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보든 비스듬히 보든 도무지 말, 그것도 갑옷을 입힌 말의 모습이라고 볼 길이 없다. 결국 말에 갑옷을 입힌 모습과 닮았단 뜻으로 개마대산이라 명명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개마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임금을 칭하는 고유 용어인 검과 곰하고 어원이 같으며 왕검성이 있던 자리에서 멀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한서 28권에서 현도군의 서개마현 바로 다음에 나오는 현이 樂浪군의, 왕검성의 고지에 세워진 조선현이라는 점으로 알 수 있다. 한나라 본토에서 가까운 순 대로 羅列하였기 때문에 서개마가 왕검성의 바로 서쪽이고 왕검성이 있던 자리가 개마라고 불리게 됐다고 추론할 수 있다.
또 "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고, 그 산은 평양성 서쪽에 있다" 라고 한 후한서 동이렬전의 기록을 보면 개마산이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평양성은 지금의 遼陽 부근에 있었으므로 왕검성이 그 서쪽인 대릉하와 遼河의 사이에 있으면 맞아떨어진다.
遼史 지리지 동경도에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라고 되어있고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옥저국(沃沮國) 지역이며 고구려 때 비사성(沙卑城)으로 당나라 이세적이 공격하였던 곳이다'' 라고 나와있는데 해주는 지금의 해성시로 遼陽과 매우 가깝다. 후한서에서 평양성의 서쪽에 있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동옥저가 위치했다고 했으니 평양성이 있던 지금의 遼陽이 동옥저가 있던 곳이고 그 부근의 해성시에 있었던 해주가 본래 옥저의 땅이었다고 하는 遼史의 기록으로 보면 지금의 遼東 반도는 옥저의 땅이었다. 지금의 연해주에 북옥저가 있었는데 그보다 서쪽에 위치했던 옥저를 동옥저라고 기술한 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에 후한서의 동옥저는 옥저로 바꿔서 보는게 맞다.
그 다음으로 왕검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의문이다.
한나라의 사신 섭하가 위만 조선에 왔다가 비왕을 죽이고 도주한 곳을 사기정의에서는 평주 유림관이라고 설명했다. 유림관은 곧 림유관이다. 그곳을 지금의 란하의 바로 동쪽에 있는 산해관으로 볼 경우 위만조선의 서쪽 경계는 지금의 대릉하 부근이 된다. 그러나 림유관이 위치했다던 석성현이 盧龍현에서 서북쪽으로 140리 떨어졌다던 사서 기록들을 본다면 결코 사실일 수 없다. 盧龍현의 지금 위치를 기준으로 보면 석성현은 지금의 란하의 서쪽 隣近이 된다.
그렇다면 당시 위만조선의 서쪽 경계인 패수는 지금의 란하에, 그 동쪽에 있었을 렬수는 지금의 대릉하에 비정된다. 한서 지리지에 ''(렬수가) 팔백이십리를 흐른다(行八百二十里)''라고 하였는데 한나라의 1리가 415미터이므로 340.3킬로가 되는데 지금의 북한에 있는 강인 대동강은 439, 청천강은 217, 압록강은 790킬로, 혼하는 415(정확히 일천리), 태자하는 464킬로이기 때문에 렬수가 될 수 없다. 대릉하는 397킬로인데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