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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2-08-16 01:22
[한국사] 단군의 어원 분석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를 기준으로) -긴글-
 글쓴이 : 보리스진
조회 : 1,461  

현재까지 우리는 단군왕검이라는 명칭에 중점을 두고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단군의 아들이라고 하는 부루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단군의 아들 부루를 분석하여 단군을 해석해보도록 하겠다.
부루는 夫婁 또는 扶婁라고 쓰인다. 제왕운기, 응제시주, 삼국유사, 승정원일기 등에 이름이 나온다. 해모수의 아들로 해부루도 존재한다. 解夫婁 또는 解扶婁를 쓴다.

1. 부(扶)의 소리값은 ‘돕’
삼국사기(1145년)에는 부소갑(扶蘇岬)을 송악군(松岳郡)이라고 하였다.
부(扶)는 송(松)과 대입이 된다.
그런데 계림유사(1103년)에는 송(松)을 ‘자자남’이라고 하였다. 
‘자자남’은 현대 우리말로 ‘잣나무’라는 것이다.
송(松)은 현대에 ‘소나무’로 쓰이지만, 과거에는 ‘잣나무’로도 쓰였다.
‘잣’을 구개음화 하면 ‘닷’이 된다.
부(扶)는 ‘닷’이라는 소리값과 대응됨을 알게 된다.

삼국사기(1145년)에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는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라 하였다.
조(助)는 훈독을 하면 ‘돕다’가 된다. 이(利)는 ‘이롭다’이다. 옛말로는 ‘니하다’라고 하였다.
북(北)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북’이라고 읽거나 ‘뒤’라고 읽었다.
옛날에는 동서남북을 앞, 뒤, 왼쪽, 오른쪽이라고 읽었다. 또한 동서남북 한자음 그대로 읽기도 하였다.
비(非)는 훈몽자회(1527년)에 비(非)를 ‘안득’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대두산성(大豆山城)은 본래 비달홀(非達忽)이라 하였다.
비(非)는 대(大)나 두(豆)와 대입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승량현(僧梁縣)은 비물(非勿)이라 하였다.
여기서 승량현(僧梁縣)을 동량현(㠉梁縣)이라고도 하였다.
비(非)는 僧(승)에 대입되는데, 이 僧(승)은 동(㠉)과 대입된다.
계림유사(1103년)에 僧을 ‘복전’이라고 하였다.
훈몽자회(1527년)에는 僧을 ‘즁’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즁’을 구개음화하면 ‘듕’이 된다.
(복전이라고 하는 것은 복+전 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현재 방장스님, 주지스님 같이 접두사가 붙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非)는 소리값이 ‘대’, ‘두’, ‘듕’, ‘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부(扶)의 소리값은 조(助)의 ‘돕다’이거나,
비(非)의 ‘대’, ‘두’, ‘듕’, ‘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扶)의 훈독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역어유해(1690년)에 부(扶)를 ‘돌보다’라고 하였다.
신증유합(1576년)에 부(扶)를 ‘븓들다’라고 하였다.
현대에는 부(扶)를 ‘돕다’라고 한다.
따라서 부(扶)의 훈독은 ‘돌보다’, ‘붙들다’, ‘돕다’가 된다.
부(扶)의 상형원리를 살펴보면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곁에서 부축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부(扶)의 뜻은 ‘돕다’, ‘들다’ 등으로 귀결됨을 알게된다.
여기서 소리값을 얻어내면 ‘돕’, ‘돌’, ‘들’이 된다. 
현대의 훈독인 ‘돕다’를 대표로 할 수 있겠다.
부(扶)의 소리값은 ‘돕’이다.

2. 부(夫)의 소리값은 ‘답’
부(夫)는 훈몽자회(1527년)에서 ‘샤옹’이라고 하였다.
부(夫)를 신증유합(1576년)에서는 ‘짓아비’라고 하였다. 또 다른 옛말을 찾아보면 ‘집아비’가 있다.
‘집아비’를 구개음화하면 ‘딥아비’가 된다. 단어를 축약해보면 ‘딥압’, ‘답’이 된다.
‘샤옹’과 ‘집아비’ 두가지 단어가 혼용되어서 전해져 내려온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에는 어떤 단어로 사용을 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우선 부(夫)는 상형원리가 성인 장정을 뜻한다. 훈몽자회(1527년)에는 남(男)을 ‘아도’라고 하였다. 또한 자(子)를 ‘아들’이라고 한다. 신증유합(1576년)에서는 남(男)을 ‘아들’이라 하였다. ‘아도’와 ‘아들’이 ‘딥아비’와 어원이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삼국사기(1145년)에 다지현(多支縣)은 본래 부지(夫只)라 하였다.
다(多)와 부(夫)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부(夫)는 ‘다’라는 소리값과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1145년)에 고부군(古阜郡)은 본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라 하였다.
부(阜)는 훈몽자회(1527년)에 ‘두던’이라고 하였다. 현대말로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부(夫)는 ‘두던’이라는 소리값과 대응되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1145년)에 부평군(富平郡)은 부여군(夫如郡)과 금화현(金化縣)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부(夫)에 대응되는 단어로 부(富)와 금(金)이 있다.
그런데 부(富)라는 단어에 대응되는 우리말은 없다. 옛말에는 ‘가멸다’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부시이현(富尸伊縣)을 두시이현(豆尸伊縣)이라고 하였다.
부(富)는 두(豆)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계림유사(1103년)에 따르면 두(豆)를 ‘태’라고 읽는다 하였다.
부(富)는 일본어에서는 ‘토미’라고 부른다.
부(富)를 삼국시대에서는 ‘두’나 ‘태’라고 읽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金)은 ‘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말로는 ‘텰’이다.
부(夫)에 대응되는 단어인 부(富)는 ‘두’나 ‘태’였고, 금(金)은 ‘텰’이었다.  
여기서 부(夫)의 소리값은 ‘두’, ‘태’, ‘텰’이었다.

삼국사기(1145년)에는 장제군(長堤郡)을 본래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 하였다.
장(長)은 한자음은 ‘장’이고, 훈독하면 ‘길다’이다. 
제(堤)는 한자음은 ‘제’이고, 훈독하면 ‘둑’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옛날 고대어는 어간은 훈독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접두사, 또는 어미는 한자음 그대로 읽는 경우가 많다.
장제(長堤)는 ‘긴 둑’이라는 뜻이다. 고대어로는 ‘장둑’이었을 것이다.
주부토(主夫吐)에서 주(主)는 접두사로 보인다. 부(夫)는 제(堤)에 대응된다.
부(夫)라는 글자가 어디에 대응되든 소리값은 ‘장’과 ‘둑’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1145년)에 송현현(松峴縣)은 본래 부사파의현(夫斯波衣縣)이라 하였다.
송(松)은 부사(夫斯)와 대응된다. 파의(波衣)라는 단어는 주로 산, 언덕, 봉우리와 대응되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현(峴)과 대응된다.
그런데, 송(松)은 계림유사(1103년)에 따르면 ‘잣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잣’을 구개음화 하면 ‘닷’이 된다.
따라서 부사(夫斯)에서 부(夫)는 소리값이 ‘닷’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부(夫)의 소리값을 위와 같이 살펴보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닷’, ‘둑’, ‘두’, ‘태’, ‘텰’, ‘두던’, ‘다’ 이라는 소리값과 대응된다.
부(夫)의 상형원리와 훈독을 살펴보면 ‘집아비’라는 소리값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집아비’를 구개음화하면 ‘딥아비’가 된다. 이를 축약하면 ‘딥압’, ‘답’이 된다.
부(夫)의 소리값을 종합하면 ‘답’으로 귀결된다.

3. 부루(夫婁)는 소리값이 ‘답루’
삼국사기(1145년)에는 설부루성(屑夫婁城)은 본래 초리파리홀(肖利巴利忽)이라 하였다.
다른 단어를 분석해보면 성(城)에 대응되는 단어는 홀(忽)이다.
그러므로 부루(夫婁)에 대응되는 단어는 파리홀(巴利)이다.
부(夫)는 위에서 분석했듯이 소리값이 ‘답’이다.
파(巴)는 ‘꼬리 파’ 또는 ‘바랄 파’로 쓰이는 한자이다.
그런데 상형원리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그리고 구결에서 파(巴)는 읍(邑)의 약자이다. '도로' 또는 '도'라고 읽는다.
부(夫)의 소리값과 대응을 시켜보면 ‘또아리’와 ‘틀다’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부루(夫婁)와 파리(巴利)에서 루(婁)와 리(利)는 서로 훈독으로 비교해보면 일치점이 없다.
한자음 그대로 비교해보면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루(婁)는 그대로 ‘루’로 읽었다.
삼국사기 등을 보면 어간은 훈독을 사용하고, 어미는 한자음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부루(夫婁)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루(夫婁)는 소리값이 ‘답루’였던 것이다.

4. 제(濟)의 소리값은 ‘다라’ 또는 ‘탐라’
백제(百濟)는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부여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등이 존재한다. 남(南)은 접두사에 해당하고, 부여(扶餘)가 어간이라 할 수 있다.
백제(百濟)는 일본어로 '쿠다라'라고 한다. 그리고 백제(百濟)는 십제(十濟), 백제(伯濟) 등의 이칭도 존재한다.
여기서 백(伯), 백(百), 열(十)은 ‘쿠다라’의 ‘쿠’에 대응된다. 
백(伯)은 ‘맏이’,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백(百)은 ‘숫자 100’, ‘모두’, ‘온갖’, ‘갖가지’라는 뜻이다. 열(十)은 ‘숫자 10’을 뜻한다. 
종합하면 여러 세력을 모아서 그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크다’, ‘제일이다’, ‘으뜸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된다.
‘쿠다라’의 ‘쿠’는 ‘크다’는 뜻에서 왔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다라’는 제(濟)에 대응된다. 제(濟)가 ‘다라’라는 소리값을 갖는지 확인을 해보자.
고려사에 이르기를 1295년에 탐라(耽羅)를 제주(濟州)로 바꿨다. 명칭을 변화시킨 것이다.
여기서 제(濟)의 소리값은 ‘탐라’가 됨을 알 수 있다.
일본 사서에서는 제(濟)가 ‘다라’이고, 고려사에서는 제(濟)가 ‘탐라’였다.

5. 여(餘)의 소리값은 ‘라’
한편 여(餘)의 소리값도 찾아봐야한다.
삼국사기(1145년)에 부여군(扶餘郡)은 본래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 하였다.
부(扶)와 부(夫)는 서로 대응되는 단어이다. 사서에 따라서 부여(扶餘)라고 쓰거나, 부여(夫餘)라고 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所)는 접두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餘)는 리(里)에 대응된다.

삼국사기(1145년)에 적리홀(赤里忽)은 적리성(積利城)이라 하였다.
리(里)와 利(리)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1145년)에 이산군(里山郡)은 일리군(一利郡)이라 하였다. 리(里)는 한자음이 ‘리’이고, 훈독하면 ‘마을’이다. 산(山)은 훈독하면 ‘뫼’ 이다.
일(一)은 한자음이 ‘일’이고 훈독은 ‘하나’이다. 리(利)는 한자음은 ‘리’이고 훈독은 ‘이롭다’인데, 옛말로는 ‘니하다’라고 하였다.
결국 살펴보면 리(里)는 한자음 그대로 ‘리’라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1145년)에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는 본래 조리비서(助利非西)라 하였다.
여기에서도 리(利)가 쓰이고 있다. 부여(扶餘)와 조리(助利)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여(餘)는 리(利)와 대응된다. 리(利)는 한자음 그대로 ‘리’라고 쓰였다. 물론 훈독 ‘이롭’으로 쓰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백스터(Baxter)와 사가르(Sagart)의 중국어 상고음 재구에 의하면
餘(여)는 ‘La’로 발음 된다. 그대로 읽어서 ‘라’라고 하면 된다.

6. 귀실(鬼室)의 소리값은 ‘귀딥’ 또는 ‘달딥’
백제(百濟)에서 제(濟)는 일본어로 ‘다라’이다. 부여(扶餘)의 소리값은 ‘돕라’이다. 
부여(夫餘)도 소리값이 ‘답라’가 된다. (위에서 긴 설명을 했으니 여기서는 설명 생략하겠다.)

한편 부여(扶餘)의 소리값은 ‘돕라’가 맞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일본서기와 비석문에는 부여복신(扶餘福信)이 귀실복신(鬼室福信)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귀실씨(鬼室氏)가 부여씨(扶餘氏)에서 왔다고 되어있다.
귀(鬼)라고 하는 것은 ‘귀신’이다.
훈몽자회(1527년)에는 귀(鬼)를 ‘귓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한자음을 그대로 따와 ‘귀’라고 해보겠다. 실(室)이라 하는 것은 훈독으로 ‘집’이다. 
‘집’은 구개음화에 의해서 ‘딥’으로도 변화가 가능하다.
‘귀+딥’이 되는데 이는 ‘쿠다라’와 같은 어원으로 생각된다. 백제(百濟)는 ‘쿠다라’, 부여(扶餘)는 ‘다라’, 귀실(鬼室)은 ‘귀딥’이 되는데, ‘쿠다라’와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귀(鬼)는 훈독하면 ‘도깨비’라고도 하였다. 월인석보(1459년)에는 ‘돗가비’라고 하였다.
귀(鬼)는 유의어로 영혼(靈魂)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靈)도 분석해보겠다.
삼국사기에 영암군(靈巖郡)은 본래 월내군(月奈郡)이라 하였다.
영(靈)과 월(月)이 대응된다. 월(月)은 훈독하면 ‘달’이 된다.

삼국사기(1145년)에 마령현(馬靈縣)은 본래 마돌현(馬突縣)이라 하였다.
영(靈)과 돌(突)이 대응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마돌현(馬突縣)은 마진(馬珍)이라고 하였다.
돌(突)과 진(珍)이 대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증유합(1576년)에 돌(突)은 ‘믄득 내다를’이라고 하였다. 현대에는 ‘갑자기’, ‘부딪히다’는 뜻이다. 
훈몽자회(1527년)에는 진(珍)은 ‘구슬’이라고 하였다. 현대에는 ‘보물’, ‘보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자음 그래도 읽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을 구개음화하면 ‘딘’이 된다.
‘돌’과 ‘딘’으로 소리값이 당시에 동일했던 것이다.

삼국사기(1145년)에 무령군(武靈郡)은 본래 무시이군(武尸伊郡)이라 하였다.
영(靈)과 시(尸)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훈몽자회(1527년)에는 시(屍)를 ‘주검’이라고 하였다.
왜어유해(1781-1787년)에는 시(尸)를 ‘죽엄’이라고 하였다.
‘주검’과 ‘죽엄’을 구개음화하면 ‘두검’과 ‘둑엄’이 된다.
영(靈)은 월(月)과 돌(突), 시(尸)와 대응된다.
결국 영(靈)의 소리값은 ‘달’, ‘돌’, ‘둑엄’이었던 것이다.
(현재 영암(靈巖)에는 월출산(月出山)이 있다. 이 월(月)은 ‘신령스럽다’는 뜻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귀(鬼)를 ‘도깨비’로 훈독해서 해석해보면, 영(靈)과 대응되게 된다. 
영(靈)의 소리값은 ‘달’과 ‘둑엄’이다. ‘도깨비’, ‘돗가비’와 어원이 같음이 추정된다.
귀실복신(鬼室福信)에서 귀실(鬼室)은 소리값이 ‘달+딥’이 된다.

따라서 부여복신(扶餘福信)에서 부여(扶餘)는 소리값이 ‘돕라’이다.
백제(百濟)에서 제(濟)는 일본어로 소리값이 ‘다라’이다.
귀실(鬼室)은 소리값이 ‘귀딥’ 또는 ‘달딥’이 된다.
그러므로 소리값이 공유됨을 확인해 볼 수 있고, 공통된 어원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7. 우라(溫羅)와 다타라(多多良)의 소리값은 ‘다타라’
부여(扶餘)의 소리값은 ‘돕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데, 더 확인해보기 위해서 일본의 백제 왕족 성씨를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일본 오카야마현에는 백제왕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우라(溫羅)전설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왕의 후손 이름이 우라(溫羅)라고 한다.
온(溫)을 우리말로 훈독을 하면 ‘따뜻하다’이다. 일본어로 훈독하면 ‘아타타카이’, ‘아타타메루’
여기서 공통된 소리값을 찾으면 ‘따뜻’, ‘아타타’
현재 溫羅라는 한자를 ‘우라’라고 일본에서 읽고 있다. 그런데 원래는 ‘타타라’라고 읽었던 것 같다.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씨족도 존재한다. 오우치(大內) 일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오우치(大內)의 성씨는 원래 ‘다타라(多多良)’라고 불렀다.
나중에 성씨를 오우치(大內)로 바꾼 것이다.
백제왕족 성씨라고 하는 우라(溫羅)와 다타라(多多良)는 소리값이 ‘다타라’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부여(扶餘)의 소리값 ‘돕라’와 어원이 같음을 안다.

8. 사씨(沙氏)의 소리값은 ‘다닥’
오우치(大內)의 이름을 더 분석해보고자 한다.
대(大)는 한자음으로 ‘대’라는 것이고 훈독으로는 ‘크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분석해보면 접두사나 접미사는 한자음을 그대로 읽는 경우가 많았다.
내(內)는 훈독으로 ‘들이다’는 뜻이다. 상형원리는 집안의 건축물인 ‘도리’를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이를 분석해보면 ‘대도리’ 또는 ‘크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구결에서 입(入)은 '드'나 '들'로 읽는다. '들이다'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백제(百濟)는 일본어로 ‘쿠다라’이므로 ‘크도리’로 해석하면 백제(百濟)와 연결된다.
‘대도리’로 해석하면 다타라(多多良)라는 본래 성씨와 소리값이 같다.
이 경우는 한자만 다르지 소리값은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1145년)에는 사천현(沙川縣)을 내을매현(内乙買縣)이라고도 하였다.
사(沙)와 내(内)가 대응됨이 추정된다.
역어유해(1690년)에는 沙木을 ‘자작나모’라고 하였다.
사성통해(1517년)에서는 桬木을 ‘자작나모’라고 하였다.
백제 대성팔족 가운데 사씨(沙氏)가 있다. 사씨(沙氏)는 사택시(沙宅氏)로도 불린다. 문헌에 따라서는 사택시(砂宅氏)로 나온다.
사(沙)는 옛날에 ‘자작’이었다. 구개음화를 하면 ‘다닥’이 된다.
택(宅)의 훈독은 ‘집’이다. 구개음화를 하면 ‘딥’이 된다.
사씨(沙氏)와 사택시(沙宅氏)는 소리값이 근본적으로 같다.

그런데 일본의 철기 제작 기술을 ‘다타라’라고 한다. 한자의 표기는 다음과 같다. (多多良), (多多羅)
일본의 제철 기술인 ‘다타라’는 사철(砂鐵)을 원료로 한다. 사철(砂鐵)을 분석해보면 사(砂)는 사택시(砂宅氏)에서 볼 수 있는데 소리값을 ‘다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철(鐵)은 ‘텰’에 해당된다. 합치면 ‘닥텰’이 된다. ‘다타라’라는 철기 제작 기술과 똑같은 소리값이다. 일본의 백제 왕족 성씨와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사씨(沙氏)는 소리값이 ‘다닥’이고, 일본 백제 왕족 성씨 ‘다타라’와 소리값이 같다.

9. 단군(檀君)에서 단(檀)의 소리값은 ‘달’
단군왕검에서 단이라는 글자는 단(檀)을 쓰거나 단(壇)을 쓴다. 사서에 따라 다르다.
신증유합(1576년)에서는 단(檀)을 ‘박달’ 또는 ‘자단’이라고 하였다.
훈몽자회(1527년)에서는 단(壇)을 ‘졔터’라고 하였다.

단군의 아들은 부루이다. 부루는 사서에 따라서 부루(夫婁) 또는 부루(扶婁)로 나온다.
부루(夫婁)의 소리값은 ‘답루’이고, 부루(扶婁)의 소리값은 ‘돕루’이다.
위에서 분석하여 최종적으로 소리값을 도출하였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ㅂ탈락 법칙이 있으므로, ㅂ을 빼도 좋다.)
부루(夫婁)의 소리값은 ‘답루’ 또는 ‘다루’
부루(扶婁)의 소리값은 ‘돕루’ 또는 ‘도루’

단군이라는 명칭은 수천년동안 내려왔다. 왕이 달라져도 단군이라는 명칭은 계속된 것이다.
그런데 단군의 아들이 부루가 되었다고 해서 단군이라는 명칭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백제는 일년에 두번 단군에게 제사를 지냈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것이다.
부루와 부여라는 명칭이 단군와 고조선이라는 명칭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단군이라는 명칭과 부루, 부여 등을 비교 분석해보겠다.

단군의 아들
부루(夫婁)의 소리값은 ‘답루’이고, 부루(扶婁)의 소리값은 ‘돕루’이다.
백제대성팔족
사씨(沙氏)의 소리값은 ‘다닥’ (역어유해 등에는 자작나무를 뜻하는 한자였다.)
일본백제왕족
우라(溫羅)와 다타라(多多良)는 소리값이 ‘다타라’
백제왕족성씨
부여(扶餘)의 소리값은 ‘돕라’ 또는 ‘도라’

‘박달나무’는 자작나무과, 자작나무속에 속하는 나무이다. 그런데 백제대성팔족의 사(沙)는 역어유해에서 자작나무를 뜻하는 한자였다. 위에서 분석을 해보니까 사씨(沙氏)는 부여(扶餘)와 백제(百濟)의 어원과 동일함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단(檀)이라고 하는 글자의 소리값을 종합적으로 비교해보겠다.
단(檀)은 ‘박달’인데, 위에서 언급되었던 ‘답루’, ‘다루’, ‘다닥’, ‘다타라’, 등의 소리값과 동일하다. 단군이라고 하는 명칭이 계승되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부여와 부루를 통해서 단군의 소리값을 추정해 보면 ‘박달’에서 ‘달’이 이에 해당된다. 
단군왕검에서 단(檀)은 그 당시의 소리값이 ‘달’로 전해져 내려왔음이 사료된다. 현재 ‘박달’이라고 하는 뜻 가운데 '달'로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고 단(檀)의 한자음은 ‘단’인데, 한자음도 그 당시의 소리값이 어느정도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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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위하늘 22-08-16 14:55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인 사씨는 사택씨로도 알려져있는데,
이 경우에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요?

예를 들어 사택지적(沙宅智積)을 기록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서와 같이 다른 한자를 사용한 것은
음가만 가져와서 그랬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沙)씨와 사택(沙宅)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궁금합니다.
     
보리스진 22-08-16 21:18
   
똑같은 말입니다.
명(明)은 밝다는 것입니다. 한자는 글자 한개로 되어있어서, 그 다음에 무슨 글자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우리말은 '밝다'. '밝고'. '밝으니'. '밝을' 같이 뒤에 다양한 말들이 붙습니다.
어간은 하나인데, 어미가 다양해서 글자 하나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사씨(沙)이외에 사택(沙宅), 사모(沙毛)의 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사모(沙毛)에서 모(毛)는 '터럭'입니다.
사(沙)와 모(毛)의 소리값을 합쳐보면 '다닥+터럭'이 됩니다. 줄여서 '닫털' 이 됩니다.

사택(沙宅)에서 택(宅)은 훈독이 '댁'이고, 한자음은 '택'입니다.
따라서 ‘닫댁’이나 ‘닫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사(沙)의 ‘닫’이나, 사모(沙毛)의 ‘닫털’이나, 사택(沙宅)의 ‘닫댁’이나 같은 말입니다.
단지 말 끝에 붙는 어미를 정확하게 표현해주기 위함입니다.
당시에는 사(沙)라고만 해도 정확히 어떤 '소리값'이었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 사(沙)라고만 하면 잘 모릅니다.
사(沙)를 '자작나무'라고 한 기록이 존재하니, '자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입니다.
일본에서 백제왕족의 성씨가 다타라(多多羅)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사(沙)라고만 해도 'ㄹ' 소리값이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사모(沙毛)의 ‘닫털’이라는 소리값은 더 정확하게 표현해줍니다. 'ㄹ' 소리값을 알려주니까요.
그리고 한국계 단성 성씨가 일본으로 가면 복성으로 표기됩니다. 한자 표기 방식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집이라는 뜻을 가진 한자는 많습니다. 우(宇), 주(宙) 등입니다.
하고많은 집 가운데 왜? 택(宅)을 썼을까요.
택(宅)이라는 글자 가운데 탁(乇)은 모(毛)의 축약형으로 추정됩니다.
‘터럭’이라는 소리값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집 택(宅)이라는 글자로 ‘집’이라는 소리값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에 ‘터럭’이라는 소리값이 어느정도 반영되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에는 비교해볼 수 있는 자료들이 많아야 그 당시의 소리값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위구르 22-08-22 22:27
   
조리비서 할 때 助利는 되의 음차가 맞습니다. 그 다음에 非는 중고한어 재구음을 보면 pjʷĕi, pı̆wəi, pjuəi, piuəi, piuəi, piuəi, pi̯wəi, piuɨi, pʷɨɤi인데 뷰아이, 브이, 비와이, 뱌아이 등으로 읽어서 부여를 음차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답'이라는 말을 도출하는 모양새가 흥대나 수구리같은 정신병자 수준입니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90800&sca=&sfl=mb_id%2C1&stx=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몇 년간 지껄이는 이유가 궁금하다
     
보리스진 22-08-25 01:41
   
제가 100%는 아닐거에요.
그런데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내용을 확인해보고 큰 흐름은 맞춰놓은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大豆山城=非逹忽), (鐡圎郡=毛乙冬非), (僧梁縣 =非勿), (森溪縣=所非芳縣),
(赤木縣 =沙非斤乙) 이 중에서 非를 '부여'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두가지인데요. 하나는 森溪에서  森을 '수풀'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森을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없습니다. 林으로 비교를 해보면 林을 '수풀'이라고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적목현(赤木縣)의 赤을 '붉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赤의 사용용례를 삼국사기에서 찾아보면 '붉다'로 해석이 불가능한게 나오거든요.
(積利城=赤里忽), 그리고 삼국사기에 지명에 보면 (赤=丹=朱)이 보여요. 赤을 丹이나 朱에 빗댔거든요. 그런데 이 赤은 '붉다'가 아니라 음차한 것입니다. (赤(적)=丹(단)=朱(주))
朱(주)의 쓰임새를 주몽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몽의 이칭으로 추모, 중해, 도모 등이 있습니다. 이 한자들은 음차입니다.

위구르님이 말하는 음차는 안맞습니다. 고대 한자가 훈차가 있고, 음차가 있습니다.
助利는 되의 음차가 아닙니다. 利는 구결에서 소리값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입니다. 助利는 '조리' 또는 '도리'라고 읽어야지 北을 뜻하는 '되'가 아닙니다.

부여는 음차가 아니에요. 부여를 음차해서 서양의 국가 이름에 끼어다가 맞추는 학자들 많습니다. 흉노, 신라를 중앙아시아 국명, 명칭에 끼어맞추기 엄청 많지요. 그런데요. 음차가 있고 훈차가 있는데 이 국가명칭은 음차가 아니에요.

두막루는 북부여의 후예라고 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음차입니다.
백제는 일본어로 '쿠다라'라고 합니다.
제(濟)는 '다라'에 대응됩니다. 제(濟)를 찾아보면 고려시대에 제주를 탐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제왕족 성씨는 부여씨입니다. 부여씨를 분석했습니다.
결과는 (부여=답라=다라=돕라)
두막루=다라=탐라=답라
지역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한자나 소리값이 조금씩 다르지만 어원은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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