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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9-08 02:33
[한국사] 성리학 국가인 조선이 노비제를 채택한 이유
 글쓴이 : 폭커
조회 : 1,893  

(이전에 조선 후기의 정치상황을 너무 길게 적다보니 오타가 너무많았습니다. 회원분들의 눈을 아프게 해드린점부터 사죄드립니다)

전 이전 조선후기 정치상황의 정조파트에서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노비제가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차후에 설명한다고 언급했었는데 지금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성리학이 정착된 송은 어떻게 노비제를 혁파했나?

과거 성리학이 처음 정착된 중국의 북송,남송시기에는 이전의 왕조들과는 다르게 노비제가 혁파된 상황이었습니다(이후 몽고제국시대에 부활) 이는 왕조입장에서 국가의 세금을 내지않는 노비가 많을수록 그 국가에는 손해이기 때문에 아예 노비제가 지배층에 의해 혁파된상황이었지요 특히 송나라 같은 경우는 이전 5대10국시기인 무신황제시대에 신분질서가 사실상 붕괴해 버렸고 한나라시기부터 중국의 오래된 전통 지배계층이던 문벌귀족들이 이시기에 씨가 말라버렸기때문에 지배계층공백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이게 사실제일큽니다)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여 송나라의 백성들은 농업말고도 상업이라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지경제와 이모작같은 혁신적 농법의 확립으로 일반농민출신지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급제자들의 주류를 이루었기에 사실상 황족들을 제외한 모든신분이 경제적으로 국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후 성리학을 성립시키고 주류를 이룰 과거에 급제한 송대의 신진관료계층들이 모두 이런 지주농민출신들이었지요. 이런배경에 의해 성리학에서는 모든이들에게 과거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는것을 중요시하였고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이들을 교화 해야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송나라에서는 중국전통 부계중심사회와 성리학이념이 결합되어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는 더더욱 발전되며 자연농 비중이 늘고 상업은 당대에 세계최고수준이었기에 노비의 노동력을 중심으로한 노비경제가 굳이 필요하지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리학 국가인 조선은 왜 노비제를?

우리는 평소에 조선사회를 인식할때 주로 성리학예법이 완벽하게 자리잡은 조선 중 후기의 모습을 많이들 생각합니다.

하지만 퇴계이황과 율곡이이가 등장한 16세기 이전 조선은 완전히 다른 나라였습니다.

우선 사회적으로 조선초기에는 서옥제(남자가 처가에들어가 사는 풍습으로 원삼국시기부터 전례된 고유풍습이었다)가 남아있었습니다(세종대왕은 서옥제에 대해 여러번 불만을 표현하고 왕실이 모범을 보여 고치려하고 민간에 금지령까지 시켰으나 지배계층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다만 왕실은 서옥제폐지)
원래 조선이전 우리고유 문화는 남계중심문화(성리학에서 중시하는 남계중심 오복친 가족제와 문중이란 조직은 중국에서 수입되었고 16세기중반 퇴계이황과 율곡이이에 의해 조선에서도 체계화됨)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초기에도 이전시기의 모습은 매우 많이남아있었습니다.

예를들어 세조시기에 기록된 어느 사족의 상속과정읕 보면 남녀 구분없이 태어난순서대로 상속되는것이 원칙이었던 것을 살펴 볼수있고 이는 당대의 분재문서(상속문서)로도 나타나있습니다. 또한 외손자도 상속대상에 포함됬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상속의 원칙은 경국대전에도 법으로 체계화되어 있었지요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할점은 서옥제입니다. 가령  제가 조선초기의 지배계층이고 제 아버지는 부산출신 어머니는 안동출신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서옥제에 따라 안동에서 살게되고 저도 거기서 태어나 외사촌들과 함께 자랍니다. 이후 저는 대구의 부인에게 장가를가 대구로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부산과 안동에 있는 땅들을 상속받게 됩니다.

저는 현재 대구에 살고있고 이땅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가 힘이듭니다. 그렇다고 묵혀둘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당신은 노비를감독할 인원과 노비들을 보내서 경작하게하도록 합니다.

어떻게보면 허술하기짝이 없는 이론이지만 실제로 문중과 토지경제가 제대로 정착되지않았던 고려말과 조선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노비인력이 많이 필요하였던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초기의 유학자이자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초까지도 3년간 사는방식으로 서옥제가 어느정도 남아있었기에(이순신의 경우에 장인인 방진의 집에서 2년간 기거했다) 기득권층이 된 성리학자들조차도 노비를 포기하지 않으려했지요.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노비문서가 대거 소실되었고 중국의 성리학이념에 따른 오복친가족제와 부계중심의 토지경제가 조선사회에 확립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사족들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위해 남계가족중심으로 지방에서 뭉치기 시작하였고 양란이후 숫자가 적어지고 여러부분에서 비용이 많이드는 노비를 활용하기보다 지역소작농에게 소작을 맡기는것을 선호하게됩니다.

 또한 양란이후 노비들이 대거 이탈하고 신분제가 혼란해지기 시작하면서 조선말에는 노비는 있으나 그 수가 매우 적어지고 족보를 위조한 이들에 의해 상위계층인 양반 사족들이 더많아지는 괴상한 신분구조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후기는 노비는 존재하지만 신분질서 혼란으로 인해 그 수가 급감소하고 성리학 정착에 따라 남계 친척들이 모여살기시작하여 씨족중심의 문중이 조직화되자 노비경제가 탈피되었고 토지경제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810년 순조시기에  공노비들이 모두 해방하여 왕실에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조선사회의 신분구조에 매우 큰변혁을 일으키게 됩니다(물론 세도가들과 사족들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지만 인구구조상 이들 노비비율은 순조시기에 소수에 해당되고 이들조차도 소작농 고용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순조이전인 정조시기부터 소위 실학파라 불린조선의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노비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였고 성리학의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한 정조에 의해 왕실에서도 노비제를 성리학국가에서는 없어져야할 낡은악습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요약
요약하자면 조선초기에는 여전히 이전시대의 모습을 가진사회였고 그 이전 시대는 노비로 유지될수 밖에 없는 구조의 사회였기때문에 당연하게도 노비가 남아있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16세기에 조선에서도 성리학이 체계화되기 시작하였지만 성리학을 체계화한 퇴계이황과 같은 개혁적인 성향의 조선의 신진사림들조차도 근본적으로 노비에 기반한 경제구조에서 이득을보는 지배층들이었기 때문에 노비제 철폐에 미온적이였던게 당대의 현실이자 시대적한계였습니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격변을 겪은뒤에는 조선의 신분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노비는 전체인구비중에서 소수가 되었지만 중국처럼 기존지배계층이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기에 노비제 철폐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다만 성리학적인 이념에 의해 남계가족중심의 토지관리제도가 활성화됨으로써 노비경제가 무너지고 토지중심의 소작경제로 전환되었던것이 조선후기 사회의 특징이었습니다. 또한 정조 이후 순조시기인 19세기초에 들어서면 조선도 사노비는 비록 철폐하지 못했지만 공노비에 대해서는 철폐를 감행하는 시대의 변화에따른 진보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특히 최상위 지배계층인 국왕과 왕실이 노비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피력하여 공노비 폐지와 같은 행동에 나선것은 조선사회의 큰변화를 암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사실 공노비철폐는 대중들 입장에서 세도정치로 인하여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던 순조의 가장 큰 치적이기도 합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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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칸늑대 21-09-08 03:54
   
좋은글 잘봤습니다.
도나201 21-09-09 20:59
   
좀더 보충하면...
고려시대  호족세력이 대부분 사병 및 사노비중심으로 이끌어가던 사회고,
특히나 몽고침입에 의한 일반농노가 대부분 호족세력의 사병 및 사노비로 들어가던 시절이라서.

노예제도의 상황은 조선시대와 비교해볼때... 그 괘를 달리했습니다.

특히나 이들의 호족의 사병 은  일반 농노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줄 만큼 의 계급적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한 사회체제가 몽고이후에 엄청나게 정착해버립니다.

조선건국이 되면서 사병혁파를 통한 계층을 국가병력으로 흡수하면서  많이 달라지게 되었죠.

그러나 일반 호족세력의 사노비 관련해서는 많은 부분이 달라집니다.
고려시대의 사노비는 자신의 의지대로 나갈수도 있엇고,
특히 조선건국때 멸문지화 당해버린 호족세력의 사노비는 그대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공신 호족세력과 기타 관련 해서는 사노비는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고,
이때 관노비의 필요성에  노비제도는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노비제도는 조선초기에는 노비로서 아주 인격적으로 대접을 못받는 것이 아닌.
황희정승이  노비아이들을 앉고서 이야기하기를 즐겨하였다라는 이야기도 있고 해서 .
어느정도이 대접?  정확히는 최하의 직장 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게 심각하게 바뀐것은 
연산군 이후 (이때 장길산 의 산적이 등장.  )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급격한 상인의 득세로 
경신대기근을 이후에  노비의 가치는 인간이하의 취급으로 돌변합니다.
     
폭커 21-09-10 03:01
   
덧붙이자면 양란이후의 노비의 처우가 썩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18세기초 1709년 경상감영에서 조사한 울산의 인구 호적을 분석해보면 외거노비 배우자의 53.4%가 양인여자였다라는 사실입니다. 양인과의 통교는 노비의 처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또 조선말의 노비는 사유재산 소유까지 가능했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세수를 늘이기위해 사노비가 100냥=쌀 13섬을 바치면 면천시켜 주도록 하는 것을 법제화하기도 하였지요 이때문에 18세기말 울산 경주에서는 노비비중이 전체인구의 1.7프로 경주는 3.3프로 까지 줄어듭니다.

이미 18세기 영,정조시대에는 성리학의 원리적이론을 중시한 임금들의 존재와 국가세수증대를 위해 왕실에서는 노비추쇄관을 폐지하고 공노비 철폐를 논의하고 실학파와 정조 시기의 집권당이었던 시파의 일부 대신들은 노비제도 자체도 폐지되어야한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영조와 정조는 일정 세금을지불하면 노비면천을 시켜주는것과 동시에 노비추쇄관 폐지를 결정하여 당시 조선왕실은 노비폐지쪽으로 가닥을 잡았었지요.

이는 이후 순조시기에 공노비가철폐되는것으로 이어졌습니다 17세기말부터 극단적으로 노비비율이 줄어들어 18세기~19세기 조선에서는 노비 계층의 인구비중이 극소수가되어(특히 영조의 세금지불책은 노비신분이탈을 가속화시킴) 조선사회에서 노비라는 존재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었지요

17세기에 오복친가족제와 문중이 확립된뒤 양반사족들은 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기 위해 남계씨족들끼리 뭉쳐서 지역사회에서 큰세력을 이루었고 17세기부터 극단적으로 줄어든 노비수와 도망노비 이탈 노비가 많아짐에 따라 이들은 비용이 많이드는 노비보다는 자신들의 토지에 마름을 두어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는방식을 선호하게 됩니다.
(이미 병자호란 이전 임란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경상도 양반사족들 사이에서는 노비가 아닌 마름을 두어 지역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것이 유행하였지요 대표적으로 적은소작료를 받고 흉년때 주변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하여 지역사회에서 크게 존경을 받았던 경주 만석꾼 최부자 집안이 여기해당되는 케이스였고 이렇듯 이시기쯤에 안동의 풍산류씨 경주의 경주이씨 울산의 학성이씨 밀양의 밀양박씨 같은 영남지방(특힝왜란중피해가 가장극심했던 오늘날 부울경지역) 각지역의 사족들은 다른지방보다 일찍 남계후손들끼리 뭉쳐 소작농을 고용하는 방식으로토지를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 노비경제가 제일먼저 무너졌던 지역이었지요)

이렇게 양란은 조선 신분질서를 흔들어놓았을뿐만 아니라 조선의 문화와 경제체제를 뒤바꾸어 버렸고 노비에 대한 양반사족과 사대부들의 관점마저 흔들어버리게 만들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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