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내현(尹乃鉉)은 기자집단의 동쪽으로의 이동은 긍정했으나, 기자조선시대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즉, 기자는 은나라 왕실의 근친인 ‘다자(多子)’출신의 제후로서, 성은 ‘자(子)’였다. 은나라의 피복속민집단인 기족을 통치하기 위해 봉해졌기 때문에 기자라 불렸다.
즉, 기자는 기족을 통치하는 이가 띠었던 작위의 명칭으로서 ‘기후’·‘기공(箕公)’·‘기백(箕伯)’ 등으로도 불리었다. 기자가 봉했졌던 기국(箕國)은 지금의 허난성 상추현 부근으로 여겨진다.
은나라의 멸망 후 기국의 통치권과 지위를 상실한 기자는 일족과 함께 동북지역으로 이동하여 허베이성 옌산(河北省燕山) 근처에 자리잡았다.
그 뒤 기자국은 롼허강 동부지역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는데, 서기전 3세기 초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패해 롼허강 서쪽 땅을 상실하였다. 롼허강 서쪽을 빼앗김으로써 기자국은 롼허강 동부지역에서 요령성 서남부에 걸치는 조선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중국인들은 기자국의 통치자를 ‘조선후 기자’로 부르게 되었다. 즉, ‘조선국의 제후인 기자’ 또는 ‘조선에 있는 제후인 기자’라는 뜻이다.
서기전 195년 위만이 롼허를 넘어 기자국에 망명오자, 기자의 후손인 준왕이 그를 신임했다가 오히려 위만집단에게 축출당하게 되어 기자국은 망하였다.
이상의 논리에 의해, 기자국은 어디까지나 당시 중국의 변방에 있었던 소국이었을 뿐이고, 말기에 고조선의 변경에 위치하게 되었지만, 고조선사회의 주도적인 세력은 되지 못했으므로,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시대를 설정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