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시대 그러니까 서기전 25세기에서 서기전 2세기까지 제가 보는 고조선강토 서변의 변화를 이렇게 봅니다.
1. 동아시아만 살펴보면
기원전 10000년에서 8000년 사이 기후가 따뜻해졌고 신석기시대가 도래하였는바 기원전 5000년전은 지금보다 지구가 따뜻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소위 말하는 홍산문화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다 기원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 기후가 차가워지고 건조해져서 많은 부족들이 남하했는데 주경로가 세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부류는 현 길림성일대와 현 요동요서 및 한반도 북부입니다.
이들은 비슷한 족속들로서 같은 문화를 공유한 족속들로 보입니다. 이들이 남하하면서 곳곳애 에 읍(촌락보다는 규모가 훨씬 큰 도시)을 세웠고 이들이 연맹하여 고조선을 세웠으나 당시의 교통의 한계로 인해 곳곳에 자주적인 읍연맹체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고조선은 처음부터 청동기를 기반으로 하는 읍의 누층적 연맹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다른 부류는 현재 중국의 북경일대를 넘어 산동반도 그리고 현 중국의 태행산맥 동쪽일대에 자리잡습니다. 이들은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곳곳에 읍을 세우고 토착인들을 정복하여 마찬개로 누층적 읍연맹체인 상나라를 세웁니다. 상과 고조선사이에 거리가 멀고 교통수단이 낙후하여 제생각엔.상호간 교류가 적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태행산맥 동쪽으로 앞의 두부류와는 다른 족속이 남하합니다. 이 부류가 정착한 곳은 지금의 서안일대의 고원지대로서 고원지대이지만 농사가 가능한 곳입니다. 이들은 토착인들을 정복하여 정착하는데 이들이 주족 강족이라고 합니다.
상나라와 이들 사이에는 태행산맥이라는 해발고도평균 2000미터급의 고준산령이 가로막고 있었고 무수한 밀림이 가로막고 있었죠. 따라서 이들사이에는 전투가 벌어지곤 했는데 이게 갑골문자와 은청동기에 나오는 상나라의 주변국 토벌입니다. 상은 정기적으로 주족과 강족을 토벌했으며 이에 주족이 중심이 되어 거꾸로 상나라를 토벌하고 주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지는 여전히 태행산맥동쪽이었죠.
2. 그러다 철기시대에 들어와서 무기도 좋아지고 농기구도 발전하면서 농업생산력이 부강의 중요한 척도가 되자.비로소 강역의 개념이 분명해지고 농토쟁탈을 둘러싼 전쟁과 벌채가 이루어집니다. 도끼를 가지고 벌채를 하여 농토를 확장하고 주변국 농토를 빼았는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죠.
시경에 나오는 한후에 대해 주나라왕이 한후에게 동북방면의 모든 족속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다며 한후를 칭송합니다. 이 한후를 고조선의 임금으로 본다면 기원전 9세기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알던 동북방면 지금으로 보면 북경일대와 요서 일대의 모든 족속이 고조선의 영역이 되는 것이죠.
즉 중국측 역사자료로 나타나는 고조선의 첫번째 서변은 낙양을 기준으로 동부방면 즉 북경일대와 산서성남부와 발해를 잇는 선으로 보입니다.
3. 농토가 확장되고 비옥한 황하일대의 농업경제력은 확장되어 주나라를 둘러싼 주위보다 높게됩니다. 그결과는 주나라시대 인구폭발이고 최소한 전국시대초기 3천만명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같은 철기를 갖고 있었지만 농업생산력이 떨어지는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을 넘어서는 국력을 가지게 되어 고조선의 서변은 점점 현재의 난하일대로 축소되었다고 생각댑니다.
즉 진한교체기때 고조선 서변은 현재의 난하일대로 정해졌고 이는 많은 문헌근거가 있습니다. 또한 만리장성이 고고학적 유적으로 남아있습니다.
4. 한무제의 위만침공이후 고조선의 서변은 더 현 요수쪽으로 후퇴었는바 이는 위만이 초기에 한의 원조를 받아 주변 읍들을 정복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현 요수나 대륙하까지 확장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실제로 현재도 요동과 서북한지역에 서한시대 유적은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유물은 있습니다만 이는 교류의 흔적이지 정복의 흔적은 아닙니다.
즉 한군현설치시 고조선의 서변은 현재의 요하로 추정됩니다.
5. 이후 고조선내에서 마치 주나라붕괴후 춘추전국시대가 등장한 것처럼 열국시대가 등장하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중국문헌에 나타납니다. 춘추시대앤 단순히 종족으로 언급하다가 진한시대엔 나라로 언급하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고조선왕실은 주왕실처럼 진짜 명맥만 유지하다가 고구려의 평양지역 완전 점령때 사라졌다고 봅니다.
즉 한군현이 설치된 이시기 누층적 읍연맹봉건국가인 고조선은 붕괴했고 이후 한군현과 부여 낙랑 숙신들이 경계를 맞대다가 강력한 한의 무력에 밀려 부여와 낙랑 예 옥저 들은 더 동쪽으로 이동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창건되면서 한군현과 경계를 맞대다가 백제는 한반도 중부로 이전하고 고구려가 한군현과 경계를 맞대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시기에도 한군현은 요수를 넘지못하였습니다. 즉 서기전108년부터 고구려가 한군현을 멸한 시기까지 한은 결코 요수를 넘지 못하였습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조조가 오환을 정벌하고 기념으로 갈석산을 올랐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갈석산은 현 진황도시입니다.공손씨는 현 요서일대에서 할거하였고 한때 요동남부 요동반도에서 위세를 떨쳤지만 그 중심지는 여전히 현요서였습니다. 다른말로 동한ㅡ위ㅡ진시기 요동은 여전히 지금의 요서였습니다. 즉 조조의 위나라(실제론 사마의)는 공손씨가 가까이 있었기에 업도에서 출정한 것입니다. 멀리있었다면 결코 출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생각의 출전은 거의 모두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