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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9-01 02:27
[한국사] 조선 초기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渾江) -긴글버전-
 글쓴이 : 보리스진
조회 : 1,248  

1.서론
압록강은 위치가 변화하여왔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역명을 먼저 살펴봐야한다.
자성, 우예, 여연, 무창이라는 행정구역이다. 사군(四郡) 또는 폐사군(廢四郡)이라고도 부른다.
이 사군은 조선의 평안도 최북단에 위치했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할 때부터 조선의 영토였고, 태종·세종(1416-1443) 때에 군(郡)이 설치되었다. 세조(1455-1459) 때에 군이 폐지되었으나, 성종(1484년) 때까지 주민 일부가 살고 있었고, 1500년대까지도 조선의 영토였음이 확인된다. 1600-1700년대를 거치면서 사군이 조선의 영토라는 인식은 변함이 없으나, 여진야인이 오래 거주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사군의 정확한 위치를 확실히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2. 사군(四郡)의 위치
조선후기 기록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겠다.
18-19세기 지도를 보면 조선후기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 맞다. 지명 기록으로도 현재의 압록강이 맞다. 그런데,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폐사군(廢四郡)의 본말(本末)에 대한 변증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군은 압록강 너머 북쪽에 있다는 것이다.
<사료1> 『오주연문장전산고』(1788~1856년)
세조(世祖) 원년(을해)에 야인(野人)이 변방을 소란시키므로 그곳 백성들을 내지(內地)로 이주(移住)시키고 드디어 그 땅을 비워버렸다. 그러나 그 땅은 북쪽으로는 압록강 너머에까지 뻗쳤고.......
世祖元年乙亥 以野人擾邊 移其民於內 遂空其地 然而其土 北逾鴨綠

조선중기 당대의 기록에도 사군이 압록강 바깥에 있었다고 나온다. 1523년 기록에 야인이 파저강, 야로강, 사군이 위치한 곳까지 와서 살기 시작했다. 아직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했으나, 앞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들어올지 모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군은 현재 압록강의 바깥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사료2> 『중종실록』(1523년)
파저강 이동은 되가 사는 곳이 근래에 더욱 심하게 번성하였습니다. 여염이 땅에 가득 차고 농사지을 땅이 좁아서 점점 사군(四郡)에 벌여 살게 되고, 야로강 이남에도 점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삼수(三水)부터 아래로는 의주(義州)까지가 장차 되가 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힘으로 금하지 못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허실을 갖추 알고 때를 타서 일어나면 아마도 압록강 이동에 또다시 출입하는 형세가 될 것인데.......
婆猪以東虜居之盛, 近尤甚焉。 閭閻撲地, 耕種地窄, 漸至列居四郡。 也虜以南亦漸來居, 上自三水下至義州, 將爲夷虜之居, 不但此也。 我國力不能禁, 隔江相處, 備知虛實。 乘時動發則臣恐鴨綠以東, 又復有出入之勢。

사군은 1500년대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였다. 1600년대 1700년대가 되면서 위치가 어딘지 정확히 알지 못하게 된다.
<사료3> 『중종실록』(1522년)
김주성합 등이 우리 지경에 다가와 여연(閭延) 성 안에서 거주하며 우리 강토를 경작(耕作)하므로....... 金主成哈等迫近我境, 至居閭延城內, 耕我彊土


3. 압록강의 위치
다음으로 압록강의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자성, 우예, 무창군의 서북쪽에 압록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1400년대 압록강은 사군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서북쪽에 1400년대 압록강이 있고, 그 가운데에 사군이, 그 동남쪽에 현재 압록강이 위치한다.
<사료4>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자성군(慈城郡)
대천(大川)은 압록강 상류(上流) 【군(郡) 서쪽에 있다. 】
大川, 鴨綠江上流, 【在郡西。】

우예군(虞芮郡)
대천(大川)은 압록강 상류(上流)이다. 【군(郡) 북쪽에 있다. 】
大川, 鴨綠江上流。 【在郡北。】

무창군(茂昌郡)
대천(大川)은 압록강의 상류(上流)이다. 【군(郡) 북쪽에 있다. 】 
大川, 鴨綠江上流。 【在郡北。】 

압록강의 위치 변화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조선초기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건국 시기에 이미 여연에 압록강이 있었다. 압록강을 界 또는 限이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압록강은 영토 한계선, 국경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가장 서북단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초기에는 압록강이 서북쪽에 있었고, 사군은 그 동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조 때에 자성, 우예, 여연, 무창 사군이 폐지된다. 주민들은 구성, 이산, 강계, 상토, 만포 등지로 이동된다. 하지만 영토를 줄이면 안된다는 여론이 모아져서, 압록강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국경선 역할을 하였다. 행정구역만 폐지되었을 뿐, 조선의 영토는 그대로였다. 1484년까지도 주민 일부가 남아 있었고, 단지 땅을 비워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섬주민을 육지로 옮겨 섬을 비워둔 공도정책과 같았다.
<사료5> 『태조실록』(1395년)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기까지의 연강(沿江) 천 리에 고을을 설치하고 수령을 두어서 압록강으로 국경을 삼았다. 
自義州至閭延沿江千里, 建邑置守, 以鴨綠江爲界。
<사료6> 『세종실록』(1436년)
압록강(鴨綠江)은 하늘이 만든 경계로서, 여연에서 자성에 이르기까지 적도가 침입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불과 6, 7개소이다. <중략> 
여연·자성·강계·벽동·이산·창성 등 모든 군(郡)은 모두 압록강 변에 책성(柵城)을 설치했다.
鴨綠江, 天作限界, 自閭延至慈城, 寇來之處, 不過六七 <중략> 閭延、慈城、江界、碧潼、理山、昌城諸郡皆設柵城於鴨江之濱
<사료7> 『문종실록』(1450년)
평안도 연변(沿邊)에는 긴요하지 않은 각 구자(口子)가 자못 많습니다. 우예(虞芮)로부터 무창(茂昌)에 이르기까지 각 고을과 구자(口子)가 강변(江邊)으로 옮겨 들어갔기 때문에 토지가 좁고 척박하여 백성들이 힘입어 살 수가 없으며....... <중략>
비록 국토를 넓히지는 못할지라도 조종(祖宗)의 봉강(封疆)을 줄일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얼마 안 되는 땅[寸土]일지라도 줄일 수는 없습니다. <중략>
우예(虞芮) 이상의 땅은 지금 비록 혁파하더라도 압록강(鴨綠江)의 큰 강을 경계로 하여 저 사람들 이 이곳에 들어와서 거처하지 못하게 한다면 진실로 땅을 줄이는 예(例)는 아닌 것입니다.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 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중략>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중략>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사료8> 『단종실록』(1453년)
비록 〈여연ㆍ무창ㆍ우예 등〉 3읍(邑)을 버린다 하더라도 큰 강(江)이 경계를 한(限)하여 띠[帶]처럼 둘러 있으므로, 우리의 봉강(封疆)은 예전과 같습니다.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 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 盡賣田産, 因而逃散流入遼潘者, 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사료9> 『세조실록』(1455년)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등의 고을은 강변에 포열해 있는데, 이제 이 세 고을을 혁파하고 자성(慈城) 1군(郡)이 홀로 적의 요충(要衝)을 막고 있습니다.
延、茂昌、虞芮等邑, 列於江邊, 今罷三邑, 慈城一郡, 獨當賊衝
<사료10> 『세조실록』(1459년)
자성(慈城)을 혁파(革罷)하여 그 백성들을 상토(上土)와 만포(滿浦)와 와동(瓦洞)에 옮기고, 이보다 앞서 옮겨가 살던 사람들을 구성진(龜城鎭)에 옮겨 안치(安置)하여.......
請革慈城而移其民於上土、滿浦、瓦洞, 其前此徙居人, 移置龜城鎭
<사료11> 『성종실록』(1484년)
여연(閭延)·무창(茂昌)·자성(慈城)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고을에 살던 백성을 옮겨 살게 하여 채웠었다. 이제 듣건대 앞의 세 고을에 옮겨 온 백성이 거의 다 유이(流移)하였다 하니, 실로 이것은 수령(守令)이 어루만져 어거하는 것이 방도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경(卿)은 친히 그 고을에 가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몇 호(戶)이고 유이(流移)한 것이 몇 호인지를 상세히 추고하여, 폐단 없이 쇄환(刷還)하도록 하라
革閭延、武昌 、慈城等官, 以其邑所居人民, 徙居以實之。 今聞前項三邑移來之民, 流移殆盡, 實是守令撫御乖方耳。 卿其親往本邑, 備細推考時存者幾戶、流移者幾戶, 無弊刷還。

행정구역상에서 사군은 북쪽에 있고, 만포는 남쪽에 있었다. 사군이 있던 지역이 전방지대가 되고, 만포가 있던 지역이 후방지대가 된다. 원래 압록강은 이 전방지대 바깥에 있었다. 이후에 후방지대로 이동되었다.
1488년까지는 압록강이 전방지대였던 사군지역에 남아있었던 것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1392-1488년의 압록강은 사군이 있던 전방지대 바깥에 존재했다. 사군의 북쪽에는 압록강이 국경한계선으로 존재했었고, 사군의 남쪽에는 만포, 상토가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사료12> 『성종실록』(1485년)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혁파(革罷)한 뒤로 이 땅이 야인(野人)의 유렵(遊獵)하는 곳이 되었음을 들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네 고을은 모두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하여 위는 삼수(三水)에 접하고 아래는 상토(上土)에 연(連)하여서 그 형세가 서로 의지하여 있고, 그 사이에 거의 4, 5백여 리의 땅이 비옥(肥沃)하여서 사람이 살 만하였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은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한계이므로 압록강을 넘어서 경계로 할 수 없거니와 압록강도 못미쳐서 경계로 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수자리 사는 군졸(軍卒)이 험한 곳을 넘어서 왕래하는 것이 불편하다 하여 네 성(城)을 폐기(廢棄)하였습니다.
<중략>
네 성이 압록강을 따라 있는 것은.......
<중략>
여연 등 네 진(鎭)은 강을 따라 설치하고 그 사이에 보책(堡柵)을 세웠으며, 또 압록강의 천참(天塹)의 험함도 있어 다시 세울 만하나, 다만 토병(土兵)의 수가 적어서 남쪽의 군사를 빌어다가 함께 지켜야 합니다.
革罷茂昌、閭延、虞芮、慈城後, 此地爲野人遊獵之所。 臣竊惟四邑皆以鴨綠爲界, 上接三水, 下連上土, 形勢相依, 其間幾四五百餘里, 沃饒可居。 且鴨綠江天設限界, 不可過鴨綠爲境、縮鴨綠爲境。 今以戍卒之越險往來爲不便, 廢棄四城。<중략> 四城之沿鴨綠江, <중략> 閭延等四鎭沿江而置, 間以堡柵, 又有鴨綠天塹之險, 似可復立。 但土兵數少, 借南兵幷戍之。
<사료13> 『성종실록』(1488년)
옛 여연(閭延)·무창(茂昌) 등의 고을은 압록강(鴨綠江) 상류(上流)에 있는데.......
古閭延、茂昌等邑, 在鴨綠上流
<사료14> 『중종실록』(1522년)
신이 만포(滿浦)에 있을 때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와서 거주하는 야인(野人)이 겨우 30여 호였는데 지금은 부락이 점차 번성해진다니, 번성해지면 상토(上土)·만포(滿浦) 등의 진(鎭)에 장차 조석간에 변이 있게 될 것입니다. 
臣在滿浦時, 野人之來居閭延、茂昌者, 僅三十餘戶, 今聞, 部落漸至繁盛。 繁盛則上土滿浦等鎭, 將有朝夕之變。

1516년이 되면 압록강은 후방지대인 만포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1520년대의 기록들을 보아도 압록강이 사군이 있던 전방지대에서 만포가 있는 후방지대로 이동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압록강은 1488년까지도 원래 사군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중종(1516년)때에 이르러서는 압록강도 만포 지역으로 후퇴하게 된다.
<사료15> 『중종실록』(1516년)
“압록강 건너편의 나무를 베는 일은, 변방의 일을 아는 사람도 많이 입시(入侍)하였으니, 하문하여 처리하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장곤이 아뢰기를, "강계(江界)로부터 삼수(三水)·갑산(甲山)·여연(閭延)·무창(茂昌)에 이르는 곳들은, 세조조 때에 수호(守護)하기 어렵게 되어 각보(各堡)를 내지로 옮겨 설치하였는데, 그 사이에 큰 산과 긴 골짜기가 있어서 초목이 무성하여 우러러보아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예전에 이극균이 나무를 벨 때에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지금은 마마동(麻麻洞)에서부터 주파리동(朱坡梨洞)·상토(上土)이하까지 강변의 벨 만한 곳과 만포(滿浦) 강변의 의심할 만한 곳은 이미 죄다 베었으므로, 산과 들에 초목이 전혀 없습니다.”
鴨綠江越邊伐木事, 知邊事之人亦多入侍, 宜下問處之。" 長坤曰: "自江界至三水、甲山、閭延、茂昌等處, 世祖朝不能守護, 故移設各堡于內地。 其間有大山長谷, 草木叢茂, 仰不見天。 昔李克均伐木時, 人多見死。 今自麻麻洞、朱坡梨洞、上土以下, 江邊可伐處及滿浦江邊可疑處, 今已盡斫, 故山童野赭矣。
<사료16> 『중종실록』(1523년)
점점 사군(四郡)에 벌여 살게 되고, 야로강 이남에도 점점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위로는 삼수(三水)부터 아래로는 의주(義州)까지가 장차 되가 사는 곳이 될 것입니다. 이뿐이 아니라, 우리 나라가 힘으로 금하지 못하여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허실을 갖추 알고 때를 타서 일어나면 아마도 압록강 이동에 또다시 출입하는 형세가 될 것인데.......
漸至列居四郡。 也虜以南亦漸來居, 上自三水下至義州, 將爲夷虜之居, 不但此也。 我國力不能禁, 隔江相處, 備知虛實。 乘時動發則臣恐鴨綠以東, 又復有出入之勢。


4. 1392-1488년의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渾江)
그렇다면 1392-1488년의 압록강은 어디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국조정토록에 여연은 상토에서 서북쪽으로 320리 떨어져있다고 하였다.
상토는 만포 근처에 자리한 지명이었다. 만포는 1450년에 만호가 폐지된 이후 행정구역의 변화는 없다. 1450년 이후부터는 현재의 압록강변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만포에서 여연평까지 320리 떨어져있다고 하였으므로 교차검증이 확인된다.
여연은 평안도 가장 서북단에 위치했던 행정구역으로, 당시 압록강 발원지와 가까웠다.
(만포에서 서북으로 320리, 약 154km 떨어져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여연의 동북쪽에 압록강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 때에 영토가 넓어져 당시 압록강 바깥쪽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17> 『국조정토록』(1614년)
여연은 옛날 읍의 이름이다. 상토의 서북쪽으로 320리정도 떨어져 있다. 세조1년에 읍을 폐지하였다.
閭延 古府名 在上土西北 三百二十里許 世祖元年廢
<사료18> 『중종실록』(1523년)
4일에 만포진(滿浦鎭)을 떠나 1식(息) 20여 리를 가서 사을외평(斜乙外坪)에서 자고 5일에 1식여 리를 가서 응평(鷹坪)에서 자고 6일에 3식쯤 가서 조명간(趙明干)에서 자고 7일에 2식 15리쯤 가서 하무로(下無路)에서 자고 8일에 2식 10여 리를 가서 여연평(閭延坪)에서 잤으므로, 치중(輜重)없이 경기(輕騎)로 종일 들어간 것이 여연까지 5일정(日程)이니.......
初四日滿浦鎭離發, 一息二十餘里斜乙外坪止宿, 初五日一息餘里鷹坪止宿, 初六日三息許趙明干止宿, 初七日二息十五餘里許下無路止宿, 初八日二息十餘里 閭延坪止宿, 無輜重輕騎, 而窮日入歸, 至閭延, 乃五日程也

상토가 강에서 100여리 떨어져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전후기록을 보면 이 강은 당시 압록강이다. 후대의 기록에 상토가 만포 등이 자리한 강변에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1392-1488년의 압록강은 상토에서 100여리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50km~60km 거리로 보인다.)
<사료19> 『성종실록』(1475년)
상토 구자(上土口子)는 강(江)과의 거리가 1백여 리(里)나 되어 적(賊)이 다니는 길이 매우 머니, 염려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平安道 上土口子距江百有餘里, 賊路甚遠, 似無足慮。
<사료20> 『성종실록』(1490년)
추파(楸波)·상토(上土)·만포(滿浦)·고산리(高山里)의 네 구자(口子)는 강(江)을 따라 나란히 배치하고 안으로 강계(江界) 한 부(府)를 설치하여 거진(巨鎭)을 삼았는데, 
楸波、上土、滿浦、高山里四口子, 沿江列置, 內設江界一府, 爲巨鎭,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에서 요동 변장을 세우면서 조선영토와 접경했다고 하였다. 요동변장에서 동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곳에 창성부 운두이연대가 있고, 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에 구령구자가 있었다. (100리는 48km이고, 60리는 29km이다.)
이 당시 요동변장 가운데 가장 조선영토로 다가와 있었던 지역은 애양보였다.
애양보는 현재의 애하 발원지 근처에 있었다. 현재의 지명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사료21> 『예종실록』(1469년) 
장장(長墻)으로부터 동쪽으로 창성부(昌城府)의 운두이 연대(雲豆伊煙臺)와의 거리가 1백여 리이고 남쪽으로 구령 구자(仇寧口子)까지의 거리가 60여 리입니다.
自長墻, 東距昌城府 雲豆伊烟臺百餘里, 南距仇寧口子六十餘里。
<사료22> 『성종실록』(1488년)
중국(中國)에서는 요동(遼東)으로부터 애양보(靉陽堡)까지 장성[長墻]을 쌓아서 적로(賊路)를 막았습니다. 애양보(靉陽堡)로부터 압록강(鴨綠江)까지는 비록 장성이 없다 하나
且中國自遼東至靉陽堡築長墻, 以防賊路, 自靉陽致鴨綠雖無長墻

상토는 현재 만포 부근이고, 애양보는 현재 애양 부근이다.
상토에서 서북으로 154km 떨어진 곳에 여연이 있었고, 이 여연의 동북쪽에 당시 압록강이 있었다. 그리고 상토에서 50km 이상 떨어진 곳에 당시 압록강이 있었다.
애양에서 동쪽으로 50km정도 떨어진 곳에 운두이연대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해보면 운두이연대는 당시 압록강 근처에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392년-1488년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이다.

5.결론
압록강의 위치변화는 1488년에서 1516년 사이에 일어났다. 지금까지 확인해본 바로는 명확하게 기록으로 나오는 시점이다. 더 정밀하게 살펴보면 아마 1500년대 이후로 보이는데,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
1392-1488년까지 압록강은 현재의 혼강(渾江)이었다. 1516년부터는 현재의 압록강으로 지명이 이동되었다.

<참고문헌>
<사료1>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폐사군(廢四郡)의 본말(本末)에 대한 변증설」(1800년대)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50_020_0060_2000_020_XML
<사료2> 『조선왕조실록』, 「중종」 49권, 18년 12월 11일(1523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8_12A_11A_00020_2005_025_XML
<사료3> 『조선왕조실록』, 「중종」 44권, 17년 5월 7일(1522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7_05A_07A_00050_2005_022_XML
<사료4> 『조선왕조실록』, 「세종」 154권, 지리지 평안도(1454년)
<사료5> 『조선왕조실록』, 「태조」 8권, 4년 12월 14일(1395년)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12014_002
<사료6> 『조선왕조실록』, 「세종」 73권, 18년 윤6월 19일(1436년)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06119_002
<사료7> 『조선왕조실록』, 「문종」 3권, 즉위년 8월 26일(1450년)
http://sillok.history.go.kr/id/WEA_10008026_004
<사료8> 『조선왕조실록』, 「단종」 9권 , 1년 11월 2일(1453년)
http://sillok.history.go.kr/id/WFA_10111002_001
<사료9> 『조선왕조실록』, 「세조」 2권, 1년 11월 10일(1455년)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111010_006
<사료10> 『조선왕조실록』, 「세조」 15권, 5년 1월 15일(1459년)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501015_003
<사료11> 『조선왕조실록』, 「성종」 168권, 15년 7월 5일(1484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507005_006
<사료12> 『조선왕조실록』, 「성종」 181권, 16년 7월 26일(1485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607026_003
<사료13> 『조선왕조실록』, 「성종」 215권, 19년 4월 5일(1488년)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4005_001
<사료14> 『조선왕조실록』, 「중종」 44권, 17년 3월 7일(1522년) 
http://sillok.history.go.kr/id/kka_11703007_002
<사료15> 『조선왕조실록』, 「중종」 25권, 11년 5월 30일(1516년)
http://sillok.history.go.kr/id/wka_11105030_004
<사료16> 『조선왕조실록』, 「중종」 49권, 18년 12월 11일(1523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JT_K0_A18_12A_11A_00020_2005_025_XML
<사료17> 『국조정토록』, 「정파저강」(1614년)
<사료18> 『조선왕조실록』, 「중종」 49권, 18년 12월 20일(1523년)
http://sillok.history.go.kr/id/WKA_11812020_001
<사료19> 『조선왕조실록』, 「성종」 57권, 6년 7월 11일(1475년)
http://sillok.history.go.kr/id/wia_10607011_003
<사료20> 『조선왕조실록』, 「성종」 246권, 21년 10월 24일(1490년)
http://sillok.history.go.kr/id/wia_12110024_003
<사료21> 『조선왕조실록』, 「예종」 7권,1년 8월 13일(1469년)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108013_004
<사료22> 『조선왕조실록』, 「성종」 217권, 19년 6월 11일(1488년) 
http://sillok.history.go.kr/id/WIA_11906011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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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21-09-01 04:48
   
훌륭하십니다

그런데
"압록강은 혼강이었다"
라고 하시면 안 되고
"압록강은 혼강~혼강과 연결된 현 압록강의 그 밑으로 물줄기(혼하~현 압록강)"
라고 하셔야 합니다.

이런 상황은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고려시대 압록강

현 동요하~요하

V
현 혼하~요하

V
현 애하~현 압록강 // 현 혼하~현 압록강

이렇게 관찰됩니다
감방친구 21-09-01 04:54
   
여말선초와 명의 국경은

혼하ㅡ> 본계 ㅡ> 봉황성(애하의 남쪽~현 압록강 북안)

인데

혼하~현 압록강은
그 과정의 흔적입니다

대체로 임진왜란을 거치며
명/(청)과 조선의 국경이 현 압록강으로 굳어집니다

그러나
비교적 후대까지 현 압록강 북안이 조선땅이라는 인식이 조선 측보다는 중국(청) 측에 남아 있었습니다
감방친구 21-09-01 05:17
   
보리스진님의 이 결과물은

연구과정에 1년 이상, 정리 과정에 한달 이상이 걸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직접 본격 연구를 해보셨으니

연구자들의 고충을 절갑하셨을 듯 ㅎㅎ

이미 이대로 연구자의 길에 접어드신 것

연구자의 길에 백스페이스키는 없습니다 ㅋㅋㅋㅋ
광개토경 21-09-01 09:59
   
이런 개똥글 참 한심스럽다.

조선은 동아시아에서도 가장 역사기록과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국가인데, 이마저도 왜곡을 하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네.

조선이나 고려 두 왕조 모두 압록강은 일관되게 현재의 압록강임.

무슨 압록강이 쩌리강도 아니고, 나름 경계선으로 일관된 강인데, 위치를 변화시키는지 원. 조선이라는 나라는 초기부터 역사지리기록이 잘 되어 있는데, 뜬금없이 후기에 북쪽에서 가장 큰 강인 압록강의 위치를 변경한다? 이게 상식적으로 봐도 대가리 터진 소린데 ㅋㅋㅋ. 조선을 너무 멍청한 국가라고 착각하는건가?

일단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만 봐도, 압록강은 현재의 압록강이란 전제하에 만들어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평안도에서 대천으로 소개된 압록강을 보면 현재의 압록강을 설명함을 분명히 알 수 있음. 하긴 머 대동강 청천강 부연설명하는거 보면 유사사학자들이 보면 식민사학이라고 하겠지 ㅋㅋㅋ 세종실록지리지도 식민사학이 조작한거라고 할듯 ㅋㅋㅋ

참고로 밑에 한나라 시대 패수에 대한 위치 비정에 대해서 세종실록지리지의 입장은 압록강설이고, 이게 식민사학이라고 하면 할 수 없죠.
광개토경 21-09-01 10:59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편을 첫장부터 정독하면 절대로 그 당시에 압록강이 현 압록강이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음에도 이런 소리를 하는건 애당초 자신이 생각하는 장소로 위치비정을 하려고 여기저기서 짜깁기하는 데서 발생함.

평안도의 대략 위치비정만 봐도 현 평안도이고, 압록강을 경계로 함을 알 수 있는데, 뜬금없이 현 압록강이 압록강이 아니다라고 하면 도대체 현 압록강은 그 당시에 무슨 강이었음?

압록강이 조그만 강이었으면 모르겠는데, 나름 매우 큰 강인데 말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소개된 평안도의 큰 강 중에 그럼 무엇이 현 압록강이 됩니까?

세종실록지리지 평안도편에서 큰 강으로 대동강, 청천강, 박천강, 압록강을 말하고 있는데, 압록강이 현 압록강이 아니라면 어느 강이 현 압록강을 말합니까?

압록강에 대한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편의 설명만 봐도 아 현재의 압록강이구나 하는게 그려지게 설명해놨는데 말입니다(백두산에서 발원해서 수백리를 흘러, 의주 서쪽을 통해 바다로 들어가는 강, 이게 뭔데요?)
     
보리스진 21-09-01 13:20
   
동일한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편에 압록강의 발원지는 어면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백두산이 아닌 것이지요. 어면수는 현재의 장진강으로 사료됩니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강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혜산천이라고 했습니다.
이 혜산천은 현재의 허천강과 장진강이 모두 합류한 뒤에야 이름이 압록강으로 불리었습니다.
이유를 추정해보면 현재의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강은 크기가 작기 때문입니다.
허천강과 장진강이 훨씬 더 길고, 크기도 더 큽니다.
강의 본류, 지류를 나눌 때, 허천강이나 장진강이 압록강 본류이고, 백두산 혜산강은 지류에 해당합니다.

압록강은 방어진지 역할을 했습니다. 강 크기가 커서 적이 건너오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면에서 압록강은 본래 강의 본류에 위치해야합니다. 하지만, 현재 백두산 압록강은 지류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압록강이 이동되면서 어쩔 수 없이 강의 지류에 이름을 옮겨붙여야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압록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한다는 기록은 아주 옛날부터 내려온 문구입니다. 관용구라고 해도 좋습니다. 압록강은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한다고 신당서 등에서 기록되어있습니다. 명나라 이후에는 압록강은 장백산에서 발원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고구려,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영토 이동이 있었습니다. 수백년전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의 지명과 대조하여 기록하다보니 생긴 모순입니다.

실제로 애양보에서 동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은 엄밀히 말하면 혼강이 아닙니다. 혼강의 지류인 북고하입니다. 애양보에서 남쪽으로 60리 떨어진 곳은 포석하입니다. 현재 압록강의 지류에 해당합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현재의 압록강 지류에 해당하는 강들에도 영토가 존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지명 이동이 생겼을 때, 아귀가 잘 안맞아 생긴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영토가 축소되었습니다. 이 때 압록강 지명의 위치도 바뀌게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명이 바뀔 때, 아귀가 잘 안맞다보니까,  압록강 본류로 딱 집어서 국경선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현재의 압록강과 압록강 지류를 모두 포함한 형태의 국경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경 21-09-01 14:08
   
참 억지로 짜 맞추려니 고생이겠네.

조선초의 압록강이 조선 후기 확실하게 지도로 표시하는 압록강이 아니라면서요?

그러나 님이 말하는 것들도 결국 지금의 압록강이라는 걸 말하면서 논하는거죠. 혼강이 아니라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영토가 축소요? 개소리죠. 오히려 늘어서 현 한반도의 영토를 차지한거죠.

님도 말하자나요? 현재 압록강 두만강 자체가 천혜의 경계선이라는 걸 말이죠.

그 이북은 먹어봤자 야인들 때문에 골치만 아픈데, 머할러 점령하겠습니까? 야인들에 대한 기미정책이 최선이었죠.

조선은 고려를 바로 이은 왕조이고, 영토 축소가 없는 왕조임.

님이 백날 헛소리 해봤자 누가 인정해 줘요? 아니 조선처럼 명백하게 자료들이 다 남아 있어도 우기는데 고대사 가면 머 상상이 안 가겠네요.
               
보리스진 21-09-01 14:35
   
압록강에 대한 주제여서 압록강으로 얘기했지만.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이 아니어도,
현재 압록강 바깥에 조선의 영토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지도에도 압록강 바깥에 조선의 영토 지명이 적혀있는 지도가 있습니다.
현재 제가 올린 글에도 이미 현재 압록강 바깥에 조선의 행정구역이 존재했음을 기록해두었습니다.
     
감방친구 21-09-01 14:10
   
우선 토론이든 대화든 되려면 논문의 틀을 갖추어 주장하는 이에게는

그 사람이 든 근거를 세부적으로 따져서 비판해야 합니다

위에서 보리스진님은
사실 근거를 구체적으로 들어서
자신이 파악하고 판단한 바를 논리적 구조로서
성립해 보였습니다

보리스진님은
이 연구글을 완성하는 데에
한달의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자신이 수년 간 꾸준히 관심 가져오면서
파악한 것을 주장했으나
먹히지 않자
더욱 심층 탐구하여 구색을 갖추어
논리 토대 위에 주장을 성립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광개토경님은
그 한달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보리스진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연구글을 올려서 공유할 적마다
교묘한 언행으로 저를 조롱하고 모욕주길 일삼던
아주 형편 없이 못된 사람으로
지금까지 저에게 한번도 사과한 적 없는 뻔뻔하고 한심한 작자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보리스진을
제가 편들어 말하는 까닭은

그 연구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사료를 면밀히 종합해서 연구해본 경험이
단 한번이라도 없는 사람은
그저 통설이나 상식에 기대서 말하기에

연구자가 말하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광개토경 21-09-01 14:12
   
뭐가 논리적인가요?

애당초 시작부터 틀렸는데? 사료를 면밀히 종합해서 연구하는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생각한 지점을 찍고, 거기에 맞게 짜깁기 해서 오류가 생기는 거죠.

이딴 개소리 하나 구분 못하면 수준 나오는 거죠.
               
감방친구 21-09-01 14:21
   
광개토경님은 지금 상대와 소통하는 법부터가 잘못 됐습니다

제 기억에 님과의 대화는 후한서 군국지 얘기가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님의 주장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제가 후한서 군국지 연구한 것을 이곳에 나누어서 게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반론도 안 하고 무시하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구리님과 님이 논쟁하는 것을 보고서
수구리님에게 님을 편들어서 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 하면 님이 수구리님과 논쟁할 적에 비교적
예의를 갖추었다 보였고 또한 그 주장의 내용이 수긍이 갔던 까닭입니다

생각이 다르더라도
이렇게 구조를 갖추어 주장하는 것에는

상스러운 말로 비난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터무니 없이 주장하는
이를테면 수구리님이나 백랑수님한테
상스러운 말을 쓴 적이 여러번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 우선 처음 여러 차례 정상적인 대화를 시도한 후에 그렇게 했습니다

동아게에 사람이 적습니다

제가 보기에 광개토경님은 어느 정도 우수한 학식을 배경으로 지닌 귀한 유저입니다

보다 건전한 소통으로
동아게에 이바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광개토경 21-09-01 14:20
   
간단히 말해서 그냥 고려나 조선의 역사지리서에서 언급하는 압록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이 맞다.

고대 패수 논쟁은 모르겠지만(김부식이는 대동강설이고,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압록강설이다. 둘다 유사사학이 보기에는 식민사학이다? ㅋㅋㅋ) 고려 조선의 압록강 위치비정은 논할 가치도 없다. 아니 역사 공부 좀 했으면 이딴 소리 잘 안하고 논쟁 거리도 안됨.

망상도 정도껏 합시다. 역사왜곡이 무슨 자랑도 아니고.
     
감방친구 21-09-01 14:21
   
그렇지가 않으니 연구하는 이들이 있는 겁니다
          
광개토경 21-09-01 14:30
   
네 열심히 하세요.

더이상 반론할 생각이 안 드네요.

화이팅하세요. 이만.
               
감방친구 21-09-01 14:42
   
님은 실상 아무런 제대로 된 반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위구르 21-09-02 08:46
   
더이상 반론할 생각이 안 드네요. <- 혼자 헛소리하고 불나방처럼 날뛰다가 비판받으니 튀는 꼴이 웃깁니다
수구리 21-09-01 14:44
   
글 잘보았습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한 분석을 하셨으며
사료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셨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하는 방법을 소개해 드리면
먼저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사료를 통해 내용을 검증하는 작업 순으로 진행합니다

1) 제가 하는 전체적인 내용 파악이라
 관련된 중요한 사료들을 찾고 확인하면서 나름대로 교차 검증을 해서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2) 사료를 통해 내용을 검증하는 작업이란
  전체적인 내용 파악에서 교차검증을 한 내용을 좀더 더 구체적으로 정밀한 확인작업을 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고 설명을 추가하는 것이

제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수구리 21-09-01 14:50
   
고려나 조선의 경계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다면..
저는 먼저 관련 내용을 먼저 찾아서 확인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관련 내용이라 큰 그림을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

[이덕일의 한국통사] '고려, 조선의 북방강역이 어디인가? #1'
--> https://www.youtube.com/watch?v=7QiX-P289oI

먼저 보고...
사료 확인을 통해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반박하던 지지하던
제 나름으로 문헌과 자료 확인을 통해 고찰하고 연구한 내용을 정리 했을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니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그냥 가볍게 읽으셔도 되고요
     
보리스진 21-09-01 14:55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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