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23-06-01 23:43
[한국사] 세계사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임진왜란
 글쓴이 : 지골
조회 : 1,927  

세계사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임진왜란

 

우리는 임진왜란을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친 전쟁으로 기억합니다.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우리나라와 일본이 맞붙은 전쟁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이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접근하면 임진왜란을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15세기까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은 중국 대륙을 둘러싼 패권 다툼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중원을 차지했거나 차지하려는 세력은 한반도 국가를 자신의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배후 세력으로 여겼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에 대한 대륙 세력의 침략은 중국 대륙의 패권을 굳히려는 목적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서방 해양 세력이 부상한 16세기부터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서방 해양 세력은 힘을 키워서 세계로 진출했습니다.

한반도는 서방 해양 세력이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 세력과 충돌하는 곳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두 세력이 상대방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또는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차지해야 하는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은 서방 해양 세력의 아시아 진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한반도에서 충돌한 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으려고 한반도를 침략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명나라까지 참전한 국제전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침략하기 전에 서방 해양 세력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대항해 시대를 선도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1553년에 중국의 마카오에 진출했습니다.

1557년에는 영유권을 획득해 동아시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고 가톨릭을 전파했습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극성을 부리던 왜구가 사라졌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서방 해양 세력이 동아시아의 중요한 바닷길을 통제하면서 무장 밀무역 세력이었던 왜구가 사라졌습니다.

 

일본의 이와미 은광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은을 생산했습니다.

이와미 은광의 광맥은 1526년에 발견되었습니다.

1533년경 세계에서 가장 뛰어났던 조선의 은 제련 기술을 받아들여 은 생산량이 급증했습니다.

17세기 초부터 볼리비아의 포토시 은광을 제치고 생산량 기준 세계 제1위 은광이 되었습니다.

연간 150톤을 생산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당시 은은 명나라에서 무역의 결제 수단이었습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에서 가져간 은으로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차와 교환했습니다.

일본은 은으로 엄청난 국부를 축적했습니다.

임진왜란에 사용된 군자금은 은에서 나왔습니다.

은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본군의 기본 화기였던 조총도 1543년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이듬해부터 제조 기술을 전수받아 조총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세계에서 조총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군사력 덕분에 100년간의 혼란기였던 전국 시대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를 침략할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일본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프로이스라는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는 1563년부터 1597년까지 일본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왔습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까지 진출한 서방 해양 세력과 연결돼 있었던 것입니다.

 

돈이나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방 해양 세력과의 접촉으로 일본의 세계관이 바뀐 것입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세계관은 조선의 전통적인 중화주의 세계관과 엇비슷했습니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그 주변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조선과 베트남이 포진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외곽에는 중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던 일본, 필리핀, 말레이, 캄보디아 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16세기에 동남아시아에 진출해 집단 거류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동남아시아와 서양에 관한 정보를 조선보다 훨씬 더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서양인들과 접촉하면서 일본인들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났습니다.

자국이 중국과 맞먹는 위치에 있다고 여기고, 조선은 물론 중국까지 정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20세기 전반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정신적 뿌리는 16세기 세계관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흔히 명나라를 칠 계획이 없이 허풍을 부렸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봐서는 안 됩니다.

토요토미는 1591년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양장(良將)의 위세를 외국에 떨쳐 명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요.

토요토미는 실제로 명나라를 침략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실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분수에 넘치는 무모한 계획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가 조선을 교두보로 삼아 중국 대륙을 집어삼킬 꿈을 꾸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중세 이후 일본의 인구는 한반도의 1.5~2배였습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인구는 600~700만 명, 일본은 1,000~1,200만 명, 명나라는 6,000만 명 정도였다고 추정됩니다.

인구는 전근대에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였습니다.

조선은 실제 병력이 6만 명이었습니다.

일본은 전국 시대를 거치며 단련된 33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동원된 병력이 아니라 상비군의 숫자입니다.

도요토미는 전국 시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증강된 군사력을 이용해 중국을 침략하려 했던 것입니다.

 

20만 명의 일본군은 15925월 부산에 상륙한 후 파죽지세로 북상해 단숨에 평양까지 점령했습니다.

명나라는 중대한 안보 위협으로 느꼈습니다.

적대 새력이 한반도 서북부를 차지하면 중원 안보의 사횔이 걸린 완충 지대 요동, 요서가 뚫립니다.

도요토미의 야망은 1년도 되지 않아 꺾였습니다.

14만 명의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고, 조선 수군이 맹활약했기 때문입니다.

북방 국경선을 지키던 조선의 정예병들이 투입되었던 것도 전세가 바뀐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이때 명나라 군대에는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명나라가 포르투갈 상인들한테서 흑인 용병을 사들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5931월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 탈환은 임진왜란의 성격을 바꾸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의 목표를 한반도 남부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한반도를 분할하는 방안을 놓고 협상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측은 처음에는 명나라 대표 심유경에게 대동강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나중에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 남부 4도를 일본이 차지하는 분할안을 제안했습니다.

실제로 심유경은 분할안을 수용했습니다.

일본측은 한반도 남부 분할 외에도 명나라 황녀를 토요토미의 후궁으로 보낼 것, 양국간의 공식적인 무역 재개, 조선 왕자와 대신 12인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심유경은 이런 요구 조건을 모두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에서 수용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한반도 남부 분할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황녀를 토요토미의 후궁으로 보내라는 것은 명나라를 신하국으로 취급하거나 맞먹자는 얘기였기 때문입니다.

심유경은 도요토미를 일본 왕에 책봉하고 조공을 허락한다는 거짓 협상안을 보고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왕에 책봉한다는 외교 문서를 전달했습니다.

명나라가 일본을 신하국으로 취급했다는 뜻입니다.

도요토미는 분노했습니다.

일본은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음해에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했고 임진왜란이 끝났습니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숫자는 10만 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그중 상당수는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루벤스가 그린 그림의 모델로 알려진 안토니오 코레아는 이때 이탈리아로 팔려갔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큰 흐름으로 보면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본은 동아시아 중화주의 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이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을 결정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으로 변해 갔습니다.

명나라와 일본의 한반도 분할 협상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타협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대륙 세력은 완충 지대로 한반도 북부가 필요했습니다.

해양 세력은 대륙으로 진입하는 교두보로 한반도 남부가 필요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처음 제안된 한반도 분할안은 그 후 여러 차례 역사 무대에 등장합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와 일본 등이 협상 테이블에 한반도 분할안을 올렸습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후 서방 해양 세력을 대표한 미국과 유라시아 대륙 세력을 대표한 소련에 의해 한반도가 분할되었습니다.

지금도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습니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사이에서 한반도가 완충 지대 또는 교두보라는 지정학적 위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기원은 임진왜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임진왜란을 일본 침략자를 물리친 전쟁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충돌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현실을 똑바로 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현재진형형의 역사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Marauder 23-06-02 10:24
   
서양의 해양세력은 배를타고다녔으니 해양세력이죠. 그 시기 동아시아는 정크선타고다녔고 특히 조선기술이 허접한 임란시절 일본은 그냥 대륙세력의 연장선이죠.
하이시윤 23-06-02 22:41
   
좋은 시각입니다
위구르 23-06-03 16:31
   
유익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아주 지엽적인 부분이 하나 있는데 하버드의 원명사라는 책에서 명나라의 후기 인구를 1억5천만명으로 추정한다는 점을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하이시윤 23-06-04 11:30
   
한나라 시절 1억돌파햇다는 분석도 있죠
          
위구르 23-06-04 22:35
   
기껏해야 6000만명까지로 알았는데 놀랍네요 관련된 논문이나 책이 있나요
지골 23-06-03 19:18
   
유익한 지적 대단히 감사합니다
KilLoB 23-06-04 20:04
   
당시 막 치고나오기 시작한 신교에 대항한 카톨릭 계열의 십자군 전쟁의 말로서 사용된게 키리시탄이고 도요토미 입장 훗날 구한말 조선 침략행위 처럼 내부 통일에 결정적 공이지만 위험세력 토사구팽 ㅡ 물론 조선점령 성공하면 좋고... 목적이 었을겁니다. 당시 조선침략 다수인 조총 키리시탄들 이후 백성들 죄다 노예로 넘기던 것들이라 쇼군입장 숙청과 카톨릭탄압은 당연한 수순이었을겅로 봅니다. 의외로 일본인과 잡아온 조선인들 엄청 노예로 팔아넘겼고 체구가 흑인에 비해 작아 1/3값이었다는... 이탈리아의 코레아 가문 기원썰이 말이되는 소리
KilLoB 23-06-04 20:15
   
에초 예수교 설립자체가 교황직속의 크루세이더 특수부대같은조직. 당시 남미 점령과 비슷한 시각 용병이 키리시탄들.. 조총주고 전술 지원해주고 왜인 노예받고 쇼군입장목적은 내전승리나 지원한 예수교측 목적은 카톨릭화가 목적이었죠. 탄금대 전투 신립이 궤멸된이유또한 그들 키리시탄이 내전에서 조총으로 기병잡는 전술을 맨날했는데 그거 고대로 야지 돌격을 하다 당한거
윈도우폰 23-06-23 05:47
   
무쉰 세력 씩이나...해양새력? 그런게 있나??? 일 개 섬나라를 댜륙 수준으로 보고 싶어 왜인 들이 만들어낸 용어일 뿐... 세력이라 칭하기에는 걸맞는 문화나 정치, 제도가 뒷받침없는 그냥 양아치 들이 수준 당시 왜국 아닌가???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913
19949 [한국사] 우리 고대사 #7 : 맥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43
1994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2 : 한민족과 재가승 윈도우폰 03-22 286
19947 [한국사] 우리 고대사 #11 : 한반도의 왜(倭) 윈도우폰 03-22 168
19946 [한국사] 우리 고대사 #10 : 진국의 한(韓)족 윈도우폰 03-22 293
19945 [한국사] 우리 고대사 #9 : 고조선 유민과 신라 윈도우폰 03-22 110
19944 [한국사] 우리 고대사 #8 : 고조선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47
19943 [한국사] 우리 고대사 #6 : 예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90
19942 [한국사] 우리 고대사 #5 : 맥족과 예족 윈도우폰 03-22 254
19941 [한국사] 우리 고대사 #4 : 단군조선과 토템 윈도우폰 03-22 100
19940 [한국사] 우리 고대사 #3 : 홍산문화와 적봉지역 주민 윈도우폰 03-22 266
19939 [한국사] 우리 고대사 #2 : 하화족과 동이족 윈도우폰 03-22 112
1993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 : 우리 민족의 조상 윈도우폰 03-22 296
19937 [한국사] 《인류와 한국조선의 변천사 - 한경대전》 (1) 에피소드 03-21 156
19936 [한국사] 아래 지도에 대한 내 관점... 고조선 중심의 열국시대… (4) 윈도우폰 03-21 386
19935 [한국사] 위만조선 시기 판도 (2) 위구르 03-20 263
19934 [한국사] 우리는 동이가 아니다. (2) 윈도우폰 03-19 572
19933 [한국사] 2022년 고고학계의 경주 월성 발굴조사 보고서 (6) 홈사피엔스 03-19 265
19932 [한국사] 삼국사기 이해 (1)신라사 (7) 홈사피엔스 03-16 582
19931 [한국사] 《(고)조선의 "가르침"과 직접민주주의 "국민의원"》 에피소드 03-14 332
19930 [한국사] 《고구려 최초의 이름은 '홀본(일본)' 이다》 에피소드 03-14 544
19929 [중국] 대륙계보? 아랫글 관련... (6) 윈도우폰 03-11 602
19928 [한국사] 《안문관,연운16주,송나라.. 화하족 관점 대륙계보》 에피소드 03-09 691
19927 [한국사] [한겨례] 2024/3/8 [단독] 고대 일본 권력층 무덤 장식품… (2) 외계인7 03-09 493
19926 [기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감미로운 모지혜(다니엘) - 인… 아비바스 03-08 666
19925 [한국사] 《고려 조상님들이 건축한, 서경(북경성)의 모습》 (7) 에피소드 03-08 643
19924 [기타] 동아시아에서의 국가의 형태라면? 그냥 잡설 (3) 윈도우폰 03-06 760
19923 [한국사] 발해 멸망 이유 - 야율아보기의 쿠데타 (4) 하늘하늘섬 03-05 1829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