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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8-16 21:08
[한국사] 요수와 위만조선의 위치 탐구
 글쓴이 : 위구르
조회 : 1,088  

1. 요수 관련 사료

1. 1.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 ⁠ ⁠

遼水出碣石山 自塞北東流 直遼東之西南入海 ⁠ ⁠

요수는 갈석산에서 나오고 새로부터 북동쪽으로 흘러 요동의 서남쪽으로 곧게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1. 2.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 ⁠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 入海 行千二百五十里 ⁠ ⁠

망평(현) 대요수가 새 밖을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 리를 흐른다

1. 3.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 ⁠

遼西郡 秦置 – 중략 - 參柳水北入海 ⁠ ⁠

요서군은 진나라가 설치했다 – 중략 - 참류수가 북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1. 4. 사기 월절서 외전기군기(越絕書 外傳記軍氣)

燕故治,今上漁陽、右北平、遼東、莫郡,尾、箕也

齊故治臨菑,今濟北、平原、北海郡、菑川、遼東、城陽,虛、危也

趙故治邯鄲,今遼東、隴西、北地、上郡、雁門、北郡、清河,參也。

연이 예날에 지금의 상어양, 우북평, 료동, 막부, 미와 기를 다스렸다

제가 예날에 림치와 지금의 제북, 평원, 북해군, 치천, 료동, 성양, 허와 위를 다스렸다

조는 예날에 한단과 지금의 료동, 롱서, 북지, 상군, 안문, 북군, 청하와 참을 다스렸다

1. 5. 사기 7권 항우본기

臧荼之國,因逐韓廣之遼東,廣弗聽,荼擊殺廣無終 並王其地

장도는 (자신의) 나라로 가서 한광을 요동으로 내쫓으려 했으나 한광은 말을 듣지 않다. 장도는 한광을 무종(無終)에서 쳐죽이고 그 땅을 아울러 통치했다

徙燕王韓廣爲遼東王. 『集解』徐廣曰:「都無終.」

연왕 한광을 료동왕으로 삼았다. (집해)에서 응소가 말하길 수도가 무종이었다.

2. 사료의 의의

2. 1. 회남자에 의하면 당시 요수는 지금의 영정하와 대릉하에 해당한다. 북동으로 흐르다가 요동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은 요수가 북동으로 흐르다가 도중에 방향을 90도로 꺾어 동남으로 향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 2.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요수의 길이는 1250리인데 한나라 기준으로 계산하면 0.416 곱하기 1250이라 520키로가 된다. 지금의 대릉하는 길이가 397키로인데다 당시 발해 북쪽 해안선은 지금보다 북에 있었으므로 당시 길이는 더 짧다. 영정하는 773키로인데 당시와 지금의 해안선의 차이만큼 빼면 520키로에 가까워진다

2. 3. 요서군은 요수의 서쪽에 있다는 뜻이지만 그 요수가 동서로 흐르는 강일 경우 중원에 가까운 쪽인 요수의 남쪽에 요서군이 있게 된다. 요서군에 북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이 있을려면 지금의 대릉하일 수가 없고 영정하라면 그 남쪽에 북으로 흘러 발해에 들어가는 강이 몇개 있으므로 가능하다.

2. 4. 연나라와 제나라, 조나라가 공통적으로 가진 지명이 요동이다. 지금의 요동반도는 물론 대릉하와 난하의 동쪽일 수가 없으며 영정하의 동쪽이라고 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 경우는 오히려 영정하의 남쪽에 있었을 상황인데 요동의 위치가 전국시대에는 하북성의 남부였다가 한나라 대에 비로소 영정하의 동쪽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2. 5. 사기집해에 장도가 한광을 처단한 지역인 무종이 요동국의 수도였다고 하는데 무종은 지금의 천진시 계현(薊縣)에 비정된다. 또 장도가 그를 무종에서 없애고 병합했다고 하니 요동국의 위치는 무종이었다. 그 외에 요동이 그 동쪽에 있었다면 그곳은 조선의 땅이었다. 항우가 굳이 연나라를 나눠서 요동국을 새로 만들어 한광에게 주었으니 연나라의 땅에서 벗어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난하가 당시 조선(불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이며 이후 들어선 진나라와의 경계였다.



연제조.png


3. 사기 조선렬전으로 본 지리

3. 1. 연나라의 위치

원문. 秦滅燕,屬遼東外徼

국역.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위만조선은)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의의. 진나라가 멸망시킨 연나라의 범위는 항우에 의해 양분되고서 그 기존 연나라 내지의 동부에 신설된 료동국의 수도가 지금의 계현이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동으로 지금의 난하까지였다. 고로 위만조선의 전신인 불조선 혹은 한씨조선은 그 서계가 지금의 난하였고 그곳이 패수였을 것이란 추론이 이어진다.

3. 2. 료동 외요

원문. 漢興,爲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

국역. 한(漢)나라가 일어났지만 (위만조선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삼아 (이를)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의의. 진나라는 동쪽의 조선을 침략하려 시도한 적이 없으며 금세 망했으니 한나라의 동계는 진나라 대와 같았을 것이다. 그런 한나라가 료동을 다시 점유해 연나라에 소속시켰으니 무종이 있던 지금의 계현이 그곳이고 거기서 동쪽으로 가까운 난하가 패수였을 것이다

3. 3. 위만의 망명

원문. 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국역.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의의. 위만이 동으로 요새를 빠져 패수를 건넜다 했으니 지금의 청천강이면 동이 아니라 남으로 갔다고 기록해야 했다. 진나라의 옛 빈 땅인 상하장에 머물렀다는 말은 패수의 이동 지역이 진나라의 땅도 아니고 조선의 땅도 아닌 공지였다는 말인데 교통의 요지이자 요충지인 난하 동쪽이 무주지였을 리는 없으니 불조선의 지배력이 약했던 상황을 자국에 유리하게 기술한 결과이다

3. 4. 망명

원문.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국역. 진번·조선의 만이(蠻夷)와 옛 연나라·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점차 복속하게 하고, 왕이 되어 왕험(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의의. 만약 위만조선이 지금의 평양에 국한된 나라였다면 연나라의 유민들이 광대한 산지와 수많은 강을 뚫고 오느니 조나라나 제나라의 땅에 가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제나라의 유민들 역시 위험한 바다길을 통해 평양 지역으로 찾아왔을 리가 없다. 

3. 5. 조약 체결

원문. 遼東太守即約滿爲外臣

국역. 요동태수(遼東太守)는 곧, 위만과 (이렇게) 약속하였다

의의. 료동태수가 위만조선과의 조약에 나선 것은 료동군과 위만조선이 접경했기 때문이다. 료동군이 지금의 영정하 이동에 있었으므로 위만조선은 거기서 가까운 난하의 이동에 위치했다

3. 6. 영토 확장

원문. 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方數千里

국역. 그 이웃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하게 하니, 진번(眞畨) ·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고 사방이 수천리였다

의의. 지금의 호로도시에 해당하는 료녕성 금서시 연산구 녀아가 태집둔 소황지에서 임둔 태수장이 발견되었다. 즉, 존속 기간이 26년에 불과한 임둔군의 태수장이 발견된 곳이므로 최초 개설 위치에 다름 없다. 그곳을 복속시켰다는 것은 위만조선의 위치가 압록강을 넘지 못했다는 기존 인식이 틀렸음을 쉽게 보여준다. 더구나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협정을 맺어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 상황에서 서쪽으로 영토를 넓힐려면 한나라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고로 임둔국을 복속시키면서 위만조선이 진출한 방향은 동쪽이다. 위만조선의 서계가 난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빙한다.

3. 7. 섭하의 만행

원문. 臨浿水 -- 중략 -- 即渡,馳入塞 -- 중략 -- 拜何爲遼東東部都尉

국역. 패수(浿水)에 닿자 -- 중략 -- 강을 건너 말을 달려 요새로 들어가 -- 중략 --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遼東 東部都尉)로 삼았다

의의. 섭하가 패수를 건너 요새로 들어갔는데 한나라 수괴 유철한테 자신의 전공(?)을 보고한 다음에 칭찬을 받고 료동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그 '요새'는 지금의 난하 동쪽인데 이에 대해서 후술한다

3. 8. 수군의 침공

원문. 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 兵五萬人

국역.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발해를 건너니 군사가 5만이었다

의의. 지금의 산동의 이름이 제(齊)인데 그곳을 출발점으로 발해를 건넜다는 말은 그 종착지인 왕험성이 지금의 하북성이나 료녕성에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평양으로 갈려면 발해를 건너서는 불가능하다.

3. 9. 서부 방어전

원문.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自前

국역.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앞서부터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의의. 패수가 청천강같이 동서로 흐르는 강이면 그 강을 지키는 군이 북군과 남군으로 나뉘어야 한다. 그런데 서쪽 군(軍)이 있었다는 말은 반대로 남북으로 흐르는 강이었다는 뜻이다. 

3. 10. 태자의 습격 시도

원문. 遣太子入謝,獻馬五千匹

국역. 태자(太子)를 보내어 입조(入朝)하여 사죄하고, 말 오천필을 바쳤고

의의. 사서에는 말을 바쳤다고 되었지만 1만 명이 군량을 짊어지고 패수를 건너려다가 끝내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돌아간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습과 시간 지연을 동시에 노린 일이었다. 여기서 말 오천필을 동원했으니 위만조선이 보유한 말의 수는 그보다 많은 수만 필에 달했을 텐데 지금의 북한 땅, 그것도 청천강 이남에 국한된 작은 영토를 가졌다면 그 춥고 산지가 많은 좁은 땅에서 그 많은 말을 사육하기가 불가능하다.

3. 11. 패수 함락

원문. 左將軍破浿水上軍,乃前,至城下,圍其西北。樓船亦往會,居城南

국역. 좌장군은 패수 상류의 군을 격파하고, 곧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누선장군도 역시 가서, 모여서 성 남쪽에 자리잡았다

의의. 패수가 뚫리고 성의 서북쪽 혹은 서쪽과 북쪽이 포위되었는데 그 전에 격파된 패수의 상류를 지키는 상군이 만약 청천강의 동부를 지키는 부대고 평양이 왕험성이었다면 오히려 동쪽과 북쪽을 포위하여 圍其東北이라는 기술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리 안하고 청천강의 상류를 넘고서 다시 서진해 평양의 북쪽을, 또 서진하여 청천강의 하류에 가깝게 접근한 다음 남진해서 서쪽을 포위함과 동시에 동쪽을 비워두는건 이해가 안되는 행동이다. 더욱이 양복이 이끄는 수군이 남쪽을 포위한 상황이었다. 이 때 왕험성은 사방 중에서 동쪽이 험한 산지나 바다로 막혀서 군을 주둔시킬 수 없거나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외교적인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

3. 12. 연과 대 출신 병사들

원문. 左將軍素侍中,幸,將燕代卒,悍,乘勝

국역. 좌장군은 원래 시중(侍中)이었고, 천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연(燕)과 대(代)의 병졸을 거느렸고, 사나웠으며, 승세를 타고 있었고

의의. 여러 지역 중에서 유독 연과 대 출신 병사들이 언급되며 그들이 사나웠다고 하는 기술은 그 연 지역과 대 지역이 전에 위만조선이나 불조선으로부터 자주 침범을 당해 적개심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4. 료동군의 위치

료동군의 서계가 지금의 영정하면 동계는 어디인가. 난하일 가능성이 높지만 더 알아본다. 당나라의장수절은 그의 저작 사기정의에서 섭하가 도주한 상황에 대해 '入平州 楡林關也', 즉 '평주 유림관에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거기 있던 섭하가 료동 동부도위에 임명되었으니 그곳이 료동군의 동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동쪽에 패수가 있었다. 

신당서(新唐書)에 ⁠' ⁠석성현은 본래 임유현(臨渝)인데 무덕(武德) 7년(624년)에 없앴다. 정관(貞觀) 15년(당 태종, 641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가 만세통천(萬嵗通天) 2년(측천무후, 697년)에 이름을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석성현에 림유현이 있었는데 림유는⁠ 유림관의 유림과 같은 말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당 정관 15년에 옛 임유현성에 임유현을 설치했다. 만세통천 2년에 이름을 석성현으로 고쳤다'라고 나온다. 

서채씨전방통(書蔡氏傳旁通)에 나온 석성현의 위치에 관한 구체적인 서술은 다음과 같다.⁠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은 노룡(盧龍)의 서쪽 140리에 있다'

노룡의 서쪽 140리는 어디인가. 

으륵.png

로룡을 지금의 노룡현으로 본다면 난하 바로 서쪽에 석성현이 있었고 거기가 옛 유림관의 위치가 된다.



결론

료동군.png





추가) 위만조선이 존재할 당시 료동군은 영정하의 동쪽이었지만 망하고 한사군이 세워지고 나서는 난하의 동쪽으로 옳겨졌다

참고한 글과 책

https://earthlin9.tistory.com/17

https://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7057&sca=&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

https://ko.wikisource.org/wiki/%EB%B2%88%EC%97%AD:%EC%82%AC%EA%B8%B0/%EA%B6%8C115

https://zh.wikisource.org/wiki/%E5%8F%B2%E8%A8%98/%E5%8D%B7115

중국에 팔아먹은 단군조선 영토 연구(김종서 박사)

고조선으로 날조되어온 기자위만조선 연구(김종서 박사)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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