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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22 11:23
[한국사] 고조선의 사회성격2
 글쓴이 : 울티마툴레
조회 : 1,330  

2. 고대사회의 모형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근래 인류학계는 초기의 인류사회가 무리(band). 부족(tribe). 추방(酋邦, chiefdom)의 세 단계를 거쳐 국가(state)에 도달하였다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무리사회는 구성원의 규모, 방랑생활의 정도, 식료의 종류와 수급상황에 따른 구성원의 계절적인 변화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30명부터 100명 사이의 작은 지역적 집단으로서 사냥과 채집의 경제에 의존하여 생활하였다. 그리고 동일지역내에서의 족외혼과 동일한 지역에서의 거주를 특징으로 하였다. 따라서 생활환경이 허락한다면 주어진 영역에서 함께 거주할 것이 요구되는 상호 관련이 있는 핵가족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혈연집단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인 정치조직, 사회계층, 경제적 분업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는 이 단계의 사회에 해당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확인된 것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인류인 元謨人(원모인)이 생존했던 170만 년 전으로부터 중석기시대였던 1만 년전 전후까지가 이 단계의 사회에 해당 된다.

부족사회는 무리사회의 구조가 자연적으로 성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무리사회에서와 같은 족외혼과 결혼에 의한 혈연집단의 동거가 한층 확산되었다. 그리고 부족사회는 무리사회의 구조로부터 진화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평등을 바탕으로 하여 수평적으로 집합된 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족사회에는 사회적인 계층이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 기술에 의하여 조직된 사회도 아니었다. 부족사회는 일반적으로 농업경제와 결합되어 있었으나 시장, 조직적인 교역, 전문적인 기술집단 등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따라서 부족사회는 고고학적으로 신석기시대의 개시와 더불어 확산되는데 각 부락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본 단위가 되므로 부락사회 단계라고도 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裵李崗文化(배이강문화). 磁山文化(자산문화). 仰韶文化(앙소문화).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北辛文化(북신문화). 大汶口文化(대문구문화)전기(종래의 청화강문화 강북류형의 청연강기)가 이 단계의 사회에 속한다. 그간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이 시기의 부락구조와 각 부락단위의 공동묘지에서는 강한 부족공동체의 특징이 확인된다. 그리고 각 묘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매우 영세하고 량과 질에서 서로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은 당시에 계층의 분화나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하여준다. 일부의 부락유적에서는 저장용 구덩이가 한지역에 밀집되어 있어 식료 등을 부락 구성원이 공유했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사유제가 아직 출현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질그릇 제조에 물레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든가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장신구 등의 대량 출토를 볼 수 없는 것은 전문 기술집단이 출현하지 않았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추방사회는 기본적으로 구성원 사이에 평등이 유지되었던 부족사회와는 달리 사회신분과 지위에 의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인물은 추장이었다. 추장을 중심으로 하여 원추형의 계층적 사회구조를 형성한 모든 사회구성원은 추장과의 관계에 따라 집단 안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계층이 결정되었다. 종교적으로도 중심인물이나 중심세력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권령과 결합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특권과 의무가 부여 되었는데 이것이 사회결합의 기본적인 기술이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생산에서 분업이 일어나고 이에따라 생삼품을 사회 전체에 재분배. 공급하는 행위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추방사회는 부족사회와는 달리 여러 집단의 큰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요약하면 추방사회는 경제.사회.종교 등에 있어서 공동생활의 중심이 출현하였다는 점이 부족사회와 다르다. 규모가 크거나 진보된 추방사회의 경우에는 그 중심은 추장 개인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한 수의 행적적인 보조원이나 전문 행정인을 포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회단계는 고고학적으로 신석기시대 후기에 나타나는데 부족 또는 부락이 합병 또는 연맹을 이루었으므로 부족연맹사회 또는 부락연맹사회 단계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협서용산문화. 하남용산문화.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대문구문화 후기(종래의 대문구문하)와 산동용산문화가 이 단계에 속한다. 이 시기의 묘 가운데서는 일반묘와는 달리 부장품이 풍부한 소수의 묘가 발견되어 경제적.사회적으로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었고 질그릇 제조에 물레의 사용이 확산된 것이라든가 장신구가 다양화되고 풍부해진 것은 전문기능인이 출현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다.

여러 유적에서 신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사용된 점뼈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전문직이 존재했음을 알게 하여 주는 것으로 이 종교직은 추장을 비롯한 지배집단을 위하여 봉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황하 중류유역의 이 시기 유적에서는 전쟁에 의하여 희생된 유골이 많이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다른 지역보다 황하 중류유역에서 치열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었음을 알게 하여 주었다. 이러한 전쟁은 기후변화에 따른 생산감퇴와 인구증가가 복합되어 가져온 식료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약팔전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상당히 영속적인 부족연맹이 형성되었을 것이며 강력한 지배자의 출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묘저구2기문화와 대문구문화 중기(종래의 청련강문화 강북류형의 유림기와 화총기)를 어느 단계의 사회에 포함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황하 중류유역에서 앙소문화로부터 협서용산문화.하남용산문화로의 과도기적인 문화양상을 띠고 있는 묘저구2기문화(용산문화 전기)의 유적에서는 사회계층의 분화나 빈부의 차이를 확인 할 만한 자료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질그릇 제조에 물레를 사용하였고 앙소문화가 모계사회였던 것과는 달리 이 시기는 부권사회였다는 점에서 사회성격이 변화되는 징후를 볼 수가 있다. 따라서 묘저구2기문화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족사회로부터 추방사회로의 과도기로 보아야겠지만, 추방사회 초기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황하 하류유역의 대문구문화 중기 유적에서는 빈부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묘들이 발견 되었으므로 부족사회로부터 추방사회로의 과도기 또는 추방사회 초기에 포함시킬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앙소문화,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대문구문화 전기까지를 부족사회, 그 이후를 추방사회로 보아서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추방사회 다음 단계인 국가단계는 사회계층의 분화, 직업의 전문화 등 추방사회가 지니고 있던 사회특성과 요소를 대부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양과 질에서 팽창되었고 사회규모가 확대되었으며 조직이 한층 복잡하여 졌다. 국가단계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법적인 힘에 의한 특수구조에 의하여 통합된 사회라는 점이다. 국가는 법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무력의 사용행위와 그 상황이 정당화되는 반면에 개인과 개인 또는 그 사회의 구성집단에 대해서는 그들 사이의 분쟁에 의한 소란으로 그들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금지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국가단계 사회의 정치적 조직은 뚜렷하게 규정된 사회계층 이었는데 분배기구로서 시장이 있었고 사회신분의 차이가 한층 철저한 형태였다. 추방사회는 그 지배세력이 혈연적인 조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국가단계에서는 원칙적으로 법적인 권력으로 특정지어졌다.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국가는 전문적인 지배계층이 있으며 아주 현저하게 집중화된 정부가 있는 매우 강한 사회형태로서 혈연에 의하여 결속되는 것을 특징으로하는 단순한 사회(이전의 사회단계)와는 크게 다르다. 국가는 혈연이나 친족관계보다는 직업의 전문화에 기초한 거주형태를 가지며 그것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크게 계층화 되고 매우 다양화 되었다. 국가는 무력의 독점을 유지하려고 기도하는데 진정한 법에 의하여지배되는 사회로 특징지어진다. 대부분의 범죄는 국가에 대한 죄악으로 인정되었으며 각 범죄에 대한 처벌은 단순한 사회에서와 같이 피해를 입은 집단이나 그의 혈연이 책임지는것이 아니라 국가가 법제화된 절차에 따라 처리하였다. 개개의 인민은 반드시 폭력을 포기해야 하지만 국가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있다. 또한 국가는 병사의 징집, 세금의 징수, 공납의 강요를 할 수가 있다.

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단계가 중국역사에서는 어느 시기에 출현하였는가?

이 점을 검증하기 위하여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갑골문의 내용을 살펴보는것이 순서일 것이다. 갑골문에 의하면 商王(상왕)은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을 함께 장악하고 스스로를 ‘一人(일인)’ 또는 ‘余一人(여일인)’이라고 칭하며 유아독존의 위치에서 신권전제통치를 행하였다.. 상왕국 말기로 오면서 그 성격이 변화되기는 하였지만 신권통치의 기초가 되었던것은 占卜(점복)행사와 제사의식이었다. 상왕은 점복을 통하여 신의 뜻을 파악하여 그것을 집행하고 상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연맹부족의 수호신에 대한 제사를 통괄함으로써 종교적 권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상왕 밑에는 대신.무관.문관 등으로 분류되는 20개가 넘는 관료가 있어서 상왕의 행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상시대에 이미 왕권이 확립되어 있었고 전문적인 지배계층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조직화된 중앙행정기구가 존재하여 집중회된 정부를 형성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상왕국의 사회 구성원은 크게 나누어 지베귀족. 평민. 노예로 볼 수 있다. 지배귀족은 상왕을 우두머리로 하여 그 밑의 각급 관료와 多婦(다부). 多子(다자)등의 왕실귀족 그리고 ‘外服(외복)’에서 작위를 받은 侯(후).伯(백) 등이 있었는데 이들만이 방대한 관료기구와 강대한 군대및 종교적 권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위치에서 그들은 호사스러운 낭비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인데 발굴 결과에 의하면 재화가 소수의 귀족에게 집중되었던 현상을 보여 주고있다. 평민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지배귀족의 통치대상이었고 경제적으로도 지배귀족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빈한하였다. 노예는 주인이 사망하면 그를 위하여 순장되기도 하였고

동물과 함께 제물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생사권마저도 찾지 못한 채 처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사회가 심하게 계층화되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상시대에는 정치적 전문 지배계층과 종교적 전문계층이 존재했음을 앞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수공업 방면에서도 매우 전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시대의 청동기는 ‘司母戊鼎(사모무정)’과 같이 3백 명 이상의 집단노동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뿐만 아니라 종류가 다양하고 제품이 정교하고 우아하여 예술적 가치로도 세계 역사상 가장 우수하다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상시대는 製陶業(제도업)도 크게 발달하여 대표적인 것으로 硬陶(경도)와 瓷器(자기)의 출현은 제도기술의 진보를 보여주는 것이며 白陶(백도)는 일종의 진귀품으로 그릇모양의 문양에서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를 보여준다.

明器(명기)는 생산자가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이 방면의 전문 직업인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骨器(골기). 刻器(각기). 牙器(아기). 貝器(패기). 玉器(옥기). 漆器(칠기). 紡織品(방직품) 등도 매우 우수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주와 안양 등지에서는 청동기. 도기. 골기. 각기 등의 제조장터와 사회신분과 직업에 따라 거주지역이 다른 도시구성이 확인 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당시의 사회가 매우 분업화되고 다양화되었으며 그것에 기초한 거주형태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대형의 건물터, 성터, 능묘와 악기 등도 그 분야의 전문 직업인이 있었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상왕국에는 王族(왕족). 多子族(다자족). 五族(오족). 三族(삼족) 등의 중앙 상비군이 있었고 군대의 조직은 좌. 중. 우의 3師(사)로 편성되어 있었다.

갑골문에서는 刑具(형구)와 감옥에 관한 상형문자도 보이고, 상시대에 이미 墨刑(묵형). 비형. 宮刑(궁형). 刖刑(월형). 殺刑(살형) 등 후세의 소위 5刑(형)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으며 1회에 수십 명 또는 1백여 명이 刖刑(월형)에 처해진 기록도 보인다. 刖刑(월형)을 받은 유골이 출토된 바 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에 이미 정부가 무력을 독점하고 있었고 상당히 정비된 법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법제회된 절차에 따라 형벌이 가해졌을 것임을 알게 하여 준다.

갑골문에 의하면 상왕국은 주변의 대립된 세력인 方國(방국)들과 잦은 전쟁을 하였는데 이러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서 한 부족 또는 여러 부족으로부터 3천, 5천 또는 1만 명을 징집하였다. 武丁(무정)시대에는 土方(토방). * 方( * 방)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7월부터 9월까지 38일간에 모두 2만 3천여명을 징집한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상왕국을 구성하고 있던 여러 연맹부족은 상왕실에 대한 병역의무와 더불어 貢納(공납)의 의무도 지고 있었는데 공납에 관한 기록은 갑골문에서 자주 확인된다. 공납은 상왕국을 유지하는 경제적 기초의 한 부분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상왕실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였고 병사를 징집하고 공납을 받아들였음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 외에도 상왕국의 사회구조에 있어서 계층화와 다양화를 보여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된 자료만으로도 두 가지의 분명한 결론에 도달 하게된다. 그것은 첫째로 상왕국은 근래에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사회진화 개념상에 있어서의 국가단계에 이미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구미의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고대 국가의 구조에 관한 이론이 동아시아지역에서도 적용될 수있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그것은 정치권력의 기초와 거주형태에 관한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지적하기를 국가단계에서는 혈연이나 친족에 의한 결속이 와해되어 정치적인 권력은 법에 기반을 두게 되고 거주형태는 직업의 전문화에 기초를 둔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음에 자세히 확인되겠지만, 중국에서는 상시대는 물론이고 西周(서주)시대까지 정치권력을 포함한 사회구조가 혈연적인 조직에 기초하고 있었고 전문직업이나 거주형태도 혈연적집단을 토대로 하여 형성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점은 보편적인 고대국가 이론에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서 혈연적인 공동체의식이 기초가 된 정치권력과 사회구조는 아시아 고대국가의 특징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상왕국에 관한 주된 자료는 갑골문이며 그것은 상왕국 후기의 기록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22대 무정 이후의 기록이다. 따라서 앞에서 학인된 국가단계의 사회는 상왕국 후기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상왕국 후기에는 이미 완벽한 국가단계에 도달하여 있었으므로 국가단계로의 진입은 그보다 올려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근래에 이리두문화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적의 분포와 년대가 중국 최초의 왕조였다고 전하는 夏(하)의 전설지 및 연대와 일치하여 그것이 하문화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따라 고대국가의 기원을 하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제출되어 있다. 이리두문화의 유적에서는 궁궐로 보이는 대형의 건물터, 성터 등이 확인되어 강한 정치권력 집단이 출현하였을 것임을 알게 하여 주었고 묘제에서는 사회계층 분화와 빈부의차이를 보여 주었으며 청동기의 출현과 다양한 玉肌(옥기) 등은 전문 직업인이 존재하였음을 알게 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리두문화에서는 아직 당시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그 사회의 구조, 정치권력의 성격, 법제의 유무 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고 그것을 하문화로 단정한다는 것도 무리이다. 그러므로 중국고대국가의 기원을 하에서 찾는 노력은 좀더 보류되어야 할 것이며 이리두문화를 추방사회의 말기 단계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상시대의 유적을 보면 중기와 후기의 도읍지는 발굴되었는데 전조의 도읍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상왕국 전기의 사회성격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상왕국 중기의 도읍지였던 오는 지금의 정주로 추정되고 후기의 도읍지였던 殷(은)은 지금의 안양인데 정주에서는 상시대의 도시구조가 확인되었고 안양기는 앞에서 언급된 상왕국 후기에 해당된다. 정주에서 발견된 상시대의 토성은 전체의 길이가 약 7km에 이르고 북쪽의 성벽이 약간 구부러지긴 하였지만 대략 正方形(정방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1천 3백만여 일의 노동일을 요하는 거대한 것이었다. 이 성 안의 동북부에는 궁궐터가 있었고 성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에는 청동기. 골각기. 도기 등의 제조장터가 있었다. 그리고 사회계층과 전문직업에 따라 거주지역이 구분된 도시구조가 확인되었다.

정주기, 즉 상시대 중기의 당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도시구조가 매우 강한 정치권력의 출현, 사회계층의 형성과 전문직업의 분화, 그것에 기초한 거주형태를 보여 주고 있으므로 이 시기에 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아 크게 잘못이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에서의 고대국가 출현은 상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어떠했으며 그것이 후에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볼 시점에 와있다. 상왕국의 국가구조와 그후의 중국에서의 국가구조 변화는 고조선의 사회성격을 검증하는데 좋은 모형이 될 것이다.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邑(읍)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갑골문에 邑字(읍자)는 일정한 영역을 뜻하는 사각형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시대의 읍이 경계가 있는 영역과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을 요소로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거주지역을 뜻하는 것이다. 이 읍의 주위에는 경작지와 수렵지가 있었는데 그것을 포괄한 일정한 지역을 鄙(비)라고 불렀다.

갑골문에서는 ‘作邑(작읍)’에 관한 기록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읍의 건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읍은 자연적으로 성장한 거주지역이라기보다는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鄙(비)에는 하나의 읍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20개 또는 30개의 읍이 있는 지역도 있었고 지금까지 갑골문에서 확인된 읍의 수는 1천여개에 달하는데 이것들이 모두 인위적으로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 邊境(변경)지대에 새로운 경작지를 개간하기 위하여 읍을 건설하는 경우와 같이 필요에 따라 읍이 건설되기도 하였겠지만 당시의 읍 가운데는 자연적으로 성장한 소규모의 취락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읍은 그 규모의 대소에 차이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부락 또는 취락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읍은 부족사회 단계에서의 부락이 성장 또는 계승된 것과 그후에 새로 건설된 것 등 두 종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읍 가운데는 大邑(대읍)이라고 불리어진 것이 있었다. 갑골문의 기록 가운데 한 예를 보면 唐(당)이라는 곳에 大邑(대읍)을 건설하였고, 이 읍은 唐邑(당읍)이라고 불리어졌다. 그리고 당으로부터 상왕실에 공물이 납부된 바 있고 당에서 제례의식이 거행된 바도 있다. 이로 보아 일정한 지역의 읍 가운데서 그 규모가 크고 종묘와 祭地(제지)가 있어서 그 지역의 정치와 신앙의 중심지였던 읍을 大邑(대읍)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읍에 그 지역을 다스리는 諸侯(제후)가 거주하였던 것이다. 읍은 상왕국 국가구조의 기본단위였는데 소읍은 종교적.정치적으로 대읍에 종속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대읍 가운데는 추방사회에서 부락연맹이 이루어 지면서 그 중심을 이루었던 부락이 성장 또는 계승된 것도 있었을 것이고 상왕국에서 필요에 의하여 새로 건설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상왕국에 있어서 지방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지가 대읍이었다고 한다면 상왕국 전체의 종교적.정치적 중심지는 어디였겠는가?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바로 상왕국의 도읍을 연상하겠지만 당시에는 종교적 중심지와 정치적 중심지가 분리되어 있었다. 이 두 곳을 포함한 지역이 상왕의 직할지인 ‘王畿(왕기)’여/t을 것인데 ‘도읍지역’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갑골문에는 商(상)이라는 지명이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항상 취락을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상은 읍명임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商邑(상읍)으로도 불리어 졌다. 갑골문 연구가 초기단계에 있었던 시기에는 상을 당시 상왕국의 도읍이었던 지금의 안양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후 결론적으로 상은 당시의 도읍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금의 商邱(상구)지역이었음이 확인되었다. 商族(상족)은 당시의 도읍지가 아닌 다른 곳에 고정되어 있는 상읍에 대하여 그곳이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中商(중상)이라고도 부르고 그것을 중심으로하여 다른 지역을 방위에 따라서 동토.서토.남토.북토라고 불렀다. 상족이 특별한 읍으로 생각하였던 상읍은 그들 조상의 도읍지 또는 거주지였던 곳으로 상왕실에서 가장 중요시하던 종묘. 위패. 왕위의 표징품 등을 그곳에 두고 특별한 제사의식과 많은 군대의식이 그곳에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商(상)이 고정된 지명으로서 전기간을 통하여 이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이동이 가능한 상왕국의 도읍지는 분명히 각각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 현재로는 후대의 문헌에 의거하여 그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문헌에 의하면 상왕국의 도읍은 毫(호). 오. 相(상). 邢(형). 암. 殷(은) 등이다.

이 가운데 毫(호)만이 갑골문에서 학인될 뿐이고 殷(은)이나 다른 도읍명은 아직 학인되지 않았다. 단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왕국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지금의 안양을 ‘玆邑(자읍)’ 즉 ‘이 읍’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안양에서는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여 대규모의 상시대 유적과 유물이 발견.출토되어 상왕국 후기의 도읍지였던 殷(은)으로 확인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갑골문에서 보이는 대읍을 도읍에 대한 호칭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상왕국의 도읍도 대읍가운데 하나였기는 하겠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읍이 도읍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하여 볼때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거주지. 농경지. 수렵지로 구성된 읍이 기본단위가 되어 소읍.대읍.도읍.상읍이라고 하는 읍의 누층적인 관계에 기초를 두고 원추형을 이루고 있었다. 읍이라는 취락의 거주인들은 혈연적으로 결합된 집단인 씨족이나 부족이었으므로 읍의 층서관계는 바로 씨족이나 부족 사이의 층서관계를 형성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갑골문 연구가 초기단계에 있을때 邑字(읍자)를 성벽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이에 근거하여 읍은 하나의 작은 단위국가였을 것으로 인식된 바가 있다. 그리고 상왕국은 이러한 작은 단위국가인 읍이 연맹을 이루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상왕국은 읍의 연맨체이기 때문에 읍제국가라고 불러야 한다는 가설이 제출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읍이 단위국가가 안었음은 앞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으므로 이 점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왕국을 그대로 읍제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단지 그것이 갖는 의미는 소국인 읍의 연맹체가 아니라 취락인 읍이 기초가 된 읍의 누층적 층서관계로 형성된 국가라는 것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상왕국을 멸망시키고 건립된 西周(서주)왕국은 혈연적인 宗法制(종법제)에 기초를 둔 分封(분봉)제도를 실시하였다. 주왕은 천하의 宗主(종주)로서 天子(천자)가 되어 서주왕국을 통치하였다. 천자의 자리는 嫡長子(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諸侯(제후)로 封(봉)하여졌다. 제후는 천자로부터 일정한 封地(봉지)를 받아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제후의 자리는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卿(경). 大夫(대부)로 봉하여졌다. 경. 대부는 제후로부터 일정한 봉지를 받아 그 곳을 통치하였다. 경. 대부의 자리도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士(사)가 되었다. 士(사)에게는 食地(식지)가 주어졌다. 士(사)도 적장자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른 아들들은 평민이 되었다. 주왕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異族(이족)출신이 제후가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이러한 제도가 擬制化(의제화)되었다.

그런데 당시에 천자가 직접 지배하는 직할지를 ‘王畿(왕기)’라고 하였는데 그 안에는 宗周(鎬京)[종주(호경)]와 成周(洛邑)[성주(낙읍)]가 있었다.

宗周(종주)는 서주왕국의 도읍으로서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宗廟(종묘)가 있어서 종교적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成周(성주)는 周族(주족)이 상왕국을 멸망시킨후 동방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건설된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로서 서주왕국의 제2도읍이었다. 그리고 제후가 거주하는 읍을 國(국)이라고 하였고, 卿(경). 大夫(대부)가 거주하는 읍을 都(도)라고 하였으며 그 외의 일반적인 소읍은 鄙(비)라고 불리어졌다. 따라서 서주왕국의 국가구조는 鄙(비).都(도).國(국).成周(성주).宗周(종주)의 순서로 상시대보다 읍이 중층화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주시대의 국가구조는 각 층 위의 읍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고 중층화되었을뿐 상시대의 그것을 계승하여 한층 구체화된 것이었다.

상.서주시대의 영토 가운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것은 읍의 집적이었다. 당시에는 읍과 읍 사이에는 경작지가 포함된 읍의 면적보다 훨씬 넓은 空地(공지)가 있었는데 사람도 거주하지 않고 개간이나 경작도 되지 않은 이러한 공지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상.서주왕국의 국가구조는 기본적으로 같은 기초위에 있었던 것으로 읍의 集積(집적)과 層序關係(층서관계)로 형성된 邑制國家(읍제국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구조와 질서는 春秋時代(춘추시대)를 거쳐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와해되었다. 서주왕국이 몰락하고 춘추시대가 개시되면서 천자는 권위는 추락되었고, 패권을 장악한 제후가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으며 춘추 중기에 이르면 卿(경).大夫(대부)의 세력이 성장하여 제후국내에서의 실권을 장악하고 종국에는 제후를 능가하는 세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서주의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감에 따라 경제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상.서주시대의 농민은 혈연적인 집단을 이루어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그 사회적 신분은 세습되었다. 즉 농민과 그들이 거주하는 읍 그리고 그들의 신분은 일체화되어 자유로이 그들의 소속집단이나 거주지를 이틸할 수가 없었다. rfj나 서주 후기부터 사회가 혼란하여짐에 따라 이러한 농촌구조가 와해되기 시작하였고 춘추시대에 이르면 농가는 1家(가)1戶(호)가 단위가 되어 토지 소유주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農具(농구)와 농경기술의 발달은 종래의 사회구조를 붕괴시키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춘추시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철제농구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되었다. 철제농구의 보급은 종래의 空地(공지)를 개간할 수 있게 하였고 水利(수리).관개시설을 용이하게 하였으며 여기에다 농경기술면에서 牛耕(우경)의 확산은 생산을 크게 증대시켰다. 이렇게 되어 토지의 면적은 바로 경제력의 기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춘추 중기 이후에는 토지 쟁탈전이 심각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국시대에 이르면 列國(열국)간의 土地兼倂戰爭(토지겸병전쟁)으로 화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춘추시대에 읍제국가 구조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전국시대에 이르면 영역이라는 개념이 중요시되어 領域(영역)국가가 출현하였다. 이러한 국가구조와 의식의 변화는 종국적으로 秦國(진국)에 의한 중국의 통일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이해와 비교의 편의를 위하여 년대를 보충하면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170만년 전에 중국대륙에 출현한 인류는 1만년 전후까지 무리사회 단계에 있다가, 後氷期(후빙기)를 맞이하여 농경생활에 들어가면서 부족사회의 확산을 맞게 되었다. 고고학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황하 중류 유역에서 가장 오래된 부족사회는 배리강문화.자산문화로서 기원전 6천년 이전이 되고, 황하 하류유역에서는 북신문화로서 그 개시연대는 기원전 5300년경이 된다.

그후 황하 중류유역에서는 앙소문화를 거쳐 묘저구2기문화에서 사회성격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협서용산문화.하남용산문화에서는 완전한 추방사회 단계에 도달하였는데 묘저구2기문화의 연대는 기원전 2900년 경이며, 협서용산문화와 하남용산문화는 기원전 2600년경이다.

황하 하류유역 즉 산동성 지역에서는 대문구문화 전기를 거쳐 중기에서 사회성격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여 후기에는 추방사회 단계에 도달하였는데 대문구문화 전기의 년대는 기원전 4500년경이고, 중기는 기원전 4천년경이며, 후기의 개시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2400년보다는 앞설 것이다. 기원전 2천년경에 이르러 황하 중류유역에는 추방사회 말기로 볼 수 있는 상당히 강한 정치권력이 출현한 이리두문화가 있었고 그 뒤를 이어 기원전 17.8세기경에 상시대가 개시되는데 그 중기인 기우너전 15.6세기경에는 국가단계에 도달하였다.

상왕국의 국가구조는 읍이 누층적 층서를 형성한 읍제국가였는데 그것은 서주시대까지 계속되었다. 기원전 770년에 시작되는 춘추시대에 읍제국가 구조는 와해되었고 기원전 403년에 시작되는 전국시대에 이르면 영역국가 단계에 도달하였으며 이것이 전개되어 기원전 221년에는 秦國(진국)에 의하여 통일된 고대제국이 출현하였다.


3. 고조선의 사회단계

앞에서 필자는 중국에서의 고대사회 전개과정을 다소 장황하게 언급하였다. 이에 대하여 독자 가운데는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찰하면서 중국의 고대사회에 관하여 이렇게 장황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중국의 고대사회 전개과정은 한국의 고대사회연구에 좋은 모형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더욱이 고조선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문화적인 면에서 서로 크게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은 자명하다. 고조선이 존재했던 기간은, 후대의 기록에 의한 그 건립연대에 의심을 품는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읍제국가로부터 영역국가의 단계를 거쳐 통일제국이 출현한 이후까지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조선의 말기, 즉 중국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오늘날과 같은 통일된 중국이나 중국민족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점은 한국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고조선은 한반도지역은 물론이고 지리적으로 직접 접해 있던 중국지역과도 여러 면에서 밀접한 간계를 맺고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리적으로 접해 있는 지역을 단위로 하여 깊은 관계를 갖는것은 시대가 올라 갈수록 현저하였다. 중국의 선사문화를 예로 보면 북부지역의 문화는 남부지역보다는 몽고.시베리아와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남부 해안지역문화는 북부보다는 해안선을 따라 동남아지역과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치권이 형성되면서 감퇴되기는 하였지만 통일된 한국이나 중국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기 이전의 사회를 고찰하면서 오늘날의 국가단위를 영역으로 설정하고 자료의 선택을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조선을 연구하는 傍系(방계)의 자료로서 한반도의 것이 중국지역의 것보다 반드시 더 가치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사회를 고찰하기 위하여 먼저 분명히 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고조선의 위치와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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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21-08-22 16:33
   
국가가 형성 되는 것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심플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잉여 생산물이 생산 되면 국가가 형성 되는 거에요.

잉여 생산물 특히 농산물 같은 잉여 생산물이 생산 될려면 품종개량이 있어야 겠죠. 단순히 자연산이 아닌 재배에 적합한 생산물이 있어야 하죠.

둘째로 제방등의 치수가 이루어져야 하죠.

세째로 이 잉여 생산물을 저장할 창고 있어야 하는 것 이고요.

네째로 이 창고를 보호할 군사적인 시설물이 존재 해야 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이 둘을 지도할 리더가 존재해야 국가 형성 되는 거에요.

이 것만 갇춘다면 국가가 형성이 됩니다. 사직이라는 말도 이 범주에 벗어나지 못하고 우왕이 하나라를 건국 했다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하며 슈메르 지역에서 제방을 만들고 국가를 빨리 건설 하는 것도 이런 이유임.

국가의 시작은 자본주의 시작과 같고 사회주의는 원시적인 사회죠.

일단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 할려면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로리 볍씨가 나온 지역에 국가가 형성 되었을 까요? 안 되었을 까요?
윈도우폰 21-08-22 18:29
   
누가 다스리냐가 핵심 아닌가??? 왕이 다스리면 Kingdom...여왕이 다스리면 Queendom^^? 하여간...공이 다스리면 공국(dukedom), 후가 다스리면 후국(영어로는 그냥 공국으로 묶어버리는 것 같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백작이 다스리면 백국(earldom)...그리고 제국체계가 아니고 작위 없이 다스리면 분류 상으로 chiefdom

아 여성이 우위에 있는 femdom도 있네...물론 여기의 dom은 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구성원이 씨족이냐 민족이냐...이런 것은 오히려 부수적인 듯...동양에서나 혈연(ethnocentric)적인 관점에서 국가를 보는거지...다른 쪽은 그냥 통치자 중심

정치적으로 나라를 보면 제국도 있겠지만...사실 제국은 보편적인 개념의 나라라고 하기는 좀 그런 편임 ... 그냥 연맹이나 연합(연합왕국), 합중국과 같은 형태... 정치적으로 국가를 묶는 체계 중 하나 정도?

그런 점에서 고조선이 과연 제국까지 갔느냐...아니면 좀 강력한 kingdom이냐 아니면 명목 상 제국의 후국 수준이었느냐 부족장 수준의 chiefdom이었느냐...마땅한 기록이 없으니 그것이 문제~~~

증거가 없으니 그냥 기분 좋게 제국으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Marauder 21-08-24 14:19
   
공국의 경우 princedom 을 사용하더군요.
울티마툴레 21-08-22 19:50
   
어이없는 무식한 소릴 든다니
     
윈도우폰 21-08-23 00:43
   
맷돌에 어이가 없는 상황은 황당한 상황을 말하는 건데...황당한 상황에서 무식을 연상을 하는건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듯^^ 어쨌든 내가 보기에는 무식한 소리를 들은게 아니라 무식하게 댓글을 단 상황으로 보임~~~
감방친구 21-08-23 01:55
   
귀한 자료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조선을 '국가'로서 접근하면 필패라고 보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1) 국가로서 보고 접근하여 그 물질문화에서 나타나는 '수준'과 '정도'를 근거하여, 이른 바 발전단계론에 입각하여 이미 주류사학계에서는 BC 6세기 현 심양일대를 중심한 정가와자문화를 고조선의 실체로 보고 통설을 수립해 유통시킨 바 있습니다

2) 이 '정가와자 고조선'론은 다시 현 요서지역의 BC 9세기 십이대영자문화를 동호로 보던 기존설이 파괴 되고 이를 고조선, 또는 발(맥)로 보는 신진설이 등장하면서 보다 몇 세기 그 건국연대를 높여보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3) 그런데 이 BC 9세기 고조선론도 BC 11-10 세기 현 대릉하 유역 위영자문화에 대한 고려가 간과돼 있습니다 이 위영자문화는 현 적봉시 권역의 하가점하층문화를 일부 계승한 것으로 보고되는데 위영자문화와 십이대영자-정가와자문화의 계승성을 밝히거나 밝혀서 부각시키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4) 이렇게 되면 BC 20세기 전후의 하가점하층문화에 대한 역사연고권 규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5)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더라도 만주(연해주 포함)-한반도를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려됩니다

6) 삼국유사의 BC 24세기 고조선 건국 기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의 3조선(3한) 론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반드시 그 시기에 고조선이 건국됐어야 하고 반드시 그 시기부터 삼조선이 광대한 강역을 가진 대제국으로 성립, 발전되었어야 하는, 말하자면 이미 결론을 지어놓고 역사연구를 하는 우를 초래하고, 실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오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21-08-23 01:58
   
7) 저는 오히려 중국의 발전단계, 그 수준과 정도가 아니라 상고대의 귀방, 융, 적, 호 등, 그리고 고대의 흉노, 오환, 돌궐, 선비, 거란, 그리고 중세의 여진족, 몽골 등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방친구 21-08-23 02:04
   
8) 저들은 분명히 일정한 권역을 유지하며 활동했고 중국을 수천 년 침략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 수천 년 동안 부족연맹체를 유지했습니다

9) 대흥안령산맥으로부터 그 동쪽의 내몽골과 만주, 한반도 일대의 신석기-청동기-초기 철기 시대의 문화동질성 연구를 결과로서 수립하고, 이어서 언어, 인족적 동질성 연구를 결과로서 수립하여 굳혀 놓고 그 다음에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부르고 일컬을 것이냐 하는 식의 접근이 최적 유효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울티마툴레 21-08-23 09:39
   
감방친구님//고조선이 서기전24세기에 성립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불신할 것이나 신뢰할 것이냐는 일연스님의 다른 저작들의 신뢰성과 삼국유사 전체적인 신뢰성으로 판단할 문제라고 봅니다. 윤교수는 저서에서 이러한 검토를 마치기 썻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더 엄격한 사료비판을 했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고고학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합니다. 그부분은 뒤이어 게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고조선이 처음부터 대제국이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든 전성기가 있습니다. 상나라 전성기를 보면 지금의 화북지방 거의 절반이상을 장악하고 화북지방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고조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만주는 해안선을 따라 한반도 서부전체와 남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전성기에 요서와 요동과 한반도북부는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고 요동북부와 한반도.남부 그리고 하북성일대는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였다고 봐도 무리는 없으며 고고학적 증거도 있습니다. 물론 초기엔 심양일대부터 청천강이북까지 정도였겠지요.
     
감방친구 21-08-23 13:08
   
제 말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 하신 듯

제가 쓴 댓글은 윤내현 선생을 비판한 게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고조선에 대한 접근방법론을 적은 것입니다

위에서 윈도우폰님이 야기한 삐딱한 분위기를 중화, 또는 절충하기 위해 쓴 겁니다

그리고 윤내현 선생의 연구를 마치 성전처럼 받드는 듯한 태도는 누가 봐도 좋지 못한 모습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더구나 저는 단재 선생이 입안한 삼조선설에 근접해 가고자 애쓰는 사람이고 고조선이 그 즈음에 성립했다고 추정하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BC24세기에 성립했고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하는 식의 접근은 문제가 있다. 이러저러한 논거 위에 "그렇다면 이를 무엇이라 일컬을 것인가"하는 접근이 유효하다는 게 핵심이고

이는 윤내현 선생의 방법론에 맞서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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