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通典)
其地後漢時方二千里。至魏南北漸狹,纔千餘里。至隋漸大,東西六千里。
그(고구려의) 땅은 후한때에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
수나라 때 1리가 530미터(https://baike.baidu.com/item/%E9%87%8C/7205675#viewPageContent)
6000리는 곧 3180키로
흑룡강 하구 부근에서 우수리강까지 957 키로
우수리강에서 하르빈까지 789 키로
하르빈에서 통료까지 504키로
통료에서 나중에 고구려군과 당나라군의 격전이 벌어진 적봉진의 고지까지 364키로
적봉에서 보정시까지 595키로 혹은 574키로
합치면 3209키로나 3188키로라서 6000리와 사실상 같다
보정시를 서단으로 정한 근거는
구당서(舊唐書)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
번역: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였으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이다. 장안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른다.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는 말갈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영주까지 닿았는데 영주는 통설대로 현 조양시에 있지 않았고 훨씬 서쪽에서 여러번 옳겨졌는데 수나라 때의 위치가 바로 지금의 보정시다.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5471&sca=&sfl=)
구당서에서는 통전의 기록보다 오히려 고구려의 강역을 좁게 묘사하지만 정작 뒤에 료수를 넘어 영주까지 이르는 상태라는 설명을 덧붙이는 것으로 보아서 수치 자체를 축소시켰을 수가 있지만 구체적이라서 통전의 경우와 다른 잣대로 고구려의 강역을 측정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고구려의 직할지를 기준으로 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 강역
보라색: 전체 강역 추정도, 백색: 직할지 추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