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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신라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힌 적은 누구일까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기록을 살펴보면 신라를 가장 집요하게 괴롭힌 적은 ‘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침략했다는 기록만 해도 40건이 넘습니다.
그런데 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왜’가 지금의 일본일까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에서 ‘왜’가 침략한다면 가야나 백제도 접촉했을 텐데 도대체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또 일본서기에도 신라 침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 또한 일치하지 않습니다.
백제본기에 나오는 최초의 왜는 397년(아신왕 9년)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백제’와 ‘왜’의 접촉은 백제본기와 일본서기가 일치합니다.
그런데 신라본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은 173년(아달라 이사금 20년) 비미호 관련 사건과 418년(눌지마립간 2년) 박제상 사건을 제외하고는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즉 백제본기의 왜는 일본열도에 있지만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왜’는 다른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신라본기의 ‘왜’는 과연 누구일까요?
우선 일본에 세력을 둔 사람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4세기 이전의 일본열도는 바다 건너 다른 나라를 침범할 정도의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라의 남동쪽에 있는 집단 중에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집단 중 어느 세력을 왜라고 했을 텐데, 여기에 딱 맞는 세력은 임나가야 밖에 없습니다.
임나가야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있던 기자조선을 바탕으로 중국이 기자의 후예라는 헛소리를 했듯이, 실제로 있던 임나가야를 바탕으로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이라는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임나가야가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을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는 이 임나가야를 ‘왜’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임나가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일까요?
위치는 현재의 부산입니다. 중심지는 종발성(從拔城)인데 지금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초읍동 성지곡 근처입니다.
지금도 부산은 일본 및 다른 나라를 연결해주는 최대 항구입니다.
임나가야도 현해탄을 오가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무역을 하던 상업국가일 것입니다.
(고대 한국사의 베니스라고 하면 적절할까요?)
임라가야인들은 부산을 발판으로 일본을 공략합니다.
비미호 관련 사건이 일본서기에 실려있다는 것은 비미호 또한 임라가야인이기 때문입니다.
비미호 즉 신공천황의 추호(追號)는 기장족희(氣長足姬)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足을 ‘발’이라고 발음하면 기장벌에 살던 여자(姬)라는 의미입니다.
(*기장은 부산 근처입니다.)
아마 이런 관계 때문에 임나일본부설을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가야의 원래 이름은 ‘의부가야’인데 숭신천황의 이름을 따서 ‘임나가야’가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열도에 야마도를 개척한 숭신천황이 사실은 임나가야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삼한이 세력을 확대하여 가야를 멸망시킬 때 임나가야도 삼한의 세력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약소국이던 신라를 지독스럽게 괴롭힙니다.
(미국-쿠바-소련의 관계 비슷합니다. 단 신라는 강대국이 아닙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과 삼한과의 싸움에서 삼한이 패배하자 삼한의 지도자들은 임라가라를 통해 일본으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기록되어있습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10년 경자, 보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남거성부터 신라성까지 왜(=삼한)로 가득 차있었다. 관군이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물러났고 (...) 뒤를 급히 쫓아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자 성이 즉시 귀복하였다.
든든한 후원자를 잃어버린 임라가야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몰락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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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가야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김유신입니다.
김유신이 임나가야인이라고 하니까 의아하게 생각하실 분들이 많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증손입니다.
즉 금관가야인입니다.
하지만 진경대사비문을 보면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이라고 나옵니다.
해석하자면 “대사의 이름은 審希이고 성은 신김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왕족이며 草拔聖枝가 이웃 군대에게 매번 고통을 당하자 우리나라로 투항했는데, 먼 조상은 흥무대왕(김유신)이다.”입니다.
삼국사기는 2차 사료이고 진경대사비문이 1차 사료이니 김유신은 금관가야인이 아니고 임나가야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 왜 금관가야인이라는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신라와 임나가야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국초부터 신라를 집요하게 괴롭혀 왔던 나라가 임나가야입니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임나가야를 증오합니다.
가야인도 이등 국민으로 취급받는 마당에 임나가야인이라고 밝히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김유신의 후손들이 족보 세탁을 했겠지요.
그런데 임나가야인의 후손인 김유신의 출생지는 충북 진천입니다.
임나는 지금의 부산인데 왜 김유신의 출생지는 진천일까요?
여기에는 임나가야 멸망과 관련된 비극이 숨어있습니다.
진흥왕 때 임나가야는 멸망당합니다.
당시의 일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당시에 임나가야의 후원자는 백제 성왕이었습니다.
삼한이 일본으로 도망치고서 백제를 등에 업은 것이지요.
처음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백제는 성왕 때 근초고왕 이후 제2의 전성기였습니다.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빼앗겼던 자신들의 근거지인 한강 하류 일대를 탈환합니다.
하지만 그 후 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한강 하류 일대를 빼앗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왕과 백제군 주력까지 전부 전사하고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됩니다.
신라의 다음 표적은 후원자를 잃어버린 임나가야였습니다.
떠오르는 태양 같은 신라를 임나가야는 막아내지 못하고 562년에 멸망하고 맙니다.
원수의 나라를 차지한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던 신라인들은 대학살을 합니다.
그리고 남은 사람은 내륙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는데 그곳이 지금의 충북지방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최대 항구인 임나항은 폐쇄가 됩니다.
마치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끝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했지만 임나가야는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김유신이 장군이 되어 삼국을 통일시키고, 조카인 김법민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임나가야인에 의해 만들어진 중원경(지금의 충청도) 세력은 신라의 핵심이 됩니다.
그야말로 껍데기는 신라이지만 그 내용물은 임나가야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임나가야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