서한 정권은 미처 주변의 이민족에 대해서 강력한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閩越(민월)은 절강 남부를 침략했고 南越(남월)은 내지 깊숙이까지 쳐들어왔으며, 북쪽의 흉노를 비롯한 이민족들이 변경지역을 소란시켰다.
그 가운데 특히 흉노는 세력이 강성하여 장성내에까지 진출하였고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전쟁에서는 서한의 고조를 참패시킴으로써 서한정권으로 하여금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도록 만들었다. 당시에 흉노는 장안의 북방 7백리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치었고 운중, 압문, 연, 대 등의 북방 지역을 거의 매년 쳐들어와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서한의 도읍인 장안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으로서는 장성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 할수 없는 형편이어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최대의 염원이었다. 이상과 같은 서한 초의 정황을 살펴볼 때 고조선과의 국경선에 있었던 초소를 경영하기에 비교적 유리한 난하의 서부연안과 장성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서한정권의 고심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조선과 서한의 국경선이 전국시대의 진개전쟁 이전과 동일해지게 되었는데 진개전쟁 이후에 설치되었던 鄣塞(장새)와 요동외오가 있었던 지역은 고조선과 기자국에 속하게 되었으나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空地(공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위만이 서한으로부터 기자국에 망명하여 거주하였던 진의 옛 공지 上(상).下(하)鄣(장)은 바로 장새가 있었던 지역인 것이다. 장새는 국경에 있었던 초소이므로 여러 곳에 설치되었을 것인데 그 가운데 上鄣(상장)과 下鄣(하장)이 있었던 공지에 위만이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 변화에 대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은 원래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의 상류와 중류 그리고 그 중하류 서부얀안에 있었던 令疵塞(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창려 갈석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 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국시대인 기원전 311년부터 기원전 279년 사이에 일어난 진개의 침략전쟁 후에 국경선은 종전보다 약간 동쪽으로 이동하여 난하의 동부연안이 되었다. 그후 서한 초인 기원전 205년경에 이르러 국경선은 다시 진개전쟁 이전과 동일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ㅊㅊ 한국고대사신론, 윤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