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21-08-15 17:01
[한국사] 한韓(마한, 진한, 변진)은 산동성과 강소성이었다(삼국지 위서동이전 내용)
 글쓴이 : 수구리
조회 : 989  

■ 사마천 사기 평준서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따르면

한(마한,진한, 변한)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있었다(한을 통합한 것이 백제다)

※주) 산동성과 강소성은 원래부터 동이족 살던 곳이었고,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있었다

1) 사기 평준서에는 예맥조선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북경 동남쪽인 창주시라고 했고,

2) 후한시대(AD 25 ~ 220년)의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한이 예맥조선의 남쪽에 있다고 했으니

한(마한,진한, 변한)은 산동성과 강소성에 있었다

1)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으나

2) 백제는 한(산동성, 강소성)의 소국 1백개를(일백개의 제濟 나라 소국)을 통합하여 번성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 장수왕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수도를 한반도 남부인 웅진으로 옮겼다

3) 한(산동성, 강소성) 남쪽이 왜국이니 왜국은 절강성과 대만에 있었다

 

■ 정사 삼국지는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했다


■ 예맥국(예맥조선)은 하북성 창주시다 

       --> 고조선 영토(유방의 한漢나라와 ◐경계선◑은 호지하虖池河:現. 滹沱河):네이버 포스트 글 참조


■ 한韓은 예맥국(穢貊國) 남쪽인 산동성과 강소성이다


※주) 1) 예濊는 예맥국,예맥조선으로 하북성 천진시 아래 창주시滄州市이니, 예濊 나 한韓을 한반도, 고구려를 만주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동쪽 바다를 동해가 아니라 중국동쪽 바다인 황해로 보고..

---> 고구려를 하북성 북부로예濊를 중국 동부인 하북성 창주시로, 한韓을 중국 동부나 산동성,강소성으로 상상하고 읽어보시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됩니다(바다는 소양호와 덕주시인 발해호수, 대해는 황해)

2) 동옥저는 高句驪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정도나 된다.

--->개마대산(蓋馬大山)이 당산시와 진황도시 사이의 갈석산으로 보이니, 동옥저는 동북은 좁고 서남이 천리 정도인 요서회랑(진황도시秦皇島市와 호로도시葫蘆島市 사이)이다


 
○ 三國志註 001 魏書 烏丸鮮卑東夷傳註 002


○ [역사 편찬자인 陳壽는] 평한다.
『史記』·『漢書』에서는 朝鮮과 兩越註 183을 기록하였고, 東京(後漢)시대에는 西羌에 대해 撰錄하였다. 魏나라 때부터 匈奴가 쇠약해지자, 다시 烏丸과 鮮卑가 나타났다. 이어 東夷에 이르러서는 사신이 늘 왕래하여 사건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였으니 어찌 凡常한 일이라 하겠는가!

『書經』에 ‘동쪽은 바다(황해)에 닿았고 서쪽은 사막에까지 이르렀다’註 003 하였으니, 九服의 制度註 004 이내에 있는 것은 말할 수가 있으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荒域 밖은 여러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漢人의]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그 나라의 풍속이 중국과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虞나라로부터 周대에 이르기까지 西戎은 白環을 바쳤고註 005 東夷에서는 肅愼의 조공이 있었으나,註 006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 漢나라 때에 張騫을 西域에 사절로 파견하여註 007 黃河의 근원을 찾아내고, 여러 나라를 두루 방문하여 드디어 都護를 설치하고註 008 그들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뒤에는 서역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게 되어 그 결과 史官도 [西域의 일을] 상세히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註 009
魏나라가 일어서는 서역의 모든 나라가 다 오지는 않았으나, 그 중의 大國인 龜玆註 010·于寘註 011·康居註 012·烏孫註 013·疎勒註 014·月氏註 015·鄯善註 016·車師註 017 등의 무리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해가 없었으니, 대략 漢나라 때의 古事와 같았다.

○ 公孫淵의 父祖 三代註 018가 계속 遼東(하북성 중부 형수시)을 차지하자, 천자는 그 지방을 絶域으로 여겨 [公孫氏에게] 海外(창주시 산동성 강소성)의 일로 위임시켰다. 그 결과 결국 東夷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景初 연간(A.D.237~239; 高句麗 東川王 11~13)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註 019 또 몰래 바다(하북성 중부 덕주시에 있었던 발해호수)를 건너가서 樂浪郡과 帶方郡을 수습하였다.註 020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東夷들이 굴복하였다.
그 뒤 高句麗가 배반하므로 또 다시 약간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면서註 021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烏丸註 022과 骨都註 023를 넘고 沃沮를 거쳐 肅愼의 王庭을 짓밟고 동쪽으로 大海(황해)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長老가 ‘얼굴이 이상한 사람이 해가 돋는 근처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 드디어 여러 나라를 두루 관찰하고 그들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의 구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다.
[그 나라들은]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기는 하지만 俎豆註 024를 쓰는 예절이 남아 있으니, ‘중국이 禮를 잃으면 四夷에게서 구한다’註 025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나라들을 순서대로 찬술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열거하여 前史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다.

 

○ 濊註 133(하북성 중부 창주시)
註 134는 남쪽(산동성)으로는 辰韓과, 북쪽으로는 高句麗·沃沮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大海(황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朝鮮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戶數는 2만이다.
일찍이 箕子가 朝鮮에 가서 八條의 敎를 만들어 그들을 가르치니,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백성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이 참람되게 王이라 일컬었다.註 135 [秦나라 말년에] 陳勝註 136 등이 起兵하여 온 천하가 진나라에 반기를 드니, 燕·齊·趙지역의 백성 수만인이 조선으로 피난하였다. 연나라 사람 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王이 되었다.
漢 武帝는 조선(하북성 형수시 무강현의 위만조선)을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부터 胡族과 漢族 사이에 점차 구별이 생겼다.註 137

○ [濊에는] 大君長이 없고註 138 漢代 이래로 侯·邑君·三老註 139의 관직이 있어서 下戶를 통치하였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예부터 스스로 일컫기를 ‘[高]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廉耻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지만 의복은 다르다. 남녀가 모두 曲領註 140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 單單大山領의 서쪽은 樂浪에 소속되었으며, 領의 동쪽 일곱 縣은 [東部]都尉가 통치하는데 그 백성은 모두 濊人이다. 그 뒤 都尉를 폐지하고 그들의 우두머리(渠帥)를 封하여 侯로 삼았다. 오늘날의 不耐濊는 모두 그 종족이다. 漢末에는 다시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 나라의 풍속은 山川(하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註 141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同姓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註 142 꺼리는 것이 많아서 병을 앓거나 사람이 죽으면 옛 집을 버리고 곧 다시 새 집을 지어 산다. 삼베가 산출되며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든다.註 143 새벽에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안다.註 144 珠玉은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

○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舞天’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神으로 여겨 제사지낸다.註 145 부락을 함부로 침범하면 벌로 生口와 소·말을 부과하는데, 이를 ‘責禍’라 한다. 사람을 죽인 사람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한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적다.
길이가 3丈이나 되는 창(矛)을 만들어 때로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잡고서 사용하기도 하며, 步戰에 능숙하다. 樂浪의 檀弓註 146이 그 지역에서 산출된다. 바다에서는 班魚의 껍질註 147이 산출되며(DB주석 : 班魚皮가 나고), 땅은 기름지고 무늬있는 표범이 많다(DB주석 : 땅에서는 文豹가 아주 많다). 또 果下馬註 148가 나는데 [후]한의 桓帝 때 獻上 하였다.

○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 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註 149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 韓註 150
註 151은 帶方註 152의 남쪽(산동성, 강소성)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동쪽바다는 황해, 서쪽 바다는 소양호)를 삼고,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註 153 둘째는 辰韓,註 154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註 155

○ 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 댓글에서 계속--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수구리 21-08-15 17:04
   
(게시글의 연장입니다 한 韓부터...)

○ 韓
韓註 151은 帶方註 152의 남쪽(산동성, 강소성)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동쪽바다는 황해, 서쪽 바다는 소양호)를 삼고, 남쪽은 倭(오나라 월나라 대만)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馬韓,註 153 둘째는 辰韓,註 154 세째는 弁韓인데, 辰韓은 옛 辰國이다.註 155

○ 馬韓은 [三韓 中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土著生活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綿布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長帥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邑借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城郭이 없었다.註 156
[馬韓의 諸國으로는]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註 157·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占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등 모두 5십여國이 있다. 큰 나라는 萬餘家이고, 작은 나라는 數千家로서 總 10餘萬戶이다.
辰王註 158은 月支國을 통치한다. 臣智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臣雲遣支報 安邪踧支 濆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註 159의 稱號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이 있다.

○ [朝鮮]侯 準(창주시의 예맥조선) 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옛 箕子의 후예인 朝鮮侯는 周나라가 쇠약해지자, 燕나라가 스스로 높여 王이라 칭하고 東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朝鮮侯도 역시 스스로 王號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燕나라를 逆擊하여 周 王室을 받들려 하였는데, 그의 大夫 禮가 諫하므로 중지하였다. 그리하여 禮를 서쪽에 파견하여 燕나라를 설득하게 하니, 燕나라도 전쟁을 멈추고 [朝鮮을] 침공하지 않았다.
그 뒤에 子孫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燕은 장군 秦開註 160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고 2천여리의 땅을 빼앗아 滿番汗註 161에 이르는 지역을 경계로 삼았다. 마침내 조선(창주시의 예맥조선)의 세력은 弱化되었다.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註 162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를 下賜하며, 百里의 땅을 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註 163(산동성)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魏略: 準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韓氏라는 姓을 사칭하였다. 準은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조선(위만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絕滅되었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 [韓은] 漢나라 때에는 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朝謁하였다.
魏略: 일찍이 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에게 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辰國註 164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註 165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朝鮮에 조공하는 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王莽의 地皇 연간에, 廉斯鑡이 辰韓의 右渠帥가 되어 樂浪註 166의 土地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하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작정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韓人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漢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戶來이다. 우리들 천 5백명은 材木을 벌채하다가 韓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우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다. 鑡이
“나는 漢나라의 樂浪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戶來는,
“좋다.”
하였다. 그리하여 鑡은 戶來를 데리고 출발하여 含資縣으로 갔다. 含資縣에서 [樂浪]郡에 연락을 하자, [樂浪]郡은 鑡을 통역으로 삼아 芩中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辰韓에 들어가서 戶來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鑡이 이때 辰韓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樂浪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라고 하니, 辰韓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습니다.” 하고는, 진한 사람 만 5천명과 弁韓布 만 5천필을 내어놓았다. 鑡은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樂浪]郡에서는 鑡의 功과 義를 표창하고, 冠幘과 田宅를 주었다. 그의 자손은 여러 代를 지나 安帝 延光 4년(A.D.125; 百濟 己婁王 49)에 이르러서는 그로(선조의 공으로) 인하여 賦役을 면제받았다.

○ [後漢의] 桓帝·靈帝 末期에는 韓과 濊註 167가 강성하여 [漢의]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郡縣의] 많은 백성들이 韓國으로 유입되었다.註 168
建安 연간(A.D.196~220; 百濟 肖古王 31~仇首王 7)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帶方郡으로 만들고, 公孫模·張敞 등을 파견하여 漢의 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韓·濊에 있던] 옛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帶方에 복속되었다.

○ 景初 연간(A.D.237~239; 百濟 古爾王 4~6) 에 明帝가 몰래 帶方太守 劉昕과 樂浪太守 鮮于嗣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帶方·樂浪의] 두 郡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韓國의 臣智에게는 邑君의 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韓族의] 풍속은 衣幘을 입기를 좋아하여, 下戶註 169들도 [樂浪이나 帶方]郡에 가서 朝謁할 적에는 모두 衣幘를 빌려 입으며, [대방군에서 준] 자신의 印綬를 차고 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部從事 吳林은 樂浪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 八國을 분할하여 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臣智註 170과 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帶方]太守 弓遵과 樂浪太守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遵은 전사하였으나 二郡은 마침내 韓을 滅하였다.

○ 그 풍속은 기강이 흐려서, 諸國의 도읍에 비록 主帥가 있어도 邑落에 뒤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跪拜하는 禮 또한 없다. 거처는 草家에 土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과 같았으며, 그 문은 윗부분에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長幼와 男女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棺은 있으나 槨은 사용하지 않는다.註 171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지만, 금·은과 錦·繡는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는데 마치 날카로운 兵器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 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官家에서 城郭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에 한 발[丈]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註 172

○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명이 모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中國의] 鐸舞와 흡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國邑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天神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天君’註 173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蘇塗’註 174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蘇塗를 세운 뜻은 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 그 나라 北方의 [中國]郡에 가까운 諸國은 그런대로 약간의 禮俗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奴婢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별다른 珍寶가 나지 않고, 동물과 草木은 대략 中國과 동일하다. 큰 밤이 생산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細尾雞가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는 모두 5자(尺) 남짓 된다. 그 고장 남자들은 간혹 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
또 州胡註 175가 馬韓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다.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韓[族]과 같지 않다. [그들은] 모두 鮮卑族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옷은 上衣만 입고 下衣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韓나라에서 물건을 사고판다.

○ 辰韓은 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辰韓의] 노인들은 代代로 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秦나라의 苦役를 피하여 韓國으로 왔는데, 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城柵이 있다.註 176
그들의 말은 馬韓과 달라서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라 하고 도적(賊)을 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徒라 하여 秦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燕나라·齊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樂浪 사람을 阿殘이라 하였는데, 東方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阿라 하였으니, 樂浪人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辰韓을] 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辰韓은] 처음에는 6國이던 것이 차츰 12國으로 나뉘어졌다.

○ 弁辰도 12國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邑借가 있다.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이 있어서, 弁韓과 辰韓의 합계가 24國이나 된다. 大國은 4~5천家이고, 小國은 6~7백家로, 총 4~5萬戶이다.
그 중에서 12國은 辰王에게 臣屬되어 있다.註 177 辰王은 항상 馬韓사람으로 王을 삼아 대대로 世襲하였으며, 辰王이 자립하여 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魏略: 그들은 [外地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

○ [弁辰의] 土地는 비옥하여 五穀과 벼註 178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베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魏略: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에 나무를 가로로 쌓아서 만들기 때문에 감옥과 흡사하다.
[弁辰의] 나라에서는 鐵註 179이 생산되는데, 韓·濊·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鐵로 이루어져서 마치 中國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樂浪과 帶方의] 두 郡에도 공급하였다.

○ [그 나라의]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은 筑과 같고 연주하는 音曲도 있다.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에 지금 辰韓사람의 머리는 모두 납작하다.註 180 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男女가 文身註 181을 하기도 한다.
步戰을 잘하며, 兵仗器는 마한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길을 양보한다.

○ 弁辰은 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城郭도 있다. 衣服과 주택은 辰韓과 같다. 言語와 法俗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은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들 竈神을 모신다.
그 중에서 瀆盧國註 182은 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12國에도 王이 있으며 그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장대하다. 衣服은 청결하며 長髮로 다닌다. 또 폭이 넓은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관습은 특히 嚴峻하다.

 


○ 夫餘註 026
夫餘註 027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註 028 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註 029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註 030 [국토의 면적은]사방 2천 리가 되며,註 031 戶數는 8만이다.註 032

그 나라 사람들은 土著생활을 하며, 宮室과 창고 및 감옥을 가지고 있다.註 033 山陵과 넓은 들이 많아서 東夷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註 034
토질은 五穀註 035이 자라기에는 적당하지만, 五果註 036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나라에는 君王이 있고, 모두 六畜의 이름으로 官名을 정하여 馬加·牛加·豬加·狗加註 037·大使·大使者·使者註 038가 있다. 부락에는 豪民이 있으며, 下戶라 불리는 백성은 모두 奴僕이 되었다. 註 039 諸加들은 별도로 註 040四出道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家이며 작은 곳은 수백家였다.

○ 음식을 먹고 마심에 모두 俎豆를 사용하고, 會合을 할 때에는 술잔을 주고(拜爵) 술잔을 닦는(洗爵) 禮가 있으며, 出入시에는 [主客 사이에] 揖讓하는 禮가 있다.
殷曆 正月에 지내는 祭天行事는 國中大會로 날마다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迎鼓’라 하였다.註 041 이 때에는 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國內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外國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繡놓은 옷·모직옷을 즐겨 입고, 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삵괭이·원숭이·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註 042 통역인이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은 적몰하여 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케 했다.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註 043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南山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兄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는 匈奴의 풍습과 같다.註 044
그 나라 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名馬와 赤玉, 담비와 원숭이 [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구슬의 크기는 대추(酸棗) 만하다.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하였다. 註 045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네들이 옛날에 [다른 곳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城柵은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낮에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註 046 적군[의 침입]이 있으면 諸加들이 몸소 전투를 하고, 下戶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

○ 여름에 사람이 죽으면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며, 사람을 죽여서 殉葬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명 가량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槨은 사용하나 棺은 쓰지 않는다.註 047
魏略註 048: 그 나라의 習俗은 다섯 달 동안 초상을 지내는데 오래 둘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죽은 이에게 제사지낼 때에는 날 것과 익은 것을 함께 쓴다. 喪主는 빨리 [장사]지내고 싶어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强勸하기 때문에,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서 예절로 삼는다. 喪을 입는 동안에는 남녀 모두 純白色의 옷을 입고, 부인은 베로 만든 面衣를 착용하며 반지나 패물 따위를 몸에서 제거하니, [상복을 입는 禮는] 대체로 중국과 비슷하다.

○ 夫餘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다. 漢나라 말년에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高]句麗와 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註 049
尉仇台가 죽고 簡位居가 王이 되었다. [簡位居에게는] 適子가 없고 庶子 麻余가 있었다. [簡]位居가 죽자, 諸加들이 함께 麻余를 옹립하여 王으로 삼았다.註 050 牛加의 兄[벼슬에 있는 사람]의 아들도 이름이 位居였는데, 大使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國人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魏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貢物을 바쳤다.

○ 正始 연간(A.D.240~248; 高句麗 東川王 14~中川王 1) 에 幽州刺史 毌丘儉이 [高]句麗를 토벌하면서 玄菟太守 王頎를 夫餘에 파견하였다.註 051 位居는 大加를 보내어 郊外에서 [王頎를]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位居의] 季父인 牛加가 딴 마음을 품자, 位居는 季父 父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적몰,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簿歛)을 만들어 官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DB주석 - 홍수나 가뭄이 고르지 못하여) 五穀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王에게 돌려 ‘王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註 052 麻余가 죽고,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依慮를 세워 王으로 삼았다.

○ 漢나라 때에는 夫餘王의 장례에 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玉匣을] 玄菟郡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公孫淵이 주살된 뒤에도 玄菟郡의 창고에는 玉匣 一具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玉으로 만든 璧·珪·瓚등 여러 代를 전해 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先代[의 王]께서 하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魏略: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일이 없다.

○ 그 도장에 ‘濊王之印’註 053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濊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王이 되었으므로, 자기들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 하다.
魏略: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날 북방에 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註 054 그 王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王이 그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한 크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나에게 떨어졌기 때문에 임신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王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王은 天帝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는, 이름을 東明이라 하고 항상 말을 사육토록 하였다.
東明이 활을 잘 쏘자, 王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東明은 달아나서 남쪽의 施掩水註 055에 당도하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東明이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간 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버려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다. 東明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王이 되었다. 註 056

○ 高句麗註 057
高句麗註 058는 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朝鮮註 059·濊貊과, 동쪽은 沃沮와, 북쪽은 夫餘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丸都註 060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戶數는 3만이다.
큰 山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한다. 좋은 田地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에 음식은 아껴 먹으나 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DB주석 : 宮室짓기를 좋아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靈星과 社稷註 061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王이 있고, 벼슬로는 相加註 062·對盧註 063·沛者註 064·古雛加註 065·主簿註 066·優台註 067·丞·使者註 068·皁衣·先人註 069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 東夷의 옛 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別種註 070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고구려에는] 본디 다섯 [部]族註 071)이 있으니, 涓奴部註 072·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註 073가 그것이다. 본래는 涓奴部에서 王이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桂婁部에서 王位를 차지하고 있다. 註 074

○ 漢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하사하였으며,註 075 항상 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朝服과 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玄菟]郡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城을 쌓고서 朝服과 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幘溝漊註 076라 부른다. 溝漊란 [고]구려 사람들이 城을 부르는 말이다.

○ [고구려에서는] 관직을 설치할 적에 對盧가 있으면 沛者를 두지 않고, 沛者가 있으면 對盧를 두지 않는다. 王이 宗族으로서 大加인 자는 모두 古雛加로 불리워진다. 涓奴部는 본래의 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王이 되지 못하지만 그 適統을 이은 大人은 古雛加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宗廟를 세우고 靈星과 社稷에게 따로 제사지낸다. 絶奴部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註 077 [그 大人은] 古雛[加]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大加들도 스스로 使者·皁衣·先人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王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大加의 使者·皁衣·先人은] 마치 중국의 卿이나 大夫의 家臣과 같은 것으로, 會合할 때의 좌석 차례에선 王家의 使者·皁衣·先人과 같은 列에는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大家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인구(坐食者)가 만여명이나 되는데, 下戶註 078들이 먼 곳에서 양식·고기·소금을 운반해다가 그들에게 공급한다.

○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그 이름을 ‘桴京’註 079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으며,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祭天行事는 國中大會로 이름하여 ‘東盟’註 080이라 한다. 그들의 公式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金과 銀으로 장식한다. 大加와 注簿는 머리에 幘을 쓰는데, [中國의] 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小加는 折風註 081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隧穴이라 부른다. 10월에 온 나라에서 크게 모여 隧神註 082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江]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隧神을 神의 좌석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諸加들이 모여서 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妻子는 몰수하여 奴婢로 삼는다.

○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DB주석 : (혼인에 대한) 말이 정해지고 나면),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뒷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壻屋’ 이라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跪拜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 세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서야 작은 집(壻屋)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註 083은 [壻屋]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長成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註 084
그 풍속은 음란하며,註 085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니, 金·銀의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체구가 작아서 산에 오르기에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여, 沃沮와 東濊를 모두 복속시켰다.

또 小水貊註 086이 있다. [고]구려는 大水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는데, 西安平縣註 087의 북쪽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드는 작은 강이 있어서, 고구려의 別種이 이 小水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小水貊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貊弓이 그것이다.

○ 王莽의 初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胡(匈奴)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胡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遼西[郡]의 大伊註 088 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州·郡·縣이 그 책임을 [高]句麗侯 騊註 089에게 전가시키었다. 嚴尤는,
“貊人이 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騊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罪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尤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尤는 [高]句麗侯 騊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長安에 보내었다. 王莽은 크게 기뻐하면서 天下에 포고하여 高句麗란 國號를 바꾸어 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는] 侯國이 되었는데,註 090 [後]漢 光武帝 8년(A.D.32; 高句麗 大武神王 15)에 高句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朝貢하면서 비로소 王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 殤帝와 安帝 연간에 [高]句麗王 宮이 자주 遼東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玄菟[郡]에 속하게 하였다. 遼東太守 蔡風과 玄菟太守 姚光은 宮이 두 郡의 害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宮이 거짓으로 講和하기를 請하자, 두 郡은 진격하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宮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玄菟郡을 공격해 候城을 불사르고, 遼隧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宮이 다시 遼東을 침범하자, 蔡風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다가 패하여 죽었다.註 091

○ 宮이 죽고 그 아들 伯固가 王이 되었다.註 092 順帝와 桓帝 연간에 다시 遼東郡을 침공하여 新安과 居鄕을 노략질하고, 또 西安平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帶方令을 죽이고 樂浪太守의 妻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靈帝의 建寧 2년(A.D.169; 高句麗 新大王 5)에 玄菟太守 耿臨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 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伯固가 항복하여 遼東에 속하였다.
熹平 연간(A.D.172~177; 高句麗 新大王 8~13)에 伯固는 玄菟郡에 속하기를 청하였다.註 093 公孫度註 094의 세력이 遼東에 웅거하자, 伯固는 大加 優居와 主簿 然人 등을 파견하여 [公孫]度를 도와 富山註 095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伯固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拔奇, 작은 아들은 伊夷模였다. 拔奇는 어질지 못하여, 國人들이 함께 伊夷模를 옹립하여 王으로 삼았다.註 096 伯固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遼東을 노략질하였고, 또 流亡한 胡[族] 5백여戶를 받아들였다.

○ 建安 연간(A.D.196~219; 高句麗 故國川王 18~山上王 23) 에 公孫康註 097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拔奇는 兄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涓奴部의 [大]加와 함께 각기 下戶 3만명을 이끌고 [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가 돌아와서 沸流水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 날] 항복했던 胡[族]도 伊夷模를 배반하므로 伊夷模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註 098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拔奇는 드디어 遼東으로 건너가고,註 099 그 아들은 [高]句麗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古雛加 駮位居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玄菟를 공격하므로 玄菟郡과 遼東郡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 伊夷模는 아들이 없어 灌奴部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位宮註 100이다. 伊夷模가 죽자 즉위하여 王이 되니, 지금의 [高]句麗王 宮이 바로 그 사람이다. [位宮의] 증조가 이름이 宮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宮이] 장성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나라가 殘破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의 王[位宮]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位라고 부르는데, 그의 曾祖父와 닮았기 때문에 位宮이란 이름을 지었다. 位宮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 景初 2년(A.D.238; 高句麗 東川王 12) 에 太尉 司馬宣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公孫淵註 101을 토벌하니, [位]宮이 主簿와 大加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명을 거느리고 [司馬宣王의] 군대를 도왔다.
正始 3년(A.D.242; 高句麗 東川王 16)에 [位]宮이 西安平을 노략질하였다. [正始] 5년에는 幽州刺史 毌丘儉註 102에게 격파되었는데, 그 때의 사실은 [毌丘]儉의 列傳에 실려 있다.

○ 東沃沮註 103
東沃沮註 104는 고구려 蓋馬大山註 105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註 106 북쪽은 挹婁·夫餘와, 남쪽은 濊貊과 접하여 있다. 戶數는 5천戶인데, 大君王은 없으며 邑落에는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註 107가 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와 대체로 같지만 경우에 따라 좀 다른 부분도 있다.

○ 漢나라 초에 燕의 亡命客 衛滿이 朝鮮의 王이 되면서 沃沮의 [邑落들은] 모두 [朝鮮에] 복속케 되었다.
漢 武帝 元封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四郡을 설치하였는데, 沃沮城으로 玄菟郡註 108을 삼았다. 뒤에 夷·貊註 109의 침략을 받아 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니 지금의 이른바 玄菟의 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單單大領註 110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東部都尉註 111를 설치하고 不耐城에 治所를 두어 별도로 領東 7縣註 112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에 옥저의 [邑落도] 모두 현이 되었다.

○ [後漢] 建武 6년(A.D.30; 高句麗 大武神王 13) 에 변경의 郡을 줄였는데, [沃沮의 東部]都尉도 이 때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縣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로 모두 縣侯를 삼으니, 不耐註 113·華麗註 114·沃沮註 115등의 諸 縣은 전부 侯國이 되었다. 이들 夷狄들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不耐濊侯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侯國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功曹註 116·主簿註 117 등의 諸曹를 두었는데, 濊人이 모두 [그 職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우두머리(渠帥)들은 스스로를 三老라 일컬으니, 그것은 옛 [漢나라] 縣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 [東沃沮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에 臣屬케 되었다. [고]구려는 그 [지역 인물] 중에서 大人을 두고 使者註 118로 삼아 [토착 渠帥와]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大加로 하여금 租稅를 통괄 수납케하여, 貊·布·魚·鹽·海草類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동옥저 사람)을 奴僕처럼 대우하였다.

○ 동옥저의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五穀이 잘 자라며 농사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의 성질은 질박하고 정직하며 굳세고 용감하다. 소나 말이 적고, 창을 잘 다루며 步戰을 잘한다. 음식·주거·의복·예절은 [고]구려와 흡사하다.
魏略: 그 나라의 혼인하는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10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약속하고, 신랑집에서는 [그 여자를] 맞이하여 장성하도록 길러 아내로 삼는다. [여자가] 成人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자의 친정에서는 돈을 요구하는데, [신랑 집에서] 돈을 지불한 후 다시 신랑 집으로 돌아온다.註 119

○ 그들은 장사를 지낼 적에는 큰 나무 槨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 丈이나 되며 한쪽 머리를 열어 놓아 문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모두 가매장을 하되, 겨우 형체가 덮일 만큼 묻었다가 가죽과 살이 다 썩은 다음에 뼈만 추려 槨 속에 안치한다.註 120 온 집식구를 모두 하나의 곽 속에 넣어 두는데, 죽은 사람의 숫자대로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무로써 모양을 새긴다. 또 질솥에 쌀을 담아서 곽의 문 곁에다 엮어 매단다.

○ 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할 때 [고]구려의 王 宮이 옥저로 달아났으므로 [毌丘儉은] 군대를 진격시켜 그를 공격하게 되었고, 이에 沃沮의 邑落도 모조리 파괴되고, 3천여 級이 목베이거나 포로로 사로잡히니 宮은 北沃沮註 121로 달아났다.
北沃沮는 일명 置溝婁註 122라고도 하는데 南沃沮註 123와는 8백여리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속은 남·북이 서로 같으며, 挹婁와 접해 있다.
挹婁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서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촌락에서 산다.

○ 王頎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宮을 추격,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어느날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일을 바람부는 대로 표류, 동쪽으로 흘러가서 한 섬에 도착 하였다. 그 섬 위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말을 서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습속은 해마다 7월달이면 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넣는다.”
라 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곳에는 순전히 여자만 있고 남자는 없다.”註 124
고 하였다. 또 그는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그 시체는 마치 中國사람 같고 입은 옷의 두 소매 길이는 3丈이었다. 또 난파되어 해안에 밀려온 배 한척을 잡았는데 그 배에 있는 사람의 목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 생포하여 함께 말을 해 보았으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으며 음식을 먹지 않고 죽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이 말한] 그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 挹婁註 125
挹婁註 126는 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北沃沮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高]句麗와 같지 않다. 五穀과 소·말·삼베(麻布)가 산출된다.註 127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다. 大君長은 없고 邑落마다 각각 大人이 있다.

○ [그들은] 항상 山林속에서 살며 穴居註 128생활을 한다. 大家는 그 깊이가 9계단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다고 여긴다. 그 지방의 기후는 추워서 夫餘보다 혹독하다.
그들은 돼지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 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를 몇 푼이나 되게 하여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철에는 알몸에다 한 자 정도의 베조각으로 앞뒤를 둘러서 형체만을 가린다. 그들은 不絜하여 [집]한가운데에 변소를 만들고 그 주위에 빙 둘러 모여 산다.註 129

○ 활의 길이는 4자인데 그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화살대로는 楛를 쓰는데註 130 길이는 한 자 여덟 치나 되며, 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었으니,註 131 [이는 挹婁가] 옛 肅愼氏의 나라 [이기 때문]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어김없이 명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註 132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赤玉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挹婁의 貂가 그것이다.

○ 漢代 이래로 夫餘에 臣屬되었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黃初 연간(A.D.220~226; 高句麗 山上王 24~30)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에서 여러 번 정벌하였으나, 그 무리가 비록 수는 적지만 험한 산 속에 거주하는데다가, 이웃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활과 [독]화살을 두려워하여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다니면서 노략질을 잘 하므로 이웃 나라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東夷들은 음식을 먹을 적에 대부분 俎豆를 사용했으나, 오직 挹婁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법도나 풍속이 [東夷 가운데에서] 가장 기강이 없었다.
엄근진 21-08-18 01:05
   
> 사기 평준서에는 예맥조선이 연나라와 제나라 사이인 북경 동남쪽인 창주시라고 했고,

수구리님이 글을 열심히 올리셔서 사기 평주서를 찾아봤는데, 위와 같이 해석 되는 구문이 안 보이네요.

彭吳 賈滅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閒靡然發動.
사기 평준서에서 조선 관련 문구는 이것 뿐인데, 혹시 제가 놓친 문구가 있을까요?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903
1049 [한국사] 유사사학의 신종 수법 (44) 위구르 02-19 904
1048 [한국사] ‘요동의 장통이 낙랑 백성 이끌고 모용씨 귀속설’ … (1) 히스토리2 05-28 903
1047 [한국사] 우리의 가야에 대해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야할 것 같… (1) oksoc 06-21 903
1046 [한국사] 유왕성 유왕역 그리고 한나라 유성현 (4) 삼바 08-23 903
1045 [북한] 일제강점기때 독립군 단체 "동북항일연군"이란 돌통 09-05 903
1044 [한국사] 개경, 서경 그리고 황성, 고려제국의 수도 하늘하늘섬 11-21 903
1043 [세계사] 영국, 아일랜드의 선주민과 도래계 하플로 그룹을 알… 하플로그룹 08-15 902
1042 [기타] 한사군 논쟁으로 잊혀진 것들! (2) 환빠식민빠 06-19 902
1041 [한국사]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것은 역사에서 정설이 아닌 적… (21) 타이치맨 12-23 902
1040 [한국사] 백제 (1) history2 02-13 902
1039 [한국사] 진개전쟁의 진실2/1ㅡ연국이 복속시킨 조선의 실체 하이시윤 10-02 902
1038 [기타] 역사 뒤집어 보기, 역썰 22회ㅣ고려 국경 조작사3 관심병자 05-15 902
1037 [기타] 의문이든다 (3) 바토 06-26 901
1036 [기타] 호공(瓠公)이 마한(馬韓)에 사신으로 다녀오다 관심병자 07-28 901
1035 [한국사] 대방군의 위치에 관한 기사 히스토리2 05-29 901
1034 [한국사] 한족이 한반도로 유입되기는 쉽지않습니다. (2) 녹내장 09-25 901
1033 [한국사] 궁금한게 함보를 김씨라고 기록한 역사서가 없는데 (34) 하응하치 02-17 900
1032 [한국사] 야요이의 볍씨와 수전에 대한 질문과 답(?) (13) 밑져야본전 12-11 900
1031 [세계사] 유럽 하플로그룹 R1b와 R1a 분포도 하플로그룹 08-15 899
1030 [중국] 환단고기와 유사역사학 비판 (3) 고이왕 06-09 898
1029 [기타] 기타 운석들과 구리(금) 슬러지 (키덜트식 수집품) history2 04-14 898
1028 [한국사] 대한민국은 고대사와 근대사가 다 같이 왜곡되었다. (3) 스리랑 08-10 898
1027 [기타] 웅산의 전설 (2) 응룡 05-10 897
1026 [기타] 동아시아에 있어 해양민족이라고 한다면... (11) 윈도우폰 08-12 897
1025 [한국사] 수경주 백랑수 하류-낙랑 대방 영구 요동 현도 교치… 삼바 09-30 897
1024 [한국사] 식민사학과 언론카르텔 마누시아 06-23 896
1023 [한국사] 대한민국 내부의 식민사학자들 스리랑 11-06 896
 <  701  702  703  704  705  706  707  708  709  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