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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11-21 18:24
[한국사] 갈석산(碣石山)에 대한 소고(小考)
 글쓴이 : 백운
조회 : 1,986  

흔히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무르익는 가을은 자연이 모두에게 푸짐하게 베풀어 주는 향연(饗宴)의 계절이다.

그래서 이 때가 되면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내고 한 해를 마무리한다 하여 년(年)이라고 불렀다.

년(年)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人)이 볏단(禾)을 지고 가는 형상을 하고 있는 데, 이 때문에 가을걷이를 뜻하는 추수(秋收)를 달리 수년(受年)으로 쓰기도 하였다.

이를 보면 우리가 가을을 계절의 왕으로서 최고로 대우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는 산(山)의 이름에서도 드러나는 데, 가을이 들어간 산은 모두 그 자태가 아름답고 두드러지게 뛰어난 산들이 대부분이다.

가을산은 그 소리를 받아서 가을산(加乙山)이라 하거나 뜻으로 써서 추산(秋山)이라 하였다.

또한 가을을 줄여서 갈이라 하였으니 갈산(葛山)은 이를 음차(音借)한 것이다.

그러니 전국에 있는 갈산(葛山)은 전부 가을산을 의미하며 칡과 관련지어 풀고 있다면 그 해석은 십중팔구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우리나라 산천의 이름을 대부분 우리말로 지었기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군과 평창군 사이에 있는 가리왕산(加里王山)은 본디 이름이 갈왕산(葛王山)인데 일제강점기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갈왕(葛王)은 가을의 왕이라는 뜻인 데, 이를 어찌 맥(貊)의 갈왕(葛王)과 연관지어 풀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 산천에 대한 고대의 작명방법부터 공부하기를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가 산명(山名)이나 수명(水名) 등을 지을 때는 마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가르치는 것처럼 아주 쉬운 이름으로 하였다.

그렇게 지어야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배미산은 누가 들어도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길게 이어진 산이라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경북 군위와 의성 사이에 있는 높이 879m의 선암산(船岩山)은 본디 이름이 배미산이었으며 달리 사산(巳山)이라고도 하였다.

이를 보면 배미산은 곧 뱀산을 지칭함을 알수 있다.

그런데 후대에 들어 배미산 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그 이름이 혐오스럽다고 하여 지금의 이름인 선암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는 선조들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후손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소치일 것이다.

선암산이 기억하기 쉬울까, 배미산이 기억하기 쉬울까?

이는 후손들이 스스로 전통을 단절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뱀처럼 생긴 골짜기라 하여 뱀골이라 불렀는 데 혐오감이 든다 하여 이를 음이 비슷한 밤골로 바꾸어 부르고 또 율곡(栗谷)으로 옮겨 적으면 본래의 뜻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 송파구 풍납동(風納洞)은 뱀이 많이 드나드는 곳을 뜻하는 배암들이가 본래의 이름이었으나 이 역시 음이 비슷한 바람들이(風納)로 바뀐 것이니 이런 것들이 바로 역사가 단절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배미산은 전국에 수없이 많이 산재하고 있기에 이를 음차(音借)하여 배미산(倍尾山), 배미산(盃美山), 배미산(培美山), 배미산(倍眉山) 등으로 썼는 데 모두 글자의 뜻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중국 산동성 사수현(泗水縣)에 있는 배미산(陪尾山)은 한족들이 사수(泗水)가 흘러나오는 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수(泗水)는 공자(孔子)의 출생지인 노(魯)나라 땅을 흐르던 물이름이다.

이 때문에 산동성(山東省)을 고대의 노(魯)나라 땅이라고 그들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배미산(陪尾山)의 뜻도 모르고 멋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배미산(陪尾山)은 온전히 우리 민족만이 그 뜻을 알수 있으니 이는 고대에 그곳에 살던 한민족이 붙인 이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럼 그 땅이 과연 노나라 땅일까, 아니면 우리 한민족의 땅일까?

배미산(陪尾山)에서 나와서 구불구불하게 흘러가는 물은 보지 않아도 배미내(뱀내)로 불렀음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그리고 이를 훈차(訓借)하여 사천(巳川)이나 사수(蛇水) 등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사수(蛇水, 巳水)가 사수(泗水)로 둔갑하는 일은 실로 이여반장(易如反掌)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늘상 저지르는 행태이기에 너무나 쉽게 추리할수 있는 것이다.

마치 애들 장난같은 짓을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남의 것을 제것이라고 우기는 뻔뻔한 모습을 봐 온 것이 어찌 어제, 오늘에 국한할수 있겠는가?

맹자(孟子)는 천자(天子)의 땅이 천리(千里)를 넘지 못하고 제후(諸侯)의 땅은 백리(百里)를 넘지 못한다고 하였다.

한민족의 최고지도자가 한알(天)이었으니 천자(天子)는 이에서 나온 것임을 알수 있다.

한알(天)은 아스(朝)로 불린 방주 형상의 갓을 썼기에 그리 불리게 된 것이니 한알(天)의 통치력은 온전히 아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아스의 본디 이름은 아스알이고 이는 오악(五岳)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코룸(崑崙)의 정상에 있었다.

그런데 솟대 한알(天)의 제위시에 코룸(崑崙)의 화산폭발로 아스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를 암시하는 흔적이 몽골의 국기나 티벳의 대문위에 그려진 아스를 덮고 있는 불꽃문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의 화산폭발로 만주와 한반도는 코룸(崑崙)에서 쏟아지는 화산재와 먼지구름에 뒤덮혀 수 많은 생명이 사라져 버리고 이후 약 200년 이상 이곳은 인간이 살수 없는 불모지가 되어버렸었다.

아스가 화산폭발로 사라지자 한알(天)은 그 정통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니 마침내 한알(天)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한알(天)이 아스가 사라져 간 허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아스(朝) 또한 그 수명을 다 마쳤다 하여 아침으로 뜻이 바뀌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시대의 종말을 맞닥뜨린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한 줄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버렸어도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었던 아스(朝)만은 의식적으로라도 되살려내고자 하였다.

그렇게 해야 또 다시 찬란한 미래를 꿈꿀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한 일이 조(鼂)의 역할을 조(朝)가 대신하도록 한 것이었다.

아침 조(鼂)는 본디 아침 단(旦)과 개구리 와(鼃)의 결합형이고, 와(鼃)에는 처음이나 시초의 뜻도 있으니 하루의 시작을 알림에 있어서는 가장 어울리는 글자이다.

그런데 이런 뜻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朝)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는 아스가 해처럼 다시 솟아 오르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스의 이름을 잊지 않고 영원토록 기억하기 위하여 노래로 만들어 부르게 되니 이로써 '아리랑과 스리랑'이 탄생하게 된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알 아리가 났네"라는 노랫말로서 최고지도자인 한알(天)이 아스알(朝)에서 탄생하던 그 순간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라고 가르쳐 온 것이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한 일은 마지막 한알(天)의 이름을 솟대로 지은 것이니 이 또한 언젠가 한알(天)이 다시 솟아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솟대 한알(天)은 이를 음차(音借)하여 소태(蘇台) 단군(檀君)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솟대신앙이다.

민간의 거주지역에는 어디나 솟대를 세워 이러한 정신을 늘 새기면서 살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일은 아스(朝)가 천재지변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한(韓)이라는 글자를 만들고 이를 무리의 이름으로 삼도록 한 것이다.

한(韓)은 조(朝)의 앞부분인 알과 가죽 위(韋)가 합쳐진 글자이다.

가죽은 그 가공정도에 따라 피(皮)와 혁(革)과 위(韋)로 구분한다.

피(皮)는 금방 잡은 짐승에서 막 벗겨낸 생가죽을 말하며, 혁(革)은 털을 뽑고 가죽 안쪽의 지방 때 등을 손질하여 물에 끓인 다음 물기를 잘 짜서 말린 가죽을 말한다.

그렇기에 개혁(改革)이나 혁신(革新)은 가죽이 피(皮)에서 혁(革)으로 진화하듯이 더 나아진 상태를 말한다.

위(韋)는 삶아 말려 쪼그라든 가죽을 얇게 잘 펴기 위해서 백반을 문질러 지방을 모두 제거하고 여러번 무두질을 하여 부드럽게 만든 최종가공단계의 가죽을 말한다.

가죽이 위(韋)의 단계가 되면 모든 형태의 제품을 만들수 있으며 가늘게 잘라 띠나 끈 등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가죽이 위(韋)가 되면 본래의 모습을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탄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韓)은 아스(朝)가 지니고 있던 역할이나 임무를 사람에게 부여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글자라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아스(朝)가 화산폭발로 사라지고 한알(天)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남겨진 무리들은 삼한(三韓)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삼한(三韓)은 모두 창조주 마라(麻羅)의 허락을 받아 세운 나라임을 내세우기 위하여 그 무리의 이름을 마라(麻羅)가 존재하는 별의 이름인 마벨에서 따 오게 되니 이로 인하여 마침내 마한(麻韓)과 벨한(番韓)과 진한(辰韓)이 순서대로 탄생하게 된다.

창조주 마라(麻羅)가 존재하는 별을 마벨이라 부르고 진(辰)으로 썼으니 이는 곧 모든 별을 탄생시키는 오리온(Orion)을 말한다.

오리온은 지금도 매일 새로운 별들을 낳고 있으니 모든 별들의 어머니 별이라 불린다.

진(辰)은 해(日)와 달(月)과 별(星)을 모두 가리키는 글자이니 이는 곧 그들을 낳은 별중의 별인 어머니 별을 말한다.

오리온은 동절기에 남쪽 하늘에 뜨는 별인 데, 이 때문에 남쪽을 마(麻)라고 하고 남풍(南風)을 마파람이라 부른다.

남(南)의 갑골문은 창조주(十)를 향하여 재단(冂)을 마련하고 재물(羊)을 바치는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경(冂)이 멀리 있는 신에게 절을 한다고 하여 멀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한족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신이 존재하는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버렸다.

그들의 하는 짓이 매양 이와 같으니 그들의 기록을 반대로 생각하면 그곳에서 오히려 수 많은 진실을 발견할수 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을 공전(公轉)이라 하고 태양이 오리온의 주위를 도는 것을 세차운동(歲差運動)이라 하니 한 바퀴를 도는 데 약 25,800년이 걸린다.

그래서 그 절반인 약 12,900년을 기준으로 지구에서 바라보는 진북(眞北)이 북극성과 직녀성을 오가며 교대로 바뀐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난 후 북극성을 천자성(天子星)이라 하고 직녀성을 천손성(天孫星)이라 불렀다.

북(北)의 갑골문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는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이는 천자성과 천손성이 서로 북쪽 하늘을 나누어 맡는 현상을 상형한 것임을 알수 있다.

결국 남(南)과 북(北)은 오리온과 결부지어 만들어진 글자라고 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천체현상을 보고 오리온에 창조주인 마라(麻羅)가 산다고 믿었으며 그런 연유로 오리온을 마벨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리온은 세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주위를 네 개의 별이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 땅에 재현시키니 방위(方位)의  이치와 사신(四神)의 개념이 모두 이에서 생겨서 난 것이다.

또한 망자(亡者)를 신의 곁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관속에 칠성판(七星板)을 까는 의식이 행해진 것도 모두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한족들이 이것 또한 북두칠성으로 바꿔버렸다.

북두칠성은 북두(北斗)나 두성(斗星)으로 불린 적은 있어도 칠성(七星)으로 불린 적은 없다.

무엇보다 북두칠성은 한족들이 별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붙이고 자기들이 모시는 신을 그 자리에 앉혔으니 그들의 천문에 대한 지식이 어느정도 수준인지 알수 있는 것이다.

부도지(符都志)에도 나타나 있듯이 우리 선조들은 창조주의 곁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 복본(復本)을 삶의 최고의 이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 땅에 마벨을 재현시켜 복본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으니 그것이 곧 마벨탑(피라미드)이다.

마벨탑은 오리온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니 이집트와 서안(西安)과 마야의 피라미드가 모두 이와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세 곳의 피라미드를 일직선으로 이으면 바로 오리온의 별자리가 만들어진다.

마벨탑의 축조공사를 놀이로 만들어 재현시킨 것이 명절 때 즐겨하는 윷놀이이다.

이는 윷판의 한 가운데를 손으로 잡아 위로 들어보면 피라미드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에서도 알수가 있다.

또 윷놀이에 나오는 말의 이름인 도,개,걸,윷,모는 마벨탑을 쌓던 오가(五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함인 것도 알수가 있다.

마벨탑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추후 따로 설명을 드리겠다.

이밖에도 마벨의 형상으로 방패연을 만들어 날린다든지 또는 마대놀이(자치기)를 하며 '마대'라고 소리치는 것도 모두 이런 복본의 염원이 담긴 것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한(韓)이 왜 삼한(三韓)이 될 수밖에 없는 지, 또 각각의 이름은 왜 그렇게 지어졌는 지 충분히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삼한(三韓)이 탄생한 후 각 무리의 지도자들은 통치권을 공동으로 행사하였는 데, 이를 위하여 지도자의 호칭을 왕(王)으로 통일하였으니 이는 세 사람이 동시에 창조주 마라(麻羅)의 권능을 이었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물론 왕(王)의 글자는 시간이 가며 조금씩 변화하는 형태를 보이는 데, 이는 가장 늦게 태어난 진한(辰韓)의 임금이 점점 더 많은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제(日帝)가 만든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찬한 역사교과서의 영향으로 인해 삼한(三韓)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삼한(三韓)의 탄생 당시 한반도는 코룸(崑崙)의 화산폭발이 끼친 피해 때문에 인간이 살수 없는 땅이었다.

그럼 삼한(三韓)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바로 중국대륙이 전부 삼한(三韓)의 땅이었다.

비록 한알(天)의 시대가 끝났지만 그렇다고 한알(天)이 다스렸던 땅마저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사방 천리(千里)의 땅은 모두 비워 두었으니 이곳은 역대 한알(天)의 유해가 안치된 마벨탑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안(西安)은 약 8,000년전 나무들의 침입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기에 거기에 도읍을 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겠다.

서안(西安)을 비워 둔 또 다른 이유는 삼한(三韓)의 임금중 어느 누구도 한알(天)의 뒤를 물려받을수 있는 정통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기화로 당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상인집단인 상(商)의 무리들이 삼한(三韓)이 태동하는 초기의 약한 틈을 타 한알(天)의 뒤를 잊고자 하는 욕심으로 서안을 향해 서진을 하게 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삼한(三韓)의 임금들은 서안과 가까운 강수(羌水) 주위에서 또 다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강족(羌族)에게 부탁하여 이를 물리치도록 하니 비로소 태공망(太公望) 강여상(姜呂尙)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태공망(太公望)의 성(姓)은 강(姜)이니 이는 어머니가 강족(羌族)이라는 것이고, 씨(氏)는 여(呂)니 아버지가 여씨(呂氏)라는 것이다.

강(羌)은 그 글자로 보아 강수(羌水) 주변에서 양(羊)을 키우던 사람들을 말하며 이후 강(姜)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결국 상(尙)으로 하여금 상(商)을 물리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삼한(三韓)의 임금들은 상(尙)에게 서안(西安)의 통치권을 맡기게 되면 그도 결국 상(商)의 무리와 같은 욕심을 품을 것이 우려되어 그의 사위인 희발(姬發)을 선택하게 된다.

희발(姬發)은 여상(呂尙)의 딸인 읍강(邑姜)과 혼인을 한 관계로 그 자리에 앉게 되었는 데 한족들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그를 무왕(武王)으로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왕(王)은 오직 삼한(三韓)의 임금만 쓸수 있는 호칭이었으니 그의 지위는 많이 봐줘야 제후(諸侯)에 불과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아비인 희창(姬昌)이 서백(西伯)의 지위를 갖고 있었으니 이는 서토(西土)의 백작(伯爵)이란 뜻이다.

그런데 한족들은 희창(姬昌) 역시도 문왕(文王)으로 승격시켜 놓았다.

희창(姬昌)의 아비는 계력(季歷)이고 할아비는 고공단보(古公亶父)이다.

고공단보에게는 장남인 태백(太伯)과 둘째인 우중(虞仲) 그리고 셋째인 계력(季歷)까지 모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 데 권력의 승계가 셋째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여기엔 필유곡절(必有曲折)이 있을 수밖에 없다.

먼저 세 아들의 이름을 보면 순서대로 백(伯), 중(仲), 계(季)로 이어지고 있다.

한족들은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아들이 세 명이면 백(伯),중(仲),계(季)로 짓고 네 명이면 백(伯),중(仲),숙(叔),계(季)로 짓고 있다.

이를 언뜻 보면 마치 주(周)나라의 전통을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임금의 이름을 피하는 피휘(避諱)가 습관처럼 배어 있다.

그렇다면 이는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지을 때 고공단보 세 아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여 당시 한족들의 관습을 차용(借用)하여 쓴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주(周)나라의 정통성은 온전히 희발(姬發)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태공망(太公望)으로 인한 것임을 알아낼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발(姬發)은 제위에 오른지 얼마 못가 사망하고 그의 처인 읍강(邑姜)이 낳은 희송(姬誦)이 뒤를 잇게 되는 데 이가 후일의 성왕(成王)이다.

희송(姬誦)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자 읍강(邑姜)이 섭정을 하였고 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周)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혀가게 되는 것이다.

읍강(邑姜)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성모(聖母)로 추앙을 받고 있다.

결국 주(周)나라는 강씨(姜氏)들의 비호 아래 나라를 다스렸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이는 삼한(三韓)의 임금들이 강씨들의 세력권을 인정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삼한(三韓)의 임금들은 그들에게 서안(西安)에 있는 마벨탑을 수호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주(周)라는 국호를 내렸다.

주(周)라는 글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마벨탑이 모셔진 땅(土)을 삼면(冂)에서 둘러싸고 어느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게 방비하고 오직 아래쪽에만 입구(口)를 두어 삼한(三韓)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통과시키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니 서안(西安)은 마벨탑을 수호하는 곳이라 하여 호경(護京)으로 불렸을 것이 당연한 데, 이 또한 한족들이 나중에 호경(鎬京)으로 이름을 바꿔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낙양(洛陽)에서 호경(護京)으로 가는 길목에 관(關)을 세워 출입자를 통제하였을 것이니 함곡관(函谷關)이 생겨난 동기가 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 결국 주(周)나라의 강역은 지금의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낙양(洛陽)까지 사방 천리(千里)의 땅이었을 것이며 나중에 등장하는 춘추오패(春秋五覇)나 전국칠웅(戰國七雄) 등이 전부 여기에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맹자(孟子)가 말한 천자(天子)의 강역은 천리(千里)요, 제후(諸侯)의 강역은 백리(百里)라는 말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은 데 어찌하여 공자(孔子)의 탄생지인 노(魯)나라가 산동성(山東省)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중국의 지형은 서쪽이 산지이고 동쪽이 평야지대라 서고동저(西高東低)의 형태를 하고 있기에 강물이 대부분 동쪽으로 흘러 우리의 서해바다로 들어간다.

그렇기에 동쪽은 농업이 발달하고 서쪽은 목축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자연적으로 동쪽에 인구가 밀집되어 살 수밖에 없으니 도시가 점점 발달하게 되고 이어서 나라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한족들의 천자(天子)는 여기에 나라를 세워야 할 것인 데 그러지 못했다면 이미 그 지역에 강력한 나라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 나라가 삼한(三韓)의 무리중에 가장 늦게 태어난 진한(辰韓)이며 한족들의 역사에 서(徐)나라로 등장하고 있다.

진한(辰韓)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였으면 한족들이 꿈에서라도 쓰러뜨리고 싶어 언왕(偃王)으로 기록을 하였을까?

한족들은 서언왕(徐偃王)이 구이(九夷)를 이끌고 가서 주(周)나라를 공포에 빠뜨렸다고 하니 당시 진한(辰韓)의 임금이 삼한(三韓)을 대표하였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이때문에 금문(金文)에서 왕(王)의 글자가 점점 변해가며 세로획은 아랫부분이 길어지고 가로획의 아랫부분은 점점 두꺼워져 나중에는 도끼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을 것이다.

서(徐)는 여(余)와 같은 뜻이고 이는 부여(夫余)를 말하며 부여(夫余, 扶餘)는 부리(扶黎)와 같은 뜻이고 부리(扶黎)는 불리(不里, 火里)가 변한 것인 데, 상세한 내용은 나중에 따로 설명을 드리겠다.

삼한(三韓)은 가운데 있는 벨한(番韓)의 국경선을 흐르던 벨물을 경계로 하여 그 강역이 나눠졌는 데, 서쪽에 있는 마한(麻韓)과는 동서(東西)로 마주 보고, 남쪽에 있는 진한(辰韓)과는 남북(南北)으로 마주 보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니 벨한(番韓)과 마한(麻韓)의 사이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벨물(1)이 흐르고 벨한과 진한(辰韓)의 사이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벨물(2)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한족들은 벨물(1)을 패수(沛水)라 하였으니 지금의 분하(汾河)를 말하고, 벨물(2)를 패수(浿水)라 하였으니 고황하수로(古黃河水路)를 말한다.

삼한(三韓)의 강역과 패수(沛水, 浿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따로 설명을 드리겠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우리민족은 특별히 땅에 대한 욕심을 가지지 않았다.

땅은 신이 부여한 선물이므로 모두가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지 특별히 주인을 정해서 나눠가질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살던 땅이 재해를 입거나 나무들이 침입을 해 오는 경우에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살았다.

이때문에 우리민족이 살았던 흔적이 전세계 곳곳에 오롯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원하기만 하면 어디나 가서 함께 어울려 살수 있었다는 것이며 반대로 남이 찾아오는 경우에도 살던 곳의 땅의 나눠주며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오랫동안 우리 몸에 축적되어 왔기에 남의 땅을 강제로 뺏아아 제것으로 만드는 호전적인 국민성은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周)나라의 강역안에서만 갇혀 살던 한족들은 그들이 살던 땅을 확장시키고자 끊임없이 욕심을 부려왔으니 이는 일종의 폐쇄공포증이 불러온 저항의 심리가 작용한 까닭이었다.

이러한 저항심리는 마치 바람이 가득 든 풍선을 눌렀을 때 나타나는 반발력과 같은 것으로 마한(麻韓)의 잦은 변경 침략이 불러 온 결과로 인한 것이었다.

마한(麻韓)이 주(周)나라를 자주 침략한 이유는 그곳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기 때문이었다.

갈석(碣石)은 흔히들 글자의 뚯만 보고 비석돌로 해석하는 데 이는 우리민족의 산천에 대한 작명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갈석(碣石)은 글자 그대로 갈돌(乫乭) 즉, 숫돌을 의미하는 말이다.

숫돌은 끝이 뭉텅한 물건을 갈아서 예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서 병기(兵器)를 만들 때 없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바로 숫돌이 등장함으로써 구석기시대를 마감하고 신석기시대로 진입하게 되었으니 역사상 이 보다 혁신적인 제품은 일찍이 없었다.

그렇기에 숫돌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해주는 생활의 이기(利器)로서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숫돌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반드시 충분한 양을 확보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소재이기에 숫돌의 산출지인 갈석산(碣石山)은 누구나 탐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갈석산이 주(周)나라의 강역안에 있었기에 이를 두고 마한(麻韓)과 주(周)나라 사이에 많은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삼한(三韓)의 임금들은 이러한 분쟁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周)나라와 갈석산 사이에 벽을 만들고자 흙으로 길게 둑을 쌓았으니 이것이 바로 한족들이 주장하는 만리장성이 생겨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진시황(秦始皇)이 쌓았다고 하니 참으로 웃음만 나올 뿐이다.

천하를 통일할 정도로 호전적인 사람이라면 성을 쌓아 지키기보다는 징기스칸처럼 타국을 침략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겠는가?

한족들은 모든 분쟁의 원인이 그곳에 갈석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갈석산만 옮길수 있다면 다시는 삼한(三韓)과 다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의지가 발현되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니 "어리석은 자들이 갈석산을 옮기는 꿈을 꾼다"는 뜻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나오게 되었다.

이후부터 이들의 행동은 더욱 노골화되어 갈석산의 위치를 점점 동쪽으로 밀어내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황하의 섬가운데에 숫돌이 나는 산이 있다고 하여 지주산(砥柱山)이라고 명명하였으니 함부로 숫돌을 구하려 들지 말라는 고약함이 내포된 것이었다.

숫돌은 오랜 시간을 사용하면 가운데가 닳아 마치 배꼽처럼 움푹 파지는 현상을 보이는 데 이런 돌을 그리스어로 옴파로스라고 부르며 신령스러운 돌로 숭배하고 있다.

우리 역시 이런 숫돌을 신령스러운 돌이라고 하여 영석(靈石)이라 부르고 있다.

이를 두고 한족들은 갈석(碣石)을 영석(靈石)으로 바꾸어 부르고 영석현(靈石縣)이니 영석산(靈石山)이니 하는 지명을 임의로 만들어 내니 이는 갈석(碣石)을 영석(靈石)에 가탁(假託)하여 영원히 숨기고자 한 의도가 내포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갈석산(碣石山)은 한족들이 온 힘을 다하여 밀어내고자 하는 배척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기술한 "낙랑(樂浪)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으니, 장성(長城)에서 비롯된 곳이다(長城所起)" 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는 즉, 장성이 그곳에 있기에 갈석산 또한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 이런 해괴한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럼 장성(長城)을 부셔버리면 갈석산 또한 사라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는 만리장성과 갈석산이 늘 붙어다닌다는 것이고 장성을 새로 축조하여 연장할 때마다 갈석산 또한 함께 옮겨다닌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수법이 이처럼 간교하니 지금까지도 후학들이 갈석산(碣石山)의 진정한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가진 애를 다 쓰고 있는 것이리라.

갈석산 얘기를 하기 위해 글을 쓰다가 보니 글이 무한정 길어지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밀린 얘기는 다음을 기약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첨언을 하자면 우리의 역사는 때로 눈 보다는 귀에 의지하여 푸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역사란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릎을 앉혀 살아온 세월을 얘기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심에 무한히 감사드리네.

* 카톡에 쓴 글을 옮기다 보니 존칭어가 생략되었습니다.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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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키 22-11-22 08:48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흥미롭네요
     
백운 22-11-22 18:02
   
재미있게 보시고 또 흥미를 느끼셨다니 저도 뿌듯합니다.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이시윤 22-11-22 12:14
   
이름풀이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가장 초보적인 일이죠.
그저 갈석산이 어디인지는 고증을 통해
해결할 일입니다
     
백운 22-11-22 18:02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윈도우폰 22-11-23 15:17
   
너무 장황하여 뭘 전달하고자 하는지 잘 안 보임...갈석산에 대한 얘기 즉, 주제 중심으로 글을 쓰실 필요가 있을 듯....1천자로 줄이거나 3분 스피치 처럼 일정 제약 하에 내용이 압축되어야...
     
백운 22-11-23 18:46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쓴 글은 대부분 다 깁니다.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얘기를 하려니 배경설명과 부연설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하여 관련 자료를 덧붙여 드려야 하니 자연 글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자료를 다 붙여드리자니 글이 무한정 길어질 것 같기에 다음을 약속하고 가능한 함축적으로 쓸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 줄여버리고 글의 핵심만 골라쓰면 이해를 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혼동만 초래하게 되지요.

그래서 앞에서 이미 했던 말은 가급적 생략하고 그때의 글을 참고용으로 덧붙여 드리기도 합니다.

이건 제가 글을 쓰는 스타일이니 굳이 님께서 저를 지도하여 글쓰기를 가르치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혹여 제 글이 빨리 이해가 되지 않으시면 머릿속으로 음미하며 천천히 읽어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제 마음이 오해없이 잘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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