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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0-04 05:18
[한국사] 왜(倭) 연구 요약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1,571  

# 한달 전(2021.09.08)에 완료한 본 연구 결과를 이곳이 이 연구를 시작한 곳인 만큼 그 끝맺음으로서 요약하여 게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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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長長) 한달이 걸린 왜(倭) 연구를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연구는 이곳 동아게시판에 밑져야본전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유저가 "왜의 기원과 정체에 대해 꽤나 설득력 있는 기사가 있어서 올려봅니다." 하는 제목으로 한 기사문을 공유한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유저가 <미래한국>이라는 사명을 가진 한 인터넷 언론에서 2014년에 발행한 기사 전문을 동아게시판에 공유하여 왔는데 이를 놓고서 동아게 유저들이 아무런 비판 없이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서 이 기사문이 전하는 주장과 그 근거를 비판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 기사 원문은 다음의 링크에 있습니다.

□ 왜인은 중원에서 흘러온 유민이다 - 미래한국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17

해당 기사문이 전하는 주장은 모두 일본 학자들의 것으로, 저는 그 기사문을 읽고서 대번 상당히 엉터리다 하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검토하기 시작하여 그날 새벽까지 대여섯 시간에 걸려서 검토를 끝냈으며 제가 한달여 동안 지속한 연구의 골자가 사실 그 때에 이미 다 나왔습니다. 저는 이 검토결과를 보다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재검증하고자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한달이라는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미래한국의 해당 기사문이 전한 일본학자들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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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설에서는 산해경을 근거하여서 산해경 해내북경의 개국(蓋國)을 서기전 3~2세기에 현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로, 왜(倭)는 동시대에 현 일본열도에 있었던 집단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산해경의 해당 기술 "왜는 연에 속했다"는 화중·화남의 왜인들이 연(燕)나라에 무역을 하기 위해 들어간 것을 표현한 것이다.

논형과 본초강목 등 중국의 여러 사서에 근거하면 왜(倭)는 본래 중국 강남(江南)에 기원을 둔 해양민족으로서, 여러 곳에서 활동했는데 서기전 2세기 이후 한(漢)의 남하 정책으로 중국 남부와 한반도, 일본 열도 등으로 흩어졌다가 서기 1세기에 일본에 정착한 무리만 왜(倭)로 불리게 됐다.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의 '왜(倭) 강남 출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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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기사문이 전한 일본학자들의 왜(倭) 강남 기원론, 또는 출자론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들이 근거로 든 《논형》과 《산해경》, 《본초강목》 뿐만 아니라 《열녀전》, 《한서》, 《설문해자》, 《삼국지》, 《후한서》, 《수경주》 등의 여러 사서를 심층 분석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검토 과정에는 저의 『장백산과 압록수 연구』, 『고조선 연구』, 『고구려 서계 연구』, 『고막해와 거란 연구』, 『발해 연구』, 『내몽골과 만주지역 고대 북방 종족 연구』 등 이미 완료했거나 계속 진행 중인 연구의 결론적 결과, 과정적 결과, 그리고 과정에서 획득한 사실 정보가 활용되었습니다.

우선 에가미 나미오 등 해당 기사문이 전한 일본학자들이 저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 사서와 그 사서에 대한 해석적 주장을 비판하면,

첫째, 산해경 해내북경의 개국은 서기전 3~2세기 한반도에 있었던 국가가 아니다. 산해경의 산경과 해경의 모든 서술내용과 구성방식을 입체적으로 분석하면 해내북경에서 언급한 개국과 왜는 현 하북성 동남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둘째, 개국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그리고 하북성 지역에 상고대에 존재한 기, 기, 개, 개후 등 여러 유사동질한 명칭을 지닌 국가 및 종족 가운데에 어느 것으로 봐야 하며, 왜는 현 하북성 창주시 일대에 있던 예수, 예성, 예읍 등의 연원이 되는 예족과 관련이 있거나 산해경이 후한 시대(왕충)와 동진 시대(곽박)에 편집되면서 삽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

셋째, 왜는 연나라가 아니라 후한의 낙랑을 교섭창구로 삼아서 처음 중국과 통교하였다. 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서기전 1세기 후반, 중국 사서(한서와 후한서)에 따르면 서기 1세기 후반이다.

넷째, 논형의 왜는 그 저자 왕충이 전한이 성취한 업적을 성주시대(주나라 무왕·성왕 시대)에 비견하고, 나아가 성주시대보다 더 높이고자 한 정치적 의도로 가공된 상징조작의 재료로서 선택돼 삽입된 것이다.

다섯째, 논형에서 왕충은 이미 기존에 관용적으로 사용돼 온 "월상이 흰꿩을 바친다"는 표현과 "울인이 방초를 바친다"는 구절을 합쳐서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낸 후에, 이 가운데에 울인을 왜, 또는 왜인으로 고쳐서 유증편과 희국편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이 조작의 흔적은 이허편과 초기편에 미완의 상태로 남았다.

여섯째, 논형에 나타난 왜를 심층 분석하여 보면 왜의 위치는 하북성 북부, 구체적으로 요동과 낙랑 지역으로 나타난다. 이는 천하가 통일되어 태평성세를 이룰 때에 먼 곳의 이방인들이 조공을 바친다 하는 《상서》 성주지회의 전형을 따라서 한나라를 높이고자 논형의 저자 왕충이 가까운 과거인 서기 57년에 낙랑을 통하여 교섭하여 후한의 조정에 사신을 처음으로 보낸, 그 당시 매우 낯선 존재인 왜를 이 '성주지회 전형'의 재료로서 새롭게 삽입시킴에 따른 것이다.

일곱째, 본초강목은 지극히 후대의 문헌으로, 사서도 아닌 약학서이며 명나라 때의 문헌이다. 이 때에는 이미 왜의 존재와 위치가 일본국으로서 명확한 시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초강목에서 언급된 왜는 전혀 부정할 여지 없이 당시의 일본국, 즉 현 일본이다.

에가미 나미오 등 일본학자들의 '왜 강남 출자론'을 비판하기 위한 연구와 병행하여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타난 왜(倭)에 대한 연구 역시 실시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왜는 동이전과 선비전에 나타나 있다. 필자는 동이전의 왜, 선비전의 왜로 구분하여 분석했다.

둘째, 삼국지 동이전의 왜는 대방을 교섭창구로 삼았으며, 현 일본 규슈 지역의 소국연합체이다. 후한서 동이전은 삼국지 동이전을 저본으로 삼은 까닭에 그 내용이 거의 같은데 다만 시대를 후한 시대로 소급한 까닭에 낙랑을 교섭창구로 삼고 있는 것으로 기술돼 있다.

셋째, 조위는 후한 시대부터 계속돼 온 왜와의 사역, 그리고 서기 243년 사마의가 국정을 주도할 당시 조위를 방문한 왜국(야마대국) 여왕 비미호의 사신으로 인해서 왜국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습득하였는데 삼국지를 저술한 서진의 진수가 서진을 창업한 사마의 가문의 업적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에서 대방에서 왜국 지역까지 이르는 거리를 10배 가량 과장하였다.

넷째, 이러한 까닭에 대방군에서 왜국까지 '1만 2천 리'라는 거리가 적히게 됐으며, 이러한 거리 기록을 토대로 "대방의 동남쪽에 있다"와 "방위와 거리를 고려할 시에 회계군(현 복건성)의 동쪽에 있을 것이다"하는 위치 인식이 양립하게 되었다.

다섯째, 삼국지를 저본을 한 후한서에서 그 저자 범엽은 삼국지의 이러한 착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모자라서 아예 확언하여 "회계군의 동쪽에 있다", "담이군 및 주애군(현 해남성)과 그 풍속이 같다"라고 기술하였다.

여섯째, 삼국지-후한서의 이러한 위치 착오는 왜국이 현 복건성의 동쪽, 또는 해남성의 동쪽 인근에 위치하였다 하는 인식을 낳았으며 이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 지도 등에서 왜국을 지금의 필리핀 쯤의 위치에 표시한 연원이다.

일곱째, 후한서 선비전에는 2세기 후반에 옛 흉노의 전 지역을 통일하여 선비제국을 이룩한 단석괴가 왜인국을 공격하여 왜인들을 약탈해 와서 오후진수(현 로합하)에 옮겨서 살게 했다고 적었으나 이는 후한서 선비전의 저본이 되는 삼국지 선비전(배송지가 보주하며 인용한 왕침의 위서)과 다른 내용이다.

여덟째, 삼국지 선비전에는 한국(汗國)에서 한인(汗人)들을 약탈했다고 적고 있을뿐으로 왜인국이나 왜인 관련 그 어떤 언급도 흔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홉째, 후한서 선비전의 왜인국과 왜인은 오후진수(현 로합하)의 위치(현 하북성 진황도시 북쪽의 내몽골 적봉시 동쪽)를 고려하여 후한서의 저자 범엽이 한국의 위치를 그 근처에서 찾지 못 하자 낙랑의 바다에 해당하는 현 발해 연안에 왜국이 있다 한 한서 지리지, 요동과 낙랑 등에 왜를 위치시킨 논형 등의 후한 시대 왜와 왜국에 대한, 적은 정보에 따른 부정확한 인식에 기반한 기록을 참고하여 독단적으로 "한국과 한인"을 "왜인국과 왜인"으로 고쳐 적은 것이다.

열째, 범엽의 이러한 착오는 그 1세기 후인 6세기 초 수경주의 역도원까지 이어진다.

열하나째, 후한서 선비전의 왜인국은 삼국지 선비전의 한국의 착오이며, 삼국지 선비전의 한국은 구만한국을 가리킨다.

열둘째, 구만한국은 북만주 눈강의 서쪽, 소흥안령의 동쪽, 현 흑룡강성 헤이허시의 우다롄츠시를 중심한 지역에 있다가 2세기 후반 단석괴의 공격을 받은 후에 소흥안령을 넘어가서 그 동쪽에 새 터를 잡고 흑룡강을 경계로 읍루(숙신씨)와 마주하였다. 본래 구만한국이 있던 지역은 훗날 두막루국이 터를 잡는다.

이상입니다.

한번 잘못된 인식이 들어서서 그것이 구조화돼 계승되면 그것을 깨뜨리는 데에 일백 배, 일천 배의 노력과 시간이 소요됩니다. 단 한 줄의 그릇된 서술을 비판하는 데에 수십 페이지에서 수천 페이지의 연구가 요구됩니다. 또한 그 그릇된 인식이 이미 보편 인식으로 자리잡은 다음에는 학문적으로 비판이 가해져 기존설이 깨진 다음이라 해도 이미 틀이 잡힌 보편 인식을 전환시키는 데에 수년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의 지난 한달 동안(2021년 8월 9일~동년 9월 8일)의 『왜(倭) 연구』는 제가 기존에 수년에 걸쳐 이미 습득하고 검증한 사실 정보, 그리고 제 개인이 진행한 여러 연구가 바탕이 되었기에 '겨우' 한달이 걸렸던 것입니다.

이 연구를 일단 여기서 마무리합니다만 이 연구가 왜(倭)의 실체에 대한 모든 연구가 아니므로 제 개인적으로 차차 추가 연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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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리 21-10-04 10:04
   
감방친구님이 거론한 신문기사에서
'왜인의 기원은 일본 열도가 아니라, 진(秦)나라대에까지 양자강 유역과 산동반도 등에 흩어져 해상무역을 하던 집단이라는 점이다.'

는 내용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열전의 내용이니 정확한 내용입니다

후한시대나 삼국지 시대의 왜의 위치는
중국 동해안인 절강성과 대만으로 비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에 따르면
주산군도와 양자강이 왜의 주 근거지로 보이고요
이 왜는 가야 김수로왕의 가야제국의 속국으로 보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수구리 21-10-04 10:12
   
왜의 위치가 절강성과 대만인 근거는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 내용입니다

하북성 창주시로 비정되는 예의 남쪽이 진한과 마한 이고요
산동성의 진한과 마한 남쪽이 변진이고요

강소성 근처의 변진 남쪽이 왜이니
왜는 절강성과 대만으로 비정해야 합니다
수구리 21-10-04 10:22
   
하지만  기사내용에서
"한(韓)에 통합되기를 거부한 이들이 한반도에서 왜(倭)로 불렸으며 이들이 다시 일본 열도로 이동해 사서(史書)에 야마토 정권을 수립한 왜(倭)로 등장한다는 것이 도리고에의 학설이다.'

는 근거가 없는 상상이고 소설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왜는 한반도에 없었다고 보고요
왜가 일본열도로 이주한 시점은
산동성의 백제가 광개토태왕과 장수열제에게 망한
서기 400년 이후로 보면 될 것 같고요

서기 400년 이전의 일본열도는 가야제국의 왕자들이 일본을 건너가 세운 가야 속국이 있었기에
절강성과 대만에 있었던 왜 세력이 쉽게 일본 열도로 이주 가능했다고 봅니다
수구리 21-10-04 10:33
   
거론하신
산해경 해내북경의 개국(蓋國)은 개마국으로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의 동옥저조에 나오는 개마대산 근처로 비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개마대산이 어디인가 하면
 진황도시와 당산시 사이의 갈석산으로 보입니다

갈석산을 개마대산으로 비정하는 이유는
1) 갈석산을 구글 위성지도로 보면 갑주를 두른 말의 형상인 개마형상입니다
2) 예의 북쪽이고 부여의 동쪽이 동옥저인데 개마대산 동쪽이 동옥저이니
  예의 위치가 중국 하북성 창주시라면 동옥저는 진황도시와 진황도시 동쪽으로 비정되니

당산시와 진황도시 사이의 개마형상(말에 갑주를 씌운 모양의 산)의 큰산인

지금의 갈석산을
삼국지와 후한서의 개마대산으로 비정해야 하고 단단대령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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