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서 고죽성(孤竹城)은 요서군(遼西郡) 영지현(令支縣), 하북성(河北省) 노령현(盧龍縣) 일대, 또는 산해관(山海關) 부근, 조양현(朝陽縣) 서남 지구 등으로 나타난다. 세력 범위가 난하(灤河) 하류에서 대릉하(大凌河)에 걸치는 발해만 북안 일대이고, 그 중심지는 대릉하 상류의 요령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상(商)과 주(周) 시대에 롼허[灤河] 유역을 중심으로 요서(遼西) 지역에 존재했던 제후국이다. 상을 건국한 탕왕(湯王) 때에 분봉(分封)되어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며, 왕족(王族)의 성(姓)은 상 왕조와 마찬가지인 자(子)였으며, 씨(氏)는 묵태(墨胎)라 하였다. 초기에는 국도(國都)를 허베이성[河北省] 루룽[盧龍] 인근으로 하였다가 영지(令支, 지금의 河北省遷安)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고죽국(孤竹國, 기원전 11세기~기원전 664년)은 상주대부터 춘추시대 후기까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허베이성탕산 시에 존재한 국가이다. 국성은 자(子), 씨는 묵태(墨胎)이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로 알려져 있고 기원전 664년에 제에 의해 멸망했다. 수서 배구전에는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인데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하여 조선(箕子朝鮮)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에는 수양산이라고 일컫는 산이 다섯 곳이나 있다.[1] 하동(산서성) 포판현 화산의 북쪽과 하곡의 가운데에 수양산이라는 산이 있고, 농서 혹은 낙양 동북쪽에도 있다 하며, 또 언사현(하남성 낙양현 동쪽에 있는 현) 서북쪽에 백이·숙제의 사당이 있다 하고, 요양에도 수양산이 있다 하여 전해 오는 기록에 섞여 나온다 그라나 맹자는 "백이가 은나라 폭군 주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살았다"라고 했으며, 우리나라 해주에도 수양산이 있어 백이·숙제의 제사를 지내건만, 중국에서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산기슭을 경유하여 두어 마을을 지나 15리를 가서 고죽성(孤竹城)에 도착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誌)』를 살펴보니, 영평부(永平府) 서쪽 15리에 고죽국 임금이 봉해진 땅이 있고,그 서북쪽에 고죽국 세 임금의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괄지지(括地誌)』에 고죽의 옛 성이 노롱현(虛龍縣) 남녘 12리에 있다고 하 였다. 『황명방여지(皇明方與誌)』에는 요서(遼西) 땅이 곧 옛 고죽국이라 하니, 고금(古今)에 이름이 전하여 정확하고 의심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이첨(李詹)이 황해도 해주(海州)에 있는 수양산(首陽山)을 옛 고죽국이라고 억지로 끼워 맞추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는 “당의 배구전에 말하기를,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의 해주)이고 주나라는 기자를 봉해줌으로 조선이라고 불렀다(唐裵矩傳云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고 하였다. 즉 고구려를 고죽국과 연결시켜 본 것이며, 『삼국유사』는 고죽국을 황해도 해주로 파악하였다.
산융은 한때 강대해져 그 세력의 범위가 전국 시대의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의 사이에 있었다. 연나라를 자주 침범하였으며, 기원전 705년에는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기원전 679년, 제 환공이 제후들 사이에서 패권을 잡았고, 산융이 중원에 끼치는 소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기원전 664년, 산융이 다시 연나라를 공격하자 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제 환공은 연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산융을 토벌하였다. 다만 이듬해인 기원전 663년에 산융은 이미 북방으로 되돌아 간 상태였다.
제나라, 연나라의 연합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산융의 근거지인 무종산(無終山, 현재의 허베이성첸안시옌산 일대)을 공격해 크게 이겼다. 산융의 왕은 고죽국으로 도망갔고, 연합군은 최종적으로 '산융을 북벌하고, 영지국(令支)를 치고, 고죽을 참한 뒤 남쪽으로 돌아오는' 결과를 얻었다. 제 환공의 산융 정벌 때 고죽국도 동시에 멸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연나라는 강역을 넓히고 제나라의 북쪽 방벽이 될 수 있었다.
《수문비고》에서는 청나라 직예성 영평부에 있었던 고죽국도 조선 종족이라고 했다. 고죽국 왕자인 백이·숙제 형제는 왕위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들은 오늘날의 섬서성에 있었던 주나라를 여행하다가 무왕에게 반전론을 열렬히 역설했다. 이 외에, 양자강·회수 유역으로도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소왕국을 많이 건설했다. 그중에서 서나라 언왕이 두각을 보이고 인의를 실천하니, 중국 36개국이 서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이상은 조선 본국이 아닌 식민지에서 나온 한두 호걸의 행적이다.
춘추 시대 다섯 패자(覇者) 중의 한 사람인 제나라 환공(桓公)은 어느 해 봄에 재상 관중(管仲)과 대부 습붕(隰朋)을 대동하고 군사를 이끌어 고죽국(孤竹國) 정벌에 나섰다. 고죽국은 작고 힘없는 나라라서 금방 결판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상대방이 의외로 완강히 저항할 뿐 아니라 이것저것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겹치는 바람에 싸움이 예상 외로 길어져 그 해 겨울에야 말끔하지 못한 채로 겨우 끝이 났다. 관중이 왕에게 말했다.
역사의 진실은 史書를 직접 읽어보고
지리지를 분석해야 일차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섬서성과 감숙성을 연구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는데
이는 중국의 대부분 지명이 隋書를 통해 교묘하게 당나라가 지명을 이동시켜
실제 지명을 찾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