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니가 수집된 토성지역에서는 “大晉元康(대진원강)”, “樂浪禮官(낙랑예관)“, ”樂浪富貴(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평양이 낙랑군의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는데, 여기서 대진원강은 西晉 惠帝(서진 혜제)의 연호로서 서기 291년부터 299년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 기와 연대에 의하면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西漢(서한) 武帝(무제) 元封(원봉) 3년(기원전 108년)보다 400여 년이 뒤진 서기 290년대의 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기에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또 앞에서 언급한 봉니들의 書體(서체)에 대해서 정인보는 한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정돈되 있음을 지적한바 있는데, 위의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로 보아 봉니들도 한시대 보다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낙랑예관” “낙랑부귀”등은 평양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의 설치 연대와는 크게 차이가 날뿐 아니라, 다음에 확인 되겠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樂浪(낙랑)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