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김상
3세기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흔히들 말하는 3세기 한국고대사의 3대 문제는 아래와 같다.
<< 고고학 >>
가. 3세기 초반(200~229)에 한강유역에 등장하는 초기 고구려식 고분군의 기원
나. 3세기 후반(270~299)에 낙동강유역에 등장하는 북방 유목민족 문화의 기원
<< 문헌사학 >>
다. 3세기 중반(230~269)의 삼국사기와 삼국지 한전의 차이 (삼국지 한전의 배경은 260년대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이 3가지 문제에 관하여 10여년 전에 최초로 답을 했는데,
혹시 틀린 곳이 있거든 지적을 바랍니다.)
가. 3세기 초반(200~229)에 한강유역에 등장하는 초기 고구려식 고분군의 기원
1. 3세기 이전 요동반도의 초기 고구려식 묘제다.
- 비류와 온조의 백제건국보다 3백년 늦으므로 이들과는 관계가 없다.
2. 3세기 초에 나타나고,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시작할 무렵에 사라진다.
- 근초고왕대에 축조가 중단된다. 따라서 이들 고분군에 근초고왕이 묻혔을 가능성은 없다.
3. 3세기 후반 서진 시대 도자기 조각이 발굴되었다.
- 3세기 후반에 마한과 서진 사이에 여러차례 교역이 있었다.
4. 한반도에는 오로지 한강유역에만 있다.
- 북한에는 없다. 요동반도에서 출발하여 한반도 북부인 압록강-청천강-대동강을 건너 뛰고 한강유역에 나타났는데, 당시 한반도 북부는 고구려와 낙랑 등 강력한 권력체가 있었다. 같은 백제권이라도 금강유역이나 영산강유역에는 안 나오는데, 웅진천도의 약 백년 전에 축조가 중단되는 것을 보아, 이들은 웅진천도시 백제의 주도세력이 아니었다.
5. 이전에 있었던 묘들을 파괴하여 쓸어버리고 그 위에 다시 축조되었다.
- 정복자의 특징이다. 3세기 초에 한강유역에 정복이 있었다.
6. 한강유역에 고구려식 고분군이 출현하는 시기에 맞추어 풍납토성의 축조가 중단된다.
- 풍남토성의 토기조각이 대부분 축조가 중단된 3세기 중반 이후 것들인데 이는 이때 풍납토성의 거주민이 교체되었다는 뜻이다.
7.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고이왕의 출현시점과 일치한다.
- 고이왕대는 백제에 고구려 귀족성들이 대거 출현하고, 모든 제도가 고구려식으로 바뀌고, 외교는 고구려를 돕고 말갈과 친해진다. 동명조를 제사지내는 것은 당연하다.
8. 이들은 고구려계이므로 고구려를 통과해도 별 다른 마찰은 없었을 것이다.
나. 3세기 후반(270~299)에 낙동강유역에 등장하는 북방 유목민족 문화의 기원
1. 3세기 후반에 낙동강유역, 특히 하류인 변한지역에 집중적으로 출현한다.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등이다.
- 가야 건국보다 2백년이 늦으므로 가야건국자인 수로왕과 무관하다.
2. 흑룡강성 유물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부여지역에서도 일부 남하하였다.
- 280년대 모용씨에게 멸망한 부여보다 먼저 출현하므로 그들과는 무관하다.
3. 문화적으로 고구려와는 무관하고 고구려보다 북방의 몽골초원 유목민족 문화다.
- 등자를 비롯한 마구가 출토되는 등 유목민족 문화다. 유목민족이 고구려를 건너 뛰었는데 배를 타고 건너뛴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건너뛰었다.
4. 3세기 후반에 고분군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중반에 남하하였다.
- 이주민이 유물을 남기는데는 통상 한 세대(20년)가 걸린다. 3세기 중반에 유목민족 기마군단이 고구려를 뚫고 동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5. 본래 있었던 묘들을 파괴하여 쓸어버리고 그 위에 새로 고분을 축조하였다.
- 정복자의 특징이다. 3세기 중후반에 낙동강유역에 정복이 있었다. 이들은 비고구려계이므로 고구려를 통과했다면 전쟁 같은 큰 마찰이 발생했을 것이다.
6. 순장이 나타난다.
- 순장은 유목민족 문화다. 가야와 신라에서 6세기에 사라진다.
7.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최초 김씨왕인 미추왕의 출현과 일치한다.
- 미추이사금시절에는 신라의 가장 큰 적이던 왜로부터 공격이 없다. 대신 왜는 미추왕의 가장 큰 정치적 라이벌이던 석우로를 제거해준다. 3세기 초중반에 백제에 밀리던 신라가 3세기 후반에 백제와 대등하게 싸운다.
8. 3세기 후반의 변한지역은 삼한 중 고고학적으로 가장 첨단기술로 무장되어있다.
- 후한서와 삼국지 한전의 차이가 보인다. 후한서는 진왕이 삼한을 보두 통치하는데, 삼국지는 진왕이 마한과 진한만 통치한다고 하여 낙동강하류에 정치적 변동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당시 삼한 중 변한만 당시 중국을 통일한 서진과 교류하지 않는다.
9. 낙동강유역이 북방 유목민족에게 점령됨에 따라, 낙동강하류의 변진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구주지역으로 이주하고, 이 연쇄반응으로서 구주인들은 다시 기내지역으로 이주함에 따라, 4세기에 일본에 야요이 시대가 끝나고 고분시대가 시작된다.
다. 3세기 중반(230~269)의 삼국사기와 삼국지 한전의 차이
1. 260년 경 한반도 남부에 무엇이 있었는가?
- 삼국사기를 보면 3세기 중반에 한강유역 이남의 한반도 남부에 백제와 신라와 '신라본기의 왜' 3국이 존재한다. (참고로 4말5초에만 나타나는 백제본기의 왜는 신라본기의 왜와 전혀 다른 존재다.) 그 3국 뿐이다. 반면에 삼국지를 보면 한반도 남부에는 80여개 소국이 존재한다. 백제와 신라라는 국명은 없고 그 대신 伯濟國과 사로국이 존재한다.
2. 삼국사기의 기록 공백지대에 누가 있었는가?
- 삼국지를 보면 한반도 남부는 80여개 소국들로 빈틈 없이 꽉 차있다. 심지어 울릉도(우유국)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보면 한반도 남부가 텅 비어있다. 당시 대단한 유물이 출토되는 금강유역과 영산강유역은 백제 건국후 5백년이 지난 5세기 후반에야 최초로 출현한다.
3. 진왕은 누구인가?
- 당시 한반도 남부의 유일한 통치자로 보이는 존재는 진왕인데 진왕은 누구인가? 삼국지는 진왕은 스스로는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왕이 되는가? 후한서는 진왕은 공립(추대)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공립되는가?
4. 진왕의 통치지역은 어디인가?
- 진왕은 목지국만 통치하는가? 아니면 삼한 전체를 통치하는가?
5. 삼국사기는 왜 공백인가?
- 3세기의 삼국사기는 90% 이상이 1달도 안 틀리는 정확한 기록들이다. 그런데 왜 기록들이 없고 한반도 남부 지역은 텅 비었는가? 기록의 망실이나 누락인가? 아니면 고의인가? 고의라면 누가 왜 그랬는가?
6. 삼국사기와 삼국지에 모두 가야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 삼국사기에는 가야가 3세기 초에 사라지고 없다. 그러다 5세기 후반에 다시 출현한다. 그 공백기를 기록한 것이 삼국지다.
7.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가?
- 가야인들의 자체 기록인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10명의 왕이 있는데 앞의 5명과 뒤의 5명의 통치제도가 전혀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왜 뒤의 5명은 합리적 재위기간을 가지는데, 앞의 5명은 재위기간이 비합리적(평균치보다 3배나 오래 재위)인가?
8. 소국체제가 오래 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삼한 소국체제는 2~4세기 후한서-삼국지-진서를 거치며 2~3백년이나 지속된다. 만일 소국들이 서로 다른 나라들이면 후삼국시대처럼 서로 싸우다 300년이 아니라 30년이내에 대부분 통합된다. 왜 소국들이 통합되지 않고 오래 존재하는가? 이 소국들은 서로 어떤 관계인가?
9. 삼한 소국체제는 언제 사라졌는가?
- 80여 소국으로 이루어진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가? 참고로 삼국사기에 근초고왕이나 내물왕이 주변 소국을 정복한 기록은 없다. 중국 사서에도 삼한 소국들이 통합된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