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정보는 제한되어 있지만 북한 공산당의 태동에 대한 실질적인 자료는 사실 김일성이 활동했던 만주 지역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실증적인 연구를 진행한 책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북한 공산당의 창시자인 김일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사실상 유사 공산주의 사이비 종교 단체의 특성을 보이는 현 북한 공산당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패망 이전 시기의 김일성에 관한 중요한 책이 출판됐다. 평양에서의 출생, 만주로의 이주, 만주에서의 항일 게릴라운동과 극동 러시아로의 탈출 및 소련극동군 아래서의 군사훈련, 그리고 소련점령 아래서의 북한으로의 귀환까지 33년에 걸친 김일성의 삶을 추적해 세 권에 담은 방대한 양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 유순호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도문에서 태어난 ‘조선족’ 중국인이다. 이미 20대 초에 다큐멘터리 작가로 입신하면서, 중국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서 전개된 항일독립운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1931~1932년 이후 거기에 대항해 중국공산당이 조선인을 끌어들여 세운 동북항일연군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이를 통해 <비운의 장군: 동북항일연군 총사령 ‘중국인’ 조상지(趙尙志) 비사>, <만주 항일 파르티잔: 잊혀진 ‘조선인’ 허형식(許亨植)>, <만주 항일 속으로> 등을 냈다.
<김일성, 1912~1945>의 저자 유순호는 마침내 동북항일연군에서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사장(師長)에까지 오른 ‘김일성 3부작’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또는 하나하나 매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새로운 사실을 대거 밝혀냈다.
1)북한의 김일성에 앞서 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는 ‘항일독립운동가 김일성 장군’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어려서부터 그 전설에 접했고 자신이 크면 그러한 ‘김일성 장군’이 되겠노라고 다짐하곤 했다. 스스로 본명 김성주 대신에 김일성으로 행명(行名)했으며,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그는 본명 김성주보다 ‘김일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김일성의 부모 김형직(金亨稷)과 강반석(康盤石)의 결혼을 주선한 사람은 미국 침례교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장인 넬슨 벨 의료선교사였다. 벨 목사는 강반석의 이름도 지어주었다. 그러한 인연에서 그레이엄 목사는 1992년과 1994년에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었다(1권 50~51쪽).
3)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죽은 뒤 어머니 강반석은 시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조선인 부농에게 개가했다. 생활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처음엔 화를 냈으나 곧 이해하게 됐다. 강반석은 곧 새 남편과 헤어져 혼자 살았으며, 적빈 속에서도 아들이 ‘독립군 대장’으로 성장하도록 독려했다.
4)김일성은 스무 살이 된 1932년께부터 지방의 한 항일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뽑힐 정도로 성장했다. 주보중(周保中)을 비롯한 중국 유격대 지도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들은 대체로 김일성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훗날 김일성은 자신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었다고 썼는데, 그러한 조직은 실존하지 않았다.
5)김일성이 이끌던 항일유격대 안에서 식사를 담당했다가 훗날 김일성의 부인이 된 김정숙이 1936년 ‘만주국’ 군인의 습격을 받자 밥을 짓던 가마솥을 머리에 인 채 권총으로 사살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북한당국은 영화에 꼭 이 장면을 포함시켰다.
6)김일성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보천보전투에 대해서다. 김일성은 자신이 빨치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함경남도 혜산의 보천보를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연설도 했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압록강을 넘지도 않았고, 당연히 연설도 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김일성의 문제는…거짓말에 있다. 거짓말 때문에 문제가 더 복잡하게 불거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우리가 북한의 김일성을 그리고 그 김일성 ‘신화’에 바탕을 두고 3대 세습에 이른 오늘날의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