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적했던 사료비판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료에서 지명을 봤으면 지명의 유래에 대한 시계열적 분석을 해야 합니다. 아래 사례를 보시기 바랍니다. 진시대 요동과 서한시대 요동이 같은 지 다른 지를 체계적인 사료비판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개개 지명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는 있고 위치비정에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체계적인 사료검토와 비판을 통해 진시대 요동과 서한시대 요동이 같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고고학적 증거가 남은 것이죠.
파스크란님의 글은 바로 시계열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님글에 나오는 등주와 청주의 변천유래를 따져보지않았다는 것이죠. 그리되면 한화정책(경덕왕시절)으로 인한 지명변천을 전혀 반영할 수 없습니다. 아래 사례를 보시고 꼼곰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왜 위구르님이 답답해 하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료비판의 사례]
서한시대의 요동군도 진시대의 요동군과 동일한 지역이었을 것인데 그것은 장성의 위치를 확인하면 자연히 밝혀질 것이다.
“史記(사기)” “匈奴列傳(흉노열전)”에 의하면 전국시대 말기에 연국은 東胡(동호)를 포함한 이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朝陽(조양)으로부터 양평에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의 군을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淮南子(회남자)” “人間訓(인간훈)”에는 진제국이
서쪽으로는 유사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수와 만나며 동쪽으로는 조선과 국경을 맺는 장성을 축조하였다
고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진 장성의 東端(동단)은 바로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史記(사기)” “蒙恬列傳(몽념열전)”에 의하면 진제국이 중국을 통일한후 몽념에 의하여 진 장성이 축조되었는데 그것은 임조에서 시작되어 요동에 이르렀던 것으로되어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된 전국시대 말기에 축조된 연 장성은 그 東端(동단)이 양평에 이르렀고 진 장성의 동단은 요동 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두 지점은 전연 다른 곳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이름인가?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하여는 양평의 위치를 밝힐 필요가 있게 된다.
“사기”“흉노열전”의 연 장성 기록에 나오는 양평에 대해서 “史記索隱(사기색은)”은 주석하기를 삼국시대 吳國人(오국인)인 韋昭(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삼국시대의 요동군치소 라고 말하였을뿐 그 이상 양평의 위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魏書(위서)” “地形志(지형지)” 영주 요동군조에는 北魏(북위)시대에 요동군에는 양평과 신창 두 개의 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양평현에 대한 주석에는 양평현은 서한과 동한을 거쳐 晉(진)시대에 이르기 까지 변화가 없었다가 그후 일시 폐지된 일이 있으나 북위의 효명제 정광 년간(서기 520~525)에 다시 설치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양평의 위치는 북위시대까지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있다. 그러므로 서한시대부터 북위시대에 이르기 까지의 기록에서 양평의 위치를 확인해 낸다면 그곳이 바로 연 장성의 동단인 양평인 것이다.
그런데 “晉書(진서)” “地理志(지리지)” 平州條(평주조)를 보면 동한 말기에 공손도와 그의 아들 공손강 그리고 그의 손자 공손문예는 양평이 속해있는 요동에서 할거하였으며 魏國(위국)에서는 東夷校尉(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주하게 하고 요동, 창려, 현토,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가 후에 다시 유주로 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양평을 “후한서”에서도 확인할수 있는데 同書(동서) “원소유표열전”에는 공손강에 대해서 그는 요동인이고 양평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양평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요동이 어느 지역 이었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지금의 요하 동쪽인가, 아니면 서한 초 이전에 요수로 불리어 졌던 지금의 난하 동쪽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은 후한서의 이현의 주석이 해명하여 준다
唐시대의 이현은 “후한서” “원소유표열전”에 보이는 공손강의 거주지였던 양평에 대해서 주석하기를 “양평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 그 옛성이 지금의 평주 노령현 서남에 있다”고 하였다. 당시대의 평주 노령현은 동한시대의 비여현인데 비여현은 고죽성이 있었던 영지현과 접해 있었다. 따라서 비여현은 고죽국 지역이었던 지금의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연 장성의 동단인 양평이 있었던 요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 아니라 난하의 동쪽을 지칭한 것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 하였듯이 “사기”“흉노열전”에서 사마천은 진 장성의 동단이 요동에 이르렀다고 말한바 있는데 이 요동도 지금의 요하 동쪽을 말한게 아니고 지금의 난하 동쪽을 지칭한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후 진국에 의해서 축조된 진 장성은 전국시대부터 있었던 여러 장성을 보수.연결하여 완성 시킨 것으로 그 동단 부분은 연 장성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연 장성의 동단을 양평, 진 장성의 동단을 요동이라고 표현 한 것은 전연 다른 지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 대한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요동은 넓은 지역명으로 표현된 것이고 양평은 구체적인 지명인 것이다. 이러한 필자의 견해는 “通典(통전)”의 기록이 뒷받침 하여 준다. 두우는 통전에서 한시대의 비여현에는 갈석산이 있었다고 말하고 진 장성은 이 갈석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였다
결국 전국시대로부터 서한시대 초까지 주욱에 속해 있었던 요동은 지금의 난하 하류와 난하 중하류 서부연안에 있었던 令疵塞(영자새)를 기점으로 하여 난하 하류 동부연안에 있는 갈석산을 잇는 선 사이의 지역이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 지역에 요동군이 설치 되었으며 갈석산으로부터 영자새로 이어지는 고조선과의 국경선상에 燕(연) 長城(장성)과 秦(진)長城(장성)이 위치 했었다는 것이 된다. 이 중국의 요동은 遼陽(요양)이라고도 불리어졌다.
“漢書(한서)”“諸侯王表(제후왕표)”에는 요양에 대해서 顔師古(안사고)는 “요양은 요수의 陽(양)이다”라고 주석하였다. 요수의 양은 요수의 양지 즉 동쪽을 말하므로 당시의 요수였던 지금의 난하 동쪽을 말함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요동 가운데 중국의 요동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