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정사의 다음 내용을 고찰해 보시기 바랍니다(고찰이란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
1) 한서 무제기 예(薉)의 내용
元朔元年(B.C.128)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 爲蒼海郡.
(B.C.128) 동이 예의 임금인 남여 등 2십8만명이 항복하자 창해군을 설치했다
(薉 : 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예에 대해 복건은 예맥은 진한의 북쪽에 있고, 고구려 옥저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은 대해로 막혀있다
2) 사기 평준서 창해군 내용
(BC 128년) 彭吳. 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팽오가 조선(위만)을 멸망시키기 위해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燕)·제(齊)의 사이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3) 후한서 동이열전의 예(濊)
濊 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元朔元年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B.C.128)에 예의 임금 남여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4) 사기 흉노열전 오유선우(BC114 ~ BC 105) 조에 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為郡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는 예맥과 조선(위만)을 함락하여 그 땅에 군을 설치했다
5) 사기열전 匈奴列傳(흉노열전) 묵돌선우(BC 3세기 초 ~ BC 174년) 東接穢貉朝鮮 (흉노는 동쪽으로 예맥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6) 사기 조선열전
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滿亡命,聚黨千餘人,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鄣, 稍役屬真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王之,都王險。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조선(위만조선 영토)은 요동군(遼東郡) 바깥 변경에 속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 지키기가 어려워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러 경계를 정하고 연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비어 있는 땅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고조선의 평양과 고구려 평양은 어디인가?
1) 삼국유사의 평양(平壤) 기록
동천왕 21년 조(247) 세주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으로 다른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고 되어 있다.
2) 삼국사기 최초 평양(平壤) 기록
동천왕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勘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3)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의 양평(襄平)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호(胡=수염호)인 고조선을 방어했다.
燕亦筑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