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망(王莽)의 초(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 흉노,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遼西)[군(郡)]의 대윤(大伊) 전담(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州)·군(郡)·현(縣)이 그 책임을 구려후 추(句麗侯 騊)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嚴尤)는“...맥인(貊人)이 법(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尤)는 구려후 추(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長安)에 보내었다. 왕망(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天下)에 포고하여 고구려(高句麗)란 국호(國號)를 바꾸어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지금 현재 구려후 추의 존재를 삼국사기를 신뢰하여 연비라 보는 견해도 국내에 소수 존재하고 혹은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고 싶었던 고구려인들의 조작이라는 설 중국측 사서에만 나오고 삼국사기에는 누락된 유리의 막내 여진으로 비정되는 고여율의 존재를 삽입한 인물일까요?
여기서 현도군은 만주 서부 변방에 있었으며 호(胡)는 조선의 이칭으로 쓰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고구려현(髙句驪玄),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라는 기록으로 고대 遼水가 지금의 영정하-상간하라고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고대 遼水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글 잘 읽었습니다. 위만이 상하장을 건너서 도읍을 세웠기 때문에 왕험서이 상하장에 있다고 하셨는데 그곳에서 무리를 모은게 먼저고 왕험성을 탈취한게 그 이후의 일이니 두 곳은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위만조선이 비정 위치에서 사방 수천리의 큰 강역을 가졌다는게 理解가 잘 안됐지만 유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기 450년 경의 후한서 동이열전
-->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에 이르러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 漢初의 대혼란기에 燕·齊·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衛滿은 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서기 300년 경의 삼국지 위서동이전
--> 연나라 사람 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王이 되었다.
BC 100년 경의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비어 있는 땅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을 도읍으로 정했다.
마침 효혜(孝惠)황제와 고후(高后) 때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가 위만이 한나라 조정의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받고
요새 밖의 만이(蠻夷)를 보호하게 하고 변방을 노략질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로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면 금지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했고, 이로써 위만은 그 땅의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부근의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저는 위만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내몽골, 료녕성에 걸친 작지 않은 나라라고 보는데 一. 조선렬전에 위만조선의 領域이 方수천리라 하여 四方 수천리와 달리 중심지로부터 동서남북 각 지의 거리가 수천리라는 뜻으로 최소 사방 이천리라는 뜻과 같이 때문이니 사마천이 작은 이민족 국가를 굳이 그리 크게 묘사할 理由가 없고 二. 위만조선의 항복한 역적들이 받은 봉지가 지금의 산동 북부에서 발해만 서안에 있는데 위만조선이 격렬히 투쟁하다 망해 저항의식이 강력했으므로 구 지배층들을 봉해서 지배를 맡기는 보편적인 방법을 쓰는게 당연했고 군으로 직할 지배를 한다고 해도 그들을 앞잡이 삼아 현지에서 부려먹는게 당연했기 때문에 그곳이 위만조선의 경내였을 것이고 三. 험독현이 창려현에 있다는 응소의 설을 보면 지금의 창려현이 위만의 수도였을 것이기 때문이죠. 작은 읍들을 복속시켰다는 理由를 들으셨는데 작은 나라나 부족들이어도 그 수가 많다면 합쳐서 대국을 이룰 수 있고 굳이 작은 읍들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을 남긴걸로 보면 그 수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애초에 위만이 장악했던 불조선의 領域 자체도 작았을 것이란 보장이 없기에 작지 않은 나라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조선렬전에 위만이 준왕을 축출했다는 기록이 없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그럼 그저 불조선의 서쪽 변방에 머무르며 거기서 세를 키웠다는건데 그럼 그 작은 땅을 가지고 어떻게 나중에 한나라의 수십만 대군에 맞서 1년간이나 싸웠는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하북성 서남부 내륙에 위치했다면 수륙 兩面으로 침공을 행한 것도 理解가 잘 되지 않습니다
1) 진개의 고조선 침공은 흉노열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동호 1천리라고 나오고요, 후한서에는 뻥티기해서 조선 2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연소왕 이전에 연나라는 100리정도 영토의 조그만 나라였였고요 제나라의 침입으로 명맥만 유지했던 조그마한 제후국이었습니다. 연소왕이 인재를 적극 발굴했지만 고조선의 영토 1천리를 얻지 못했다면 전국 7웅이 절대 될 수 없었다고 봅니다
2) 사마천의 위만조선 사방 수천리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춘추필법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3) 위만조선이 한나라 공격을 한참동안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만조선이 큰 강으로 둘려쌓은 험남한 지형때문(상하장인 상하운장)이고, 한나라는 수군이 별로 없었기에 위만조선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고대전투에서 전연요세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사로 대군을 방어할 수 있는 잇점이 있습니다)
4) 그리고 위만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요서라는 주장은 고구려 명망후의 중국 고대사서들의 춘추필법을 이해하지 못한 잘못된 틀리게 중국 사서를 이해한 부작용이라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중원의 사서에서 춘추필법으로 강역을 왜곡한 경우는 대게 외국의 강역을 줄이거나 자국의 지명을 과도하게 확장시켜 멀리 갖다 놓은 경우가 있지만 오히려 외국의 강역을 부풀리는 경우는 별로 없죠. 또 위만조선을 침공하는데 들인 병력이 흔히 57000명이라고 아는 것과 달리 조선렬전에는 발해로 나아간 병력이 오만 명이라고 해서 수군만 오만 명이고 陸軍까지 합치면 대규모였을 터인데 그 작은 나라를 치는데 그 정도 병력을 동원해서 아무리 지형의 불리함을 떠안았어도 1년이나 소모하다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그나마도 한나라의 패배로 점철된 전쟁이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나라 수군은 5만이 아니라 7천명이었고요!! 한나라 수군이 힘도 못쓰고 첫전투에서 비참하가 패해서 배로 모두 잃었습니다
따라서 한나라 군대는 배가 없으니 도강(패수를 건너는 일)이 쉽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위만조선 땅을 수천리로 부풀려야
연나라 망명객인 위만이 천여명으로 수천리 위만 조선을 건국했으니
연나라 위만이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고조선이 보잘 것 없는 힘도 없는 나라로 만들 수 있고요
따라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위대한 것으로 되고
그 수천리 땅을 한나라 군으로 다스린 한나라가 위대한 것으로
조선렬전의 '종제부발해병오만인'이라 되어있으니 발해로 나아간 병력, 즉 수군만 오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칠천 명이라는 말은 뒤이어 왕검성에 양복이 이끌고 도달한 선봉 부대일 뿐이죠. 그렇게 겁 없이 나섰다가 패퇴하자 뒤이어 도착한 43000 본대가 급히 전투에 돌입하다 마저 패배했지만 궤멸당한 수준은 아니고 패배의 충격에 놀라 흩어졌다고 봅니다. 즉, 칠천 병력과 싸우다 적 본대가 오자 위만조선의 군도 놀라서 대충 승리로 매듭짓고 적을 겁주는 선에서 끝냈으니 양복의 군대는 일단 도강(혹은 도해)에는 성공했고 아예 일망타진된 것은 아니니 이후에도 공손수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순체와 동등한 지위의 지휘관으로 행세하며 주전론에 맞서 주화론을 외쳐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끈 군대의 잔여 병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기다 그 작은 강을 건너기 위해 수군을 동원한 것 자체가 理解하기 힘듭니다. 후일의 수나라군처럼 부교를 놓고 상륙하면 될 것을 굳이 배를 만들고 힘들게 운용할 필요가 없고 수군 외에 陸軍을 운용했는데 그들은 그 강을 어떻게 건너서 공격했습니까? 陸軍이 함께 공격을 진행했다면 그들은 따로, 배를 타지 않고도 진격할 길이 있기 때문이니 수군으로서 가게 되어있을 5만 병력도 그들과 함께 편히 陸路로 가서 공격하면 됩니다.
위만의 정권 탈취는 고작 천여 명의 추종자로 이룬 것은 아닙니다. 연과 제의 망명객들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점차 세를 불려서 그 갈 데 없어서 생존을 위해 싸움도 마다 않을 동이족 유민과 한족 난민들 혹은 새 터전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 출신 무사들을 규합한 데 이어 기존 불조선 내의 사회 하층 불만 세력들이나 정권에 반대하는 호족들을 은밀히 포섭해 일시에 정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도 비록 사서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예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튼 하기에 따라서 적은 수의 사람으로 시작해 세를 불려 작지 않은 나라를 집어삼키는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애초에 당시 불조선은 위만을 서쪽 백리 땅에 봉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강력하게 중앙집권으로 운영되지 않고 분봉제로 이루어져 聯盟체 수준이었을 것이며 또 위만이라는, 아무리 본인이 조선계임을 증명하려 하였을 지라도 처음 등장한 이방인일 뿐인 인물에게 서쪽 방비의 일부 혹은 상당부분을 맡기는 중책을 맡겼다는 것은 당시 불조선의 국방이나 지배 체제에 龜裂이 있었거나 나중에 백제 세력을 북방을 방비할 요량으로 밭아줬다가 감당도 못해서 오히려 먹혀버린 마한 마냥 군소 집단이 할거하고 중앙 정부에서 간신히 그들을 한 끈으로 이어 유지하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위만은 정권을 장악하고 작정하고서 그들을 강하게 묶고 통제해 제대로 중앙 집권의 우산 아래에 놓이게 하였으며 불조선의 구 세력들이 막상 뭉치자 강력해진 힘을 기반 삼아 주변 군소 부족이나 국가들을 병합하는 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나중에 왕검성이 포위될 때 항복을 결심하고 우거 칸과 성기 장군을 죽이면서까지 항복할려고 발악한 로인, 겹, 최, 한음같은 버러지들은 실은 구 불조선의 聯盟을 이루던 호족들 중에서 유력한 세력들의 후예였는데 위만조가 다 통일하여 굳이 한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전쟁이 벌어져 자신들의 봉지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거사를 기획했을 것이니 후에 그들이 봉해진 곳이 죄다 발해만 서부지역과 산동 북부에 몰려있고 옛 위만조선의 땅과 가깝거나 속해있었을 곳들이라서 더욱 확실합니다. 항복한 그 역적들을 만약 한나라 내지의 아까운 땅을 떼어줘가지고 봉할거면 혹여나 손을 잡고 독립 투쟁에 뛰어들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분산 배치를 함이 옳은데도 서로 통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봉한 것이 그 理由입니다.
글쎄요 만약 순체의 병력이 5만 명이면 左將軍荀彘出遼東의 앞에 오는게 어색하지 않습니까? 양복의 군대가 발해로 나아갔다는 대목 바로 다음에 나왔으니 부자연스럽습니다. '양복을 파견하여 제를 따라 발해로 나아간 병력이 5만 명이다' 혹은 '발해로 나아갔으니 병력이 5만 명이다'라고 해석하는게 자연스럽지 순체의 군대가 나오는 대목 바로 앞에 병력의 수가 나오는게 더 부자연스럽죠. 아마 그 병오만인 앞에 規模라는 말이 나왔다면 모릅니다만.
그리고 한서나, 후한서, 삼국지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 위 위만조선의 당시 시대에 대한 추측은 위만조선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댄 근거입니다. 위만조선이 방수천리라는 기록을 왜곡으로 치부하시니 이리 반박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사서에 많이 나오는 지리에 대한 정보들을 물론 저는 중시하고 하나하나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선생께서도 그것들을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글쎄요
단어 자체를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병사 오만이 나오는 문장은
위만 조선을 토벌하는 한나라 군대 규묘라고 보여지고요
(구체적인 전투 상황에서 수군이 7천명이니
5만 + 7천명 해서 한나라 군대규모는 5만 7천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2) 그뒤에 구체적인 전투상황입니다
누선장군 양복의 수군 7천명이 왕검성을 도착하였는데 위만조선에게 패하여 흩어졌다
그런데 수군 후발대가 도착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후발대 4만 3천명이 도착했다면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을 것이고
후발대 4만 3천명이 위만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고 기록이 있었겠지요
(7천명으로 왕험성을 공격하려 했으니
첫 전투에 패배했을 지라도 5만명의 수군이었다면 당연히 공격하여
대규모 전투를 했을 것이 당연하겠지요)
따라서 수군 후발대 4만 3천명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조선열전의 내용으로 이해합니다
3) 표현된 단어 하나로 중국 고대 사서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만천이 사기 문장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전체적인 관점, 종합적인 관점에서 문장이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사서 기록자가 나타내거나 숨기고자 했던 정확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문장을 신중히 봐야 하는 점이 순체의 군대가 5만 명이라면 이 문장은 애매하다는 거죠. 딱 봐도 이 병오만인이 앞뒤의 어느 문장에 붙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이전 문장에 붙으면 '제를 따라 발해로 나아간 병사가 5만 명이다'라고 되고 뒤에 붙으면 '병력이 5만 명인 순체가 료동으로 나아가 우거를 쳤다'라고도 되는데 정황상으로 보면 전자가 옳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陸軍의 규모가 당장에 5만 명이라고 나오는데 바로 앞 줄에 나오는 수군의 규모는 안나오는게 이상하죠. 수군의 규모만 나오고 陸軍의 규모는 안나오는 것도 이상하다고 한다면 나중의 정황으로 넘어갑니다. 수군 7000명이 상륙했다가 왕검성에서 보고 쳐서 대파했는데 어떻게 공격을 결심했냐면 염탐을 해서 수군의 규모가 적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왕검성은 7000명의 수군으로는 넘볼 수 없는 전력을 지닌 요새였다는 뜻이고 굳이 이렇게 기술한 것은 사마천이 양복의 경솔함을 탓한다는 뜻입니다. 본대를 놔두고 먼저 7000명으로 왕검성에 너무 가깝게 상륙해서 궤멸당했고 뒤이어 온 본대 역시 전투에 휘말려서 패배했을 것이니 비록 전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큰 타격을 입고 초기 계획을 일그러뜨렸으니 말입니다. 만약 수군 규모 자체가 7000명이라면 그건 양복을 탓할 일은 아니고 그따위로 밖에 병력을 주지 않은 무제에게 책임 물을 일입니다. '적은 병력'이니 아무리 잘 싸워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먼저 도착해 지리멸렬된 7000 병력이 그 수군의 전부였다면 남은 병력은 순체의 5만 군대에 비해 그 일부에 불과해 위세가 형편이 없는데 이후에 상황을 보면 순체는 공격을, 양복은 화친을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게 됩니다. 이는 즉, 양복에게 그나마 적잖은 병력이 있어서 발언권이 있다는 뜻이니 남은 병력이 그리 없는 양복이 어떻게 순체에게 반대하고 전략 회의에 불참하는 등 고집을 부리겠습니까.
양복이 첫 전투의 패배를 딛고(?) 왕검성의 남쪽에 주둔할 수 있었던 理由도 애초에 병력이 5만 명이나 되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7000명으로 주둔했다간 언제 역습을 감행할지 모를 왕검성의 남쪽에 주둔할려면 그 이상의 병력이 있어야 할 테니 말입니다.
이런 점을 무시한, 한나라군의 규모가 57000명에 불과하다고 하는 주장은 위만조선이 방수천리의 대국이 아니고 현 북한 지역에 위치한 소국에 불과했다는 통설을 뒤받침하며 이는 대한민국 강단판 위국휘치입니다.
그리고 추가로, 처음 왕검성에 도착한 대목의 기록은 '제(齊) 군사 칠천 명을 이끌고 먼저 왕검성에 도착했다'이니 여기서 굳이 제라는 말을 쓴 것은 그 7000명이 제나라 지역 출신이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군대가 있다는 뜻이니 그렇지 않다면 굳이 여기서 제라는 말을 쓸 필요 없이 앞에서 미리 '제(齊) 군대가 제나라 땅을 따라 발해로 나아갔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참고로 어째서 제나라 군사들이 먼저 도착했냐 하면 그들이 해안가에 살던 이들이라 물에 밝아 선두를 맡기에 적당했기 때문일 것이고 나머지는 물에 익숙치 않은 내륙 출신이거나 남쪽의 강소성, 절강성 출신일 것이니 어느 경우든 발해 지역을 제나라 사람들만큼 아는 이는 드물었을 것입니다.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제나라 사람들만을 뽑아 수군으로 활용했다면 더 전투력이 좋았을 것인데 어째서 다른 지역에서도 징발을 했냐 하면 제나라 땅은 이미 전쟁 준비로 고달픈데 거기서 5만 명의 장정을 징집했다간 분노를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장 구조와 정황으로 볼 때 5만 명이 맞습니다. 陸軍은 그 몇 배인 수십만이 되니까 졸정 다의 진격, 패수 서군과의 전투 등에서 패하고도 왕검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겠죠.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위만 조선의 반역자들을 봉한 곳이 지금의 하북성 동남부에서 산동성 서북부에 이르는데 거기는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동이족의 땅인데 어떻게 거기에 한나라가 그들을 봉하는게 가능한지도 의문입니다
ㄴㄴㄴ 요동군 병사가 수십만이된다는 주장은 <- 위만조선을 료동군의 군대만으로 침공했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게 사실이면 어째서 그 이전까지 료동군과 무관했던 양복과 순체가 군을 이끌겠습니까? 료동군의 병사만 출동했다면 그 지역을 다스리는 태수에게 맡겨야 하지 않습니까. 또 양복이 이끈 군의 일부는 제나라 출신이었고 순체는 연과 대 출신의 병사들을 이끌었다 하는데 그들의 출신지인 지금의 산동, 하북이 모두 료동군 소속이었습니까?
이 전쟁에서 한나라군의 규모는 일개 군 수준일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는 내내 무제가 관심을 가지고 1년 간 도박한 것 마냥 집착을 보였습니다. 두 장군이 유리하지 못하다 여겨 위산을 보내와 협상을 하려 했지만 위만조선이 항복을 가장해 습격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두 장군이 거부했고 이에 분노해 위산을 죽였습니다. 나중에는 다시 제남 태수 공손수를 보내 이번에는 두 장군을 다독이거나 지휘권을 한 명, 아마도 양복에게 몰아줄 심산이었겠지만 그가 양복을 체포해서 탈락시키고 순체를 최고 지휘관으로 만드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니 다시 그를 죽였습니다. 이는 전황이 한나라군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서 차라리 주화파인 양복의 계획대로 위만조선과 화친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하거나 내부에 반역자들을 만들어 안에서 무너지게 만들기로 선회했음을 뜻하고 곧 무제가 이 전쟁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였다는 뜻입니다.
고작 료동군 관할의 군대만 출동한 작은 전쟁인데 다름 아닌 황제가 그리 크게 관심을 가집니까? 그리고 료동군의 군대만을 투입해 전황이 불리하면 마땅히 그 수십배 규모에 달할 병력을 다른 군들에서 차출하거나 관군을 투입하면 되는데 그리 빌빌댄게 납득이 됩니까?
네 맞습니다
요동군 소속으로만 보면 육군 5만도 요동군 소속이 아니라 요동군 근처의 모든 군사를 징집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조선열전에 '천자는 죄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했다' 표현이 있으니
한무제의 칙명이니 어떻게든 육군 5만을 좌장군 순체가 주도적으로 징벌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면
조선열전에 표현된 군사규모를 부풀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겠지요
1) 있는 그대로 이해란
조선열전에 표현된 내용을 이해를 위해 보충 설명하는 것이며(육군 5만 + 수군 7천명 주장)
2) 표현되지 않은 내용을 주장하기 위한 추정이나 설명은 판타지 소설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 수군 5만 + 육군 5만 또는 수십만 주장으로 이런 내용은 조선열전에 없습니다)
------------------------
따라서 조선열전의 군사규모란
------------------------
'천자는 죄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했다' 표현으로 시작되는
병사 오만이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위만 조선을 토벌하는 한나라 군대 규묘라고 보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전투 상황에서 수군이 7천명이니
5만 + 7천명 해서 한나라 군대규모는 5만 7천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갑자기 遼東郡의 병사가 참전했다고 하다가 순체가 죄인을 추가로 징집했다고 설명하시니 도통 납득이 안됩니다. 遼東郡의 병력이 주력이라는 기록이 어디있습니까? 출遼東토우거가 그 근거입니까?
조선렬전에 陸軍의 초전이 패배라고 이실직고 되어있는데 '졸정 다가 먼저 遼東의 병을 이끌고 지 맘대로 나갔다가 패산했다'라고 하는데 당시 료녕성 서부와 하북성 북동부에 걸쳤던 료동은 한나라의 소유이긴 커녕 위만조선의 핵심 지역이었으니 여기서의 遼東은 遼東郡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전군이 료동군 병력이면 따로 '료동의 병'이라고 할 필요가 없으니 遼東郡 출신 병력은 일부였음이 드러납니다. 만약 대다수거나 전부였으면 진작에 앞에서 진작에 그리 기술했어야 하고 여기서 졸정 다가 이끌다 참패한 군대가 遼東郡 출신이면 따로 부연 설명할 필요 없고 다른 곳 출신이면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으니 따로 기술함이 옳습니다.
죄인들을 모집한 것이 료동군이 주력인 순체의 군대를 좀더 보강하기 위할 뿐이라고 하는데 순체가 그리 했다는 기록은 없고 천자가 그랬다고는 나와있으니 일단 순체가 알아서 모집했다는건 억측이고 무제가 모집을 했다는건 전국적으로 차출했다는 뜻으로 봐야합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내용을 뒤의 전쟁상황에 나오는 내용으로 군사규묘를 보충설명한다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될 수도 있습니다
--->
천자는 죄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그 해 가을(기원전 109년),
1)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제 땅에서 출발해 발해(渤海)를 건너게 했다
2) 조선을 공격하기위해 육군과 수군을 합하여 병사 5만이다
3)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군을 나와 우거를 토벌하게 했다.
누선장군 양복의 군사는 제나라 군사로 수군 7천명이고
좌장군 순제가 거는린 군사는 연 지방과 대(代) 지방의 병사들이고
좌장군 순체의 중급 군관 다(多)는 요동의 군사를 거느렸다
상식적으로 遣樓船將軍楊仆從齊浮渤海兵五萬人은
一. 遣樓船將軍楊仆: 루선장군 양복을 보냈다(루선이 배를 뜻하기 때문에 당연히 수군을 이끈다는걸 알 수 있음)
二. 從齊浮渤海兵五萬人: 제를 따라서 발해로 나아간 병사가 오만명이다.
이렇게 해석하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병오만인이 뒤에 붙어버리면 '병사 오만 명의(혹은 병사 오만 명인) 좌장군 순체가 遼東郡을 나와 우거를 쳤다'라고 되는데 이런 식의 기술은 불합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럴거면 有나 與를 붙여서 '5만 명을 데리고(與)' 혹은 '5만 명이 있는(有)'이란 식으로 해석되게 해야 하는데 없으니 말입니다.
상식이요 어떤 것을 상식이라고 말씀하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사서 해석에서 상식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한자 자체의 해석 보다는
조선열전에 표현된 군사규모를 부풀지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상식으로 봅니다
1) 있는 그대로 이해란
조선열전에 표현된 내용을 이해를 위해 보충 설명하는 것이며(육군 5만 + 수군 7천명 주장)
2) 표현되지 않은 내용을 주장하기 위한 추정이나 설명은 판타지 소설에서 가능하다고 봅니다
( 수군 5만 + 육군 5만 또는 수십만 주장으로 이런 내용은 조선열전에 없습니다)
따라서 수군 5만이라는 주장이나 한자 해석은 틀렸다고 보고요
판타지 소설(역사 소설)을 쓸 경우에 가능하겠지요
결론적으로
兵五萬人를 단독 문장으로 보아서
(육군과 수군을 합하여, 또는 육군만) 병사 5만이다
라고 해석해야합니다
-------
추가하여
-------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반복적으로 주장하시기에 댓글을 달 이유가 사라졌으며
더 이상 반론하지 않겠습니다
(주장하는 내용도 조선열전에 표현된 내용 보다는 개인적인 생각과 추측 추론이 대부분입니다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개인적인 생각을 주장하고 있다고 봅니다)
-----
또한
-----
사마천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고찰했을 때
1) 위만조선 위치가 '하북성 형수시 무강현'이라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2) 한나라가 동원한 병사 수는 곁가지에 해당하여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 '견루선장군양복종제부발해병오만인'을 '견루선장군양복, 종제부발해병오만인'으로 끊어 읽어서 '루선장군 양복을 파견했고 제를 따라 발해로 나아가니 병사가 오만 명이다'로 보는게 틀리지 않다.
2. 반대로 '병오만인'을 뒤에 붙여 '병오만인좌장군순체출료동'으로 보면 '병사 오만 명인 순체가 료동으로 나아갔다'라고 되는듯 하나 그럴려면 '병사 오만 명을 데리고'라고 해석할 수 있도록 與가 있거나 '병사 오만 명을 인솔하여'라고 알아듣게 率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3. 양복이 왕검성 해안에 도착한 것을 두고 '제나라 출신 병사 칠천 명이 도착했다'라고 묘사되는데 수군 모두가 제나라 출신이면 여기서 이리 쓸게 아니고 앞에서 진작에 '제나라 땅을 따라서 제나라 출신 병사들이 발해로 나아갔다'라고 써야 하므로 이는 제나라 출신 칠천 명 이외에 다른 지역 출신의 잔여 병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양복이 칠천 군사를 이끌고 왕검성을 급히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왕검성 측에서 적군의 규모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해 먼저 쳐서 대파했다. 즉, 왕검성은 칠천 병사로 싸우기에는 턱도 없는 전투력을 가진 요새인데 그 칠천 명이 대파당하고 마땅히 소수의 패잔병이 전부여야 할 양복의 군대가 나중에 왕검성 남쪽을 포위했다고 하는데 칠천 명으로 싸웠다가 패한 적이 있는 왕검성의 부근에 칠천 명에 크게 못 미치고 사기도 떨어진 패잔병 무리로 주둔하는게 自殺행위에 다름 없다. 이는 칠천 명 외에 수많은 잔여 병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5. 또한 이 대목에서 양복이 왕검성에 '먼저' 도착했다고 나온다. 이는 수군이 陸軍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뜻으로 쓰였을 수 있는 말이지만 본대 사만삼천 명을 뒤에 두고 칠천 명으로 따로 먼저 도착했다고도 볼 수 있다.
6. 칠천 명 밖에 안되는 군대로 싸워 대패하고 마땅히 거느린 병사가 소수에 불과할 양복이 나중에 순체와 쌍두 노릇을 하며 주전파 대 주화파 구도를 이루어 대등하게 맞서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 발언권을 발휘하긴 커녕 조용히 틀어박혀 명령이나 따라야 할 처지인데 그리 한 것은 역시 칠천 명이 병력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7. 그리고 다음 대목에 '누선은 제(齊) 지방의 병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들어왔는데, 이미 여러 번 패하여 도망했었으니'라고 나오는데 양복의 군대가 패한 적이 한번이 아니라는 뜻이다. 초전에 칠천 군대가 박살이 났는데 무슨 수로 여러 번을 더 싸워 더 패배하는가. 전체 병력이 그 뿐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8. 양복이 위만 조선의 대신들을 꾀어 마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가 병사 몇 없는 그리 힘이 없는 인물이면 명색이 반역을 공모하는 일인데 조선의 대신들이 무슨 수로 믿고 따랐겠는가.
9. 전후 처분에 대해 '(양복이 병력을 크게 날려먹었기 때문에) 베어 죽임이 마땅하나 돈을 바쳐 속죄(贖罪)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라고 나오는데 초전에 잃은 수군 칠천 명(혹은 그 대부분)이 그의 휘하 군대 전부면 애초에 왕검성이 함락까지는 아니더라도 수군 칠천 명으로 부근에 주둔을 하고 충분히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그리 편제를 마련한건데 궤멸되었으니 이 역시 무제의 머리통의 뚜껑이 열리게 만들 실책이라 그 과실이 순체에 뒤지지가 않으므로 손잡고 함께 황천길을 걷게 됨이 마땅한데도 비록 속전을 내긴 했지만 혼자 살아남았다.
이렇게 요약하겠습니다. 앞서 환단고기 운운하거나 한문 공부니 조선렬전을 구라로 만들고 싶다느니 쓸데 없는 말씀들을 하셨는데 어딜 봐서 제가 그랬습니까?
이건 잘 생각해보셨으면 좋겠고 아무튼 앞으로도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歷史 지식이나 추론을 발전시킴이 옳으니 지속힐 理由가 없는 이번 주제에 대해서 더 따지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