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왼쪽이 낙랑군 그옆이 진번군 빨간색 위쪽이 현토군으로 추정됨
1997년 요령성(遼寧省) 금서시(錦西市-지금 호로도시葫芦岛市임) 연산구(連山區) 여아가(女兒街) 태집둔(邰集屯)의 소황지(小荒地)에서 고성의 터를 발굴하면서 한사군의 하나였다가 조기에 폐지된 임둔태수(臨屯太守)의 봉니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규격이 서한(西漢)의 규정과 일치한다고 한다-이는 위조설이 있는 낙랑봉니와는 사뭇 다르다.
이에 복기대 박사는 "임둔군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封泥)를 통해 본 한사군(漢四郡)의 위치"란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데 잠깐 그 요지를 소개할까 한다. 그에 의하면 일단 발굴된 곳의 유적층은 다음의 세층으로 아래와 같이 구분된다.
제1기층: 하가점하층(下家店下層)문화
제 2기층: 비파형동검(琵琶型銅劍) 문화로 하가점상층문화(下家店上層文化)와 비슷하나 단지 질그릇의 특징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저자는 이 지역 이 문화를 후에 능하문화(陵河文化)라고도 불렀다.
제 3기층: 두 시기의 문화가 축적된 층으로 서한(西漢) 등 외부문화의 요소가 보이는 층으로 2단에서 한문화(漢文化)로의 변화가 보인다.
또한 총 4개의 인근한 대소(大小)의 성(城)들 중에 큰 것은 산성(山城)에 해당하는 소황지북성(小荒地北城)과 방형(方形)의 성인 소황지남성(小荒地南城)인데, 전자는 춘추(春秋)시대의 것이며 후자는 전국(戰國) 시대의 것이라한다. 자연스럽게 춘추시대의 성은 제2기의 비파형동검으로 보아 고조선(古朝鮮)의 것임이 확실한데 논란이 되는 것은 남성(南城)의 것이 된다. 여기서 중국의 학자는 불확실한 명문을 토대로 이곳을 요서군의 군치로 비정하고 있는데 비해, 저자는 다른 입장에 서고 있다. 일단, 그 인근 서가구(徐家溝)의 부부합장묘(夫婦合葬墓)로 부터 중국계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최소한 중국에서 온 망명자로 보았으며 이는 중국내의 혼란상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후대의 위만과도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가 서한(西漢)에 의해 한화(漢化) 과정을 겪는데 위의 단계는 그러한 중간 단계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토착문화가 계속되는 영향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듯 싶다. 즉 이 지역은 완전한 한화를 거치기 전에 중간단계를 거쳤는데 이가 위만의 망명이나 진(秦)의 횡포에 괴로워하던 망명인들의 기록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저자는 이 성을 임둔군이라고 단언하지는 않지만, 이 인근 가까이에 그러한 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곳의 위치상 한반도 강원도 함경도 지방의 임둔이 이곳에 문서를 보냈다는 점은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므로 종래의 통설이라는 한반도 내 임둔군 설 나아가 한사군 한반도설은 역시 의심스럽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과연 그토록 짧은 기간 존속한 임둔군이 요서군과 연락을 주고 받을 어떤 이유라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