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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8-21 22:23
[한국사] 재업:현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유적유물에 대한 비판적 검토
 글쓴이 : 울티마툴레
조회 : 1,200  

출처..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제2장



첫째로, 封泥(봉니)가 있다. 평양에서 200점이 넘는 封泥(봉니)가 수집됬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은 封泥(봉니)가 한곳에서 수집된 예가 없어 처음부터 그것들 모두가 진품일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의문점은 이미 정인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지적된바 있는데, 필자는 그 전부를 위조로 보지는 않지만 상당수 위조품이 포함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樂浪大尹章(낙랑대윤장)”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大尹(대윤)은 王莽(왕망)시대의 관직명이다. 西漢(서한)시대에는 郡(군)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太守(태수)라고 하였는데 왕망시대에는 대윤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대윤이라는 관직명에 따르면 이 봉니는 왕망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왕망시대에는 서한시대에 사용하던 모든 군명을 개명했는데 낙랑군은 樂鮮郡(낙선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봉니가 왕망시대에 만들어 졌다면 “樂鮮大尹章(낙선대윤장)”이 되어야 한다. 군명과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진품일수가 없는것이다

 

어떻든 이 봉니들은 土城(토성)부근에서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樂浪太守章(낙랑태수장)”, “樂浪右尉(낙랑우위)”, **長印(**장인)“등이 있다. 西漢(서한)과 東漢(동한)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가 있었고 큰 縣(현)에는 丞(승)과 左.右尉(좌 우위)가 있었으며 작은 縣(현)에는 長(장)이 있었다. 그리고 漢書(한서) 地理(지리)지에 의하면 당시의 樂浪(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과 **현이 있었다

 

따라서 봉니는 낙랑군 조선현 **현의 치소가 평양에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는바와 같이 봉니는 공문서를 보낼대 봉함하는 것으로 사용하는것 이므로 봉니가 출토된 곳은 봉니의 주인이 보낸 공문서를 받은곳이 된다 . 따라서 봉니가 진품이라 하드라도 평양은 공문을 받은곳이 되지, 그들이 거주 하던 곳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로, 봉니가 수집된 토성지역에서는 “大晉元康(대진원강)”, “樂浪禮官(낙랑예관)“, ”樂浪富貴(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아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평양이 낙랑군의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는데, 여기서 대진원강은 西晉 惠帝(서진 혜제)의 연호로서 서기 291년부터 299년 사이가 된다. 따라서 이 기와 연대에 의하면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西漢(서한) 武帝(무제) 元封(원봉) 3년(기원전 108년)보다 400여 년이 뒤진 서기 290년대의 유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사군의 낙랑군유적으로 보기에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또 앞에서 언급한 봉니들의 書體(서체)에 대해서 정인보는 한시대의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정돈되 있음을 지적한바 있는데, 위의 기와에서 확인된 연대로 보아 봉니들도 한시대 보다는 훨씬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낙랑예관” “낙랑부귀”등은 평양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 유적의 연대는 한사군의 설치 연대와는 크게 차이가 날뿐 아니라, 다음에 확인 되겠지만 지금의 평양지역에는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다른 樂浪(낙랑)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古墳群(고분군)이 있다. 평야에서는 중국식 고분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발굴자들은 그 위치와 墓制(묘제)로 보아 제1호분이 가장 오래된 것이며 규모가 가장 큰것 가운데 하나라 하였다. 따라서 발굴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평양의 중국식 고분은 모두가 제1호분 보다는 늦은 시기의 것이 된다

 

그런데 제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貨泉(화천)이 있었다. 화천은 왕망시대에 주조된 것이다. 따라서 이 고분의 연대는 왕망시대 이전으로 올라갈수가 없다. 왕망시대는 불과 15년간 이었고 그 뒤는 東漢(동한)시대가 되므로 왕망시대에 주조된 화폐가 한반도에까지 도달된 시간을 감안하면 제1호분의 조성연대는 동한시대로 보아야한다 결국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넷째로, 왕광묘와 왕간묘에서 출토된 印章(인장)이 있다. 왕광묘에서는 “樂浪太守掾王光之印(낙랑태수연왕광지인)”,“ 臣光(신광)”, “王光私印(왕광사인)”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고 왕간묘에서도 “五官掾王盰(오관연왕간)” , “王盰印信(왕간인신)” 등의 목제인장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태수연이나 오관연은 모두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로 이 인장들은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 치소였음을 알게하는 증거로 제시 되었다. 그런데 군태수에게 속해있던 관리들이 반드시 군치소에만 근무했던게 아니며 멀리떨어진 곳에서도 근무하는 경우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다음에 밝혀지겠지만 평양에 있었던 낙랑은 한 때 행적적으로 낙랑군의 지시를 받는 屬縣(속현)과같은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관리인 태수연이나 오관연이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다는것이 낙랑군의 치소였다는 의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 고분의 연대이다. 인장의 서체에서도 그것이 서한시대보다 늦은 시기의 것임을 알수 있는데 왕간묘에서 명문이 있는 칠기가 출토되어 그 조성연대를 분명하게 해 주었다. 칠기 가운데는 “ 永平 十二年(영평12년)” 이라는 명문이 있는것이 있었는데 영평12년은 東漢 명제 때로서 서기 69년이 된다. 따라서 이 고분의 조성연대는 서기 69년 이전으로 올라갈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고분에서 출토된 목재를 이용하여 방사성탄소측정이 행해진바 있는데 그 결과는 서기 133년이었다. 결국 이 고분도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의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늦은 동한시대의 것이다.

 

다섯째로, 秥蟬平山君神祠碑(점선평산군신사비)가 있다. 이 비는 앞에서 언급한 토성의 동북 150m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비문의 첫머리를 보면 “*和二年 四月戊午(*화2년 4월무오), 秥蟬長渤興(점선장발흥)” 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서한과 동한시대에 長(장)은 縣(현)을 다스리던 관리였으므로 이 비는 점선현의 장이 세웠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서 지리지를 보면 서한시대의 낙랑군에는 秥蟬縣(점선현)이 있었고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동한시대의 낙랑군에는 占蟬縣(점선현)이 있었다. 이로보아 서한의 점선현의 한자표기가 동한시대에는 달라짐을 알수 잇는데, 黏. 占. 秥이 당시에는 통용되었기 때문에 비문에서는 秥蟬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비문에 나오는 점선은 서한시대 낙랑군의 黏蟬縣을 말하며 이 비가 서있는 지역이 바로 黏蟬縣 지역일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에대해 정인보는 점선장이 자신의 관할지역에 비를 세울 경우에는 자신의 직명을 새겨 넣지 않는것이 한시대의 비문 양식이라고 말하면서 비문에 점선장 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비가 서 있는 지역이 점선이 아님을 알수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크게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였다. 비문의 양식이 언제나 일치하였을 것으로는 볼 수 없기대문에 정씨의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볼수 없지만 참고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필자는 이 비에 대해 두가지 문제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는 이비가 세워진 연대이다. 비문의 첫 자는 마손이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고, 둘째자는 和(화), 셋째자는 二(이)와 비슷 하였다고 한다 그러데 和字가 들어간 중국의 연호는 元和(원화), 章和(장화), 永和(영화), 光和(광화), 太和(태화) 등이 있는데 元和가 가장 빠른 연대이다. 元和는 東漢 章帝의 연호로서 그 원화2년은 서기 85년이다. 따라서 비문의 연호를 가장 빠른 것으로 계산하더라도 이 비는 동한시대의 것이 된다. 다시말하면 한사군의 설치연대 보다는 훨씬 늦은 것이다 . 둘째로 黏. 占. 秥이 음이 같다고 해서 동일한 의미로 볼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음이 같으면서도 다른 문자를 굳이 사용한 것은 서로 구별할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음이 동일한 다른 지명이었을 것이다

 

이 비의 건립연대가 서한시대가 아니라는 점은 이러한 필자의 생각을 강하게 뒷받침 하여준다

 

여섯째로, 孝文廟銅鐘(효문묘동종)이 있다. 이 동종의 명문은 “孝文廟銅鐘用十斤, 重冊十斤, 永光三年六月造” 라고 되어 있다. 永光(영광)은 서한 元帝의 연호로서 영광3년은 기원전 41년 이므로 이 동종은 서한시대에 제조된 것이다. 이 동종은 제9호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 되었는데 이러한 동종이 평양에서 출토된것은 평양이 서한의 낙랑군 치소로서 孝文廟(효문묘)가 있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였다. 효문은 서한의 文帝(문제)를 말하는데 과연 지금의 평양지역에 효문묘가 설치될수 있었을까? 서한시대에는 郡國廟(군국묘)가 있었는데 군국묘는 高祖(고조)가 그의 아버지 太上皇(태상황)의 묘를 모든 제후왕의 도읍지에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국묘로서의 皇帝의 묘가 모든 군에 설치 되었던 것은 아니다. 군국은 그곳을 巡行(순행)을 했거나 잠시라도 거주한 일이있는 , 다시 말하면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황제에 대해서만 廟(묘)를 설치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한사군은 武帝(무제)때 설치되었고 文帝(문제)는 무제보다 앞선 황제였다

그러므로 문제는 낙랑군과 연고를 맺을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설사 지금의 평양이 한사군의 낙랑군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효문묘는 설치될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것은 서한의 군국묘는 元帝(원제) 영광4년(기원전 40), 즉 평양에서 출토된 동종이 제조된 1년후에 모두 폐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효문묘동종이 출토된 제9호분의 조성연대는 함께 출토된 銅鏡(동경)가운데 서한시대 이후의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한시대 이전으로는 올라갈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해 볼때 이 효문묘동종은 다른곳의 군국묘에서 사용되었던것이 군국묘가 폐지된 후 어떤 경로를 거쳐 제9호분 주인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사망과 더불어 부장품으로 묻혔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일곱째로,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印(은인)이 있다. 이 은인은 1958년 평양의 정백동 土壙墓(토광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이 묘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또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서한의 낙랑군에는 夫租縣(부조현)이 있었다. 그러므로 평양에서 “부조예군”,“부조장”등의 은인이 출토되었다고 하는것은 그 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음을 알게하는 증거라고 인식하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이미 김정학에 의해서 지적되었듯이 “부조예군”으; 은인은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사군이 설치된 서한시대 이후의 관직을 보면 郡(군)에는 太守(태수), 大尹(대윤), 丞(승), 長史(장사)가 있었고 縣(현)에는 令(영)이나 長(장), 丞(승),尉(위) 등이 있었을뿐 君(군)이라는 관직은 없었다

 

그러나 漢書(한서) 武帝記(무제기)에 “元朔(원삭) 원년 (기원전 128) 가을에 東夷(동이)의 薉君(예군)인 南閭(남려)등 28만 명이 항복하니 그곳을 蒼海郡(창해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東夷(동이)의 薉族(예족)이 君(군)이라는 관직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부조현은 낙랑군에 속해있었는데 낙랑군 지역은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위만조선에 속해있었다. 따라서 부조예군은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사용하던 관직명임을 알수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예군의 묘에서는 전형적인 고대 한국 청동기인 細形銅劍 (세형동검)등도 출토되어 그 주인이 중국계가 아님을 알게하여 주었다. 부조예군의 은인은 漢(한)으로부터 주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필자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에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을 인정하고있다. 고조선은 西周(서주)시대이래 중국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었으므로 漢字(한자)는 물론 중국의 문물제도가 상당히 수입되어 있었을 것이며 위만조선에 이르면 그 지배계층의 상당수가 중국 망명객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은 서한의 문물제도에 매우 친숙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로서 부조예군 은인이 한사군의 낙랑군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인 되었지만 그 출토지점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부조였고 후에는 낙랑군의 부조현이었지 않겠느냐는 의문은 아직도 남아있다. 그러나 다음에 확인되겠지만 한사군의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灤河(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따라서 낙랑군의 부조현이나 고조선, 위만조선 시기의 부조도 그 지역에 있었다는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조예군 은인은 위만조선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후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하던 시기 또는 서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던 시기에 당시의 지배계층이던 부조예군이 이에 항거하면서 지금의 평양지역으로 이주해 왔을것임을 알게 하여준다. 지금의 평양은 원래 마한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난하 동부연안에 있었던 낙랑의 토착민들이 외세에 항거하다가 평양지역으로 이주해와 그 지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함으로써 평양지역도 낙랑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믿고있다.

 

이제 부조장 이라는 은인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서한시대의 현에는 장이라는 관직이 있었다 따라서 이 은인은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소유했던 것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점은 이 부조장 은인은 문자의 형태만 알아볼수 있도록 부식 시킨 것으로 인장으로서는 사용할수 없는 형식적인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묘의 주인이 부조현의 장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사망시에는 자신이 사용했던 인장을 소지하고 있지 못했음을 알수있다. 따라서 필자는 부조장묘의 주인도 먼곳으로 부터의 이주민 이었을 것으로 믿고있다. 이 부조장묘는 앞의 부조예군묘와 불과 50m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연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학계는 믿고있다. 그런데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인식하고 싶다/ 즉 부조장은 부조예군과 친연관계에 있었거나 그 후손 이었는데 부조예군이 외세에 항거하다 지금의 평양으로 이주한후 그 지역에 남아 낙랑군 부조현의 장이 되었다가 후에 그도 부조예군이 거주하고 있던 평양으로 이주해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종합해 볼때 해방 이후에 출토된 부조예군, 부조장의 은인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다는 적극적인 증거가 될수 없고 해방전 일본인학자들에 의하여 조사 발굴된 고분.토성등 소위 평양의 낙랑유적은 그 조성연대가 한사군이 설치 되었던 서한시대가 아니라 그보다 늦은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 하였다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거운데는 서한시대나 그 이전의 것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늦은 시기에 제조된 유물과 함께 출토됨으로써 후대에 뭍혀진 것임을 알게하여 주었다

♥소위 낙랑유적의 성격을 밝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출토된 유물의 제조연대가 아니라 유적의 조성연대인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된다. 그것은 한사군의 낙랑군은 서한 전기에 설치되었는데 지금의 평양지역이 한사군의 낙랑군 이었다면 어찌해서 그곳에서 서한의 유적은 보이지 않는가 하는점이다. 한사군은 서한시대에 설치되었지만 유적은 그보다 늦게 조성되었을 수도있다 그러나 그 많은 중국식 고분과 유적이 모두 동한시대 이후의 것이라면 그 성격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던 시기에 지금의 평양에는 어떠한 정치세력이 있었으며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낙랑예군” “낙랑부귀”등의 문자가 새겨진 기와는 이 지역이 낙랑과 관계가있음을 알게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다음의 기록이 해명하여 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서기32)조를 보면

여름 4월에 왕자 호동이 옥저를 여행하였는데 낙랑왕 최리가 출행하였다가 그를 보고는 묻기를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같지 않은데 혹시 북쪽의 나라 신왕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드디어는 함께 돌아가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는 기록이 보인다. 위의 내용에서 神王은 고구려의 대무신왕을 뜻하는 것이니 崔理(최리)는 고구려를 북쪽의 나라라고 불렀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최리의 낙랑국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기록은 서기 32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당시에 고구려 남쪽의 동부에는 濊(예) 또는 濊貊(예맥)이 있었고 최리의 낙랑국은 예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의 위치는 평양지역이 될 수밖에 없게된다. 종래에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의 위치를 평양지역으로 보았기 때문에 최리의 낙랑국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최리의 낙랑국을 복원시켜 놓고 보면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당시에 한사군이 이미 설치되어 있었는데 만약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지역에 있었다면 최리의 낙랑국과 한사군의 낙랑군, 즉 두 개의 낙랑이 같은 지역에 있었다는 모순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었던 두 개의 낙랑을 상정하게 된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 동부연안 즉 위만조선지역의 서부에 설치되어 있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이요 다른 하나는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낙랑에 관한 문헌의 기록은 두 종류로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지금의 평양지역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은 서기 37년에 멸망하게 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서기37)조에는

 

“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 시켰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만으로는 어느 낙랑을 멸망 시켰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同書(동서)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14년(서기37)조에는 “ 고구려의 왕 撫恤(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나라(낙랑국)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고 하였으니 구구려 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은 신라와 접한 지역에 있었으므로 최리의 낙랑국임을 알수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후의 기록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44)조에는

“가을 9월에 동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드니 薩水(살수)(지금의 청천강) 이남은 동한에 속하게 되었다”

 

는 기록이 보인다. 종래에는 이 기록을 한사군의 낙랑군과 연결시켜 인식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인식하기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 이 시기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이미 자기들의 영토가 되어있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군사를 파견하여 그 곳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군현)을 만들었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사군의 낙랑군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이 있었던 지금의 평양지역을 쳤음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바다를 건넜다는 내용은 그것을 한층 명확하게 하여 준다. 최리의 낙랑국은 이보다 7년전에 이미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되었지만 그 지역이 낙랑국이 있엇던 곳이기 때문에 낙랑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동한의 광무제가 낙랑국이 있던 평양지역을 친것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였다고 생각된다. 당시에 동한은 세력이 성장하고있던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를 공략하고 그곳에 군사식민지를 만들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한편 낙랑국이 고구려에 멸망된것은 오래지 않았었으므로 그 주민들은 아직 고구려에 동화되지 않았었을 것이고 또 저항감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원래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이 대부분 이었을 것이므로 그러한 연고관계를 이용하여 동한의 세력을 빌어 낙랑국을 재건 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이용하여 동한의 광무제는 비교적 용이하게 평양을 칠수 있엇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이지역은 한반도에 있어서의 중국의 군사기지및 교역의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인용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조의 기록에 의하면 동한 광무제의 군사에 의하여 점령된 지역은 지금의 청천강 까지였는데 이것이 아마도 낙랑국의 북쪽 경계선 이었을 것이다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지역은 그전의 명칭에 따라 낙랑이라 불리어졌고 행정적으로는 한사군의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던 것같다. 평양지역이 낙랑이라고 불리어졌음은 토성지역에서 수집된 “낙랑예관” “낙랑귀부” 등이 새겨진 기와에 의하여 알수있는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평양지역의 낙랑은 漢(한)시대의 낙랑군의 屬縣(속현) 땅이었을 것 이라고 하였고, 이익도 같은 견해를 피력한바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평양에서 발견된 중국식 유적인 소위 낙랑유적은 동한 광무제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군사기지인 낙랑의 유적인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부연해 둘 것은 지금의 평양지역에 연대가 빠른 중국식 유적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르게 인식하는데는 매우 조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잠간 언급하였듯이 평양지역에 있었던 낙랑국의 지배계층은 대부분 위만조선의 팽창과 서한 무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낙랑군 지역으로부터 한사군이 설치되기 이전에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낙랑군 지역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하여 중국지역과 접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중국의 문물에 매우 친숙해 있엇을 것이라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할것이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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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21-08-21 22:39
   
근데 원장님이 예전에 문성재 박사님 기사와 페이스북 글, 논문 같은 거 공유해주셨던 분 맞죠?
예전에 지누짱 닉네임 이전에
     
울티마툴레 21-08-22 10:44
   
엥? 아뇨 전 지누짱으로 1년전 처음 알고 들어왔어요
Marauder 21-08-21 23:44
   
이전 닉이 지누짱이셨군요 ㄷㄷ 감방친구님 덕에 처음 알았네요
     
감방친구 21-08-21 23:55
   
제가 까불어서 닉변하심 ㅋㅋ ;;
울티마툴레 21-08-22 10:46
   
인용글을 인용한 이유는 역사연구에서 어떤 지역이나 사건을 논할땐 사서의 교차검토와 고고학적 증거를 동시에 검토해야 최소한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 때문입니다.
     
울티마툴레 21-08-2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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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947
19679 [한국사] 낙랑古墳群(고분군) 하이시윤 03-18 947
19678 [한국사] 왕광묘와 왕간묘에서 출토된 印章(인장) 하이시윤 03-18 956
19677 [한국사]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 하이시윤 03-18 934
19676 [한국사] 孝文廟銅鐘(효문묘동종) 하이시윤 03-18 835
19675 [한국사] 秥蟬平山君神祠碑(점선평산군신사비) 하이시윤 03-18 857
19674 [한국사] 춘추 전국 진 서한시대 요수의 위치 (6) 하이시윤 03-14 1225
19673 [한국사] 위만정권ㅡ한 전쟁 당시 발해의 위치 (3) 하이시윤 03-14 1184
19672 [한국사] 후흐호트 방언 위구르 03-11 1121
19671 [기타] 세종대왕 관모와 어진의 유래가 무엇 일까요? (ft. … (4) 조지아나 03-09 1523
19670 [한국사] [영상] 복기대교수가 임둔태수장 관련 논문을 쓴 이… (1) 하이시윤 03-04 1187
19669 [한국사] [블로그]임둔태수장 관련 블로그소개 (2) 하이시윤 03-04 1022
19668 [한국사] [논문소개]복기대교수의 임둔태수장에 관한 논문 결… (1) 하이시윤 03-04 941
19667 [한국사] 윤내현교수 (4) 하이시윤 03-03 992
19666 [한국사] 김정민이는 애초에 역사학 논문하나없이 (4) 하이시윤 03-03 1036
19665 [한국사] 사이비역사학자 김정민 (15) 하이시윤 03-03 1272
19664 [기타] 개인적으로 김정민 박사에게 굉장히 실망한사건 (6) Marauder 03-02 1562
19663 [기타] 국제관계학과 역사 (9) 조지아나 03-01 924
19662 [한국사] 김정민 박사, 책보고와 인터뷰 ㅣ한국사의 혁명 2인 (13) 파스크란 02-23 1974
19661 [기타] 발해의 유민들은 카자흐스탄의 케레이족이 되었다 (5) 관심병자 02-21 1937
19660 [한국사] 파스크란님의 글이 역사학 글이 안되는 이유 (27) 하이시윤 02-20 1085
19659 [한국사] 운남 대리국이 후백제였다 (2) 파스크란 02-20 1486
19658 [한국사] 등주(登州),청주(靑州)만 찾아도 고려의 산동 강역을 … (15) 파스크란 02-20 1321
19657 [한국사] 역사관련 자료를 찾을때 유용한 사이트 모음 (4) 파스크란 02-19 956
19656 [한국사] 축의 시대 (2) 하이시윤 02-19 890
19655 [한국사] 고구려인의 재산목록 1호는 수레였다 (1) 하이시윤 02-19 983
19654 [한국사] 강소성 양주 고려 왕성과 그 영토 (3) 파스크란 02-19 927
19653 [한국사] 송나라 고지도에 나타난 고려 서북계 (1) 하이시윤 02-19 1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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