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사기를 연계해서 보면
1) 중산국이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자조선이며,
2) 전국시대에 중국산이 망하자 중산국 후손이 동쪽으로 이동해서 기자조선을 유지했고
3) 한나라 초기인 위만조선 시기에 기자조선(예맥조선)이 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중산국中山國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고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에 나와있다
※주) 중산국이나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거수국(제후국)으로 본다
1) 사마천 사기 『조趙세가』에는
기원전 323년에 ‘오국상왕(五國相王)'이라는 동맹을 맺고 서로 칭왕했는데 다섯나라 중에 중산국이 있다(연燕, 한韓, 조趙, 위魏, 중산국中山國)
[출처] 43-12/2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3.조세가(趙世家) (12/23) <조 무령왕(趙 武靈王)>①
2)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한韓에는
연나라가 왕이라 칭하니 조선후도 왕이라 칭했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3) 삼국지 편찬자는 사기의 오국상왕 내용을 확인했을 것이고
연과 동시에 왕을 칭한 중산국을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라고 했다고 본다
(이 조선후가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자조선이다)
따라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1) 중산국이 기자조선이었으며,
2) 전국시대에 중국산이 망하자 중산국 후손이 동쪽으로 이동해서 기자조선을 유지했고
3) 한나라 초기, 위만조선 시기에 기자조선(예맥조선)이 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고조선 제후국인 중산국은 기자의 후손이 세운 나라로 산서성 장치시에 있었다
1) 사기의 중산국의 위치는 산서성 장치시다
☞ 춘추전국시대 중산국中山國의 위치는 산서성 중부 장치시長治市다 (daum.net) 글 참조
사기 화식열전에
한나라 초기에 중산국에 주왕의 후손이 남아 있다고 했으며, 기자는 주왕의 숙부이니
중산국은 기자의 후손이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 온(溫)과 지(軹)는 하내(河內)지역으로 낙양 바로 위의 황하 북쪽지역인 하남성이다
☞ 溫軹西賈上黨 北賈趙 中山, 中山地薄人眾 猶有沙丘紂淫地餘民
온(溫)과 지(軹) 지역 사람들은 서쪽으로 상당(上黨)과 장사하였고, 북쪽으로는 조(趙)와 중산(中山)일대에서 장사를 하였다. 중산은 땅은 척박한데 인구가 많은데다 아직도 사구(沙丘)에는 음탕했던 주왕(紂王)의 자손들이 남아 있다
[출처] 129-4/9[史記列傳(사기열전)] 권129 貨殖列傳(화식열전) (4/9)
2) 기자가 최초로 분봉받은 곳은 고대도시인 하북성 한단시 업성이며(추정)
조나라가 한단에 도읍하기 전인 기원전 400년 경에 업성鄴城에서 장치시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의 송세가에는
기자가 주나라 조례에 참석하기 위해 호경(서안)을 가는 길에
폐허가 된 은나라 도성인 조가(학벽시, 허비시)를 지나면서 울적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니
기자 조선의 위치는 학벽시 북쪽이고 고대도시인 업성鄴城으로 추정할 수 있다
☞ 그 후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올 때 은나라의 폐허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진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에 느끼는 바가 있어 상심하여 통곡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울고도 싶었으나 아녀자 같을까봐 맥수(麥秀)라는 시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출처] 38-04[史記(사기) 세가(世家)] 권38.宋微子世家(송미자세가) (04/10) <맥수가(麥秀歌)>|작성자 swings81
3) 기자조선인 중산국이 기원전 296년 조나라에 멸망하자
하북성 창주시의 예맥 땅(예맥조선)으로 기자조선이 이동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